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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송웅

구술자소개

구술자
설송웅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박정수, 박재홍)
구술일자
2010년 7월 26일
장소
양평 구술자의 자택
구술시간
2시간 32분 19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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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인 설송웅은 4‧19 직전에 당시 고등학생 연합모임인 협심회를 만들고 주도했던 핵심회원으로서 4‧19 전반에 대한 다양한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다. 구술자가 당시 야간부 학생위원장으로 있었던 중동고등학교 역시 4‧19 전후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당시 경험으로 인해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난 뒤 용산구청장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6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당시 중동고 학생위원회에는 운영위원장과 부위원장, 대대장, 규율부장이 있었다. 
1960년을 전후해서 서울지역 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의 연합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협심회가 되었다. 
협심회 회원 학교는 대부분 야간이었다. 동북고 홍충식, 강문고, 권오주 등이 멤버였다. 중동고가 수송동에 있어 여러 학교  중심이었고 점차 다른 학교로 전파되어 양정고 이상철, 성남고 김진태, 김종운, 대광고 김동성, 덕수상고 김갑중 등이 참여하였다.  영등포공고와 서울고도 참여했다. 모두 열여섯에서 일곱 개였다. 대부분 각 학교 간부들이 나왔다. 
초기에는 학생회 간부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순수한 모임이었으나 2‧28을 전후해서부터는 4‧19 직전까지 서울지역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고등학교 학생시위를 주도하게 된다. 
2‧28이 있기도 전인 2월 18일, 구술자가 주도해 야간 학생 중심으로 횃불데모가 일어났다. 그런데 정보가 새서 17일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 담임과 교장 선생님이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그리고 다음날 시공관에 가서 횃불데모를 했는데 80에서  100명 가량 참여했다. 2층에서 삐라도 뿌렸는데 구술자만 잡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갔다. 경찰서에 끌려가 맞기도 했지만 교장  선생님이 통사정하고 빌어서 다음날 풀려났다.
3‧15 선거 전날인 3월 14일에도 화신 앞 시공관에서 시위를 했다. 9시부터 시작된 시위는 야간 외에 주간 학생들도 참여했다.  30분 정도 하다가 명동으로 빠졌다. 구호도 외치고 삐라도 뿌렸는데 시민들도 호응을 해주었다. 삐라는 학교 사환에게 빵 사주고  구슬러 등사기로 밀어왔다.
구술자는 잡히지 않고 다음날 선거 상황도 지켜보았는데 몽둥이 들고 완장차고 거의 무법천지로 기억을 하였다. 투표하러 온 사람들은  몽둥이를 든 반공청년단이나 화랑동지회 사람들에게 투표용지를 보여줘야 했는데 보여 주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선거 다음날인 16일  안국동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고등학생 시위가 있었는데 구술자도 참여했다.
17일에는 성남고를 시작으로 해서 고등학교 시위가 서울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시위는 미리 계획되어 있던 것이었다.
4월 12일 김주열의 사건이 보도되면서 중동고에는 화약고에 불을 지른 듯 급격하게 참여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4월 10일부터 17일까지는 통제가 가장 심했던 때이므로 중요한 시위는 없었다.
4월 18일에는 고대생들이 피습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저녁 9시경 대부분의 야간부 학생들이 책가방 집어던지고 시위하러 나갔다.  중동고 선배이면서 당시 고대를 다녔던 김성환이 학교에 와서 참여를 촉구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당시 정황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18일에는 중동고뿐 아니라 다른 고등학교들도 시위를 했는데 청계천에서 덕수상고, 동대문 쪽의 강문고 등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4‧19 당일 아침 중동고 전교생들은 학교에 집결했다가 9시경에 교문을 나서게 되었다. 야간부 학생들도 아침에 등교하였고 구술자는  모두 모아놓고 연설을 하였다. 중동고생들은 광화문을 거쳐서 효자동 어귀까지 진입했다가 경찰의 발포로 대열이 붕괴되면서 흩어지게  된다. 여기서 일부 중동고 시위대들은 이기붕 집으로 가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기붕 집에서는 도둑질하는 애들도 있었고  냉장고를 여니 수박 같은 게 막 나왔다. 해군참모총장 모자 같은 하얀 모자가 있어 써보기도 했다. 이기붕 집 앞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모두가 얼싸안고 즐거워하는 축제 분위기였다. 다 같이 주동자고 다 같이 애국자고 다 같이 형제라는 생각을  했다.
구술자는 이기붕 집 시위를 거쳐 남산에서 시위대들이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좀 어두컴컴할 때였는데 밧줄을 동상 목에 걸어 끌어내렸다. 
효자동까지 들어갔던 구술자는 경무대 앞의 발포 이후 왼쪽 2층집으로 도망을 가서 다락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증언했다. 그곳 말고도 많은 집에서 시위대를 숨겨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4월 26일 여느 때처럼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있는데 계엄사 지프차가 와서 태우고 갔다. 이삼 일 동안 보다가 주동자인 사람을 선택한 거 같았다. 작전참모부장 이석봉 장군이었다. 
중앙청 앞 텐트에 갔을 때가 9시 20분에서 30분 사이, 이미 네 명이 먼저 붙들려 와 있었다. 학생은 없고 시민들 같았다.  삼사 분 지나 8척 거구가 들어오는데 송요찬 장군이었다. 악수를 청했다. 대통령과의 면담을 간다고 했다. 옆에는 이석봉, 조재미  장군이 있었다. 중앙청 들어갈 때 세단차가 나가고 있어 물어보니 송 장군이 허정 수반과 매커너기 대사라고 했다. 당시 같이 들어가  이승만을 만난 사람은 유일라, 구충서, 한규철 외 한 명이 더 있었고 송요찬 장군과 박철희 비서가 현장에 있었다.  모두 다같이 "하야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내가 하야하겠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와서는 선무차에 타고 시위  현장 가운데로 가서 송요찬, 이석봉 두 사람의 요청으로 구술자가 시민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언을 전했다.
이승만 하야성명 발표 이후 구술자는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의 요청으로 치안 및 상황정리를 위한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과의  학생연합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구술자는 4‧19의 성공배경에는 계엄군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사령관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강조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설송웅(서울중고등학생)_구술자료상세목록.pdf 8000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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