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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 통영시

욕지도

등산과 낚시, 바다관광과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섬

[ 欲知島 ]

요약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별처럼 흩어진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욕지면의 본섬으로 면적이 14.5km2에 해안선의 길이가 31km, 최고봉은 천왕봉이며 1,260세대, 2,080명이 거주한다. 삼천포 남해 통영 사람들 모두 욕지바다 때문에 먹고 산다. 이 지역 고기잡이가 두루 욕지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위치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면적 4.5km2
길이 해안선 31km
인구 2,080명(1,260가구, 2021년 기준)

욕지도 개요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별처럼 흩어진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욕지면의 본섬으로 면적이 14.5km2에 해안선의 길이가 31km, 최고봉은 천왕봉(392m)이며 1,260세대, 2,080명이 거주한다.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혜의 항구이자 다도해의 많은 섬으로 가는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통영을 대표하는 섬 욕지도는 통영 삼덕항에서 32km, 뱃길로 1시간쯤 걸린다. 통영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크고 작은 섬들이 즐비한 국도, 연화도, 노대도, 두미도 등과 함께 연화열도의 욕지면을 대표하는 섬을 만나게 된다. 연화열도의 맏형인 욕지도는 남쪽 끝 먼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고마운 섬이다. 욕지도 동항은 연화도, 우도, 노대도, 내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어 호수처럼 잔잔하다.

욕지도의 유래

최근에 이곳 욕지도 동항리에서 선사시대의 조개더미 유적들이 연이어 발굴된 이래, 한반도 남해안 도서지역 석기시대의 성립과 더불어 해양을 통한 고대문화의 전파경로 및 교류의 성격 규명을 위해 고고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옛날 호주판관(湖州判官)의 도읍터였다는 전래의 속설과 더불어 삼국시대를 비롯한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등이 그동안 간간이 출토되었으며, 그 후 고려말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로 황폐화되자 한때 일본 대마도의 어선들이 이곳 황금어장에 상주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직후, 이 고장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이곳 해역은 통제영에 속한 사량진(蛇梁鎭), 당포진(唐浦鎭), 삼천진(三千鎭) 등의 변방 수색 및 초계 정박처가 되었다. 매년 여름철이면 통제영 수군들이 사슴을 수렵하여 그 녹용을 진공품으로 조정에 올렸으며, 한말에는 통제영 소속이던 욕지도가 왕실 궁내부의 명례궁(明禮宮) 소속으로 잠시 직속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 4년(1378년) 8월 “배극렴이 욕지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1409년) 7월 15일 기록에도 욕지도란 지명이 등장함은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다. 욕지도에는 고려 말까지 주민들이 살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삼별초 연계와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에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육지로 대거 이주하였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입도가 재허락된 것은 1887년(고종 24년) 조선시대 말엽이다.

욕지도 마을 전경

욕지도 마을 전경

1889년 개척자들이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 수목이 울창하고 가시덤불과 온갖 약초가 뒤엉킨 골짜기마다 사슴들이 뛰어다녔다 하여 ‘녹도(鹿島)’라고도 불렀다 한다. 욕지항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섬이 거북이 모양으로 목욕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욕지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유배지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이곳에서 욕된 삶을 살다 갔다 해서 욕지라 일컬었다고도 한다. 다른 설은 ‘생(生)을 알고자(欲智) 한다’는 화엄경의 구절에서 유래한 불교지명이라는 등 여러 지명유래설이 있다.

1973년도에는 1,376가구 8,101명, 초등학교 1,560명, 중학교 456명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남해안의 유명한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욕지도를 관광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행정구역상 중세기 이래 고성현에 속하였고, 1900년 진남군 원삼면(遠三面)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09년 용남군(龍南郡) 원삼면, 1914년 통영군 원량면(遠梁面)으로 편입되었다가 1955년 통영군 욕지면에 속했다. 1995년에는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되면서 통영시 욕지면에 편입됐다.

어업전진기지의 섬

욕지도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입도 후 욕지도 주민들은 대체로 어업에 종사했다. 워낙 어장이 풍성했다. 욕지도는 특히 멸치의 주산지였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한 뒤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주요 어법이었다. 또 김경일과 김홍포 등이 들망을 발명해서 어업기술을 발전시켰다.

일본이 황금어장인 욕지도 바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욕지도는 일제가 식민지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어업 이민지 중 하나였다. 1895년경부터 도미우라라는 일인이 욕지도를 들락거리며 조업을 하는 동시에 욕지도의 수산물을 매입해 일본에 팔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반에는 아예 욕지도에 정착했다. 선박과 어구, 어업자금을 빌려주고 어민들의 것을 수탈해 갔다. 그가 정착한 곳이 욕지도에 고등어 파시가 열렸던 자부포(좌부랑께)였다.

일제 때는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풍어를 이루었고 남해안의 어업전진기지였다. 당시 욕지도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서울, 마산, 일본, 만주 등지로 수출됐다. 1915년경에는 조선인 2만864명, 일본인 2,127명 등 인구가 2만3,000명에 이를 정도로 섬이 번창했다. 지금 욕지도는 잡는 어업보다는 기르는 어업이 중심이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득하다. 또 욕지도에서는 처음으로 고등어 양식이 시작되어 성공했다. 서울 등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다.

욕지도와의 인연

필자가 욕지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도 봄이다. 서해안과 전북, 충남의 섬들을 다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등대호를 타고 온 곳이 통영 지방의 섬들이다. 욕지도는 여객선을 타고는 한번도 오지 않고 4번 정도 등대호를 타고 왔는데 여수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부담이 없다. 올 때마다 뱃머리 입구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면서 민박과 가게를 하시는 분이 자동차와 방과 식사를 제공해 주셔서 통영 여행에 큰 보탬이 되었다.

언론과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소매물도한산도에 비해 욕지도는 조금 덜 알려졌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여행지가 아니라 반드시 1박을 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만큼 보고 즐길 게 많다는 증거이다.

욕지도 고등어 가두리양식장

욕지도 고등어 가두리양식장

욕지도가 오늘날 경남 지방에서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섬이 비교적 큰데다가 여객선이 들어오는 욕지도의 동항은 복주머니 지형으로 천혜의 항구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려한 섬과 별처럼 흩어진 바다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왕봉(392m)을 등산하는 것은 최고의 섬 여행이 된다. 낚시꾼들에게는 유명한 출조지이고, 여름 한때만 몰려오는 피서지가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든지 찾아와도 편안하게 쉬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차도선에 싣고 온 차량을 몰고서 21km 길이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산행로를 따라서 등산을 하다 보면, 숨겨진 비경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보통 크기의 섬이기 때문에 첫 배로 들어왔다가 마지막 배로 나가도 여유가 있다. ‘욕지(欲知, 알고자 하거든)’라는 섬 이름처럼 남해상에 위치한 보통 크기의 이 섬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 경남의 대표적인 항구인 통영에서 32km, 1시간이란 적당한 거리에 있기에 부담이 덜하다.

욕지도 섬문화축제

욕지도 섬문화축제

욕지도 둘러보기

욕지도의 자랑, 천혜의 항구인 동항

욕지도의 관문은 배가 닿는 동항이다. 이곳이 섬의 중심지로, 관공서와 각종 가게들이 모여 있다. 한때 섬에서 가장 번화했다는 동항, 그래봐야 지금은 식당과 가게 몇 곳뿐이다. 항구를 낀 도로는 욕지일주로다. 일주로와 마을 사이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주유소 오른쪽으로 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천왕로’다. 이 마을 뒤에 천왕봉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욕지도 중심에 우뚝 선 천왕산은 그 높이가 해발 292m로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울창하고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사자바위가 있다.

‘천왕로’는 동남에서 북서로 이어지는 길로 일주로와 일부 겹친다. 이곳에서 산 쪽으로 계속 가면 ‘용천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길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2층 규모의 다세대 주택이 있다. 다세대주택을 지나면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욕지파출소’가 있다. 계속 올라가면 천왕길이 이어지고, 왼쪽으로 돌아서면 하천이 복개되는 지점에 특이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욕지도서관이다.

도서관 앞으로 보도블록을 깐 길이 있다. 바로 ‘중촌길’로 이곳이 중촌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불구불한 이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보건지소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면사무소가 위치해 있다. 그러니까 이 세 개의 공공건물을 중심으로 가운데에 공원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골목길은 ‘서촌윗길’로 바뀐다. 여기서 길은 남서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가게들이 제법 있다. 그것도 다양한 업종들이 있다. 치킨집과 소주방 그리고 호프집과 다방도 있다. 심지어 지업사도 있었다. 그런데 종이를 파는 곳이 아니라 실내외 인테리어 업체다. 이 길을 계속 가면 끝에 학교 가는 길이 있다. 양쪽으로 야자수 나무들이 줄을 잇고 있는 이 길을 통과하면 원량초등학교다. 병설 유치원까지 운영하고 있다.

천혜의 욕지항 전경

천혜의 욕지항 전경

운동장이 제법 넓다. 오른쪽(북쪽)으로 긴 2층짜리 교사가 있고 그 앞 스탠드에는 천막으로 돔을 만들어 비가 와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탠드 뒤 화단에는 오른쪽에 낙타, 왼쪽에는 기린 형상의 조형물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낙타가 인상적이다. 정면(서쪽)에는 세 채의 건물이 있는데 왼쪽에 있는 것이 유치원이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시소와 철봉 등 운동기구들이 몰려 있다. 초등학교 뒷산에 오르면 파란 바다와 붉은 등대 그리고 오밀조밀한 마을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나타난다.

학교에서 나와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중촌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우체국이 나타난다. 우체국은 다른 공공건물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다. 우체국 옆으로 슈퍼가 있고 이 길로 계속 가면 욕지중학교가 나온다.

해안으로 나오면 양 옆으로 쌈지공원이 있고, 해안도로답게 큰 횟집과 민박집이 많다. 식당은 동항의 선착장 앞에 몇 개 있다. 수족관마다 고기가 가득하다. 입구에 일군의 간판들이 모였다. 공공건물을 알리는 안내광고판이다. 여기서 약 2km를 가면 해군부대가 있다고 한다. 거리를 보면 아마도 산 아래에 위치해 있나 보다.

두 개의 쌈지공원 중 동쪽에 있는 쌈지공원에는 동상이 있는데 두 명의 어부를 그린 것이다. 여기서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향하면 호안이 꺾이는 지점 오른쪽에는 하천이 있다. 그러니까 이곳에는 두 개의 하천이 있는데 이 하천은 산 중턱에 있는 저수지와 연결된다. 욕지중학교 뒤편 밭 위로 댐이 있다. 양쪽으로 물이 빠지는데 이 두 개의 하천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펠리칸바위 절경

펠리칸바위 절경

여기서 조금 지나면 해림마트가 있고 그 옆으로 골목길이 있다. 이 골목길로 들어가면 구명당이라는 약국이 있다. 여기서 길은 좌우로 갈린다. 이 길은 ‘서촌아랫길’이다. 이 길로 해서 서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천주교’라고 쓰인 십자가가 보인다. 멀리서 보면 교회로 보이는데 천주교 즉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 성모상이 있다. 성당 문을 열고 안을 보면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구조로 돼 있다.

성당에서 나오면 다시 서촌윗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가면 댐이 나온다. 주변에는 밭이 많다. 논 없는 욕지도의 비탈밭은 몽땅 고구마 밭이다. 뱃길이 끊겨 곡식이 떨어지거나 춘궁기에 곳간이 바닥날 때 섬사람의 허기를 채워주던 고구마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했다는 욕지 처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욕지도는 맑은 공기에 날이 따뜻해 겨울에도 풀이 자라난다.

여기서 밭길 위로 올라서서 아래 마을을 바라본다. 마을 전체가 다 들어오지는 않지만 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국이다. 왼쪽 산등성이 뒤로 욕지도의 동쪽 끝 망대봉 산자락이 보인다. 산 아래 동그랗게 둘러싸인 항구와 거기 정박한 수많은 고깃배, 그리고 항구 주변의 산과 언덕자락을 하얗게 채색한 작은 집도 있다.

욕지도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이곳이 서촌마을로 ‘욕지금룡호’ 매표소다. 컨테이너박스로 된 터미널 뒤로 해양경찰이 있다. 터미널 앞은 주차장이 제법 넓다. 이 앞으로 낚시이야기와 미진낚시 등 낚시편의점들이 있다. 터미널 맞은편 그러니까 주차장에 위치한 화장실에 들어가면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이 앞으로 해안에는 짧은 방파제가 있고 그 옆으로는 물양장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만든 자연방파제다. 방파제 왼쪽으로 잔교가 있고, 물양장 오른쪽으로도 짧은 잔교가 있다.

해안도로인 욕지일주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서 항구를 바라보면 여느 포구에서나 볼 수 있는 정다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제법 많은 고깃배들도 보인다. 한때는 남해의 어업전진기지로 파시가 섰을 만큼 큰 어항이었다. 삼천포 남해 통영 사람들 모두 이 욕지바다 때문에 먹고 산다. 이 지역 고기잡이가 두루 욕지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욕지도 최고의 비경, 삼여도

삼여도는 욕지의 대표적인 비경이다. 용왕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900년 묵은 이무기가 변한 젊은 총각을 서로 사모했다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용왕은 노하여 세 딸을 변하게 했다. 힘이 장사인 이무기 총각은 자기 여인을 돌로 변하게 한 용왕이 미워 서산을 밀어내어 두 개의 섬으로 바다를 막아 버렸다. 훗날 세 여인이란 뜻으로 삼여라 이름 지어졌다 한다. 절벽 아래에 있는 삼여도는 아찔한 기암괴석으로 욕지도 최고의 비경이다. 송곳처럼 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두 개의 바위가 작은 바위 하나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삼여도 너머 먼 바다에는 펠리컨 형상의 바위와 갈도 좌사리도가 보인다.

삼여도는 용왕의 세 딸이 돌로 변했다는데 이곳은 1970년대 한국영화 ‘화려한 외출’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삼여도 전망대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이곳은 영화 <화려한 외출>의 주요 장면을 촬영한 곳입니다. 김용성의 원작소설을 김수용이 감독하고 윤정희, 이영화, 이대근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7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곳 욕지도는 70년대 산업화된 도시 공간에 대비되는 원초적인 생명력이 존재하는 낯선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가는 모더니즘적 영화 스타일로 한국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욕지 삼여도

욕지 삼여도 출처 : 지적넷 (http://jijuk.net/)

유동 마을과 새 에덴동산

삼여도를 지나 이어 닿는 곳은 유동마을. 이곳을 지나면 바다로 돌출한 지형 ‘양판구미’를 만난다. 양판구미는 뉴에덴동산이 있는 곳을 말한다. 유동마을에서 원시림을 가로질러 안쪽 깊숙이 10여 분을 들어가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새 에덴동산이 펼쳐진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는 길인데다 산길이다. 비라도 온다면 차량진입마저도 곤란할 정도이다.

유동마을 영화촬영장

유동마을 영화촬영장 출처 : 지적넷 (http://jijuk.net/)

주차장에서부터 차량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모녀가 살고 있다는 뉴에덴동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폐가들이 눈에 띈다. 두어 채 있는 집에 모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 주변에도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던 것 같다. 곳곳에 집터 흔적이 보인다. 예전에는 양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근에 무인등대인 유동등대가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특이한 조형물과 남자를 상징하는 것들이 일렬로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바닷가의 아득한 원시림 속에는 새 에덴동산이라는 기이한 건축물들이 여행객의 시선을 끌었다. 최숙자 선생이 15년 전, 위암 말기에 있던 딸 윤지영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와서 모녀가 함께 맨손으로 건설한 믿음의 동산이다. 돌가루 반죽으로 만든 조각은 ‘야곱의 우물’ ‘실로암’ ‘신의 제단’ ‘새벽별’ ‘신의 면류관’ 등 성경에 등장하는 17개 장면을 재현했다. ‘NEW EDEN’, ‘NEW JERUSALEM’ 등의 익숙한 문구가 눈에 띈다. 어쨌든 이곳에서 딸의 위암이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주위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자원봉사자들이 일을 돕고 있다.

작품 4호 새 에덴의 십자가(THE CROSS of NEW EDEN)

작품 4호 새 에덴의 십자가(THE CROSS of NEW EDEN) 출처 : 지적넷 (http://jijuk.net/)

뉴에덴동산에서 나와 유동마을로 다시 왔는데 유동은 그렇게 큰 동네는 아니다. 움푹 들어간 지대에 형성된 조그마한 마을이다. 유동마을 뒤로 392m 높이의 천황산을 오르다 보면 욕지도 주변의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동은 ‘2005년 아름다운 어촌 100선’에 선정되어 그 아름다움을 이미 10년 전에 인정받았다. 유동마을 들어오는 입구에 교회가 있고 집들이 띄엄띄엄 있다. 이곳 역시 고구마 밭이 참 많은 편이다. 양쪽으로 해변이 있다. 오른쪽에 자갈해변이 있고 왼쪽으로는 포구가 있다. 밤톨만 한 자갈이 깔려진 유동해수욕장이다.

작품 8호 새 에덴의 지혜자들

작품 8호 새 에덴의 지혜자들 출처 : 지적넷 (http://jijuk.net/)

이곳에도 예전에는 학교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폐교된 상태다. ‘원량초등학교 양유분교장’이다. 지금은 ‘파라다이스’라는 민박을 위한 펜션으로 변했다.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과 함께 입구 쪽에 책 읽는 소녀상이 이곳이 학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학교 아니 파라다이스 민박에서 나오면 해안길이 이어진다. 이 길 역시 ‘유동길’이다. 왼쪽은 방파제로 가는 길이다. 학교터 맞은편에는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된 건물로, 2층에는 어촌체험마을안내소가 있다. 이곳은 방파제가 북쪽으로 이어져 다른 방파제가 필요없는 형국이다. 해안도로가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을회관 옆 오른쪽으로 길이 있고, 그 옆으로는 ‘노을펜션’이 자리하고 있다. 유동마을 가는 길목 왼쪽 숲속으로는 특이한 건물이 한 채 있다. 정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와지붕에 문을 달고 사방이 막힌 구조의 건물이다.

작품7호 7층 별탑(MORNING STAR)

작품7호 7층 별탑(MORNING STAR) 출처 : 지적넷 (http://jijuk.net/)

욕지도의 앞바다 로또 전갱이(아지)잡이 어선

유동마을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가두리 양식장이다. 다른 지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하게 생긴 원형이다. 마치 올림픽기인 오륜기처럼 원형의 양어장이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 가두리 양식장은 뗏목 형태로 만들어 고기를 키우지만 여기는 좀 달라서 눈길을 끈다.

5t급 부광호 선장 김학명 씨는 정치망 어장에서 아지를 잡는다. 김 선장은 욕지도에서 3대째 어장을 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부이다. “평소에 잘 잡히지 않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수백 상자 잡으면 단번에 대박나는 거라예.” 이곳 어장의 특징은 고기들이 가는 길목을 막아서 정치망 속으로 몰아넣어 기르는 어로방식이다.

이곳의 주 어종은 전갱이인데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한다. 회로도 먹고, 얇게 포를 떠서 초밥 위에 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일명 메가리라고도 하는데 성격이 급해서 그물에서 올라오면 바로 죽는다. 그래서 전갱이를 잡은 즉시 냉동시켜서 일본으로 수출한다. 아지는 상자당 보통 10만원 정도의 값을 쳐준다. 제법 많이 잡히면 300 상자 정도 잡는다고 하니, 한번 출어하면 수천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그야말로 로또인 셈이다. 어장은 유동마을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원형 가두리 양식이다.

욕지항에서 고등어 내리기

욕지항에서 고등어 내리기

달콤한 고구마의 추억

찬바람이 불어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간식이 고구마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삶아 주던 고구마를 점심으로 때우던 때를 생각하면 그리 좋은 추억이 아니지만 지금은 웰빙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옛날부터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해 준 고마운 식량이다. 고구마만 방안에 가득 있으면 겨울에도 우리의 마음은 든든했다. 섬은 바람이 많이 불고 척박한 땅이 대부분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는 뿌리식물로 섬에서 가장 많이 심고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욕지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고구마를 키워서 먹고 살면서 육지에 내다 팔았다. 가난했던 시절 고구마가 식량의 일부였던 욕지도에는 ‘빼떼기’라는 토속음식이 있다. 생고구마를 잘게 썰어서 햇볕에 말린 것을 저장해두었다가 겨울에 죽을 끓여먹었다. 이제는 추억의 맛으로 변해 이 음식은 욕지도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 됐다.

욕지도는 산이 많다. 논은 거의 없지만 밭이 많다. 밭은 물이 잘 빠지는 황토밭으로 고구마 농사가 잘 된다. 그래서 이 고구마를 전국 최고의 품질로 개발하여 고구마 섬으로 변신하였다. 수확한 고구마는 세척부터 건조, 살균, 포장까지 모두 자동화 시설을 이용한다. 이 시설은 무엇보다 고령화로 인하여 줄어든 욕지도의 일손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섬들은 대부분 밭을 놀리지만 욕지도 주민들은 바다일 못지않게 밭에서 나오는 고구마 소득이 적지 않다.

이 자동화 시설은 통영시가 20여 억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2012년부터 추진하는 고구마 자원화 사업의 일환이다. 이미 비탈진 밭에는 농산물 운반용 모노레일을 42곳에 설치하여 욕지도 전체가 고구마 섬으로 변신하였다. 지금도 술의 주정을 위해 헐값에 수매되는 고구마가, 욕지도에서는 상상외로 비싼 작물로 자리매김을 했다. 고구마 수확이 끝난 밭에는 고구마 순들이 무더기로 나와서 염소나 소의 겨울 양식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욕지도 해풍을 맞고 자란 고구마는 한해 50억원 이상 팔려나가는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고 부르는데 욕지도 고메 막걸리는 달콤하고 맛이 아주 좋다. 욕지항 선창가에서는 고메 막걸리를 병에 담아 팔기도 한다. 또 하나 욕지도의 명물은 밀감이다. 사람들은 밀감이 제주도에서만 나는 줄 알지만 욕지도를 비롯하여 많은 섬들에 밀감나무를 키운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기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욕지도의 밀감 재배는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우장춘 박사가 토질을 조사한 후 1966년부터 시험재배하면서 시작됐다. 욕지도 밀감은 달콤새콤한 게 제주도의 야생의 맛 그대로다.

욕지도 장날

욕지도 동항에 있는 욕지 장터는 198평으로 1927년에 당시 욕지면장인 서태민 선생이 장을 유치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욕지장은 양력으로 끝수인 4일과 9일에 선다. 특별히 설날과 보름날, 추석 전날은 대목장이라 하여 정해진 날수와 관계없이 임시로 장이 선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장이 서지 못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장이 깨졌다’ 하면서 장이 깨지는 날에는 모두들 무척 아쉬워했다.

욕지장날이 되면 욕지도 주위에 있는 연화도, 노대도, 두미도, 갈도, 국도, 내초도, 우도 등에 사는 섬사람들이 조그만 배들을 욕지도 장터로 몰고 오면서부터 날이 밝는다. 수많은 섬사람들이 욕지도에 내려서 고기, 미역, 전복, 소라, 산나물 등 해산물과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한다. 1960-1970년대만 해도 커다란 돛단배들이 각종 물건을 싣고 닻을 내려 손님을 기다렸다. 전남 강진에서 옹기를 가득 실은 커다란 풍선도 왔다. 장작과 땔감, 지붕을 덮는 데 쓰는 영개(이엉)를 싣고 온 배들도 왔다. 손님들은 발판을 이용하여 풍선에 오르내리면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육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당시 시골에는 제대로 된 대중교통이 없었다. 그러나 육지에 붙어 있는 바닷가 마을이나 섬은 그런 대로 배들이 바다를 지나 장터에 드나들면서 수산물과 생필품 교역이 이루어졌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장터마다 생선과 바지락 김을 팔아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때 장터는 최고의 볼거리와 먹거리와 즐길거리가 있었다. 돈이 돌았고 인심은 넉넉하고 푸짐하였다.

욕지도의 장날 최고의 무대는 남사당패들의 공연이었다. 가설 무대를 만들어 놓고 장터에 모이라고 초립(草笠)에 쾌자(快子)를 걸친 조라치 몇 명이서 날나리를 불면서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남자들로 구성된 이 패들은 전국 각지를 떠돌아 다녔다. 이들에게는 보수도 없었고, 숙식만 제공받으면서 공연을 했다. 이들이 농촌이나 섬에 찾아와 공연을 했는데 당시 가난한 서민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 마당 두 마당을 넘어가는 농악과 소리와 춤을 보면서 만사를 잊고 웃으며 즐겼다. 특히 남성 중심의 유교 사회에서 여성들이 억압을 받고 살았던 시대에, 시집살이 때문에 고달팠던 여성들이 욕지 장터에 몰려들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남사당패 이후에는 각종 콩쿨대회가 열렸고, 가설무대에서 영화를 상영하여 욕지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장터는 20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옛날 욕지도 장터의 영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그 장터를 걷는다.

욕지도를 떠나면서

‘욕지(欲知: 알고자 하거든)’라는 섬 이름처럼 욕지를 알고자 하려면 반드시 욕지도를 방문한 다음에야 알아내고 이해해야 한다. 남해의 외딴 섬 욕지도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개통 때문이다. 이후 주 5일 근무제 확산으로 통영 주위의 남해안 섬들이 주말 관광객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특히 욕지도 관광객의 증가는 침체된 섬 경제에 효자 역할을 하면서 소매물도, 한산도, 비진도와 함께 경남 최고의 여행지로 변신하였다.

별처럼, 점처럼 흩어진 남해 섬들의 맏형이 욕지도이다. 유동의 삼여도 새에덴동산, 원형의 전갱이 가두리 양식장. 아름다운 해수욕장, 낚시천국인 욕지도는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와 감동을 선사한다. 욕지도는 관광의 섬이지만 주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것은 고구마 덕분이다. 보리를 베고 난 다음에 심는 고구마는 달고 분이 많아서 전국적으로 인기가 매우 높다.

2013년 10월, 욕지 개척 125년간의 역사를 기념하는 섬문화 축제가 열렸다. 욕지도를 개척한 그 분들의 정신을 기념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축제로, 이 행사를 통하여 섬 주민들의 친목과 더불어 관광객 유치를 기대하고 있다. 축제기간 중에는 욕지의 어제와 오늘 사진전과 걷기대회, 윷놀이, 대동줄다리기, 거리 퍼레이드, 해군의장대 시범, 해군 고속정 견학, 욕지장터, 전마선 노젓기 체험, 바다생물 체험, 시 낭송 공연, 4륜 오토바이일주 등이 열렸다. 또, 고구마 캐기와 구워먹기, 고구마 요리대회, 가두리 낚시체험 행사가 선보였다. 한국의 유인도를 돌아보면서 욕지도처럼 활기차고 희망이 넘치는 섬을 별로 보지 못할 정도이다.

욕지도 관광명소

욕지도 패총(欲知島貝塚, 경남기념물)

욕지면 동항리 일대 19필지의 조개무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3m 간격으로 격자망선을 설정하고 지름 2.5m 크기의 구덩이 17개를 파서 경작층, 흑색부식토층, 흑갈색점토층, 적갈색점토층으로 이루어진 4개의 층위를 확인하였다. 돌무지 시설은 모두 2기로 1기는 흑색부식토층에서 발견되었는데, 크기 10~20cm의 산돌과 냇돌을 길이 9m, 폭 5m의 범위로 깐 것으로 돌틈에 각종 토기와 석기, 동물뼈 등이 박혀 있었고 그 밑에서 2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다른 1기의 돌무지는 흑갈색점토층에서 발견되었으며 30~50cm 크기의 산돌로 지름 3m의 범위를 깐 것으로 단독무덤인 것으로 추정된다.

욕지면 메밀잣밤나무숲(천연기념물)

욕지도 마을 뒷산에 100그루 정도의 모밀잣밤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큰 나무는 높이 20m,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2m를 넘는다. 모밀잣밤나무의 껍질은 밋밋하고 잎은 끝이 뾰족하다. 숲이 울창하여 이곳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덕동해수욕장(德洞海水浴場)

욕지도 남서쪽 덕동마을에 위치하며 해변에는 자갈이 깔려 있다. 바닷물이 깨끗하고 해수욕장에 숲이 있으며 주변에 낚시터가 많아 사철 사람들이 찾는다.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야영이 가능하다. 덕동마을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욕지도 일주

욕지도의 둘레는 17km, 자동차로 둘러볼 수 있게 일주도로가 깨끗하게 정비돼 있다. 산 중턱을 에두르는 일주도로를 돌다보면, 욕지의 순박한 삶을 만난다. 일주도로는 섬의 중턱을 깎아 만들었다. 일주 드라이브는 욕지항 선착장에서 시작해 섬 중앙의 천황봉을 중심으로 둘레를 한 바퀴 빙 돌게 된다. 불곡마을, 유동, 덕동, 고래머리를 지난다. 선착장 왼편에서 시계 방향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첫 번째 고개에 올라선다. 남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무수한 세월 동안 깎여 내린 해안 단애가 아슬아슬하면서도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일주도로 북쪽엔 가두리 양식장이 가득하다.

욕지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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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도

욕지도 해안선은 31km에 달한다. 1988년 8월 촬영.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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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의 섬』 시리즈는 25년 동안의 현지답사와 섬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눈으로 보며 느낀 감상과 행정기관에서 갖고 있던 기존의 자료 등을 정리한 것으로, 각 지역별로 나누어 수필집 형태로 구성하였다. 총 13권으로 출간되었다. 자세히보기

  • 저자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드론 사진 포함).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하였고, 2020년 1월부터 목포과학대학교 해양레저사업단 섬해양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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