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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가 경주김씨인데 조상님주메 독립운동가 있을까요?
고양이 좋아 조회수 2,337 작성일2020.03.21
아빠가 경주김씨라저도 김씨인데 유명한독립운동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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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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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경주김씨인데 조상님주메 독립운동가 있을까요?

아빠가 경주김씨라저도 김씨인데 유명한독립운동가 알려주세요

답변 :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김세필

1473(성종 4)~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지비옹(知非翁). 아버지는 첨정(僉正) 훈(薰)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학(翯)의 딸이다. 18세에 성종이 직접 유생들을 시험할 때 장원에 뽑혀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04년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기용되었다. 1520년(중종 15) 경연(經筵)에서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죽인 중종의 잘못을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되었다. 조광조 등은 당우(唐虞)의 치세를 이루려고 노력했으며, 비록 과격했으나 잘 다스려 썼더라면 큰 성과를 거두었을 것인데, 살육함으로써 왕이 큰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했다. 경학에 밝아 왕에게 〈역학계몽 易學啓蒙〉·〈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을 강론하기도 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십청헌집〉 4권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월성위 김 한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 조선 제 21 대 영조대왕의 서 2 녀 화순옹주[和順翁主]의 夫君

경주 김씨 흥경의 아들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출생년은 1720년 [숙종 46]이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유보(幼輔). 아버지는 영의정 흥경(興慶)이며, 어머니는 황하영(黃夏英)의 딸입니다.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제용감제조를 지냈습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으며, 그 중에서도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애책문(哀冊文]·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고,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인보[印寶]를 전각하였습니다.

김홍욱

김홍욱(金弘郁, 1602년 ~ 1654년)은 조선의 문신이며 자는 문숙(文叔)이고 호는 학주(鶴洲)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1651년 홍충도 관찰사로 제수되었으며,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1655년 효종 즉위후 5년 되던 해에 김홍욱은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로 재직 중, 강빈옥사의 조작을 탄원하여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민회빈 강씨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이석철(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일가의 무죄가 입증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한 효종에 의해 김홍욱을 국문끝에 장살로 살해하였다.

김정희

1786(정조 10) 충남 예산~1856(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1809년(순조 9)에 생원이 되었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예문관검열을 거쳐, 1823년 규장각대교·충청우도암행어사와 의정부의 검상(檢詳)을 지냈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 만 9년 만에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학문체계의 형성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고증학(考證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이때 당시 연경 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명의 이학(理學)을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송(漢宋)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대 경학의 대사(大師)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한학 체계의 수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김정희는 영조·정조 시기 실학의 학풍을 바탕에 두고 청대 학풍의 정수를 혼융시켜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서예에서도 조선 후기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상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글씨 솜씨로 세인의 극찬을 받았고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었다. 연경에서 옹방강 등의 대가와 접촉하고 수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글씨에 대한 안목은 더욱 향상되었다. 국내의 서도에 대해 "구서(舊書)의 어떠한 것도 모르고 그 후에 자기류의 서법으로 널리 자랑하며 가(家)마다 진체(晉體)요, 호(戶)마다 왕희지(王羲之)라"하여 철저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원래 명(明)의 동기창(董基昌)의 서법을 따르고 있었는데, 연행(燕行) 후 농후하고 기골이 강한 옹방강의 서체를 본받게 되었다. 이후 옹방강이 숭상하는 송의 소식(蘇軾)과 미불(米)의 서체를 따르게 되었고, 훗날 해서(楷書)의 모범이 되었던 당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까지 익혔다. 더 올라가 한예(漢隷)의 서체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이를 숙달하는 데 심혈을 쏟았다. "흉중(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隷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낼 수 없다"고 하여 예서를 서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의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추사체의 독특함에 대해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서론 書論〉에서도 완원의 설을 받아들여, 〈서파변 書派辨〉을 통해 법첩(法帖)·묵·붓·종이 및 선인들의 서체와 금석비문에 대해

김동식(金東植)

한말의 의병장. 본적은 전라남도 순창.

서기 1907년 8월 28일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혁혁하게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고 1910년 12월 27일 장렬하게 순절한 민족영웅 김동식 장군은 조선왕조 철종 5년(1854년) 1월 14일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석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석정(石井)이며 자는 천식(千植)이요

이명은 수신(修臣)이고, 태사공후,고려말 충신 상촌 김자수공의 18대손이다.

상촌공 김자수의 집안에서는 많은 애국충절자를 배출하였으며,충과 효로 유명한 명문이다.

1907년 9월 진안에서 의거하여 고광순(高光洵) 의 의진과 연합하여 순창우체국을 습격, 군자금을 노획하고 방화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그해 10월 고광순 의진과 함께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으로 옮기고 의병 300명을 인솔하여 진주 일본군 수비대와 크게 접전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고광순 등 의진의 중진인사들이 크게 사상하자, 의진을 해산하는 한편, 다시 잔병을 이끌고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다. 그달 22일 의병 100여명을 인솔하고 심원암(深院庵) 아래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뒤에도 일본군수비대 10여개소를 습격하여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으며, 일진회 회원 등 부일배(附日輩)를 숙청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단구자 김적(金積:1564-1646)

자(字)는 선여(善餘), 호는 단구자(丹丘子), 1564년(명종19) 증좌승지 호윤(好允)과 반남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어머니 박씨부인의 주선으로 이계(李啓+山)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연안이씨 출신의 이계는 박씨부인의 외숙으로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후일 대문장가로 성장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아들이다. 이 과정에서 공은 외외종숙이며 동갑내기였던 월사와 숙식을 같이하며 학업에 열중했는데, 후일 월사가 공에게 출사를 종용하게 된 것도 혈연과 학연에 바탕한 세의와 관련이 깊다.

이후 성장하면서 시인?명필이며, 관료로 이름이 높았던 남창 김현성(金玄成)에게서 수학하여 사우관계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공은 과운이 따르지 않아 여러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다 1609년(광해군1) 4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했다. 이듬해인 1609년 안기도찰방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이이첨 등 대북정권이 대비를

유폐하면서 인심이 흉흉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향리인 서산으로 낙향했다.

경주김씨는 상촌공 이래로 서울, 광주 등 근기지역에 거주하며 사환에 종사해 왔고, 분묘 또한 광주, 시흥, 고양 등 경기일원에 분포하였다. 서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단구자공의 조부인 김연(金堧) 때였다. 무과 출신으로 서흥현감 시절에는 임꺽정(林巨正)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김연은 벼슬이 안주목사에 이르렀고, 중년 이후 서산 대교촌(大橋村)에 복거하여 경주김씨 일문의 세거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의 솔가 낙향도 이런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서산에 낙향한 공은 선비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오로지 자녀교육과 가정경영에 주력하는 한편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심신의 수양처로 활용하였다.

성품이 소탈했던 공은 사람을 대함에 귀천이나 존비를 따지지 않고 항상 정성을 다하였는데, 자제 중에 공의 그러한 태도가 지나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도리어 공경으로서 사람을 대할 것을 거듭 가르쳤다.

공은 집 아래 장천 가에 돌출한 절벽을 단구(丹邱)라 이름하고는 소요처로 삼았는데, 마침내 이 곳 단구의 계류와 암석의 빼어남에 매료되어 단구자(丹邱子)로 자호하였다. 공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때를 만나면 가족과 친척, 인근의 선비, 고을 노인들과 함께 단구에서 회합하여 주연을 베풀고 화합을 다지기를 연례 행사로 삼아 덕인장자(德人長者)로 칭송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사인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출사의 기회가 주어졌고, 심지어 월사가 편지까지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공은 “어찌 백수의 나이에 소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겠는가? 라고 하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공은 더욱 출입을 삼가하여 비록 고을원의 부름이 있어도 사양하였고, 관청을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1646년(인조 24) 정월 16일 감기에 걸려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83세였다. 후일 학주공(鶴洲公)의 귀현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1797년 서산 송곡사(松谷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산소는 서산시 대산면 묵수지에 있다. 묘전에 조익(趙翼)이 찬하고, 학주공이 쓴 묘갈(墓碣)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2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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