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오현경 “기운 빠져 말도 안 나왔는데 연습실 오니 마음이 조금 편해요”

문학수 선임기자

아내 윤소정 보내고…‘봄날’로 무대 서

원로배우 오현경씨는 지난달 아내(배우 윤소정)와 사별한 후 몸과 마음을 추슬러 연극 <봄날>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원로배우 오현경씨는 지난달 아내(배우 윤소정)와 사별한 후 몸과 마음을 추슬러 연극 <봄날>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집에서 혼자 실컷 울었어. 지금도 정말 황당해. 나이로 보면 나보다 10년은 더 살아야 할 사람이잖아. 내가 마누라를 더 좋아했거든. 솔직히 그 사람은 잔정이 별로 없었어. 알지? 내가 그 사람을 더 좋아했다니까.”

담담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현역 최고령 배우 오현경(81). 최근 아내를 하늘로 떠나보낸 그가 무대로 돌아온다. 지난달 20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고 윤소정 배우의 영결식이 치러졌으니, 이제 겨우 스무날 남짓 지났다. 원로배우 오현경이 “내 인생의 연극”으로 손꼽는 <봄날>(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의 ‘아버지’ 역으로 돌아온다.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는 ‘늘푸른연극제’의 일환으로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아내의 영결식에서 다리가 풀려 걷지도 못하던 원로배우에게 인터뷰 요청은 예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하며 선선히 수락한 그의 모습은 실제로 대면하니 아직 수척했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어.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병원에 입원했더니 의사가 ‘백혈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더라고. 뭐에 감염됐는지 원인균도 못 찾았어. 사인이 ‘희귀병 패혈증’이래. 참 황당하게 떠났어.”

특히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중환자실에 입원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내 등에 머리를 툭 떨구더니 ‘여보, 내 몸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거 같아’ 그러더라고. 그게 마지막 대화였어. 날이 밝는 대로 빨리 병원에 가야겠구나 생각했지. 그러다가 아들이 다리를 주물러주니까 코를 골면서 자길래, 이제 좀 괜찮아졌나 했지. 나도 수면제 반알 먹고 새벽 2시에 간신히 잠들었는데, 6시40분에 갑자기 눈이 퍼뜩 떠졌어. 그런데 이상해. 집에 아무도 없는 거야. 식탁 위에 아들이 메모를 남겼는데, ‘엄마 모시고 응급실 갑니다’ 그렇게 쓰여 있잖아.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대화가 불가능했어. ‘여보 나 누군 줄 알아?’ 그랬더니, 간신히 ‘으, 응’ 하더라고. 유언도 못 남겼어.”

그는 아내를 그렇게 떠나 보내고 “기운이 빠져 일주일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잡혀 있는 공연 스케줄을 나 때문에 망칠 순 없었다”면서 “연습실에 나오니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고 했다. 다행히 <봄날>은 이번이 다섯번째 공연이다. 1984년 연출가 권오일(2008년 작고)에 의해 초연됐던 이 연극은 2009년 연출가 이성열이 다시 무대화하면서 모두 세차례 공연됐다. 60여년을 배우로 살아온 사실주의 연기의 대가 오현경은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 이 연극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 ‘권위적이고 욕심 많은 아버지’는 이미 그의 몸에 내장된 캐릭터다. 그는 “이 연극은 대사가 140마디여서 힘이 좀 덜 들어”라면서 “이제 늙었으니까 마지막 연극처럼 하는 거야”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배우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연극을 하나 꼽으라면 당연히 <봄날>이지. <휘가로의 결혼> <허생전> <맹진사댁 경사> <동천홍> 같은 연극들도 기억에 남아. 하지만 <봄날>은 더 특별해. 연출을 맡은 (이)성열이가 아주 잘 만들었어. 초연 때에 비해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됐어.”

이성열이 이끄는 극단 ‘백수광부’의 대표작 <봄날>은 탐욕스러운 아버지와 일곱 아들의 이야기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나른한 봄날, 후미진 산마을에서 늙은 홀아비와 일곱 아들이 밭을 일구며 산다. 아버지는 인색한 성품의 절대 권력자다. 장남은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자상하게 보살핀다. 막내는 병약해 천식을 앓는다. 아들들은 노상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아버지에게 혹사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불이 나고 절간의 승려들이 어린 소녀를 그 집에 맡긴 채 떠나버리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오현경은 이 연극으로 2009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받았다. 원로평론가 구히서는 <봄날>의 오현경에 대해 “리듬이 있는 흐름으로 가만가만 다가와서 부드럽게, 그러나 강렬하게 객석에 육박해오는 큼직한 에너지를 만들어냈던 명연기”라고 극찬했다. 극작가 겸 평론가 장성희는 “명료하고 단아한 화술로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경지를 보여줬다”면서 “과한 욕망이 부리는 주책마저도 노추가 아닌 천진성과 해학적인 능청으로 살려냈다”고 호평했다. 연출가 이성열은 배우 오현경에 대해 “나의 작은 거인”이라고 말했다.

“작고 깡말랐지만 무대 위에 서면 그 누구보다 커 보인다. 신기하다. 유연하고 분명한 그의 발성은 우리의 귀를 홀린다. 선생은 우리가 잊고 사는 ‘빈자리의 기억’이다. 그가 해주는 북촌의 민어장수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는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제 희미해진 옛것의 아름다움과 향취를 느낀다. 또 선생은 ‘꺼지지 않는 라디오’다. 엄청난 수다쟁이다. 하지만 그의 입담은 맛있는 음식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만약 그가 입을 다문다면 밥을 굶은 아이처럼 우리 모두 허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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