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물론 노무현,김대중이 올바른 정책,정치만 한 것은 아니죠 저도 깔려면 한참 깔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김대중을 까는 대부분은 사람들은 지역감정,당파(새누리당민주당등)등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감정을 가지시고 까시는 분이 대부분이라고 저는 장담합니다
지식인이라고 함은 쓸데없는 감정에 휘말리지않고 합리적인 사고로 비판해야되는데 대부분의시민들은 그것을 망각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가짧으니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당신은 이유도 모르고 싫어하는 자기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잘생각해보시길바랍니다
2013.09.29.
-
채택
지식인 채택 답변입니다.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북한에 핵폭탄을 만들은 장본인 입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1926년 1월 06일에 生,
2009년 8월 18일에 死.
김대중이는 태어날때 부터 " 애비가 없이 태어난 X입니다
제갈 대중인지?
윤 대중인지?
개 대중인지?
무슨 대중인지 알길이 없네요
밑에 자료가 있으니 읽어보세요
본래 거짓말 왕초입니다
거짓말 대통령이였습니다
아주 역대 최고로 나뿐 X 입니다
지금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이 미라로 자빠저 있는 곳에 있어야 할 X입니다
왜" 동작동 국립묘지에 자빠저 있는지?
말입니다
MB에 정신적인 착각이라보여 지네요
4대강에 미처서 정신줄을 놓아버린것이 아니가 싶네요
참고로 시간 있으실때에 읽어보세요
gorovip
2003.03.11 08:40
고문이 아니라....
교통사고 입니다.
덤프트럭이 운행중에 갑자기 멈추춰서서
김대중씨가 타고 가던 차가 덤프트럭 밑으로 들어가
휴지조각 처럼 말려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사고로 많이 다쳐서 그렀다고 하기도하고
탈장이 있어서 그렇다고도 하기도하고
걸음걸이가 좀 특이하죠.
일부에선 김대중씨를 음해하려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크게 잘못하여 얻어 터진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김대중이 본인과 하니님만 아는 사실입니다
김대중이 두번째 여편네 이희호는 조금 알런지 모르겠지만
첫번째 자식이 김홍일이지요
홍업, 홍걸이는 이희호가 낳은 자식이지요
현 이희호
배우자
김홍일 어머니 고 차용수(인제에서 음독 자살)
아들
아들
아들
한미디로 고문에 휴의증이라고는 하나 알길이없네요
워낙 쑈멘십이 강한 자라 믿어야 될지는 모르오나
거짓투성이입니다
숨소리만 빼어 놓고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좋치 않은 인간이였고 천하에 망종이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1.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알려주세요.
답 : 업적이라면 김정일에게 돈 퍼다 주어서 핵폭탄 만들어 놓은게 업적입니다
업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는 허울로 세월을 보냈을 뿐입니다
2. 김대중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옥수수심어야 할 땅이라며 드러누워 반대한게 사실인가요?
이게 사실이라면 나라의 성장을 막고 미래를 볼 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군요.
답 : 대통령 해처먹은 놈들중에 최고로 더티한 놈입니다
대통령병에 걸려서 상당히 고생하다가 뒤졌지요
한마디로 인간 쓰레기 입니다
3. 김대중 대통령이 월드컵때 일어난 연평해전에서 북한에 의해 전사한 군인들 무시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축구를 관람하고 군인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게 사실인가요?
이게 사실이라면 자국군인 우습게 아는 종북세력이라 불릴만 하군요.
답 : 연평해전에 북에게 당하면서도 대응하지 말라고하고 한국해군 많이 희생당했지요
그리고 월드컵때에 일본에 건너가서 웃고 지랄 병 쳣지요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뒤저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자빠저 있지만 당장 파내어 부관참시하여야 합니다
정치
[월간조선 단독입수]
핵 테러 피해 규모- 추정한 정부 용역보고서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3.07.19 14:45
수정 : 2013.07.21 08:24
서울 도심에서 핵 테러(10kt급) 일어나면?
- 북한은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강행한후,
- ‘불바다’ ‘핵 선제타격’ 등대남 핵 공갈을 계속했다.
김관진(金寬鎭) 국방부장관은 4월 4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
우선순위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우려되는 것은 도발 주체가 불분명한
후방 테러,
폭발,
암살 등이 주종을 이루지 않겠느냐”며 북한의 대남테러 가능성을 언급했다.
7월 3일,합동참모본부는 국정원,
외교부,
경찰청 등 관계기관과 테러 대비 전술 토의를 가졌다.
이날 박선우(朴宣宇) 합참 작전본부장은 “
북한이 대남 도발과 테러를 자행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며 “
테러가 일어나 북한 소행으로 드러나면 강력하고 단호하게 응징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티 밤, 방사능 물질 확보·제조 간단해
북한은
핵,
생물,
화학 무기 등의 비대칭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이 이를 대남 테러에 이용한다면 우리는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보게 된다.
생물,
화학 무기도 최고의 살상력을 가진 테러 수단이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핵’이다.
올해 초부터 북한이 ‘
제2의 조선전쟁’ ‘핵 선제타격’ ‘핵찜질’ 등을 운운하며 대남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진짜 북한이 핵을 이용한 대남 테러를 자행할 경우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최근 《월간조선》은 서울 여의도에서 10kt 규모 핵 테러가 발생하면▲사망 24만여 명
▲경제적 손실 1575조원
▲방사능 오염 면적 2788km²
▲소개·대피 인구 217만명 등의 피해가 발생해 ‘
국가 위기 사태’를 맞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입수했다.
이 문건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가
지난해 3월 열린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두고
원자력 전문 컨설팅업체에 용역을 의뢰해 제출받은 정책연구보고서
<핵·방사능 테러 발생 시 경제적 파급 효과 분석>이다.
이는 핵 테러를 가정한 첫 정부 용역보고서다.
핵·방사능 테러란,
방사성 물질을 표적 지역에 유포,
확산시켜 인체의 방사선 피폭을 포함한 방사능 오염을 유발하는 테러 행위를 말한다.
문건은 방사성 물질을 폭약과 함께 폭발시키는
방사능 확산 폭탄(RDD·Radioactive Dispersion Device),
핵 분열성 물질로 제조한 조잡한 핵무기를 폭발하는
급조형 핵 장치(Improvised Nuclear Device·IND)를
이용한 테러의 피해 규모를 예측했다.
더티 밤 폭발 시 75명 죽고, 102조원 피해 발생RDD는 의료·산업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사성 물질을 재래식 폭약으로 싸서 터뜨리는 폭발물로,
흔히 ‘
더러운 폭탄(Dirty Bomb)’으로 불린다.
RDD를 이용한 테러를 하기 위해선 먼저 방사성 물질을 구해야 한다.
문건에 따르면 RDD에 사용하는 방사성 물질은 사회 전반적으로 이용돼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고,
반감기(半減期)가 충분히 길어서 장기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또 대기 중으로 확산이 잘돼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입자·분말 형태여야 하며,
취급하는 사람의 방사선 피폭이 작은 물질이어야 한다.
문건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방사성 물질 9종 중 세슘-173이RDD에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실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집계한 <1993~2004년간 방사성 물질 불법 거래>에 따르면
세슘-137의 밀거래가 전체의 42%로 가장 활발하다.
문건은 RDD에 쓰이는 세슘-137의 방사능 규모를 100TBq(테라 베크렐, 1TBq=1조Bq),
테러 발생 장소를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부근으로 설정했다.
베크렐은 방사능 물질의 방사선 방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국제단위다.
1TBq은 엑스레이 검진을 받을 때 노출되는 방사선량(4만6000Bq)의 2174만배다.
문건에 따르면 가상RDD 테러에 의한 인명 피해는 폭발에 따른 사망자 75명이다.
이 밖에 주민 대피·소개,
제염(방사능 오염 제거) 등의 비용 발생이 직접적인 피해다.
소개(疏開),
대피 인구는 각각 46명, 1256명이다.
제염 면적은 서울의 42%에 해당하는 254.3km²다.
이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4%에 해당하는
총 40조1381억원으로 평가됐다.
항목별로 살펴보면
▲인명손실 527억원
▲소개·대피 2억5000만원
▲제염 38조7821억원
▲건물 및 시설 손실 1조3028억원 등이다.
간접 피해도 발생한다.
방사능 테러로 인한 국내 화폐가치 하락,
주가 폭락,
자본 이탈 등 금융 부문의 손실이 발생한다.
국제신인도는 하락하고,
안보리스크는 증대된다.
민간 소비와 투자,
수출은 감소한다.
문건에 따르면 테러 발생 이후 4분기 동안의 간접 피해액은 총 61조7523억원이다.
부문별로는
▲민간소비 감소 13조6793억원
▲민간투자 감소 23조1330억원
▲관광산업 수출 감소 4조7478억원
▲농수산업 수출 감소 3196억원
▲음식료산업 수출 감소 2조4247억원
▲생산 차질로 인한 부가가치 감소 17조4479억원이다.
종합하면,
서울 여의도에서 100TBq 규모의 방사성 물질을 이용한RDD 테러가 일어나면 75명이 사망하고,
약 102조원의 직간접 경제 피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핵 테러(10kt) 발생 시 24만여명 사망, 1576조원 피해 발생
급조형 핵장치(IND)를 이용한 테러는 RDD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준다.실현 가능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IND 테러가 일어날 경우엔 ‘
국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연간 GDP에 버금가는 경제적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건에 따르면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부근에서 10kt 규모의 핵 물질이 폭발하면
반경 270m 이내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 건물과 함께 증발한다.
문건에 따르면 이때 사망하는 사람이 4604명이다.
그리고 전리 방사선에 의한 사망자 9만6533명,
방사성 물질의 대기확산에 따른 사망자 15만9587명이 발생한다.
이 중 사망원인 간 중첩되는 인원을 제하면 총 24만1640명이 사망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명피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170조658억원이다.
핵 폭발이 일어나면 인근 1054.43km²의 주민 216만6275명을 소개·대피시켜야 하는데,
7937억원이 든다.
RDD 테러와 마찬가지로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은 제염 작업을 해야 한다.
문건은 IND 테러로 방사능 오염 지역을 제주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2788km²로 추정했다.
제염 비용은 425조2389억원이다.
여기에 건물,
설비 등 유형고정자산의 피해액 87조1785억원을 합하면
총 683조2770억원의 직접적인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
간접 손실의 경우는 짐작하기 어렵다.
핵 테러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얼마 만에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건에선 일단 3년 동안의 경제 피해 규모를 산출했다.
이에 따르면
▲1년 544조2887억원
▲2년 242조6580억원
▲3년 105조4523억원 등 총 892조3990억원의 간접 피해가 발생한다.
→ ‘
월드컵 결승전 일본에 갔을때에 사진입니다
김대중의 거짓말과 적반하장도 김일성에게서 배웠나?
2000년6월의 남-북정상회담이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4억5천만달라라는 거액의 뇌물을 주고 성사 시킨 것임은
이제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김대중은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노벨상까지 받았다.
희대의 사기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요지부동이던 북한에 햇볕을 쏘여 해빙이 되었고
한반도의 평화는 완전히 정착되었다고 우겨댔다.
그 여파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무장해제 당하는 반면
김정일이가 그 뇌물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그것이 결국 서울로 향하고 있음을 김대중이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물론 후임 노무현도 김정일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요즈음 드러나고 있는 당시의 기록과 증언들을 보면
김대중의 방북은 국민들에 대한 기만이었을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정보원으로 하여금 적장인
김정일에게 뇌물을 보내기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니
이보다 더 큰 역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거짓말 잘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그의 나이와 학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런 사람이 1997년 대선직전 관훈토론회에서
당시 이도형 총무(현 한국논단 사장)가 그의 거짓말한 부분을 지적한 것에
앙심을 품고 대통령이 된 후에 바로 이 총무를 고발하고 사법조치하여
그가 살던 아파트까지 강제처분케 하는 등 분풀이를 한 것도
김일성-김정일의 무자비한 수법과 유사한 점이 있다.
김현희를 가짜로 만들려던 곳이
김대중-노무현 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니!
엊그제 <TV조선>에 나온 조갑제-김현희 대담 중
나온 이야기는 참으로 소름 끼치는 내용이었다.
필자가 1987년에 바레인에서 김현희를 호송해온
대표단의 일원이었음은 본란을 통해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희의 남편 심재환 변호사가
김현희가 가짜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고 했다기에 내 귀를 의심했던 일이 있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국정원의 고위직들이 직간접으로
김현희에게 한국을 떠나서 살라고 종용 또는 협박을 했다니,
만일 김현희가 그러한 협박에 못이겨 한국을 떠났었다면,
그들은 분명 그 사건은전두환 정부에 의한 자작극으로 결론을 내고
김정일에게 결과를 보고했을 것이다.
'자작극' 타령으로 일관한
김일성-김정일의 철면피 DNA가 김대중-노무현에게도 전이되었단 말인가?→
박지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원조 종북-친일'로 매도하였다는 기사를 보니 이 사람도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적반하장' 의 조폭기질을 드디어 드러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김대중의 수제자 다운 교활함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다.
초록은 동색 이라더니….
2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김대중의 잘못된 지시로 인한 것이었다는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최근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오히려
우리 해군의 잘못이 원인이었던 것처럼 말하였다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김일성-김정일의 행태를 그대로 따르거나 흉내내는 사람들,
그들이 속한 단체들,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려는 사람들은 확실한 종북세력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하여는
이들 종북세력 척결이 당면한 선결문제 인데,
정부나 여당의 대처가 너무도 답답하고 한심하기만 한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입력 : 2012.06.26 03:21
수정 : 2012.06.26 08:24
故 박동혁 병장 전사前 80일간 돌본 당시 군의관의 분노
"전사 장병(제2연평해전때)을 천덕꾸러기 취급…
그게 정부인가"
나라 지키다 젊은이 죽었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본다고 일본 가서 웃고 손 흔들고…
이런 나라가 어디있나 종북 국회의원들 보면
내가 낸 세금이 왜 그런 사람들에게 쓰이나 싶어
- 이봉기 교수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이튿날인2002년 6월 30일
성남 국군수도병원 응급실.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이었던
이봉기(43) 강원대 심장내과 교수는 의사가 된 이래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을 단 환자를 만났다.
고(故) 박동혁 병장.
당시 참수리 고속정의 의무병이었던박 병장은 연평해전 와중에
부상 장병을 돌보기 위해 총탄이 날아드는 함교 위를 마구 뛰어다녔다.
온몸에 100여개의 파편이 박힌 뒤에야,
그는 쇼크로 쓰러졌다.
상황은 심각했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 내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든 다른 파편은 척추에 박혔다.
등과 옆구리는3도 화상으로 벌겋게 익어 있었다.
혈관이 손상된 오른쪽 다리는 새까맣게 죽어,
끝내 사타구니 아래쪽부터 잘라내야 했다.
순환기내과 전공의이 교수는박 병장의 혈압을 유지하기 위해 매달렸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는 민간에서 따로 구해다 쓰면서 온갖 방법을 썼지만,
투병80일 만에 박 병장은 숨을 거뒀다.
이 교수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강산도 변한다는10년이 흘렀지만,
그에게 제2연평해전은 생생하다.
아니,
그때의 순간들은 그의 삶을 바꿔놓고 있었다.
이 교수는
"당시 전사 장병과 유가족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도)
털끝 하나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0년이 지났다.
제2연평해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그전에는 군인들을 보면 '군바리'라고 불렀다.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김대중 대통령이 당선했을 때
'드디어 군바리가 가고
민주정치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제2연평해전 부상자 돌보면서,
희생이 뭔지 배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군인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 정부 관계자가
'우리 선박이 (작전) 통제선을 넘어간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고,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지난 정권 떠올리면 이가 갈리고 분통이 터진다.
당시 죽어간 사람들,
다친 이들이 생각나서….
나 말고도 그 자리에 있던 군의관 모두 그랬다.
지금종북(從北) 국회의원을 보면 내 세금이 왜 이런 사람들 위해 쓰여야 하나 싶다.
이건 보수·진보 문제가 아니다.
나라 생명이 걸린 문제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건 나라를 지키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종북 인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에 대한 모독을 자주 하더라."
―당시 국군수도병원에 병원에 있던 군의관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우리끼리 일 끝나고 맥주 한잔씩 할 때마다 (제2연평해전) 이야기를 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느냐고.
나라 지키다가 젊은 사람들 죽어나갔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 본다고 일본에 가서 웃으며 손 흔들고.
이러면 어느 누가 나라를 지키겠나.
나 같아도 나서서 안 하겠다.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다.
당시 부상장병을 돌봤던
군의관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했었다. ”
―2002년 월드컵도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나?
“그렇다.
제2연평해전이 묻혀버렸으니까.
효순·미선양 사건(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우리 여중생 2명이 숨진 사건)
당시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서운하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하지만 나라 지키다
그렇게 값어치가 없나 싶더라.
효순·미선양 때 들었던촛불,
우리 목숨 지키려다 희생한 젊은이들 위해서 들어줬나.
당시 촛불 든 사람들에게 정말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 촛불 다른 곳에서 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론 좋은 뜻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홀대받은 장병 생각나서,
지금도 축구·촛불…. 보기 싫다.”
지난 22일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병원 연구실에서
이봉기 심장내과 교수가 자신의 수필집‘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를 들어 보이고 있다.
자신의 딸이 태어났던 2002년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며
연평해전 희생자를 돌봤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참수리6용사의 유가족들도 지금까지 정부에 서운한 점이 많더라.
“정부 인사의 무관심이 서운할 것이다.
사건 당시 전사자 빈소에 일반인들 조문 못하게 막았다.
유족들과 몇몇 군 관계자들만 왔다 갔다.
그건 진짜 아니다.
고(故) 조천형 중사 따님은 지금쯤 초등학생 되었을 텐데….
정말 그때 마음 아팠다.
만약 누군가 나라를 지키다 숨졌을 때,
그 자녀의 친구들이 훗날 ‘너희 아버지는 영웅이셨어.
훌륭한 아버지를 둔 거야’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유가족들에게 더 나은 혜택들을 보장해준다면
나도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몸을 던질 것 같다.
제2연평해전도 그렇게 명예를 드높여 줬다면,
자존감을 높여줬다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가족이 한을 풀지 못하고,
국가 상대로 소송 걸고 그럴까?
당시 정부는 대단히 잘못한 거다.
응당 해줘야 할 것을 안 해준 것이다.
유가족이 홀대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북한이,
간첩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이 나라 젊은이들이 조금씩 그런 생각 먹게 하는 거다.
그래서 결국 안보가 무너지게 하고, 분열되게 하는 것이다.”
―고 박동혁 병장을 돌보던 경험을 바탕으로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수기를 썼다.
“수기에 등장하던 딸이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제2연평해전10주기가 다가오면서 딸이 그 수기를 찾아 읽었다.
‘총알이 날아오면 피하고 숨으면 되잖아.
근데 왜 아프게 이렇게 죽게 됐어?’라고 묻더라.
그래서 ‘유진아,
아빠가 80일간 지켜본 오빠(박동혁 병장)는 총탄 포탄이 막 날아다니는데,
다른 죽어가는 친구들 살리려고 막 뛰어다녔어.
되게 용감하게 싸웠대.
왜 그랬을까?’라고 되물었다.
딸이
‘그 오빠들이 도망갔으면,
나쁜 사람들이 더 넘어와서 우리 총 쏘고 막 죽였을 테니까’라더라.
그게 안보 아닌가.
어떤 이들이 최전선에서 희생하고,
지키고 있으니까 우리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안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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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심판 받아야 합니다
국립묘지에서 시신을 파내어 부관참시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참 세상에 이런 일이 있군요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김대중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을 민주화의 화신이고,
전두환은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를 범했다며 무기징역을 최종 선고했다.
재판부는5.18 시위대가 헌법을 수호하려는 준헌법기관인데
전두환과 정호용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내란죄에 해당하고
그 과정에서 훌륭한 시위자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내란목적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5.18을 조기에 진압한 것은 전국적으로 확대돼야 할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것이기 때문에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필자는 이런 판검사들이 과연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의심한다.
과연 역사바로세우기의 판검사들이 옳은 판결을 했는가?
먼저 김대중이 북한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사람인지를 탈북자들의 증언록을 통해 알아보자.
인용된 자료는 모두‘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있다.
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2월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쪽6-12줄)
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5)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421쪽 하3줄-422쪽 1줄)
수기집에는 문익환에 대한 증언도 있다.
“(공화국 영웅 평양사자)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142쪽 2줄-15줄)
실제로 2006년 9월8일 한국일보는 평양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평양타임스를 인용하여
문익환의 초상이 북한 기념우표에 올라 있고,
우표에는 민족통일상 수상자로 표기돼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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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본 김대중
1)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북한에 대해 이른바‘통 크게’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김정일은1999년 김대중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선전선동기관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은 1999년 7월 19일,
김대중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A-4지14쪽 분량으로 실려 있는 한민전의 고발내용을 요약한다.
1982년 김대중은 미국망명 때 전두환에게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 30만 달러의 돈을 받았다.
92년 대선 직전 그는 노태우로부터20억 원을 받았다.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 3백억 원을 받았고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대가로5백억 원을 받았다.
노태우로부터 모두1천2백 여억 원을 받았다.
60년대 말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 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하여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8천여억원에 달한다.
「집권하자마자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H그룹회장은1백50억 원을 청와대에 상납했다.
이렇게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 돈이5천억 원이다.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 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기로 하고 사례금을 받았다.
소로스에게 단기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4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이2천억 원이다.
1998년10월,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 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았다.
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 원씩의 사례금을 받았다.
「전 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았다.
[금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2억 달러에 이른다.
인사는 곧 돈줄이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 개의 공정가격이1억 원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6백억 원은 넘는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 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 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 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걷어 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소유한 재산이9억4천만 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8억8천만 원으로6천만 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 10여억 달러에 달한다.
2) 1999년12월 5일,
북한 부주석 김병식이 김대중에 쓴 편지를 폭로했다.
김대중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 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 하니
선생과 협력해오던 지난 날이 회억 되면서 감개무량 함을 금할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 하던 때가 엊 그제 같은데 벌써 2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죤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쟈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 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 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 지금도 괴롭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 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이 어느 회합에서 말씀 하셨지만 조국 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에야 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 정권이 서야 북과 남이 민족 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 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상봉을 확약 하면서 옥체 만강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주체 86 (1997년)12월 5일 평양에서
조선 사회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3) 이어서 1999년 12월호,
일본 문예춘추지에 김정일이 김대중을 압박하는 육성녹음이 소개됐다.
우리 아버지 수령으로부터 사랑과 배려와 도움을 받고도 배은망덕하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
4) 같은 시기에 구국전선이라는 노동당 기관잡지가 전단을 통해
김대중이 스위스 은행에 10억 달러를 보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책자와 전단은 한국의 휴전선과 해외교포들에게 뿌려졌다.
바라는 요지는 김대중이 김일성 주석의 은혜에 빨리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 이 연속적인 협박에 당황했을
김대중이 2000년 3월,
갑자기 베를린으로 날아가 접선을 요청했다.
김정일의 입을 빨리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민간단체를 통해 북한을 도와주었지만 도와준 양이 변변치 못했다.
좀 넉넉하게 도와주려면 아무래도 정부가 앞장서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을 열자”는 요지의 선언이었다.
김정일은 쾌히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차안에서 단둘이55분간 접선을 했다.
색깔로 의심받아온 그가
대열을 이탈해 적장과 단둘이 1시간씩이나 밀담을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접선과정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소문과 추측만 무성하다.
하지만 그 접선 이후에 나타난 김대중의 행동은 결코 대한민국 대통령의 행동이 아니라
약점 잡힌 사나이의 허둥대는 행동이었다.
김정일이 앉아라하면 앉고 서라하면 서야 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그 후의 남북한간 거래는 거래가 아니라 한쪽 협박하고 다른 한 쪽은 그 협박에 못 이겨
허겁지겁 대국민 명분을 만들어가면서 퍼주기만 하는 약점 잡힌 전주에 불과했다.
이를 어떻게 정상회담이라 볼 수 있으며 대북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2002년 8월 16일,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 의견광고로 나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5.18이 북한과 연계된 폭동이었다고 한 35자의 문자 하나만 걸어
필자를 광주구치소로 구속시켰다.
위 사실에 대해서는 고소를 하지 못한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이
차내에서 무슨 내용을 주고 받았을까에 대해서는 소문과 추측만 난무했다.
일본에서2004년 12월 4일 발간된 책
“김정일 파멸의 날”(출판사: 일신보도. 저자: 미도 히로미찌)은
교보문고에 들어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혔다.
이 책의 188-189쪽에는2000. 6.15일 남북정상회담 시,
갈 때에 45분, 올 때에45분, 계90분간에 걸쳐
김정일과 김대중 단 두 사람이 동승한 차내에서 있었다는 밀담내용이 소개돼 있다.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미 CIA는 양 김의 차내 밀담 90분간의 내용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포착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정일은 김대중의 남로당 서류와 1967년부터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
김대중에게 제공한 자금원조에 관한 자료 등을 보여주면서
"이들 자금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이렇게 말했다.
이에 김대중은 잔뜩 주눅이 들어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1) 생전의 김일성 수령님을 만나 뵙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2) [박통시절) 납치사건에 있어서 여러 모로 힘을 써 주셔서 오늘 날의 제가 있었습니다.
3) 광주사태로 인해서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4)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김 총서기님과 협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5) 남북 평화협정을 조기에 체결하고 싶습니다.
6)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민족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는데 매진하고 싶습니다.
7) 북조선에 경제재건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8)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일본 총리를 조속히 평양에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대중이 그 후 대통령으로서 보여준 행동과 김정일이 4차례에 걸쳐 협박한 내용을 보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위 책의 내용은 증거의 존재 여부를 떠나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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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의 핵심 요지 요약
“김대중은 일본인 상선회사에 입직해 업주에게 굽신거리며 잘 보인 덕에 돈푼이나 얻어 쓰면서
돈맛을 알게 된 김대중은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인 소유였던 상선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한국사회에서 불경기를 모르는 기업,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권력을 쥐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김대중은 재빨리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가신그룹을 만들고 그를 통해 엄청난 정치자금,
선거자금을 염출해 냈다.
그 가신그룹의 핵심멤버들은
김상현,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장재식, 박태영 등 재력가,
모략가, 사기협잡배들이다.
사조직을 통해서도 수많은 돈을 뜯어냈다.
대표적인 사조직으로는 「민주연합청년회」,「민주헌정동지회」,「한국정치문화연구소」등이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직접 조직운영한 「민주연합청년회」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전위대로,
비자금조성의 별동대로 기능해왔다.
김대중의 보증만 받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땅 짚고 헤염치기라고 하는 호남권에서 공천후보자들로부터의
자금 염출은 말 그대로 수탈행위였다.
지난13대총선때 전북 남원지구에서 지역구후보 첫 내정자는 이형배였다.
그런데 조찬형에게서4억원의 뇌물을 받아먹은
김대중이 이형배를 전국구의 당선 불가능한 순위로 돌려놓고
그 대신 조찬형을 내세운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3대총선때 김대중이 호남권 후보자들로부터 받아먹은 사례금만도 1백억원이 넘는다.
김대중의 돈 그러모으기는 14대총선때 더욱 노골화되었다.
김대중은 후보선정에서 공천헌금상납액수를 후보선정기준으로 삼고
민주당의 전국구당선권으로 보는24번까지에 전 주택은행장 장재식, 무등산관광호텔사장 김옥천,
삼양실업사장 강희찬, 미주산업회장 박은태, 대림필름사장 국종남, 예식장경영자 김충현,
전 뉴욕한인회회장 박지원 등 재력가들을 넣었다.
50억원을 헌납하면 당선이 확실한 후보순위에 들고 40억원을 내면 밀려났다.
대선 때마다 집권 후에 이권을 보장한다며
재벌들과 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내 비자금을 조성했다.
지난71년7대 대선 때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럭키재벌 총수 구자경에게 집권 후 제2정유공장건설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그로부터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던 내화5억원을 긁어냈고
한일합섬회장 김한수에게는 마산한영섬유확장허가를 담보로 1억원을,
삼양그룹총수 김연수에게는 전라도 토착 기업으로 내세워주겠다면서
2억원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재벌들과 대기업주들로부터 무려1백여억원의 자금을 뜯어냈다.
김대중의 비자금 뜯어내기는
92년의 14대,
97년의 15대 대선때 절정에 이르렀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송천영 등 심복들에게
「대선자금 조성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재벌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면서 권노갑에게는 삼성, 김옥두에게는 대우,
. 이런 식으로 분담까지 해 재벌들과 대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뜯어냈다.』
지난 91년과
92년 대선직전까지2년기간에만도 집권후 특혜보장을 담보로 삼성과 대우,
진로 등 재벌들과 주식회사 한창, 대호건설, 벽산개발, 풍성전기 등10개 회사로부터만도
1백34억원 상당의 대선자금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근 8백억원의 대선자금을 긁어모았다.
특히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감행한 정치자금염출 행위는 말 그대로 광적이었다.
97년 15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김대중은 이번 대선 싸움은 생사를 가름하는 마지막 전쟁이라며
장남 김홍일과 처조카 이형택, 핵심측근인 김원길, 김한길, 재력가들인 김봉호, 김인곤,
경제통으로 알려진 장재식, 박태영으로 대선자금 모금팀을 구성하고
사조직과 지구당조직은 물론 폭력조직배들까지 총 발동해 대선자금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1982년 김대중은 미국망명 때 전두환에게 미국에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30만 달러의 돈을 받아먹은바 있다.
92년 대선 직전 그는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3백억원을 받았고
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담보를 주고서도 그에게서
5백억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노태우로부터 모두1천2백여억원을 받았다.
60년대말 업자로부터 엄청난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미국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은 적도 있다.
김대중이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하여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8천여억원에 달한다.
청렴결백을 좌우명으로 삼는다며 권좌를 차지한 김영삼이 집권1년 만에 한국7대 갑부로,
집권 3년만에는 일약 최대갑부로 둔갑해 도둑왕초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김대중은 도둑왕초로 악명 떨친 김영삼을 아연케 할 정도이다.
집권하자마자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사항 이행이란 명분으로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30대재벌그룹에 속한H그룹회장은
『재벌구조조정은 경제회생차원이 아니라 재벌들의 목을 비틀어 정치자금을 뺏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김대중은 재벌개혁이란 올가미를 걸어놓고 재벌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1백50억원을 청와대에 상납하였다』고 실토했다.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 돈만도5천억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 넘기기로 하고
또한 막대한 사례금을 받았다.
김대중은 국제금융투기수괴로 국제사회에 악명 떨치고 있는 소로스에게 단기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그로부터 4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은 2천억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외세에 기업을 팔고 시장을 팔다 못해 우리 영해와 영토까지 팔아 엄청난 돈을 챙기고 있다.
김대중은 지난해10월 일본상전을 찾아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먹었다.
일본의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재경부의 한 고위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한일어업협정의 체결로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 일본의 재계는 어업협정이 정식 발표된 즉시에
김대중의 해외은행 구좌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사례금을 넣어주었다 한다.
김대중은 집권후에도 광주살인마,
비자금도둑왕초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의 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원씩의 사례금을 받았고
정치활동재개를 보장해주고 또한 엄청난 돈을 받아먹었다.
김대중은 지난1월 추징금도 내지 않고 또 금고이상의 형을 받아
「전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특등범죄자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5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아먹었다.
심지어 김대중역도는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금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거기서도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김대중은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2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예상된다.
인사는 곧 돈줄이었다.
역대집권자들에 의해 행해진 인사권을 이용한 돈벌이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하에서 더욱 번창해지고 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 개의 공정가격이1억원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 6백억원은 넘는다.
김대중은 친족은 물론 처가 족속들까지 발동하여 검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 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김대중은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걷어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소유한 재산이 9억4천만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8억8천만원으로6억6천 만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10여억 달러에 달한다.
부정부패의 왕초 김대중 역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정치적 안정과 경제와 민생안정도 이룩할 수 있고 깨끗한 정치도 실현할 수 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선전국 주체88(1999)년7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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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서야 한다]에서
저들이 노략질해간 부채를 우리가 떠 안았습니다.
자자손손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160조의 공적자금,
또 다른200여조의 국가채무,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쳐 놓고 그 돈을 노략질했습니다.
우리는 이 노략질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돈을 풀어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습니다.
은행에 빚을 진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습니다.
기존의 공기업이405개입니다.
이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이미 이 나라는 국영공화국이요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얼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히여 돈을 털어 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습니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그의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입니다.
이걸 우리더러 갚으라 강요합니다,
세금을 올리고, 세무행패를 강화하고, 공공요금을 올리고, 거리마다 무인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것입니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습니다.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북한에 전기를 준다 합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습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 브로커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600명이나 됩니다.
이 브로커 기구가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습니다.
골드만삭스, 론스타. 리만브라더스, 싱가포르투자청 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습니다.
더러는 3배,
더러는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합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의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습니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팔아 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입니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습니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난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 넘긴 잔돈이었습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검은 돈이 더욱 클 수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도륙질 했습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란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습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기업은 식솔들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습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을 바치라는 신호였습니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했습니다.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찾아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습니다.
벤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해 사기도 쳤습니다.
청와대 식솔, 동교동 가신, 국정원, 조폭들이 총 동원되어
어린 벤처사장들과 사기 친 돈을 나눠 갖았습니다.
그야말로 난장판 놀이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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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씨의 아버지는 좌익에게 피살되고, 孫씨는 金大中씨를 돕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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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기록이 김대중을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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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충무 선생의 김대중 간첩 증언 동영상입니다.
1. http://www.youtube.com/watch?v=qWgtj973O6w
2. http://www.youtube.com/watch?v=qcYGo4uoMgs&feature=related
김대중은 23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한민통 사건 등을 통해 이미 북한을 위해 싸우는 북한의 전사로 판명 났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저지른 반역행위들은 너무도 많이 있고,
본 홈페이지에도 매우 게시돼 있다.
국민 몰래 적장에 핵자금을 대주고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진다’는 등의
말로 간첩 이상의 행동을 했고,
죽기 전까지도 광화문 촛불 폭동을 부추기며 북에 충성하다가 죽었다.
그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폭로들이 있었는지
아래에 간단히 정리한다.
내년에는 이희호 재판이 본격화될 것이다.
이희호와 검찰은 필자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추출한 아래 4호에 있는
6개의 글들을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행위가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희호와 검찰은 그 내용들이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할만한 근거가 없다.
과연 아래 4호에 있는 6개의 탈북자 증언들이 허위사실일까?
내년의 재판에서는 이희호와 검찰의 얼굴들이 뜨거워 질 모양이다.
1. 대남사업의 중심, 통전부 간부의 말(2005):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다.
월간조선 2005년 01월호에는 제3국 체류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요원
장혜영의 폭로를 실었다.
“386 주사파는 통전부의 정규군이고,
우리는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통전부-친북단체-남한 정권이 김정일 지령하에 3위1체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대북지원금은 대남공작비로 돌아간다”
“김일성은 김대중 집권의 길을 열어 주려고 박정희 암살 명령을 내렸고,
결국은 육영수를 죽게 했다.”
“김정일과 남한 386주사파는 공동 운명체다.
김정일 붕괴는 386주사파의 붕괴다.
386주사파가 국보법을 폐지하려는 것은 자신들이 국보법 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를 캐자는 것은 그들의 현재를 감추기 위한 것이고,
그들이 친일을 캐려는 것은 그들의 친북을 감추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성동격서 전략인 것이다.”
“김정일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지시했다.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안기부를 해체적으로 개편한 것과 강인덕 장관을 해임시킨 것은 통전부 작품이었다.”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이 얼마나 집요한가 하는 것은
현재 노동당 안에 대남공작부서만 해도 4개(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
그것도 모자라 인민군 무력부 안에
정찰국이라는 것을 또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인원을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사건」,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
1992년 10월6일 「남조선 노동당 사건」,
1996년 9월15일 「강릉해안 잠수함 침투」,
1998년 12월17일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 교전」,
2002년 「서해교전」 등이 반민족·반통일의 원흉 김정일이 저지른 사건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발기하고 총지휘한 악한의 직접 지휘체계下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대남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김정일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두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정상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1999년 1월 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2. 안기부 해체는 사실이었다.
(남한에서의 사실)
김대중은 정권쟁취 33일 만인 1998년 4월 1일, 이종찬-이강래를 국정원에 배치하여,
오랜 동안에 걸쳐 양성된간첩잡는 전문인력 581명을 일거에 '학살(해고)'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대공전선이 와해됐다.
이와 더불어
기무사(600명),
경찰(2,500명),
검찰(40명)에 설치된 대공전선이 모두 와해됐다.
(북한 상류층 정보)
북한 최고급 간부들의 사정을 잘 아는 위치에 있었던 상좌 출신 필명 다윗에 의하면
김대중은 1998년 10월에 박정희 시대로부터 북한 군부에 심어놓은
우리측 애국자들 300여명에 대한 명단을
김정일에 보내 이들 300여명 모두를 하루아침에 숙청케 했다.
우리 정보기관은 김신조 소대의 방차대 출신 2명을 전향시켜
북에 가서 출세하여 대한민국에 충성하라,
북으로 보냈는데 1998년 10월까지,
림태영은 3성장군,
우명훈은 2성장군으로 승진해 중요직책들(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 등)을 맡고 있었다.
1998년 10월,
갑자기 300명(반은 장군, 반은 대령)이 숙청되었는데
이들 숙청된 장군들 틈에 남한에 충성을 맹세했던 림태영(3성)과 우명훈(2성)이 있었고,
우명훈의 처남 리상일(저격여단장)도 끼어있었다한다.
이들 300명 정도의 고급간부들은 남한에 협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김대중 시대에 숙청된 것은 남한의
김대중이 이들의 명단을 북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라는
소문들이 고위직 사회에 파다했다한다.
3. 북한 상좌출신의 말 : ‘김대중은 1948년부터 김일성이 기른 북한 간첩이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대규모 팀을 이끌고 2001년 6월 어느 날 하나원으로 그를 만나러 왔다.
하나원 원장인 김중태가 다윗에 와
“청와대 홍보수석 등 40여 명이 증인과의 인터뷰를 원하니 응하겠느냐”며
의사를 타진해 왔고,
그는 이에 응하겠다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북한에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 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나는 북한의 중상류층에서 인식하고 있는
김대중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데 그걸 그대로 말해도 되겠는가” 확인했고,
홍보수석은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 했다.
이에 다윗은 거침 없이
“김대중 대통령은 1948년부터 김일성이 고용한 북한 간첩”이라는
북한 중상류층의 인식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4. 탈북자들의 진술(2009) : 김대중은 북한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이고,
5.18은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다.
아래는 2009년에 발간된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발취한 내용들이다.
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쪽6-12줄)
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5)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257쪽 하1줄-258쪽 11줄)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하3줄-422쪽 1줄)
김대중은 간첩
1998년 김대중이 남한의 대북전문가 4,000명을 숙청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2011.12.25자 중앙선데이는
김대중 정부가 98년,
이종찬 국정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의 주도로
남한의 대공전문가 4,000여명
(국정원 581여명, 경찰 2,500여명, 기무사 600여명, 검찰 40여명)을
일거에 숙청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사실임을 확인했다.
해직자 중 송영인 국사모 대표가 이끄는 20여명이
이에 저항하여 행정소송을 냈고,
법원은 2003년 9월 “불법 면직이기 때문에 집단해직은 무효”라는 판결을 냈지만
당시 좌익정권은 이 판결을 철저히 무시했다.
중요한 결론은 국정원의 집단해직이 불법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이 국정원-기무사-경찰-검찰에 훈련돼 있는
대공전문가 4,000여명을 일거에 불법 숙청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김대중은 북한의 통전부 출신, 인민무력부 출신, 일반주민들이
같은 목소리로 증언하는“김대중은 김일성수령의 전사”라는 것을
확신케 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역적이라는 사실을 인지케 한다.
김유송은?
여기에서 우리가 김대중의 역적행위에 대해 하나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은
김유송의 증언이다.
김유송은 북한군 상좌출신 탈북자이자
500만야전군 조직기획국장이며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황제버섯을 재배하면서
많은 탈북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의 대표이며
시스템클럽에는 다윗이라는 필명으로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중앙선데이는 2011.12.25자 발행본에서
우리가 30여년에 걸쳐 북한에 공들여 심어놓은
300명 정도의 우리측 협조자들이 일거에 처형됐다는 김유송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번 2월 5일자 중앙선데이는 이 사실에 대해 집중 조사-취재했다.
김유송의 증언 요지
“북한에 우리가 심어놓은 우리 측 간첩 300명 정도가 1998년 10월에 일거에 처형됐으며,
이들 중에는 3성장군인 임태영과 2성장군인 우명훈이 있다.
이들이 바로 박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북에 심어놓은 간첩이며
이들은 처형되기 전까지 만 30년 동안 들키지 않고 출세를 잘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남한에서 4,000여명의 대북전문가를 대량학살한 후부터
갑자기 체포되어 9월말부터 조사를 받고 10월에 모두 처형됐다.
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명단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유송은 “총참모부 국제연합무역회사 함경북도 무역관리 소장”으로
일본-중국-러시아와 무역을 하여 높은 사람들은 물론
그 지역을 관할하는 보위부(우리의 국정원) 간부들에게
달러와 신기한 고급 상품들을 선물로 주면서 넓은 인맥을 유지해왔었다.
98년 9월 말, 김유송은 평양에 있는 여러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시 인민무력부사택단지(아파트단지)를 찾았다.
그때 김유송은 그와 절친하게 지낸
인민무력부 검찰부 5처 처장(수사처 대좌)으로부터 음산한 말을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몇 사람씩 없어진다.
지금은 초비상사태다.”
김유송은 총참모부 보위사령부 책임지도원 모 상좌로부터
대강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김유송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안피득 상장 : 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김유송과 매우 가까운 사람)
임태경 상장 : 인민무력부 경보병지도총국장(사령관): 김유송과 가까운 사람
우명훈 중장(2성) : 인민군 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게릴라훈련국장)
이상일 소장(1성) : 64해상저격여단장(우명훈의 처남)
성명불상의 소장: 금강산발전소 건설여단 참모장
성명불상의 소장: 2군단 정치부장
이런 인물들을 포함해
장성급 100여 명,
대령급 50명,
사회안전부ㆍ당의 고위급 150여 명이
체포돼 간첩 혐의로 거의 다 처형 됐다고 했다.
300명 중 150명 정도는 총참모부 보위부에서 조사했고,
나머지 150명은 국가보위부에서 조사했다고도 했다.
임태영과 우명훈은 총참모부 보위부의 관할이었다.
이 두 사람은 김유송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가끔 달러도 주고 가족도 돌봐 주었기에 이들 장군들은 김유송을 매우 좋아했다.
그 조사관은 김유송에게 아래와 같은 취지의 말을 해주었다.
“1968년 1.21 청와대 침투사건에 투입된 조원은 33명이다.
‘방차대’(후미담당) 요원이 3명이었는데 이들은 아파트 옥상에 있다 다 잡혔다.
조장과 (조장의 이름은 들었으나 김유송이 잊어버렸음)
림태영과 우명훈이 집힌 것이다.
남조선 보안사가 이들 3명에 귀순하기를 강요했다.
가장 먼저 조장에게 귀순하기를 강요했더니
그 조장은 죽어도 못한다고 버티었다.
그래서 날이 시퍼런 작두를 가져와
이 작두에 목이 잘려 죽겠느냐고 했더니 스스로 작두에 목을 얹었다.
그의 목과 몸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작두의 양쪽에서 한동안 뛰었다.
이를 본 두 사람은 기가 질려 얼굴이 노래졌다.
그리고 귀순 및 충성서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남조선 정보기관은
최고의 자리로 출세해서 남조선에 충성하라며 이들을 북으로 보냈다.
(임태영과 우명훈) 처형은 했지만 사실 안됐더라,
작두에 목이 잘려 피가 솟구치고 머리와 몸이 펄펄 튀는 것을 보고
누군들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있갔는가?”
김유송과 보위부 상좌와의 대화는 이러했다.
김유송 : “30년 동안 모르던 사실을 어찌 지금에서야 알았으며
어떻게 300명이나 되는 간부들이 단번에 집단으로 숙청될 수 있는가?”
보위부 상좌 :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령이 됐는데 그가 못할 게 뭐 있는가?”
김유송은 이와 같은 말을 인민군 보위사령부(국정원) 9군단 담당 책임지도원인
김선우 상좌와 나전-선봉 담당 책임지도원 선우영호 상좌
그리고 보위부 2국 고려호텔책임지도원 김상욱 등으로터 계속 들었다.
김유송 자신도 이들과 가까이 지냈고,
이들에게 달러를 제공한 혐의(정부전복음모조직에 정치자금 조달죄)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지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해 2001년 한국에 왔다.
김유송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과연 이 경천동지할 증언이 사실인가?
중앙선데이는 김유송의 신뢰성에 대해 추적해 들어갔다.
300명 집단처형의 핵심을 풀 열쇠는
작두에 놀라 전향한 임태영과 우명훈이다.
과연 그들의 이름은 북한에 존재하는가?
124군 부대에 근무했던 사람은 김유송말고도 또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박모씨다.
그가 어디에서 탈북했고,
언제 왔는지는 신변보호 문제상 밝힐 수 없지만
중앙선데이는 2012년 2월 3일,
박모씨를 김유송과 함께 만났다.
박모씨는 임태영과 우명훈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이 1.21 청와대침투사건에 투입됐다가
영웅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정신교육을 받았던 사실,
1.21사건에 투입된 사람은 31명이 아니라 33명이라는 사실도 증언했다.
청와대 침투조가 31명이 아니라 33명이었다는 것은
김유송이 늘 주장해 왔던 이야기이며
중앙선데이는 이번의 제2차 추적에 31명이냐, 33명이냐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
김유송은 중앙선데이 기자들과 함께 파주에 묻혀 있는 그들의 묘지를 찾았다.
모두 28명에 해당하는 묘가 있었다.
상위2명, 중위 2명, 그리고 나머지는 다 소위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팀장으로 보도된 인민군 김종웅 대위의 묘가 없다.
김종웅 팀장은 분명 잡혔고,
그가 팀장인 것이 다 확인되었는데 그의 묘가 여기 파주에 없는 것이다.
그의 묘는 다른 곳에 있든지 그냥 유실시켰는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확인된 사살자는 29명이 된다.
여기에 김신조를 합치면 30명이고,
임태영과 우명훈을 합치면 32명이 된다.
중앙선데이는 당시 68년 당시 김신조 조사 책임자였던 백동림씨
(당시 대위, 10·26사태 때는 보안사 1국장으로 사건을 조사했다)로부터
침투조가 33명이었음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청와대 침투조가 33명이었다는 것까지 증명이 된 셈이다.
해명되지 않는 숫자는 33명 중 오직 1명뿐이다.
작두 이야기
당시의 보안사가 작두로 방차대 3인조 조장의 머리를 과연 잘랐는가?
중앙선데이는 국립기록원에 가서 사진을 찾아냈다.
그리고 머리와 목 잘린 몸뚱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다른 시체들은 모두 총을 맞고 사살된 시체인데
오직 하나의 시체만 목이 잘린 것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작두에 목을 잘랐다고 하면
상부터 찡그리고 그럴 수 있겠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실제 목과 몸이 두 동강 난 사진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1968년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목 잘린 시체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을 나타내지 않았다.
여기까지를 다시 정리해 보자.
1) 실제로 목이 잘린 시체는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2) 김유송이 와서 목이 잘린 시체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목이 어떻게 해서 잘렸는지에 대한 북한 최고 보위부 상좌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남한사회에 전했다.
3) 청왜대 침투조로 왔다가 사경을 극복하고 북으로 돌아간
임태영과 우명훈은 영웅으로 칭송되어 그 무용담이 북한 특수군
장병들에 교육되었다는 사실은 김유송(124군부대 8대대)도 증언했고,
김유송의 후배로 124군부대 7대대에 있다가
86년 소좌로 예편하여 4-5년 전에 탈북한 박모씨도 중앙선데이에 증언했다.
4) 하지만 박모씨는 86년에 소좌(소령)으로 예편하여 사회로 나갔기 때문에
임태영과 우명훈이 처형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1) 98년에 공화국영웅 임태영과 우명훈이 처형된 사실,
2) 그들이 처형되었을 때 남한이 키운 300명의 우리간첩들이 처형된 사실,
3) 그리고 임태영과 우명훈이 작두를 피해 전향을 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오직 김유송만이 알고 있는 정보다.
그러면 김유송이 증언한 위 세 개의 내용은 아직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할 것인가?
김유송의 애국적 증언, 80%는 증명됐고 20%가 남았다.
김유송은 본명을 밝히기로 작정했다.
자기 시간,
자기 돈을 소비하면서 500만 야전군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중앙선데이의 취재 조사에 적극 응했다.
그는 오랜 동안 정보사에 협력했다.
2006년 10월 9일 북이 핵실험을 했다.
그런데 김유송은 그 후 20일이 채 못 되는 시점에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 장소에서
4km 떨어진 지점의 물과 흙을 채취해 정보사 박 중령에게 제공했다.
북극성 간첩사건에서 흑금성은 1명의 대령과 2명의 중령이 북에 갔다가 왔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북에 갔다 온 장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풍계리 핵실험장소 부근의
물과 흙을 가져온 공로가 있어 처벌하지 않았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그 흙을 김유송이 가져다 준 것이다.
필자는 김유송의 증언을 100% 믿는다. 왜?
북한에 2개 사단(서부지구 2집단군 예하에 2004년 제22 및 제23사단)이
추가로 창설됐다는 사실도 그가 증명해 주었고,
실제로 그는 그의 조직을 가동하여 GPS(위치추적장비)를 휴대케 하고
북으로 보내 이 사실을 증명해주었다한다.
그리고 휴전선 전체에 800개의 벙커를 지은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중 240개는 진짜이고 나머지는 우리를 속이기 위한 위장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 용도와 구조에 대해서도 그 공사를 진행한 현장 장교를 중국에 불러
정보사에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그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정보사도 인정할 것이다.
김유송은 북한 최고의 정보기관인 보위부간부는 물론
군의 장성들을 두루 사귀고 지내왔다.
이런 사귐을 바탕으로 그는 김정일이 죽자 가장 먼저 앞으로 북한은
장성택이 이끌어 갈 것이며 장성택은 중국식 개방을 할 사람이라고 예언했다.
아직은 그의 예언이 잘 적중 돼가고 있다,
그는 살아있는 김신조에 의해 우리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31명의 침투조”를 부정하고 33명임을 자신 있게 증언했고,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김유송은 한 사람의 목이 작두에 잘렸다고 했다.
중앙선데이는 이것이 사실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44년이 지난 지금 국립기록원에 가서 목 잘린 시체를 확인했다.
김유송은 남한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임태영과 우명훈의 존재를 우리에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존재는 전 124군 부대 7대대에 있었던
박모씨로부터2012,2,3.에 확인했다.
김유송은 김대중이 김일성이 심은 고정간첩이라증언했다.
그런데 김유송과 같은 증언을 한 사람은
통전부 전간부 장혜영(김대중은 김일성수령의 전사)을 비롯해
탈북자들이 쓴 5.18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도 6명 더 있다.
대통령은1998년의 정보기관을 조사하라, 특명내려야!
1998년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북전문가4,000명을 한 번에 숙청했고,
김정일에 핵자금을 대주면서도 “북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도없고 능력도 없다.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북의 핵개발과 전력증강을 적극 도왔다,
이런 자라면 능히 북에 우리가 키운 간첩자료를 모두 넘겨주고도 남을 인간이다.
김대중은 김정일이 통전부에 내린 지령대로 남조선의 정보능력과
정보망을 쑥대밭으로 만든 역적이다.
그리고 필자는 김유송의 증언을 100% 사실로 믿는다.
국정원을 포함한 1998년의 주요 정보기관들은 1998년에
우리가 키우는 간첩들의 명단을 북으로 보냈는지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이를 위해 특별명령을 내려야 한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385/728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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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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