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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도전과 이방원, 김상헌과 최명길간의 대립 이유, 각자의 주장은?
io**** 조회수 15,082 작성일2006.04.29

중등 국사 156, 157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여기에 각자의 대립 이유같은 것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지 않아요.

 

1. 정도전과 이방원,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립 이유를 알려주세요.

 

2. 그들이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내세울 수 있을 법한 주장을 말해주세요.

 

 

될 수 있다면 성삼문과 신숙주도 같은 방법으로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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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
경제 동향, 이론 10위, 한국사, 사회학 9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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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은 가급적 스스로 해 보시고, 여기서는 1번을 주로 언급하겠습니다.

 

1. 정도전과 이방원이 대립한 이유

 

정도전과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한 주요 공로자들입니다. 가히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인물들이죠.

 

그러나 정도전은 신료였고, 이방원은 왕족으로서 차기 임금이 유력하던 자였습니다. 이들은 신권 중심의 정치를 펴느냐, 왕권 중심의 정치를 펴느냐 등의 이유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정도전은 <주례> 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상적인 유교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이상적인 유교사회는 오늘날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와 유사한 면이 강합니다. 그는 당시로서는(아니, 지금 관점에서도) 혁명적이라 할 과전법이라는 토지재분배제도를 시행하는데, 원래의 취지는 모든 대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재분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구수에 맞춰 지급한다 하여 '계구수전'(인구 수를 세어, 땅을 준다) 이라 합니다) 물론 기존 대토지소유 귀족 등의 반대로 상당히 왜곡되기는 하지만, 그 이전의 토지제도에 비해 엄청난 개선이 있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정도전은 이상적 사회를 위해 패도적이고 지나치게 강력한 군주보다는 오히려 적절한 왕권만을 가지고 신하 중심의 국정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가장 어린(따라서 강력한 왕이 될 가능성이 매우 적은) 방석을 왕세자로 삼게끔 만들지만, 이로 인해서 방간, 방원이라는 강력한 왕자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이들 왕자들의 세력을 꺾고자 사병혁파 - 국가의 병사 이외의 사적으로 거느린 병사는 극도로 줄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 - 를 하려 하다가 되려 역습을 당해 죽게 됩니다.) 

 

반면, 이방원은 역시 이상적 사회를 꿈꾸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 같지만,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강력한 왕권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조선역사상 가장 호랑이같이 무서운 임금이었다 합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정도전이 기초를 다진 제도들을 폐지하지 않고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예컨대 정도전이 하려다 실패한 사병혁파는 이방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가 정도전의 개별 정책들에 반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들의 대립은 보다 좋은 조선을 위해 강력한 왕권 중심으로 국정이 돌아가야 하느냐 마느냐의 대립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상대를 설득할 주장으로는 정도전 입장에서는 왕권중심 또는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폐해(예: 왕은 일단 집권하면 바꿀 수 없으므로 왕권중심으로 가면 왕이 멍청하거나 무능할 때 나라가 엉망이 된다, 반면 신하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므로 신권중심으로 갈 때 유능한 신하에 의해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 쉽다... 등등)를 지적하면 좋고, 반대로 이방원 입장에서는 신권중심 또는 약한 왕권 중심의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폐해(예: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신하들은 서로 분열되어 당파를 짓고 당파끼리 대립할 것이다. 이 때 강력한 왕이 이들을 중재하거나 정국을 주도할 수 없다면 (현재 우리나라 국회에서 여-야당이 싸우듯) 신료들간의 싸움으로 날밤 샐 것이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이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기초가 된다... 등등) 를 지적하면 됩니다.)

 

 

2. 김상헌과 최명길이 대립한 이유

 

이방원과 정도전이 조선건국에 있어서 같은 무리이며 협조자였던 것(신진사대부 및 신흥무관세력)과 마찬가지로 김상헌과 최명길도 원래 같은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서인' 들로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에 가담했거나 가담하진 않았더라도 암묵적으로 동조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대립은 기본적으로 '의리' 義 냐, '이익' 利 이냐의 문제입니다.

 

이들의 대립은 병자호란 내지는 청나라와의 관계와 관련됩니다. 이 때의 문제는 일단 유교의 세계관과 관련됩니다. 유교적 세계관은 절대 수평적인 국제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중화를 최고 정점으로 하고 그 주변의 사이(사방의 네 오랑캐들. 오랑캐 = 중화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들을 하위에 두는 불평등한 국제관계를 상정합니다. 따라서 당대인들에게 있어서 명을 섬기고 청을 배척하는 것은 '의리' 에 해당하는 명분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반면, 당시에는 청과의 화의(이는 사실은 청에게 머리를 숙이고 청을 섬기는 것이다)를 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피해가 더욱 더 커질 것인데, 이러한 손해와 이익의 문제는 유교에서 별로 좋게 여기지 않는 이익(利)의 문제입니다.

 

즉, 한쪽에서는 백성들의 피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옳게 살 수 없다면 차라리 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옳게 사는 것도 좋지만 백성들의 피해가 너무 크니 그 '옳게 사는 것' 을 좀 굽히자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김상헌 류의 논리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는 한족이 세운 정통 중화이므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청(또는 후금)은 여진이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에 불과하므로 이들을 섬기는 일은 유교의 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 지난 임진란 때에 나라가 왜적에 의해 거의 망할 뻔한 일을, 명나라로부터 재조지은(나라를 다시 지은 은혜: 임진란 때의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의미)을 입지 않았는가? 사람이 은혜를 잊고, 의리를 잊으면 짐승과 다르지 않듯,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이를 지킬 수 없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 낫다. (실제로 김상헌 등 의리를 중시하는 쪽에서는 화친을 맺기보다는 의리를 지키며 망하는 게 낫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최명길 류의 논리입니다. 당신은 꿈 속에서 사는가? 비록 청이 여진이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이기는 하나, 그 강력함은 오히려 정통 중화라는 명나라를 압도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숙이지 않는 문제는 상대의 강력함에 따라야 나라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지, 명분에만 입각하다가는 나라가 죄 망할 것이 분명하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백성들이 피해를 본다면 그 나라에 무슨 존재가치가 있을까? 백성들의 피해를 덜고 나라를 빨리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화친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개개인의 논리와 국가의 논리는 다를 수 있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의리를 최우선적으로 취급하더라도 국가에 있어서는 이익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p.s.

 

개인적으로 정도전은 조선 전기의 인물 중에서 최고로 꼽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인물이지요.

 

반면, 김상헌의 경우에는, 분명 의리를 지키고 청렴하며 바르기가 대나무와 같다는 점에서는 매우 훌륭한 분이라 봅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좋은 관료가 된다는 법은 없지요. 김상헌은 개인적으로 매우 윤리적이고 훌륭할 지 몰라도, 국가간의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최악의 인물이었다 봅니다. 윤리적으로 살고 싶으면 저나 그럴 것이지, 자신의 윤리를 국가에 강요하다가 백성들에게 더 큰 고초를 당하게 만든 게 저런 인물들입니다.

 

윤리적 인물과 유능한 인물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할까요? 저는 과감히 말하는데, 국가에 있어서는 유능한 인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아내를 두고도 비서와 바람을 피웠다는(그것도 한두명이 아니었지요) 점에서, 그리고 미 의회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유능했고, 미국 행정사상 가장 뛰어난 개혁과 함께 미국 정보화를 이끌었으며, 미국의 빛나는 10년 부흥경제를 이끈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치세 동안 미국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비해 보다 살기가 좋았습니다.

 

김상헌 외에도 면암 최익현 선생같은 경우에도 윤리적으로는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만, 그 분이 얼마나 유능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최근에는 그 분이 조선 재정을 망쳤다는 연구결과도 있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관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200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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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 1337년 - 1398년)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는 종지(宗之). 는 삼봉(三峰)이다. 형부사서 정운경의 아들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독단과 급진적 개혁조치로 다른 개국공신과 왕족들의 반발을 사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출생

정도전은 1337년 양주군 삼각산에서 아버지 홍복도감 정운경과 어머니 榮川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스승 이색으로부터 세로운 학문 성리학을 전수 받아 조선의 건국 이념을 완성하였는데,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이숭인, 설장수 등이다.

 

관직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성균박사(成均博士), 태학사(太學士) 등의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1375년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신들의 진노를 사 나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 간 고향에서 지냈다. 그 뒤 북한산 아래에 초가집을 지은 뒤 ‘삼봉재(三峰齎)’라 이름을 짓고 그 곳에서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때 정도전이 즐겨 읽었던 책은 군주도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맹자(孟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권신들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바람에 9년 동안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1383년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동북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경도로 직접 찾아가 사귀었다. 이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예와 통솔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도 정도전의 학식과 포부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이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일을 말하는 거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성계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정도전은 재빨리 얼버무렸다

 

이성계와 혁명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소나무 한 그루
몇 만 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옹립한 다음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자 정도전은 힘껏 이성계를 뒤에서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 등과 함께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했다.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여주로 유배된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와 정득후에게 보검을 내려 곽충보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밀명을 내린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그리고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내세웠다.

조선의 건국

이방원에 의해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모두 제거되자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때부터 평소에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와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의홍삼군부사(義興三軍府事) 등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서울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묘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고,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의 군사 제도를 만들어내고 직접 군사 훈련을 실시했던 군사 전문가이기도 했다.

조선건국 이후 정권 투쟁

왕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정도전은 조선을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차기 임금은 여린 임금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신덕왕후와 손을 잡아 태조의 아들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내세웠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의안대군을 왕세자에 책봉했다. 그러나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은 모두들 자신을 제치고 계모 소생의 막내동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고,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의안대군을 왕세자에 책봉하는 데 성공한 정도전은 다시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조선경국전》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법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데 이어 개인 소유의 사병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시행하는 등 기득권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6년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예전부터 정도전을 경계하였던 홍무제는 그가 쓴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무제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점점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위기 의식을 느낀 정도전은 태조의 허락을 얻어 반명 정책을 기지로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홍삼군부에 병합한 뒤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급진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죽음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때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살해하기로 결정한 계기는 권력 확보를 위한 공신 제거가 유력하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도 있다.

정도전과 그 일가는 1398년 8월 태종(이방원)에 의해 몰살 당했으나, 아들 1명이 살아 남아 세종 대에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는 정도전의 저서 <삼봉집>을 간행했다.

1865년 흥선대원군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요 저서

  • 《삼봉집(三峰集)》
  • 조선경국전)》
  • 《경제육전(經濟六典)》
  • 《경제문감(經濟文鑑)》
  • 《불씨잡변(佛氏雜辨)》
  • 《심문천답(心問天答)》
  • 《진법서(陣法序)》

200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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