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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 인천광역시·경기도

소무의도

본도와 인도교로 연결된 섬

[ 小無衣島 ]

요약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있는 섬으로 면적 1.22km2, 해안선길이 2.5km, 산높이 74m이다. 인구는 59가구 92명이 살고 있다. 1914년 부천군에 속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인천광역시 중구에 편입되었다.
위치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면적 1.22km2
길이 해안선 2.5km
인구 92명(59가구)

소무의도 개요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있는 섬으로 면적 1.22km2, 해안선길이 2.5km, 산높이 74m이다. 59가구 92명이 살고 있다.

이름의 유래를 보면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서 춤을 추었다 하여 무의도(舞衣島)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큰 섬은 대무의도, 작은 섬은 소무의도라고 부른다. 또 섬의 형태가 마치 ‘장수가 관복을 입고 춤추는 모양’이라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중기에는 무의도(無依島)로 표기되기도 했다. 소무의도는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갖지 못하고 대무의도에 속한 섬으로 섬이 작아서 소무의도라고 불렀다.

대무의도가 조선 말기까지 소를 키우던 목장이었던 데 반해 소무의도의 역사는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무의도는 300여 년 전 ‘박동기’씨가 딸 3명과 정착한 섬으로 실제 대무의도보다 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기계 유씨 청년을 데릴사위로 들이면서 유씨 집성촌이 형성됐다. 산 서편에는 아직까지 ‘시조묘’가 남아 있다.

조선 말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소무의도의 원래 명칭이 용유리의 일부분으로 떼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1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대무의도와 소무의도를 합쳐 무의리라 하였으며, 1914년 부천군에 속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인천광역시 중구에 편입되었다.

소무의도 둘러보기

소무의도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마을이 있다. 다리가 놓이고 섬 주변을 휘돌아 나오는 무의바다누리길이 열리면서 조용하던 마을에 요즈음은 한 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다리는 대무의도의 북쪽 광명선착장과 소무의도 남방파제 끝과 연결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소무의도 포구 정면에 나무계단이 있다. 높이가 있는 만큼 계단이 지그재그식으로 된 가파른 나무 계단이다. 20분정도 가다 보면 산 정상에 정자가 있다.

무의바다누리길은 마을 당제를 지내던 부처깨미, 몽여해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족 휴양지였다는 명사의 해변 등 이른바 ‘누리 8경’을 꼼꼼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됐다. 누리길을 다 돌아보는 데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넉넉할 만큼 평탄한 이 길은 걷는 내내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 다리에서 왼쪽으로 나오면 입구에 백송이라는 나무가 있다. 이어 해안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바위를 깎아내 길을 만들었다.

소무의도 누리길

소무의도 누리길

안내문에 의하면 모예재는 원래 동쪽마을과 서쪽마을을 잇는 고개였다. 고개가 너무 높아 마을 사람들이 파내어 골을 낮추고 길을 확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모예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동쪽마을에 사는 어머니를 서쪽마을에 사는 아들이 지극 정성으로 문안을 드리기 위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 뒤에 이정표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로 연결된 선착장인 떼무리선착장과의 거리는 190미터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몽여해변은 170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섬 동편과 서편에 있는 작은 마을의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들은 바다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2년여에 걸쳐 공공예술프로젝트로 탄생한 벽화다. 주민들의 삶과 마을 풍경을 그림과 수필로 담았다. 특히 우물가에 새겨진 글귀가 발길을 머물게 한다. 이 작업은 인천지역의 작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진행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섬집을 존중하다’의 작품이라고 한다. 길 중간에 있는 원형의 우물에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맛이 다 어디로 갔나’로 시작하는 글이다.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이 해안도로 중간에 대형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바로 ‘섬 이야기 박물관’이다. 관광객들에게 어촌 생활상을 소개하기 위해 만든 이 박물관은 지상 3층 규모(연면적 480m2)다. 박물관 외형은 소라 형태로 설계됐으며 어구전시관과 어촌생활전시실, 체험학습관, 영상관 등이 설치되어 있다.

박물관 앞 몽여해변에는 모래와 몽돌이 깔린 250m의 해수욕장과 언두꾸미가 있다. 주목망은 갯벌에 참나무를 세우고 그물을 쳐 바닷물이 빠지면 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한창 때는 150칸을 설치하기도 했다. 무의도 해역은 물살이 빨라 이 지역 어민들은 나무 막대기들을 꽂고 사이에 그물을 설치해 썰물 때 물고기를 잡고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의 방파제 해변이 그 장소다.

박물관 앞 몽여해변

박물관 앞 몽여해변

여기서 남쪽을 바라보면 해녀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그 위에 등대 비슷한 것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설치된 ‘팔미도’는 해질 무렵 부근을 드나드는 배와 어우러지는 풍광이 아름다워 인천8경으로도 꼽힌다.

박물관 앞에서 건너편 산으로 이어지는 길로 가다보면 왼쪽에 아주 오래 된 건물이 있다. ‘해양청소년수련원’이란 간판이 붙어있는데 이곳이 폐교 터다. 이곳이 예전에 학교였음을 알리고 있다. 그 뒤로 안내판이 있고 여기서부터 제4구간인 ‘부처깨미길’이 시작된다. 이 구간 옆에는 앞으로 톡 튀어나온 지점에 전망데크가 있는데 이곳을 부처깨미라고 한다. 섬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만선과 안전을 위해 당제를 지내던 곳으로 과거 주민들은 부처깨미에서 소를 잡고 풍어제를 올렸다.

소무의도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곳은 뱀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울창한 숲 밖으로 얼핏얼핏 비치는 바다가 멋스럽다. 계속 가다 중간에 쉼터가 나오고 이어 제2구간인 ‘떼무리길’이 나온다. 옛날에는 이 섬을 일컬어 ‘떼무리’라고 했다. 본섬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라고 한다.

3구간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방파제 입구. 여기서 다리 입구까지가 제2구간인 ‘마주보는 길’이다. 서쪽마을과도 연결된 길은 올망졸망한 섬마을 풍경이다. 떼무리선착장은 낚시꾼들의 차지다.

소무의도의 전성기

이 섬은 한때 새우잡이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고 6 · 25전쟁시에 인천상륙작전 당시 군 병참기지로 사용될 정도로 전략적인 섬이다. 소무의도 근해에는 명령만 기다리는 전함들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수협출장소까지 있었고, 새우잡이는 물론 새우를 잡아 먹으려고 쫓아온 조기를 비롯한 각종 물고기들도 같이 잡혔다.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는 1000여 명이 이 작은 섬에 들끓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보기가 힘들다. 조기어장이 쇠퇴하기 전인 60년대 말까지 이 섬에는 중선 배들이 7~8척 가량 있었다. 5~6월 조기를 잡는 철이면 배를 타는 어부들만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1973년 인구는 70가구 337명, 분교생이 65명이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수협이 있었을 정도로 어족자원의 보고인 섬이었다. 이 섬에서 독립자금을 몰래 지원받은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다녀갔을 정도이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근해에서 바다낚시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60년대 중반 휴양하기 위해 섬을 찾았다. 여기서 박근혜 대통령이 중학교 시절 1960년대 중반 아버지를 따라 피서를 왔다가 비키니를 입고 찍은 사진이 유명하다.

소무의도행 도선

소무의도행 도선

1994년도 처음 방문 할 때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섬으로 전락하여 2.5t급 소형 어선이 고작 10척이 있었고 주민등록상 인구 100여 명의 한적한 섬이었다.

활기가 넘치던 소무의도는 어족 자원의 고갈과 주민들의 노령화, 젊은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섬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무의도 소속인 중구청에서 2011년까지 57억원의 사업비를 들여서 대,소무의도 바다 사이에 인도교를 설치해 주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무의 인도교(414m)가 놓이고 어장 대신 관광객과 낚시꾼들의 방문으로 서서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숨이 가프다. 이제 다시 한 번 연도교를 통해서 예전의 영화를 재현하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이 아름답고 대견하기만 하다.

소무의도 지도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의 섬』 시리즈는 25년 동안의 현지답사와 섬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눈으로 보며 느낀 감상과 행정기관에서 갖고 있던 기존의 자료 등을 정리한 것으로, 각 지역별로 나누어 수필집 형태로 구성하였다. 총 13권으로 출간되었다. 자세히보기

  • 저자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드론 사진 포함).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하였고, 2020년 1월부터 목포과학대학교 해양레저사업단 섬해양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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