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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위인10명이상 한일,이름기본으로올려주세요.(인물사진도있으면100%채택)
jkm3**** 조회수 4,550 작성일2008.08.03

제가 방학숙제로 위인10명이상으로 한일,이름기본이고 그외에것두좀....그리고 위인인물사진도같이 올려주시면 100%채택해드려요!!

알고계시는분 이글보시고 그냥지나치지말아주세요ㅜㅜ!

 

공지※저주글이나 내공 그냥 가저가는사람 신고해버려요!=ㅈ=

2알림※위에 했던분들것 복사해서올리면 내공그냥가저가는거로 신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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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
은하신
학교생활 14위, 학교생활 32위, 전라남도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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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둥근 지붕에 못이 박혀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김좌진

본관 안동(安東).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출생. 형규(衡奎)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 신현대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에 두고 5분단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참모총장, 박영희부관,이범석 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 천수평, 마록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권율장군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보(溥)의 9세 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했다.

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해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잠시 주저했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고 북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해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었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했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그는 행군 중 휘하 병 가운데 4,000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 : 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 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해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제장(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 침입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 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0x9A57)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그가 임진왜란 대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 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김유신장군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군·대신(大臣).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이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는 서현과 만명이 야합(野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숙흘종이 만명을 감금한 곳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만명이 탈출하여 서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둘의 혼인이 파격적이고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음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는 이 무렵까지도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이 혼인의 결과는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다 한다.

손자로는 윤중(允中)·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香)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다. 그 무렵 화랑 수련 과정의 활동은 그에게 수련과 배움의 과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 때 맺은 낭도들과의 유대 관계도 장성한 뒤의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귀화한 가야 왕족인 그의 일족 중에는 전공(戰功)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토착 귀족들 틈에서 그들이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을 세워 인정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활동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투에서의 공로이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 중 최초의 것은 629년 34세 때의 일이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과거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 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인 신라 귀족 사회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 때 이미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무렵의 주(州)는 지방 행정 단위로서보다는 군사 작전 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 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신라에서 중요한 군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의 활약은 뚜렷해진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어지던 유성(流星)이 월성 쪽에 추락하여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 때 그는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이치로써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은 신라의 전통적 귀족이었다. 또한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이면서도 신라 중앙 정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치러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1년(647)과 2년의 전투에서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했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 당시에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을 편성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을 놓고 보아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죽지(竹旨)·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654년에는 신라군대 통수부의 중심적 위치에 서서 새 왕의 추대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이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에 즉위한 것은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이다.

귀족회의의 추대를 뒤엎고 태종이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신라본기에서는 왕에 추대된 알천이 굳이 사양하고 대신 김춘추를 추천하여, 김춘추가 세 번 사양한 다음 부득이 즉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귀족회의의 결정이 번복된 과정이 실제로 그처럼 평화적이고 순탄했다 해도, 그 이면에는 당시 김춘추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는 그 중요한 지지세력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과는 젊어서부터 친분이 있었고 누이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비였으니, 그들의 개인적 유대는 대단히 깊었다. 또한 642년의 목숨을 건 맹세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밀착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간여하였음은 열전에 나타나 있다. 김유신전에는 그가 알천과 상의하여 태종무열왕을 즉위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알천이 그 문제를 전통적 귀족이 아닌 신흥 귀족 출신과 상의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 동기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중요한 나라 일을 결정하던 4영지회의(四靈地會議)의 구성원으로서 알천·임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이 열거되어 있다. 이 중 수석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알천인데, 4영지회의의 구성원들은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이는 귀족회의의 공식적인 수뇌는 상대등인 알천이었으나, 비공식적인 실세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천이 전통적 귀족이 아닌 그와 상의하여 왕위를 양보하게 된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위가 태종무열왕에게 돌아가게 된 데에도 태종무열왕에 대한 그의 긴밀한 지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 해 그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 해 10월에는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졌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어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의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는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 그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펼쳤으며,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 해 정월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663년에는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 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倭)의 연합 세력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 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 주어 평정하게 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신라군의 총사령관 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병이 들어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원정을 떠난 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 생구관계(甥舅關係)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 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 가지 특전을 포상받았다. 그 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간파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그가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하자,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이를 빌미로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 때 그는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며 단호히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무산시켰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 당나라는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 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때 역시 이러한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켰다.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그를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000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쳐 왔다. 그러나 그는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이에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같은 노력이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 중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 일이나,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군사들이 지치자 어깨를 드러낸 채 앞장섰다는 일화, 그리고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이러한 노력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 :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강감찬

948(정종 3)∼1031(현종 22). 고려 전기의 명신. 본관은 금주(衿州 : 지금의 서울시 금천).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해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9)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이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구주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 평안북도 의주군 威遠面)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특히 구주에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거란군 10만 가운데 생존자는 겨우 수 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그는 거란과 항전했던 장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해 국방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

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

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

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허준

허준은 1546년(명종 1)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왕건

877(헌강왕 3)∼943(태조 26). 고려 제1대왕. 재위 918∼943. 성은 ().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岳 : 지금의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 : 지금의 강원도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그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廣州)·충주·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및 당성(唐城 : 지금의 화성군 남양)·괴양(槐壤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0xC89F)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또한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전공으로 알찬(閼0xC89F)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0xC89F)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환선길(桓宣吉이흔암(伊昕巖)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하였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궁예나 견훤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썼다. 이 해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했으며, 같은 해 10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 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견훤

본성은 이(李).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 지금의 문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농민출신 장군이었다. 당시 신라는 혜공왕(惠恭王) 이후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 중앙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지방에서도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여 각 지방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서남해 방위에 공을 세워 변방비장(邊方裨將)으로 있던 견훤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은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자칭했다.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와는 자주 충돌했다. 그뒤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았으며, 927년(경순왕 1)에는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에도 조물성(曺物城 : 지금의 안동 또는 상주 부근) 공산(公山)에서 이기는 등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광개토대왕

고구려 제19대 왕(391~412 재위).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가실왕

생몰년 미상. 가야 말기의 왕. 혹은 가실왕(嘉實王)이라고도 한다. 가야연맹체의 여러 나라 중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지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다.

금관가야(金官加耶)에 관한 기록인〈가락국기 駕洛國記〉에는 가실왕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금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국의 왕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대가야(大加耶)의 왕이라는 견해, 또는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왕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는 가실왕은 곧 금관가야의 취희왕(吹希王)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의 악기 쟁(箏)을 보고 열두달의 악률(樂律)을 형상하는 십이현금(十二弦琴), 곧 가야금(加耶琴)을 만들었다. 또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므로 성음(聲音) 또한 일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십이곡을 만들게 하였다.

이때 우륵이 지은 열두곡은 〈하가라도 下加羅都〉·〈상가라도 上加羅都〉·〈보기 寶伎〉·〈달이 達已〉·

〈사물 思物〉·〈물혜 勿慧〉·〈하기물 下奇物〉·〈사자기 師子伎〉·〈거열 居烈〉·〈사팔혜 沙八兮〉·〈이혁 爾혁〉·〈상기물 上奇物〉 등이었다.

가야가 망하게 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의 진흥왕은 그를 국원(國原 : 지금의 忠州)에 두고 가야의 음악을 계승케 하였다. 우륵과의 관계를 보면 가실왕은 신라 진흥왕과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실왕은 사진이없어서 가야금

 

 

출처 : 엠파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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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1) 초기생애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의 명장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1] 1922년 15세에 성주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이때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2) 교육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1]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3)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령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1932년 4월 29일 상하이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2],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3][4] 당시 폭탄은 폭발물 전문가인 김웅에 의해 폭탄 투척에 적합한 도시락 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두번의 실험을 거쳐 완성하였다. 당시 첫번째 실험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실험을 한 것이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사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였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5]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 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6]

훙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리카와 요시노리[7],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을 죽이고,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중상을 입혔다

 

4) 사형순간

폭탄 투척 직후 체포,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총살 당했다.[1]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것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형무소. 요란한 총성이 음침한 겨울안개를 뚫고 작업장에 울려퍼졌다. 형틀에 묶인 사형수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2. 유관순

 

유관순(柳寬順, 1902년 음력 11월 17일/12월 16일 ~ 1920년 10월 1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18세 때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 생애

  • 충청남도 천안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외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두 명의 남동생이 있다.
  •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부인의 권유로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보통과를 졸업한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
  •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헌병대는 가족을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여 검사국으로 이송하였다.
  •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다시 항소했으나 경성 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법정에서 항의하다가 법정모욕죄가 더해져 징역 7년형이 언도되었다.
  • 1920년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방광 파열로 인해 옥사하였다

 

3. 이봉창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일제 강점기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동경 사쿠라다 문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 부자를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 생애

이진규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랐다.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형인 이범태와 함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폭발물 마련 등 오랜 준비 끝에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우두머리)를 도살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했으며, 12월 17일 도쿄로 출발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만주국 황제 푸이와 함께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수류탄 2개를 던졌다. 근위병 1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미혼으로 처자식은 없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그의 유해를 봉환하여 1946년 효창공원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三義士墓)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 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세계에 과시"한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2) 가족

  • 아버지 : 이진규(李鎭奎)
  • 형 : 이범태

 

4. 안중근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린다

 

1) 생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2]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3],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감옥 수감시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 연보

  •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백천조씨 사이에서 출생.
  •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의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1일 군대해산 때 국외망명.
  •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
  •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 1909년 10월 26일: 거사
  •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순국.

 

3)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30분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 1910년 2월 17일: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 1910년 3월 9일: 고해성사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 1910년 3월 10일: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미사를 봉헌.
  • 1910년 3월 25일: 사형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 정월 초하루, 국왕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4) 김구와의 인연

김구가 동학난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의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왔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5) 안중근이 남긴 말

  •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해할 뿐이다. 동양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나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1910년 2월 17일).
  • "세례를 준 조제프 빌렘 신부가 곧 이곳에 오므로 천주교 신자로 기념스러운 성 금요일(예수의 수난일)에 처형해 주길 바란다".
  • "너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라. 한국은 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돈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업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꼭 공업에만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식림 같은 일은 한국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므로 식림에 종사하여도 좋다"(1910년 3월 25일, 동생들과의 면회에서).
  •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1910년 3월 25일).
  •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1910년 3월 25일 동생들에게).
  • "별로 유언할 것은 없으나, 나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1910년 3월 26일, 사형 당일 유언을 묻는 자리에서).

 

6)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7) 어머니에게 남긴 유언: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성 베네딕트의 음역)는 장차 천주교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8) 아내에게 남긴 글: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천주교, 정교회, 성공회혼배성사는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로 남녀가 부부로 맻어진다는 의미가 있다.)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많고 많은 사연은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씀

 

9) "최후의 유언": 이 내용은 옥중기 처음과 마지막에 나온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0) 천주교 신부 조셉 빌렘(한국명: 홍석구)에게 남긴 유언:

홍신부 전상서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를 불구하고 특히 와주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 다시 바라옵건데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 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흔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죄인 안도마 올림

 

11)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현감 역임
  •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 부인  : 김아려(金亞麗)
  •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8]
  • 둘째며느리 : 정옥녀
  • 딸: 안현생, 생사불명
  •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 손자 :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5. 안창호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도산(島山)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이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1) 수학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장로교 선교사호러스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구세학당 졸업후인 1898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노동으로 학비를 벌면서 공부하였다.

 

2) 민족운동

유학생신분이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외교권대일본제국이 빼앗자,1907년 도산은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계몽활동외에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등으로 민족운동을 하였다. 또한 1908년 대성학교평양에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촌 건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일본만주 침략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가 체포되어 5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출소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60세를 일기로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시신은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으며,1973년 도산공원으로 묘소가 이장되었다.

 

3) 가족 관계

 

4) 어록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것이 다 나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요라고만 하고 가만 앉아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아니하는 것이오?
운둔하는 것이 내 일신으로 보면 가장 편안한 일이다. 내 쇠약한 건강 상태를 보아서도 그러하지마는 내 심신이 아직 활동할 기력이 남아 있고, 우리 민족의 현상이 우려할 형편에 있는 이때에 제 일신의 평안이나 명성을 위하여 가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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