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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조선일보

[ The Chosun Ilbo , 朝鮮日報 ]

요약 서울에서 발행되는 조간신문.
조선일보 반면

조선일보 반면

발행년도 1920년
발행주기 조간
발행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21길 33(정동 1-16)
사시 정의옹호·문화건설·산업발전·불편부당
기타 발행물 《주간조선》, 《월간조선》, 《산》, 《낚시》, 《여성조선》, 《스포츠조선》, 《어린이조선일보》

3·1운동 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동아일보(東亞日報)》 《시사신문(時事新聞)》과 함께 허가한 신문으로, 1920년 3월 5일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기관지로 허가받아 사장 조진태(趙鎭泰), 발행인 예종석(芮宗錫), 편집인 최강(崔岡) 등으로 출발했다. 발행 초기에는 경영난으로 발행인과 경영진이 자주 바뀌었으며, 초기의 반일적 논조 때문에 1920년대만 4차례 정간되었다.

1924년 9월 신석우(申錫雨)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이상재(李商在)가 사장, 신석우가 부사장, 김동성(金東成)이 발행 겸 편집인, 그리고 이사진에 안재홍(安在鴻)·백관수(白寬洙)·이상협(李相協) 등이 취임하여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경영과 제작에 혁신을 단행하였다. 그뒤 신석우·안재홍·유진태(兪鎭泰)·조만식(曺晩植) 등이 사장을 맡았으나, 경영면에서 안정을 기하게 된 것은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인수·운영하면서부터였다.

방응모는 신문경영을 맡은 후, 총액 50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태평로에 새 사옥을 짓는 등 과감한 사세확장을 꾀했다. 또한 1934년 1월에는 출판부를 창설하여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등 일반서적 간행과 함께 월간잡지 《조광(朝光)》(1935.1), 《여성(女性)》(1936.4), 《소년(少年)》 등을 발행하였다. 한편 1929년 7월부터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남녀학생을 동원하여 한글보급반을 조직하고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뒤 해마다 이 운동을 전개하여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과 함께 문맹퇴치, 농촌계몽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신문 발행이 강제로 중단되었다가 1945년 11월 23일에 복간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사장 방응모가 납북당하였고, 그후 장기영(張基榮), 방일영(方一榮)과 방우영(方又榮)이 경영을 맡기도 했다.

자매지로는 《주간조선(週刊朝鮮)》(1968.3), 《월간조선(月刊朝鮮)》(1960.4), 《산(山)》(1960.6), 《월간낚시》(1984.5), 《가정조선》(1985.1), 《스포츠조선》(1990.3.21), 《FEEL》(1993.9)이 있으며, 해외판으로는 미주판(1984.2)을 비롯하여 브라질판(1987.3.5), 시카고판(1990.8.6), 밴쿠버판(1993.1)을 창간했다. 1988년 3월 5일에 정동별관(지하 5층, 지상 8층)을 준공하였고, 1989년 10월 14일 부산사옥(지하 2층, 지상 10층)을, 1994년 평촌사옥을, 1996년 성남사옥을 준공하였다. 1995년 (주)디지틀 조선일보를 설립하였다.

주식회사 형태로 납입자본금은 170억 원이다. 2007년 현재 조간 발행이다. 국내 총 1,688개 지사 및 지국을, 괌, 모스코바 등 25개의 해외 지사 및 지국을 두고 있다. 종사자수는 1,115명이며 주재지역은 부산, 대구 등 14곳이다.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정보화-환경운동, 전시·공연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옥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에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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