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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김완선 나이와 정주영 결혼 이혼 루머에대한 오해

김완선 나이와 정주영 이혼에대한 오해

그녀는 왜 루머에 휩싸였을까?


매혹적인 눈빛 하나로 90년대 가요계를 평정했던 가수 김완선, 파격적인 춤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톱가수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녀에게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루머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김완선 씨의 삶과 오해에 대해 준비했습니다.



김완선 리즈시절 사진


가수 김완선 프로필 "데뷔 초 한국의 마돈나였다"



김완선 나이 47세(1969년생) 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노래자랑에 나가며 춤과 노래에 재능이 있었던 김완선은 당시 엔터테인먼트사업(매니니먼트)을 하고 있던 이모 한백희 씨에 의해 가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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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터뷰에서 3년 넘게 사람도 만나지 않고 오직 노래, 춤 연습에만 열중했다고 하죠. (참고로 김완선 이모 한백희 씨는 가수 인순이를 키운 분이며 이때부터 김완선 어머니와 헤어지고 이모와 살게 되죠) 혹독한 연습생 끝에 어느정도 실력을 되자 인순이 백댄서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오늘밤'이란 노래로 17살의 나이로 데뷔를 하게 되죠.(나이를 20살로 속이고) 데뷔 초부터 강렬한 무대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김완선은 ‘리듬 속의 그 춤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을 히트시키며  10년 가까이 톱스타로 군림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여성 댄스 가수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한국의 마돈나로 불리며 김완선 책받침만 해도 엄청나게 팔렸다고 하죠. 여자 가수 중 유일하게 100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를 기록했다니(5집) 당시 김완선 인기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정말 은퇴하실 거에요? 예.....


김완선 돌연 은퇴 선언 "기획 은퇴였다"


그랬던 그녀가 1992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당시 김완선 씨는 가수인생의 전성기로 돈도 많이 벌었을텐데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지치고 한계를 느꼈었던


1. 김완선 가창력에 대한 한계와 연예계 생활에 지쳤다.



김완선하면 노래실력보다는 오직 '춤을 잘춘다'라는 이미지가 고착화 되어 있었습니다. 김완선 씨 스스로 이에 대해 가수로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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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그 사랑했던 춤마저 추기가 싫어졌다고 하니 정말 많이 속상했었을 것 같습니다.(실제로 무대에서 춤도 성의 없게 췄다고 합니다.)



이게 나의 한계인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6개월~1년간 가창력을 집중적(김완선 고음)으로 연습하여 앨범을 발매했지만 본인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디오 생방송 중에 울음이 터져 밖으로 나와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죠. (아이러니하게도 이 5집 앨범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게 됐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는 철저하게 이모 한백희 씨의 스타육성법에 의한 것 같은데 김완선 씨의 음색과는 다른 곡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곡과 가수의 음색이 맞지 않았지만 이모의 뜻을 수용했을 뿐이죠. (그래도 가수로서 가창력에 대한 이러한 열정은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하며 현재 김완선 씨는 자신의 음색에 만족한다 밝힌 바 있습니다.)



2. 김완선 은퇴는 아시아 진출을 위해서였다.(기획 은퇴)



안 들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김완선 은퇴 당시 나이 22~23세 였다고 합니다. 이모 한백희 씨는 김완선 데뷔 초부터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시아 진출을 목표로 하였죠. 이에 홍콩,대만 등에서 가수, 영화와 관련한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갚는다면...


여태 부모님에게 잘하지도 못하고...


왕가위 감독하고 연락도 됐을 만큼 진척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백희는 김완선이 단지 한국에서 방송을 중단하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에 뭔가 임팩트가 부족했다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은퇴라는 일종의 노이즈마케팅을 전략을 펼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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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김완선 씨는 이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모 한백희는 김완선 부모님에게 빚이 있었는데 은퇴를 한 후 계약금을 받으면 부모님에게 진 빚을 갚겠다는 설득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은퇴하고 돈도 못받았다고 하죠.)


 


거짓은퇴에 눈물흘리는 김완선


김완선 복귀 후 다시 한국에서 활동했지만...



그렇게 은퇴를 선언한 후 김완선은 대만과 홍콩에서 활동하게 됩니다.(그룹 클론이 대만 진출 1호 가수가 아니고 김완선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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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 가요계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죠. 그리고 1996년 한국으로 컴백 7집 '탤런트'라는 곡을 발표하며 사랑을 받았지만 전성기시절만큼은 아니였습니다.



이후 김완선은 자신이 직접 제작자로 나서 '오룡비무방' 이란 댄스 그룹을 만들었지만 잘 안됐죠. 그리고 1998년 이모 한백희 씨와 결별을 하였는데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김완선 이름으로 빚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소속사에서 음반 발매 약속을 어겨 4년 동안 TV에서 김완선 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4년 동안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 씨에 대한 소송(이모부 사업 빚),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행사 등을 뛰며 빚을 갚아보려 하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약 14억) 그 당시(지금도 그렇지만) 엄청난 돈이였기 때문입니다. 2002년 'S', 'Shall We Dance'와 리메이크 음반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에 결국 2003년 김완선 누드화보를 찍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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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역시 돈도 받지 못하고(5억 중 2억만 받음) 오히려 상의도 없이 그랬다며 소속사에게 소송을 당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김완선은 재판 끝에 소속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화보 관련 업체에는 승소를 거두게 됩니다.



김완선 정주영 루머 재벌 스폰설에 대한 오해



그리고 2005년 돌연 김완선 씨는 하와이 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92년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없이 해외로 갔고 장기가 체류했기 때문에 당시 김완선은 여러 루머에 시달리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김완선 임신', '김완선 출산' 등이였죠.(2005년 전부터 소문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이유는 음악이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던 것뿐이였습니다. (인터뷰에서도 황당하다며 대응할 가치도 없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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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스폰을 받았다면 가수로서의 사명감으로 가득찬 김완선 씨가 화보까지는 찍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길고 긴 세월 '돈'에 대한 압박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완선 백지수표설에 대해서도 이를 공개하며 거절했다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기까지 했죠. 김완선 남편, 김완선 열애 이혼에 대한에 대한 부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김완선 남자친구는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 됐든 김완선 씨는 그렇게 2011년에 다시 돌아와 최근 '불타는 청춘' 등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김완선 씨에 대해할 이야기가 더 많지만(이모 한백희에 대한 애증 그리고 후회, 김완선 남자관) 한 사람의 인생을 한 페이지에 담기에는 너무 길어져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정리하겠습니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늘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고 살아온 김완선, 이런 그녀이기에 아직까지도 여자 가수하면 생각나는 김완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시청자들과 소통하며 기억되는 '스타'가 되었으면 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