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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을미사변에서 일본의 의도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746 작성일2014.04.20
 을미사변에서 일본의 의도가 정확하게 무엇이 잇엇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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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당시 고종을 제치고 국정을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 러시아 행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성황후를 죽여서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던거죠.

201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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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둥이맘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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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은 미우라 일파가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에 앞서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한 일본 정치의 최고 원로(元老 : 겐로)[4][5]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각료였다.[6]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4]

한편 사건의 실행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과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였고,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살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다.[4]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준비[편집]

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하였다. 당근으로는 왕실을 회유 혹은 매수하여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경계심을 풀게 하려 했으며, 채찍은 바로 황후 시해였다.[7]

《한국통사》 등에 따르면,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바쳤다고 한다. 당시 내각에서 논의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을 지급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고종은 이노우에가 너무 진지하여 예방을 소홀히 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노우에의 행동은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계산된 연극이었다는 주장이 있다.[7]

《매천야록》과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일본은 고무라(小村室)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고무라의 딸과 명성황후가 궁중 연희(演戱)를 보고 있을 때 배우 가운데 종왜(從倭, 일본을 따르는 사람)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7]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1895년 9월 1일(음력 7월 15일) 공사로 부임한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군인 출신을 공사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익 군인 세력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염불 공사’였고, ‘수도승 같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7]

시해 계획과 준비[편집]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돌아간 때는 사건 20일 전이었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세부 계획이 세워진 때는 10월 3일(음력 8월 15일)이었고, 장소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이었다. 그때 미우라의 참모는 시바 시로(柴四郎)였는데, 하버드 대학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 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 소속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를 보좌하였다. 일본의 낭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특이하게도 고급 지식인 출신이 많았고,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7]

그날 모의에 참여한 사람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와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으로서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대위,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였다. 그밖에 직원에게는 비밀 유지를 위해 일체 알리지 않았다. 우치다 사다쓰치(内田 定侈搥) 일등영사도 이 모의에서 빠졌다.[8]

당시 논의한 내용은, 첫째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한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은 한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인(新聞人),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규슈와 구마모토 현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간인의 참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비중이 컸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그래서 황후 시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8]

미우라는 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여우사냥”[8][9]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과 흉도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서였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격자가 나타나게 된다.[8]

1894년 4월 15일 고등재판소 판사 권재현이 법부에 제출한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요지의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매천야록》에서는 이 유시가 김홍집 등이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이 황후 시해에 동의했는지 매우 의문이다.[8]

한편 일본으로서도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서기관 스기무라가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 6일(음력 8월 18일)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

201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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