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김완선이 한국 가요계에 미친 영향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9,314 작성일2005.11.25

저는 김완선이라는 가수가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쉽게 무시못할 영향을 끼친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마돈나 같이 말이죠..

 

지금이야 나이도 많고.. 90년대 들어서 인기가 급격하게 하락한 이유가 있지만 말이죠..

 

김완선이라는 가수가 나타나고 생긴 사회 전반적인 변화에 대해서 분석적이고.. 자세하게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써주시면 내공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chul****
초수
골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개인적으로 김완선의 팬입니다.

한때 정상의 여가수였던 점은 부정할 수 없죠. 특히 1, 2집과 전성기였던 5집 시절의

인기는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김완선이라는 가수때문에 사회 전반에 변화가 생겼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90년대 이후를 보면, 서태지나 H.O.T 정도 되어야 청소년의 문화적 전반에 영향을

끼친 가수라고 할 수 있겠죠. 즉 김완선의 등장으로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김완선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고, 인기있는

대중가수로의 역할이나 한계가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대중 음악계에는 어떠한 흐름이나 유행을 가져왔다고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전까지 '비디오형 가수'라는 의미는 희박했습니다. 멀게는 펄 시스터즈부터 김완선

이전에 나미나 민혜경등의 가수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비주얼' 보다는

'음악' '가창력'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김완선은 그녀의 외모를 내세웠죠.

물론 그녀의 가창력이 형편없다는 건 아닙니다. 독특하고 시원한 음색을 가졌죠.

그러나 김완선 등장 당시 인기 여가수들(이선희, 정수라 등) 의 표본에 볼 때 김완선의

가창력은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들었습니다. 잡지나 언론에서도 '비디오형 가수'라는 이름을

붙여줬죠. 김완선은 5집이 되어서야 그 그늘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즉 가창력이나 자신의 음악성으로 가수가 되었던 그당시 가요계에서 김완선은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섹시하고 백치미가 가미된 이미지에 맞는 노래와 춤으로 몇년간

정상을 지켜냈으니까요.

이 점은 김완선의 장점이자 곧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같이 언급한 마돈나의 경우(물론 마돈나의 가창력과 김완선의 가창력 부분은 별도로요)

자신의 섹시한 이미지에 더해서 음악적인(장르와 스타일) 변신과 도전(연기 등)으로

20년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죠. 김완선의 경우 5집으로 기존 이미지를 탈피해서

최고 전성기에 오르지만 5집의 스타일을 고수한 6집은 실패한 앨범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김완선의 5집이 여가수 최초로 밀리언이다,  90만장 판매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기억에는 5집 활동 거의 끝나고 김완선이 인터뷰할 때 50만장 정도 팔았다고

했습니다. 어떤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50만장 정도가 맞는 것 같네요)

김완선 스스로가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마돈나와의 차이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두 가수의 가창력이나 한국, 미국 대중문화의 차이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김완선은 은퇴 - 복귀의 길을 걸었죠.

김완선 활동 당시에는 신기하게도 김완선 스타일의 아류 가수들이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독보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80년대 후반 ~ 엄정화, 김현정, 이정현, SES 등이

등장하기 전 가요계에서 여가수는 거의 안팔리는 상태였으니까요.

당시 변진섭, 이승철, 신승훈, 서태지, 이상우, 신성우 등 수많은 남성가수들이 뜨고 졌을

때 여가수는 거의 전멸상태였습니다. 이선희-정수라-김완선-강수지를 정점으로 시장에서

그 상품가치를 얻지 못했죠. 특히 김완선 은퇴 후에는 박미경, 신효범 등 몇몇을 제외하고

정말 여가수가 없었죠.

신기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다시금 김완선이 조명을 받게 되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배 여가수들의 활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엄정화, 이정현, 백지영 등 섹시하고 화려한

솔로 여가수들이 대거 인기를 얻게 된 거죠. 그리고 박지윤 같은 10대 여가수가 등장

하면서 80년대의 김완선과 비교를 하게 되고 김완선이 '원조 섹시 디바' '원조 댄싱 퀸'

등으로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김완선 전성기 당시에는 '단지 김완선'이었지만 그 후

김완선 같은 스타일의 가수들이 쏟아지자 그제서야 '원조' 대우를 받게 된 거죠.

섹시한 비디오형 가수, 10대 가수라는.. 지금은 흔한 타이틀들이 한참 거슬러 이미

김완선이라는 가수가 닦아놓은 길어었던 겁니다.  또한 SES나 핑클 등이 '누나부대'를

이끌었던 것 처럼 80년대의 김완선도 서양의 섹시한 가수에 한눈팔던 한국의 젊은이에게

드디어 한국에서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심벌을 찾게 해 주었을 거구요.

지금이야 수많은 여자 섹시 가수나 그룹이 있고 그만큼 그런 시장이 많이 커졌지만

당시에는 김완선 혼자서 그 시장을 개척했다는 의미도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음반 시장도 안 좋고 '가장 김완선 다운 이미지'를 지금의 김완선이 보일 수

없으니까 예전보단 주춤한게 사실이죠.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김완선이 보여준 인기와 반응은 적어도 대중문화와 음악계에서는 독특하고 선풍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005.12.09.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