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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차,2차세계대전에 대해서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877 작성일2004.07.27
1차,2차세계대전에 관련한 자료를 스크랩하고 내용을 정리하고 싶은데요
각종 싸이트마다 잘 나오지 않아요 이것좀 정리해주세요
답변 많이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사진 첨부까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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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은 한 암살범의 흉탄으로 시작됐지만 전쟁은 9백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고, 그 중 11만6천5백16명이 미국인이었다. 일찍이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발칸반도에서 발생할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은 군비경쟁과 민족주의로 비등하고 있던 유럽에 불을 붙였다. 그후의 4년은 상상을 초월한 참상을 빚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1917년 들어 독일의 U보트(잠수함)들이 미국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세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미군은 유럽에 파병됐다.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끝났다.



제2차세계대전은 세계경제공황 뒤에 파시즘 체제를 세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서유럽은 세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소련과 미국이 주요 열강으로 떠올랐다. 전쟁 중에 발전한 새로운 기술이 전후 세계를 변화시켰고, 원자폭탄의 발명은 핵 시대를 열었다.



1. 제1차세계대전 발발의 배경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자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테러 조직에 연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의 배후라고 믿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일어났지만, 근본적으로는 19세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싹텄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민족주의 대두, 군사력 증대, 식민지 경쟁, 군사동맹체재 등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해 연합국을 형성했고,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로 구성된 동맹국이 대항했다.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연합국이나 동맹국에 가담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발칸 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2년, 세르비아,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쟁의 시작과 전개



제1차세계대전은 발칸반도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에 제1차 발칸전쟁(1912~1913)과 제2차 발칸전쟁(1913)이 일어났지만, 유럽의 주요 열강은 이 두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째 위기는 벗어나지 못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세르비아를 침략할 구실을 제공했다. 먼저 독일의 지지를 확보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3일에 세르비아에 굴욕적인 요구 조항을 제시했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을 수용하고 나머지 문제는 국제회담으로 해결하고자 제안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7월 28일에 선전포고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 편을 선언하고 프랑스의지지를 얻은후 1914년 7월 30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러시아의 동원령에 대응해 8월 1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이틀 뒤에 프랑스에도 선전포고했다. 독일군이 프랑스로 가려고 중립국 벨기에로 진격하자 영국은 8월 4일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전쟁은 시작되었고 서유럽에서 중동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전투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따라 펼쳐졌다.





1. 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5년 또는 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2. 전쟁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여 독일,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의 싸움).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 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7년 프랑스, 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3. 전쟁의 마지막 국면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연합군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레닌은 혁명에서 성공한 뒤 독일에 평화 협상을 요구했다. 레닌은 혁명에서 성공한 뒤 독일에 평화 협상을 요구했다. 독일은 1918년 3월 3일에 브레스트리포프스크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가혹한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브레스트리포프스크조약으로 러시아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베사라비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포함한 많은 영토를 잃었다. 이로써 동부전선에서 전쟁이 끝났고 독일은 서부전선에만 주력할 수 있었다.

1917년 초에 일어난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다. 2월에 독일은 무제한잠수함작전을 재개했다. 또한 독일 외무장관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내는 전문을 영국이 입수한 후에 미국과 독일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치머만 전보로 멕시코를 설득해 반미 전쟁을 일으키려던 독일의 계획이 드러나자 미국 의회는 4월 6일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1917년 6월 하순에 유럽으로 보낸 미국 원정군의 첫 번째 부대가 상륙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200만 명 정도의 원정군을 유럽에 보냈다.


1918년 초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을 압도했고, 그해 봄에 세 차례 공세를 퍼부었다. 독일군은 1918년 3월 21일에 생캉탱지역을 공격했다. 솜전투에서 참패한 후에 연합군은 통일된 방어를 계획하기 위해 회합을 가지고, 4월에 프랑스의 포슈 장군을 서부전선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4월 9일부터 30일까지 독일의 2차 공세가 벨기에의 리스강변을 따라 이어졌다. 5월 27일에 독일군은 엔강 근처에서 3차 공격을 시작해, 5월 30일에 마른강에 이르렀다. 1918년 7월 15일부터 8월 6일까지 펼쳐진 2차 마른전투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9월초에 독일에 빼앗겼던 모든 지역을 다시 찾았다. 연합군은 1918년 가을에 모든 전선에서 승리했다. 9월 29일에 불가리아가 항복했으며, 10월 30일에는 오스만제국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11월 3일에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918년 11월 9일에 제위에서 물러나 네덜란드로 도망갔다. 11월 11일에 독일은 연합군이 요구한 휴전조약을 받아들였고, 전쟁 중 점령했던 지역에서 철수했으며, 무기, 전함, 전쟁 물자를 연합군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연합군이 라인강유역의 독일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했다.






1917년에 전쟁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4. 전쟁의 결과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군인들 가운데 1000만명이 죽고, 2100만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재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였다. 전쟁으로 공장, 다리, 철로가 파괴되었으며, 서부전선은 탄피, 참호, 화학 물질로 황폐해졌다. 그리고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는 급변했다.

(1) 정치

제1차세계대전은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의 토대를 흔들어놓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같은 독립 공화국과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의 영토 일부로 나누어졌다. 러시아와 독일도 폴란드에 영토를 넘겨주었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서 독립했다.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제를 받고, 나머지 지역에서 터키공화국이 세워졌다.

(2) 경제

유럽 경제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교전국은 3370억 달러 정도의 손해를 보았다. 또한 필수품을 조달하려고 특별 화폐를 찍어내는 등 화폐 공급을 늘려 전후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전쟁부채 문제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다. 연합국은 독일에서 전쟁배상금을 받아 부채를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배상금은 패전국의 경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승전국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은 경제 강국으로 떠올랐다.

(3) 사회

제1차세계대전으로 엄청난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1920年대에 프랑스는 출산율이 낮아 인구가 줄어들었고,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또한 정부와 국경의 변화로 난민이 발생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 농민이 농토로 돌아가는 대신 도시에 정착해 도시가 팽창했다. 남성이 참전한 뒤에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자리를 얻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얻는 새로운 독립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 후에 많은 나라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한 파괴와 유혈은 유럽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프랑스,미국의 3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 %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 %를 잃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한편, 다른 동맹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舊帝國)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핀란드,발트 3국)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종속국(從屬國)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 배경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새로운 정치, 경제 문제가 발생했다. 강력한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특히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독재자들이 영토를 정복하려고 해 전쟁이 일어났다.

<파리강화조약>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에 맺은 파리강화조약은 이해 관계가 다른 나라들이 성급하게 체결했기 때문에 승전국조차 만족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예상보다 적은 영토를 얻었다. 일본은 태평양에 있는 독일 영토의 통제권을 얻고 팽창정책을 폈으나 파리강화조약이 모든 민족의 평등원칙을 보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등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은 영토를 잃고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조약에 대한 불만이 컸다. 특히,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에 엄청난 형벌이었다.

<경제> 제1차세계대전으로 유럽 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패전국은 전쟁배상금의 지불로 허덕였고, 승전국은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에서 빌려온 차관을 갚는 데 어려움이 컸다.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또한 1929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경제대공황의 여파는 1930年대 초에 유럽에까지 미쳐 안정을 찾아가던 유럽 경제 회복이 중단되었다.

<민족주의와 독재 등장>


제1차세계대전의 주요 원인인 민족주의는 전쟁이 끝난 후에 빠르게 성장했다. 민족의 영광이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국민일수록 강력하고 권력있는 나라를 갈망했다. 독일에서는 1930年대 초에 나치당이 권력을 잡았고, 1933년에 나치 지도자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무시하고 제1차세계대전에서의 패배에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히틀러의 극단적 민족주의가 많은 독일인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강력한 민족주의 정당인 파시스트당이 많은 지지를 얻었다. 파시스트당 지도자 무솔리니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다시 찾겠다고 맹세하고 권력을 잡은 뒤에 독재정부를 구성했다. 일본에서는 1936년에 강력한 통제권을 가진 군장교가 권력을 잡았다.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는 전쟁과 전시 훈련을 찬양했다. 1941년에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었다. 1936년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동맹을 결성했고, 1940년에 일본이 참여해 동맹은 로마-베를린-도쿄 추축이 되었다.




2. 전쟁의 시작과 전개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9월 17일에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해 9월 말까지 폴란드 동부의 1/3을 점령했고, 독일은 그 나머지 영토를 차지했다. 1939년 9월 3일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1940년 초까지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를 침공해 6월에 차지했고, 덴마크도 정복했다. 또 5월 10일에 베네룩스 국가를 침략했다. 그리고 독일은 마지노선 북단을 지나 프랑스 북부로 진격해 6월 5일에 공격했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했고, 독일군은 6월 14일에 파리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프랑스를 함락한 후 영국을 침략했다. 영국해협을 가로질러 잉글랜드 남부를 침공하기 전에 히틀러는 제공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영국과의 전투는 1940년 7월에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33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反)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 반전(反戰)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36년 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이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36년의 시안[西安]사건을 계기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36년 11월 독,일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이,일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영,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다. 미,영,프의 지배층은 일면으로는 독,이,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로 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다(宥和政策). 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안슐루스)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소련은 독,일의 연맹 탈퇴 후인 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39년 1월 독,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정부를 타도했다. 39년 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다.

독일,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개전(對獨開戰)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전쟁이 반소(反蘇)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8월 23일의 독,소 불가침조약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교섭은 도각(倒閣)으로서 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프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3. 전쟁의 확산과 종결


제2차세계대전은 1941년에 이르러 아프리카, 발칸반도, 소련까지 번져 전세계 전쟁으로 퍼져 나갔다. 연합국과 추축국은 바다에서도 싸웠고, 1941년 12월에는 미국이 참전했다.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은 사전통보 없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를 공격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같은해 12월 8일에 연합국은 일본에, 이튿날 중국은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2월 11일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제 2차세계대전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1941년부터 연합군은 유럽에서 승승장구했다. 소련군은 1942년에 동유럽에서 독일의 진격을 막았고, 1943년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연합군은 1942년에 아프리카 북부를 공략했고, 1943년에는 이탈리아를 굴복시켰다. 또한 1944년 6월 6일 밤, 북프랑스 해안에서 역사상 가장 대규모(약 100만여명)의 상륙 작전을 펼쳤다. 1945년 초에 연합군은 독일에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4월 25일에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했고, 4월 30일에는 히틀러가 자살했다. 1945년 5월 7일에 독일군 참모장 요들 장군은 프랑스 랭스에 있는 아이젠하워의 사령부에서 무조건 항복을 하는 데 서명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고, 연합군은 5월 8일을 유럽승전기념일로 선포했다.


전쟁의 경과
〈영,독 전쟁(1939.9∼41.6)〉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 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戰) 종료 후 히틀러는 영,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영,프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영,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 War). 영,프는 독,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線)에 의존하고, 해상봉쇄,경제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영,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 국경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이어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다. 또 40년 6월에는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를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 실현시켰다(소련-핀란드 전쟁). 이 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처분하였고, 영,프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 병력을 파견코자 하였다. 영,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諸港)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프군을 격퇴하였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共謀)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다. 40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프군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북부에 고립된 영,프군 30만은 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 휴전을 제의하였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 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 페탱 정부에 위임되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制空權)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동방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미에 대항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다. 이 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 분규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이,일 3국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다. 이것을 본 무솔리니는 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이,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 후에는 친서구적(親西歐的)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다. 5월 10일 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전(對蘇戰)을 위하여 영,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한편 소련은 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 대처하게 되었다.
〈독,소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


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다.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 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대소전의 단기승리를 전제로 하는 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한다.


더욱이 독,소전이 발발하자 영,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 영,미가 ‘대서양헌장’으로 전쟁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미,소의 반(反)파시즘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영,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40년 9월에 독일,이탈리아와의 3국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제한, 미,영 결속, 장제스[蔣介石]정권 원조강화로 대응하였다. 41년 6월 독,소전(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의 대일 금수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월 11일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관계(성격)는 명료해졌다. 42년 1월 1일, 미,영,중,소 등 26개국은 ‘연합국 선언’에 조인하였다.
〈대동아공영권과 신질서〉


일본은 진주만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다. 또 개전과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필리핀에 상륙하여 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필리핀에서는 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또한 원장(援蔣) 루트의 절단, 인도에 대한 대영(對英) 이간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남방작전은 일단락을 보았다. 하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중국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체제는 강화되어 갔다.


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 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히틀러는 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司政官)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다. 룩셈부르크,알자스로렌,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 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滅絶)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 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트레브링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42년 3월 노동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 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연합군의 반공(反攻)은 동,서에서도 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과 맞호응하면서 전개되었다.
〈전국(戰局)의 전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 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 고집하였다. 지중해에서 중동,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 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 km까지 육박하였다. 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한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 %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다. 42년 봄 재개된 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소 양군의 촌토(寸土)를 다투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 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미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다. 히틀러는 총동원 체제를 취하였지만, 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43년 7월 영,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다(46년 5월, 왕제폐지). 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단하려 하였지만, 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해군기동함대의 주력(主力)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42년 8월 미국군은 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솔로몬제도,길버트 제도,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다. 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영,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 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다. 마리아나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전선에서도 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신사군(新四軍)에 의하여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點:都市)과 선(線:鐵道)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유럽에서의 전쟁종결〉 이탈리아 항복 후의 43년 11월, 영,미,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영,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미,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저항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제국(同盟諸國)은 동요하여, 잇달아 대독(對獨) 참전으로 방향전환하였다. 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 블록에 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 불가리아는 영,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 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 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 결성되었고, 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 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다. 홀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티를 감금하고 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45.1). 소련군은 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 단교하고, 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다. 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 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對日)참전도 결정되었다. 히틀러는 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만다. 45년 2월 소련군은 오데르강(江), 4월 나이세강(江)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영,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 라인강(江)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江)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交歡)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다.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 9일 항복이 정식조인되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일본의 항복〉

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 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수호(國體守護)’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 전쟁의 결과

제2차세계대전은 역사상 최대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다. 연합군과 추축군에 복무한 약 7000만명 가운데 1700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소련은 약 750만 명이라는 최대 전사자를 냈으며, 독일은 350만, 일본은 122만명 정도를 잃었다. 영구과 미국의 전사자가 가장 적었다. 공중 폭격으로 민간인과 민간 시설이 파괴되었고, 특히 독일과 일본의 도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세계대전때는 소련과 중국의 민간인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소련은 2000만명, 중국은 1000만명의 민간인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과 소련이 주요 열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나라의 전시동맹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전파하려 하자 결렬되었다. 소련 중심의 공산 세계와 미국이 이끄는 비공산 세계 사이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1948년에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경제의 재건을 도와주는 마셜계획을 세웠고, 18개 국이 200억 달러가 넘은 원조를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중 원자폭탄과 함께 핵 시대가 열리고 치열한 무기 경쟁이 시작되었다. 1950年대 초에 미국과 소련은 훨씬 더 파괴력이 강한 수소폭탄을 실험했다. 그 밖에도 국제연합이 창설 되었다. 1943년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은 모스크바에서 평화 증진을 위한 국제 조직의 설립에 동의했다. 4개국 대표는 1944년에 워싱턴의 덤바턴오크스에서 새로운 조직을 국제연합이라고 하기로 합의했다. 또 여러나라들이 독립하였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와 책임추구〉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 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이라고 한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絶滅)정책에 유래한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 %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전비(戰費),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 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일본,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 대독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소련의 지도하에 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대립(國共對立)은 내전으로 발전하여 49년 10월 중국정권의 성립을 보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프랑스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다. 더욱이 영국에는 노동당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양 체제의 대립격화와 평화조약〉

이러한 조건 가운데서 미,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은 격화, 냉전화(冷戰化)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다. 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소가 대립하였으나, 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유고슬라비아,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40년의 소련에의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방침은 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영,프는 52년 5월 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 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미얀마,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인도,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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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네이버 이미지 검색에 '2차 세계대전'이라고 치시면 많이 나옵니다^^

200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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