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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의 역사 인물 중 라이벌 관계//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5,693 작성일2004.05.18
제말을 자알 기울여 주세요'-'
중요한것이니 잘해주세요
중3수준으로요,,

라이벌 예시로써는요
[정도전,이방원][성삼문,신숙주][김상헌,최명길][이성계,최영][정몽주,정도전]
[장희빈,인현왕후][명상황후,흥선대원군][이순신,원균][단종,수양대군]
[김종서,세조][광해군,인조][소현세자,붕림대군][최익현,김옥균]
[정봉준,조병갑][민영환,이완용] 이구요, 예시말고 다른인물이면 가산점이거든요
잘해주시기 바래요-_ㅜ 내공은 제가 만족하면 더 드릴꼐요-_ㅜ(내공이관심이;;)

방법은요
1.조선시대 인물 중 라이벌 관계가 있는 인물 2명을 선정하여 조사
2.선정한 인물에 대해 비교,평가 해보고,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온다
3.분량은 A4용지 4/3정도만(한바닥,한장이 아님)

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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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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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ks****
영웅
한국사, 세계사,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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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도전(鄭道傳) vs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정도전(1337~1398)과 이방원(1367~1422).
후대의 김상헌, 최명길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에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라이벌 입니다.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의 건국에.. 두사람의 공헌이 가장 지대했으나,
새로운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통치이념이 달랐던지라..
끝내 맞설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위인들이었습니다.

정도전과 이방원.. 처음엔 고려조정에 반한다는 명분아래..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말하자면 동반자이자 혁명의 주체로서죠..
이들의 대립을 잘 묘사했던 1997년도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이 정도전을 삼촌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극전개상 픽션이 가미되었겠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정도전은 아버지 이성계의 모사였고,
정도전의 나이가 이성계와 비슷했으니까요..

정도전은 이성계를 앞세우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중요한 명분을 쌓는데 주력했고,
이방원은 이성계의 국왕등극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합니다.
1392년, 이성계는 고려 조정을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여 태조가 됩니다.

이성계의 태조 등극에 가장 큰 역활을 담당했던 4명이 있었죠..
태조의 정신적 지주인 무학대사, 모사의 역활을 수행한 정도전,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
그리고 자신의 계비 신덕왕후강씨.. 특히 이성계는 신덕왕후강씨를 총애하였습니다.
변방의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권문세가의 강씨를 만나면서 정치력을 얻게 되었고,
그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권좌에 오를수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덕왕후강씨는 젊고 똑똑했었습니다. 야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덕왕후강씨는.. 자신의 아들로 대통을 이어가고 싶었을테고,
정도전은.. 자신이 이상으로 꿈꿔오던 재상(총리) 중심의 정치를 이루고 싶었으니..
두사람은 공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권력에 적극적이던 이방원을 배격하게 됩니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웁니다. 위화도에서 주저하던 아버지를 설득시켜,
최영의 군대를 치자고 했으며, 고려조정의 마지막 버팀목이던 정몽주를 제거하였고,
대비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극시키게 함으로서
일개 무장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군주의 반열에 올려놓게 되죠..

물론, 이런 각고의 노력에는.. 차기의 군왕자리를 노린 포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포석이.. 삼촌이라 부르던 정도전의 눈에 읽힌 셈이 되어 버렸죠..
그래서 정도전과 신덕왕후강씨는 공조를 성사시키고, 이방원을 배척하게 됩니다.
응당 세자는 자신의 권리라고 믿었던 방원에게.. 방석의 세자책봉은 배신이었습니다.
태조와 강비,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는 방원에 가슴속에 분노를 만듭니다.

강비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에 세자의 교육까지 맡게된 정도전은.. 자신이 일찍부터
꿈꿔오던 재상 중심의 정치를 펼쳐나가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게 되었고,
방원은 와신상담 재기를 꿈꾸게 됩니다. 1396년 최대의 난적이었던 강비가 죽자,
방원은 정계복귀를 가시화하였고, 정도전은 이런 방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병철폐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옵니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가지고 있는 한, 병권이 국가로 모아질수 없다고 보았고,
방원은 사병을 빼앗기면 완전히 힘을 잃게 되기 때문에 도저히 수용할수가 없었습니다.
1398년, 결국 방원은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척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시킨후,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는데,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일명..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 방원의 난).

태조는 와병중이어서 이를 막지못했고, 심히 상심하여 차남 방과에게 선위하고 물러났으며,
방원은 실권을 잡게 되었고, 2년후인 1400년 방과의 양위를 받아, 조선조 제3대 국왕에
오르게 됩니다.





2. 김상헌(金尙憲) VS 최명길(崔鳴吉)


주전론자(主戰論) 김상헌(1570~1652)과 주화론자(主和論) 최명길(1586~1647)..
이들 라이벌에 붙는 수식어 입니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은.. 명분에 입각한, 민족의 자존심이었고,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은.. 실리를 중시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1618년 광해군(1608~1623)에 의해 인목대비 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김상헌은.. 폐모론에 격렬히 반대하다 낙향하였고,
최명길은.. 이귀, 김류와 함께 반정세력에 가담, 훗날 인조반정(1623)을 주도하게 됩니다.

제16대 인조(1623~1649)의 집권 이후,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義)가 일어나자,
김상헌은.. 대의에 어긋나는, 공과 사를 구분해야할 일이라며 반대하였고,
최명길은.. 대의에는 어긋날지 모르나, 임금의 입장이 중요하다며 인조를 지지합니다.

김상헌은.. 주로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강력한 언론활동으로 국정을 견제하였고,
최명길은.. 주로 이조,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고 국정을 주도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이때부터 두사람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조정은.. 이들을 따르는
주전론자들와 주화론자들로 양분되어, 매일 치열한 격론을 벌였고,
명분보다는 실익이 중요하다는 대세에 힘입어..
최명길이 강화를 주도하게 됩니다.

청군에 의해 남한산성이 포위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최명길은.. 인조가 있던 남한산성과 청군영을 부지런히 오가며 강화를 준비하였고,
김상헌은.. 그런 최명길을 신랄히 비판하며, 계속해서 척화를 주장합니다.

최명길에 의해 항복문서가 만들어지자,
김상헌은..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고 대성통곡 하였으며,
최명길은.. 그런 김상헌의 행동이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며, 힘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되자,
김상헌은.. 국치를 한탄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두문불출 하였고,
최명길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복잡한 대외문제등 전후처리를 담당하게 됩니다.

끝까지 대의를 지키고자 분전한.. 청음 김상헌은..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당대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지만,
끝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분전한.. 지천 최명길은..
당대의 성리학적 사대 분위기에 밀려 폄하되었고, 결국 변절자로 치부 되었지만,
국가와 민생을 위해, 대의를 버린 소인배라는 비난마저 감수한.. 용기있는 행동으로
후대의 선비들에게.. 재조명 받게 됩니다.

병자호란과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과연 누구의 행동이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는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는 지천 최명길..
두사람의 의견은 이리도 극명하게 갈렸지만,
분명한건..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닌,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김상헌과 최명길.. 이들이야 말로.. 아직까지도 그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진정한 역사의 라이벌 입니다.





3. 인수대비(仁粹大妃) vs 연산군(燕山君)


"인수대비"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 한씨(1437~1504)는
세조대의 공신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서..
1455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1438~1457)와 가례를 올리고, 수빈에 봉해집니다.
그러나, 1457년 의경세자가 20세 나이로 요절하자,
왕비도 되보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나게 됩니다.

1469년, 제8대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급사하자, 후사가 논의되었는데..
수빈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대통으로 결정되자,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1471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대비로 진책되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 자주 조언하였다고 합니다.

1479년, 중전 윤씨가, 왕의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잘 찾지않는다는 이유로..
만백성의 어버이인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대노하였고, 폐비시키고 맙니다.
1482년, 폐비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자, 이를 모함하여 결국 사사되게 합니다.
이런 인수대비에게..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며느리의 자식이 곱게 보일리는 없겠겠죠..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되고, 끝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랍니다.
폐출사건이 있을 당시에 융은 4살바기에 불과했고, 성종의 함구령이 있었으므로..
정현왕후윤씨(중종의 친모, 훗날의 자순대비)를 친어머니로 알고 성장합니다.

그런데, 천륜은 어쩔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1483년, 성종이 융을 세자에 책봉하려하자, 인수대비는 반대를 합니다.
"폐비의 자식을 보위에 올렸을 경우, 보복의 피바람을 부른다"는 이유였습니다.
성종도 걱정이 안된바는 아니었지만, 대안이 없었으므로 결국 융을 세자에 책봉합니다.

1476년, 정현왕후윤씨가 진성대군을 낳자,
진성대군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으나, 세자 융에게는 지독하리만큼 가혹하게 대합니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극심한 편애는.. 연산군의 가슴속에 응어리를 지게 만들죠..
연산군은 철저히 내성적이고 독단적인, 괴팍한 성격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보위에 오른 연산군은..
친어머니인 폐비윤씨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고, 1504년, 보복을 준비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는 연산군을 심하게 꾸짖었으며,
분기탱천한 연산군은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절명케 합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수대비의 삶은 이렇게 마감되었고,
이후 연산군은 갑자사화(1504)를 일으켜 폐비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2년후인 1506년 중종반정(1506)으로 폐출당하게 됩니다.

끝끝내 풀지 못했던 할머니와 손자의 악연..
그들을 역사의 라이벌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건, 대립적인 삶을 산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4. 퇴계 이황(退溪 李滉) vs 율곡 이이(栗谷 李珥)


퇴계 이황(1501~1570)와 율곡 이이(1536~1584)
서로 반목한 적도 없었고, 대립적인 삶을 산 인물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분명 우리나라 역사상 자웅을 겨룰만한 라이벌 입니다.

이황은 주리철학의 창시자였고, 이이는 주기철학의 창시자 였습니다.
이황은 기보다 이를 중시했고, 이이는 이보다 기를 중시 했습니다.
이황은 이상주의자였고, 이이는 현실주의자 였습니다.

이황의 문하생들은 영남학파를 형성했고, 이이의 문하생들은 기호학파를 형성 했습니다.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이 되었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인조대 부터 숙종조 초반까지 조정의 양대 세력으로 발전 합니다.

이황과 이이는.. 서로가 뛰어난 학자이며 인본주의자임을 인정한 사이였으나,
그들의 제자들은.. 서로의 학문보다 자신의 학문이 위대하다며 경쟁한 사이였습니다.

이 위대한 민족의 두스승은.. 제자들에 의해 강력한 라이벌이 된 것입니다

200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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