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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립운동가 김창숙
joe9**** 조회수 3,369 작성일2012.11.04

 독립운동가 김창숙에 대하여 자유로운 형식으로 써주세요.

사진과 표등으로 정리해주셔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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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수호신
세계사 24위, 한국사 70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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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에 대해

 

 

김창숙 선생은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부친 김호림(金頀

林)과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나 양친으로부터 엄격한 가정교

육을 받으며 자랐다.



27세가 되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공포되자 서울로 가서 조약에 참가한

을사5적을 목벨 것을 상소하였고 1908년 30세 때에는 애국계몽운동 조직의 하나

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를 결성하고 구습타파와 차별적 계급타파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듬해인 1909년에는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매국노를 성토하는 건의

서를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또 1910년 초에는 향리의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영남 및 충청도의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우송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

림단 사건 즉, 파리장서 사건이다. 또 그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

의정원의 의원(경북대표)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중국 지도자 손문(孫文) 등과 회

합하여 한.중 양민족의 협력과 공동투쟁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새로운 독립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

였고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925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전개

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후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중생활을 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

도 일제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투

쟁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 1946년 9월 유림의

지원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하고

1950년대에는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다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살다가 생을 마친 김창숙 선생은 대의명

분론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의

자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

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김창숙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성균관대학교 및 심산사상연구회와 협조하여 연극 「나는 누구냐 -

심산 김창숙」 공연(서울 정동문화예술회관/5.5∼9, 대구문화예술회관/5.15∼16)

과 심산 학술대회(5.14, 세종문화회관), 기획사진 순회전시(5.1∼6.1/서울, 성주 등),

「김창숙 문존」발간을, 경북 성주문화원 및 성주군청과는 심산 사상 강연회(5.

19)와 김창숙 기념 백일장·사생대회(5. 19)를 개최하며 부산 연제문화원과는 김

창숙 기념 연제백일장(5. 29)을 개최하는 등 전국적으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실시

할 계획이다.





생애 및 업적

김창숙(金昌淑 : 1879∼1962), 조국독립과 반외세, 반분단,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앞장선 유림출신 민족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



선생은 1879년 음력 7월 10일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부

친 김호림(金頀林)과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양친으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에는 부친으로부터 노비해방

과 계급타파 등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새로운 국가관을 갖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요로 체결.공포되자 큰 충격을 받고 영남 유학자

인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서울로 가서 조약에 참가한 을사5적을 목벨 것을 상

소하였다. 하지만 광무황제(고종)의 회답이 없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통곡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1908년 30세 때에는 애국계몽운동 조직의 하나인 대한협회

(大韓協會) 성주지부를 결성하고 총무를 맡아 낡은 구습타파와 차별적 계급타파

운동에 앞장섰다. 이듬해에는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매국노 송병준(宋秉畯).이용

구(李容九) 등을 성토하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또 1910년 초에는 향

리의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

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투에도 불구하고 1910년 나라가 일제침략하에 들어가

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모친의 교훈에 따라 각종 경

서와 서적을 섭렵하는 등 학문에 매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영남 및 충청도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

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건

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우송하였다. 이것이 이

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 즉, 파리장서 사건이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

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의 의원(경북대표)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 국

민혁명의 지도자 손문(孫文) 등과 회합하여 한.중 양민족의 협력과 공동투쟁 방

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빌려 개간한 후에 새로운 독립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1925년에는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후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차에 걸쳐 수감

생활을 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도 투쟁을 계속하여 일제

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자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투쟁

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 1946년 9월 유림의 지

원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하고 정

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다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살다가 생을 마친 김창숙 선생은 대의명

분론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의

자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선생의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

고 있다.

201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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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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