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서울 노원구의 문화재
dlqh**** 조회수 2,535 작성일2020.06.12
노원구의 문화재좀여
소개하고싶은 까닭도요 그리구 소개하고싶은 내용을 잘 드러낼수있는 설명방법도요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정한 까닭도요 빨리 해주세요 오늘까지요 죄송해요 너무 까다롭죠ㅠㅠ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서울특별시 노원구의 문화재)

1.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종 목 보물 제1524호

지 정 일 2007.09.18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202 (하계동 산1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이윤탁 선생의 묘 앞에 서 있는 비로, 묘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만을 세워둔 간결한 구조로, 비몸의 윗변 양쪽을 비스듬하게 다듬었다. 서쪽면에는 한글 30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이 글을 짓고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 뒷면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중종 31년(1536)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9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글씨는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 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영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이 ‘한글영비’는 국어생활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문 내용은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이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것은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2.서울 태릉과 강릉

종 목 사적 제201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727 (공릉동 313-19)

시 대 조선시대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의 두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본관은 파평으로 중종의 원부인인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1517년에 17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중종이 있는 정릉에 묻히려 하였으나 장마철 침수로 인하여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무덤은 십이지신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12면으로 된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무덤 앞에는 상석·망주석 등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제작되었다.

무덤 아래에는 한국 전쟁시 훼손되었다가 1995년 다시 지은 정자각이 있다. 사람모양의 돌조각상(석인)은 4등신으로 입체감이 표현되지 않았는데, 당시 석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무덤이다. 왕비가 죽은 후 왕의 옆에 무덤을 쓴 쌍릉의 형태를 하고있다. 태릉과 같은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며 돌로된 등인 장명등은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보여준다.

3.서울 초안산 분묘군

종 목 사적 제440호

지 정 일 2002.03.09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산8-3 외, 도봉구 창동 산202-1 외

시 대 조선시대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은 양반분묘에서 서민 민묘까지 다양한 계층의 무덤 1,000기 이상과 상석, 문인석, 비석, 동자상 등 수백여 기의 석물들이 있는 곳이다.

15세기 이래 서민, 중인, 내관, 상궁,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각종 문관석과 동자상 등이 시기별로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내관의 분묘가 많은데 그 중에는 17세기 내관이었던 승극철 부부의 묘와 비석이 있어 내관의 생활사 연구에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여러 계층의 분묘가 집중적으로 섞여 있는 곳은 흔치 않은 예로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은 특정계층의 분묘를 비롯해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무덤을 조영하여 묘제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남아 있는 문인석, 동자상 등 석물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여 석물변천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4. 아차산 일대 보루군

종 목 사적 제455호

지 정 일 2004.10.27

소 재 지 서울특별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및 경기도 구리시 일대

시 대 삼국시대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며,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유적이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등 17여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청된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존재하는 10여개의 보루는 현재 남한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유적으로서 발굴 등을 통해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가 규명되고 있으며,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여 그동안 연구활동이 부진했던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고구려의 남하과정, 한강유역에서의 대치와 관리방식,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과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5.각궁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35호

지 정 일 1976.12.31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574 (공릉동 산230-30) 육군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고종(재위 1863∼1907)이 사용하던 활이라고 전하며, 당시의 활 만드는 장인 장문환이 제작하였다고 한다.활의 전체길이는 124㎝이고, 오금너비는 3㎝이다.한국의 전통적인 각궁은 명성이 높고 독특한 자료로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쇠뿔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한국의 대나무, 물소뿔, 쇠심, 구지뽕나무, 참나무, 화피의 6가지 재료로 구성된다.

이 각궁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화피 위에 채색을 하였으며, 시위고리를 거는 새코머리는 가죽으로 감싸서 3가지 색의 천으로 발랐고 그 밑에는 아자 무늬를 새긴 검정색 종이로 감쌌다.특히 이 활의 검은색 양 단에 각각 ‘호미’ 및 ‘주연’이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특색을 이루고 있는데, ‘주연’이 고종황제의 호이므로 고종의 활이라는 내력을 보여주고 있다.우리 나라는 활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각궁이 언제부터 널리 보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함흥 선원전에 태조 이성계의 유물로서 이 각궁이 보관되어 있었고, 또 경국대전에 각궁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각궁의 꾸밈새가 정형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삼군부 청헌당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1973.06.07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574 (공릉동 산230-30) 육군사관학교

시 대 조선시대

삼군부는 조선초 군령과 군무를 총괄하던 군사 기구로 의흥삼군부의 약칭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제도의 변화를 겪다가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직했으나, 고종 17년(1880)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에 소속되었다.

청헌당은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삼군부 청사로서 고종 5년(1868)에 지은 것이다. 고종 17년(1880)에 통리기무아문 청사로, 고종 31년(1894) 이후로는 시위대 청사로, 순종 4년(1910)부터 1926년까지는 조선 보병대 사령부로 쓰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7년 현 정부종합청사를 지을 때 이곳으로 옮겨온 후 1977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기 위하여 기둥 윗부분에 만든 공포는 새날개 모양으로 하였다. 이를 익공양식이라 하는데, 조선 후기 서울 관아건물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청헌당’이라고 쓴 현판은 조선 후기 무신 신관호(1810∼1884:신헌으로 개명)가 쓴 것이라고 한다.

7.연령군 이훤 신도비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호

지 정 일 1980.06.11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574 (공릉동 1-1) 육군사관학교내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우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은 숙종의 여섯번째 아들인 연령군이다. 연령군은 숙종 25년(1399)에 태어났고 이름이 명, 자는 문숙이며,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이었으나 이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다. 숙종이 병으로 고생할 때 연령군이 극진히 간호를 하다가 21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종의 명으로 특별히 비를 세웠다.

비의 형태는 큼직한 거북받침에 검은 대리석의 비몸을 세우고 지붕형태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숙종 때의 우의정 이이명이 지었고, 글씨는 해서체로 조태구가 썼으며, 비의 제목은 민진원이 횡서체로 썼다.

숙종 46년(1720)에 세운 비로, 원래의 자리는 동작구의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으나, 1967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8.정간공 이명 묘역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5호

지 정 일 1983.11.11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산767-2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명 선생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명은 조선 명조 때 우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성품이 단정하며 직무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주장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한다. 일생을 청백리로 일관하다 생을 마쳤으며, 죽은 후 ‘정간’이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선조 7년(1574)에 세운 비로,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김귀영이 비문을 짓고, 병조판서 신충겸이 글씨를 썼다.

9.충숙이공 영정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88.04.23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 57 (하계동 산16-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충숙공 이상길(1556∼1637)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상길 선생은 30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종묘를 지키다 순절하였으며, 효종 8년(1657)에 충숙공에 봉해졌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초상화는 실물과 같은 규모인 가로 93㎝, 세로 186.5㎝의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사모를 쓰고 엷은 홍색의 단령을 입고 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매자락 안에 넣었다. 집무복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겉옷의 안자락을 표현하고,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 표현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 대부분의 초상화가 원작을 옮겨 그린 이모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초상화로서 가장 오래된 실제본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10.충숙공 이상길 묘역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0호

지 정 일 1988.04.23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144 (하계동 산 16-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상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상길 선생은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인조 때에는 공조판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가 되어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쳤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충숙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조선 중기의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비문은 성균관제주였던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11.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지 정 일 2000.07.15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산3

시 대 조선시대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천보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학도암이라는 단아한 암자에 모셔져 있는 마애불로, 거대한 바위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높이 13.4m의 관음보살이다.

바위 측면에 새겨진 기록에는 고종 7년(1870) 명성황후가 불심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으며, 고종 15년(1878) 학도암을 고치면서 마애불상을 보강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당한 체구에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다. 관의 정면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얇은 옷은 보살이 앉아 있는 화려한 연꽃무늬 대좌 위에 부드럽게 펼쳐져 있으며, 왼손 손목에는 두꺼운 팔찌을 끼고 있어서 보살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남겨진 기록과 함께 19세기 조각기법으로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12.도선사 석 삼존불상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1호

지 정 일 2009.03.05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덕릉로 145길 101 (상계동 산154) 대한불교 조계종 도선사

시 대 고려말~조선초기

현재 도선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돌로 만든 삼존불좌상으로 삼존불 가운데 본존상은 좌우의 두 상에 비해 약간 큰 편이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원래는 얼굴이 동그랗고 온화한 모습의 불안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마멸이 심하여 이목구비를 잘 알아볼 수 없다. 목과 백호가 새겨진 부분도 손상되어 후보된 상태이다. 대의는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식으로 입었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올려 수인을 결하고 있다.

향우측의 협시상은 머리 위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화염보주같은 지물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넓은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허리가 짧고 무릎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본존상보다 왜소한 느낌을 주며 뒷면은 조각이 되지 않아 밋밋하다.

향좌측의 협시상은 머리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만들어 붙여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은 통견식으로 법의를 입은 듯하고 양어깨에는 옷주름이 새겨져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벗고 옷주름이 넓은 간격으로 사선으로 새겨져 있고, 두 손은 마주 대어 수인을 결하고 있다. 다리 위에는 옷주름이 사선으로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체구의 비례면에서 균형감이 다소 떨어지고 훼손된 측면이 있지만, 세 상 모두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된 자세를 보여줘 고려시대 석불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불상은 목불이나 금동불에 비해 석불이 많이 전하지 않는 고려말~조선초기의 석조삼존상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13.기원사 독성도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2호

지 정 일 2009.03.05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광운로17길 48-47 (월계동 392-106) 대한불교 조계종 기원사

시 대 조선시대

청록산수 화법으로 그려진 소나무 아래 앉아있는 빈두로존자를 그린 독성도이다. 빈두로존자는 16나한을 대표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석가모니불의 정법을 수호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맡은 나한으로서 독성이라고도 불린다. 그 모습은 흔히 눈썹이 길게 늘어진 노인으로 표현된다.

화면의 중앙에는 흰 눈썹 가닥이 길게 아래로 늘어진 빈두로존자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향한 채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오른손을 무릎에 놓은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 뒤에는 광배가 표현되었고 몸에 입은 붉은 가사는 왼쪽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뼈가 드러나는 앙상한 가슴이 보이며 그 아래로 녹색 법의를 받쳐 입었다. 가사의 끝단에는 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적색·녹색의 복식과 더불어 매우 화려하다. 존자의 오른편에는 고목둥치가 있고 그 위에 세발향로가 올려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에는 흰 구름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태양이 조금 드러나 있다.

화면의 우측 하단의 화기는 푸른 안료로 덧칠되어 전체를 판독하기 어렵지만 “공양”, “원” 등의 몇 자는 알아볼 수 있다.

이 불화는 전체적으로 화기가 훼손되어 조성시기 및 화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적색과 녹색을 주조로 백색과 청색을 함께 사용하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색채감과 짜임새 있는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4.불암산성

종 목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2호

지 정 일 2010.12.23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덕릉로94길 128 (중계동 산101-1)

시 대 삼국시대

불암산성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산101-1번지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산97번지, 산104번지에 접해 있다. 성이 위치한 곳은 불암산 주봉(507m)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상의 제 2봉(420.3m)이며 정상부에서는 중랑구 일대가 잘 조망되지만 북쪽방향은 불암산으로 인하여 시야가 가려져 있다.

성은 평탄한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자연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평면 형태는 부등변의 5각형이나 원형에 가깝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236m, 성 내부 면적은 약 5321.8㎡이다. 성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졌지만 서벽과 동벽 일부 구간에서는 10단 이상이 잔존하여 비교적 양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아차산 보루군과는 축성기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벽석은 세로가 긴 편이고, 면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후 줄을 맞추어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으며, 뒷채움 돌은 길쭉한 돌을 길이 방향으로 놓아 면석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였다. 문 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등산로가 형성된 부분으로 생각된다. 정상부 북동쪽 아랫단에는 우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축 구조물이 있다. 성내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헬기장의 북동쪽에는 집수시설로 추정되는 직경 8m 정도의 원형 함몰부가 있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곳과 경사면 일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류와 삼국시대~통일신라 시기의 경질토기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산성은 서울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한강 유역 방어를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산성 축성 이전에도 청동기시대부터 주거유적이나 간단한 방어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월계동 각심재

종 목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1977.03.17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초안산로7길 20 (월계동 766)

시 대 일제강점기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개량한옥으로,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 박길용(1898∼1943)이 설계했다고 전한다. 원래는 경운동에 있던 것을 1994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 원래 건축주가 두 아들에게 한 채씩 주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하며, 민익두 가옥이 앞채이고 이 집이 뒤채에 해당한다.

네모반듯한 집터의 동쪽에 대문이 있고,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H자형의 건물이 있다. 중심축에 부엌·대청·건넌방·사랑방이 있으며, 부엌 앞쪽으로 안방이 있고 뒤쪽으로 뒷방이 있다.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어 동선을 연결하였다. 사랑방의 앞쪽에는 누마루를, 뒤쪽에는 현관마루를 마련하였다. 마당 남쪽 담장 밑에는 작은 화단을 가꾸어 놓았다.

현관과 화장실·목욕탕을 건물 내부에 설치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점, 유리창을 단 점 등은 이 시기 개량한옥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주택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2020.06.21.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