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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최명길에 대해서...
sb**** 조회수 9,733 작성일2003.04.16
조선시대 병자호란때 화의파였던 최명길에 대한 자료를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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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신도비

최명길 [ 崔鳴吉 ] (1586∼1647)


최명길! 그는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기 개인의 치욕을 참았던 사람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조 인조 때 청나라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수치스럽더라도 항복을 하여 실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항복문서를 작성해서 바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지금까지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는 1586년(선조 19)에 금천에서 태어났다. 비록 충북에서 출생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묘소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어 충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영총부사를 지낸 사람으로, 그가 아직 7세였을 때, 열심히 책을 읽으며 가르치기를

"나라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성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고 하여, 이를 가슴에 새겨 주었다. 8세 때에는 부모 앞에서

"오늘은 증자가 되고 내일은 안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가 되리라."

하여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말도 전한다.

그는 당시 대학자인 이항복과 신흠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후에 크게 이름을 낸 이시백, 장유 등도 같은 문하생이었다. 그는 스승인 신흠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다. 그가 1605년(선조38) 20세로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급제했을 때 신흠은 승정원의 높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보아 아시는 바와 같이 최명길은 몸이 약하긴 해도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맑고 깨끗합니다. 장래에 틀림없이 큰일을 하고 또 존경을 받게 될 사람입니다."

라고 칭찬을 하면서 특별히 추천까지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무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는데, 이때 반대파인 북인의 이산해, 유영경, 정충민 등이 정권을 잡는 바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조가 서인인 김제남의 둘째딸(인목대비)을 둘째 왕비로 맞고 영창대군까지 낳으니 다시 득세하여 공조, 병조좌랑을 지내고, 선조가 죽은 후 1614년(광해군 4)에 27세로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런데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 폐모사건이 일어났다.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자기의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반대파에서 거짓으로 꾸며서 광해군이 김제남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으로 쫓아버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보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폐모(비)계획의 기밀을 최명길이 누설하였다고 탄핵당하여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가평으로 들어가서 이시백, 장유, 조익 등과 어울리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1623년(광해군 15)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폐모사건 등 북인 및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인세력인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등이 이들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워 인조를 옹위한 정변이다. 여기에 최명길도 가담하여 인조가 등극하자 정사공신 1등공신에 올라 완성군에 봉해지고 이조참판과 비변사제조를 겸했다.

그런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에서 자기보다 공이 낮은 최명길은 1등공신에 오르고 자기는 2등공신이 된 데 대한 불만에서였다. 이 때 최명길은 총독부사라는 직위로 직접 싸움에 나아가 이괄의 군대를 무찔러 평정함으로써 1등공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로써 나라 안이 안정되자 그는 백성들의 호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군역의 의무를 평등하게 하자는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을 뿐 아니라 호패청 당상관에 올라 이를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고 3년 후,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을 맞는다. 광해군 때는 후금(후의 청나라)을 배척하지 않다가 인조가 왕이 되면서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후금의 태종이 명나라를 치기전에 조선을 먼저 정복하고자 하여 일어난 싸움이다. 이 때 인조와 대신들이 후금의 강력한 병력에 쫓겨 강화로 피신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대신들 간에는 화친이냐 싸움이냐의 의견이 맞서게 되었는데, 대세로 보아 화친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그는 싸우자는 쪽의 극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왕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형제의 동맹을 맺었다. 이것은 오직 국가의 장래와 평화를 사랑하는 충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경기관찰사, 우참찬, 부제학, 예조판서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을 자신들에게 열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조선은 화해를 깨고 후금을 배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화해를 지킬 것을 내세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염려대로 1636년(인조 14) 후금의 태종은 국명을 '청'이라 고치고, 이제는 형제관계가 아니라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왔다.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중과부적임을 느낀 조정에서는 인조의 두 아들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을 강화로 보내고 인조 및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45여 일을 포위당해 있으니 식량은 떨어져 가고 병력은 지쳤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신들 간에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가 나섰다. 아무 대책없이 명분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나라의 장래와 백성을 위해서는 항복할 수 밖에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복문을 작성했다. 이른 본,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는 김상헌이 그에게 달려들어 항복문을 빼앗고 찢어버리며 통곡했다. 이것을 보고 그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찢어진 항복문을 주우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

하며 침통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만한 일이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겨울에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고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청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세폐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그런데 1642년(인조 20)에 변고가 일어났다. 그것은 청나라에 항복한 홍승주라는 명나라 사람에 의해서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청나라에 들어가 임금과 다른 신하들은 모르는 일이며 자신과 임경업이 사사로이 명나라에 사람을 보낸 일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병자호란 때 항복을 반대하여 먼저 잡혀온 김상헌과 만났다. 같이 옥살이를 타국에서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다를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했다. 이때 주고받은 시가 전한다.

조용히 찾아보니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반가웁고나.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노라.

이에 최명길이 받았다.

그대 마음은 돌같이 끝내 풀릴 줄 모르건만,
내 마음은 문고리같아 둥글게 돌아갈 줄만 아노라.

마침내 그들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제 늙고 약해진 몸으로 쉬려했으나 인조가 또부원군 겸 어영제조로 임명했는데 그 2년후 병으로 눕게 되었다. 임금이 직접 문병을 갔으나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1647년(인조 25) 5월 17일, 62세였다.

저서로 그의 호를 딴 「지천집」19권과 「지천주차」가 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200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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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
영웅
대학 입시, 진학, 포털사이트, 사람과 그룹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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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전주
호 : 지천(遲川)
별칭 : 자 자겸(子謙), 시호 문충(文忠)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주요저서 : 《지천집》,《지천주차(遲川奏箚)》


본문

본관 전주. 자 자겸(子謙). 호 지천(遲川). 시호 문충(文忠). 영흥부사 기남(起南)의 아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과 교유하였다.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사마시의 생원, 진사시와 문과를 모두 통과하고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는 가장 화려한 경로로 정부에 진출하였다. 광해군대에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중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에서 삭직되었으며, 북인의 독주가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 이르게 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류(金) 계열과의 연합을 통한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이조참판과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녹훈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고, 1632년(인조 10) 이후 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와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조판서에 다시 올라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하였다. 난중의 일처리로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음으로써 1637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대청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일찍 사이가 벌어진 김류 ·김자점(金自點) 세력과의 경쟁으로 1640년에 일단 물러났다가 2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1643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사상은 당시의 대세인 신유학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성리학 원론이나 번다한 예설 자체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고 명분론 일변도로 흐르지도 않았다. 또한 양명학(陽明學)에 호감을 보이고 그 소양을 몸에 익혀 장유 등과 더불어 그 사상을 후대에 이어준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인조반정 때 길흉을 점쳐 거사 시기를 정했을 만큼 점술을 인정받았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상은 실제 생활과 정치에 반영되었다. 사족들에 대해 청군에 끌려갔던 부녀들과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외롭게 주장하였고, 늦게 생자를 얻었으나 그 전에 조카를 양자로 삼은 것을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후사로 삼도록 특별히 청해 조정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를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는 무신이 아닌데도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 건너 원수 장만(張晩)을 찾아갔고, 계책을 세워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나라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하여 나갔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주로 정적들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도 곳곳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구체적인 정책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하되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후금 및 그 뒤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인조가 대원군 신분인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는 정책을 펼 때 대부분의 사림들이 공과 사의 분별을 내세워 반대하였으나 임금의 입장을 존중하는 소수 의견에 가담하여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임금만을 따른 것은 아니어서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빈을 처형할 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사류들과 함께 그녀를 용서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관직체계 ·토지제도 ·군사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출한 데 나타난 개혁 의지는 병자호란 후 국정을 주도할 때 실행에 옮겨졌다. 정치운영에 대해서는 관인들 사이의 분란 가능성을 줄이고 재상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정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민생에 대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민간의 부담을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다.

주화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인조 말년 이후 거의 모두 부정되고 자신도 소인배나 불길한 인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생을 위해 개인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과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간 공로에 대한 찬사도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손자이자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지도자인 최석정(崔錫鼎) 등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문집으로 《지천집》과 《지천주차(遲川奏箚)》가 있다

200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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