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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의 캐비닛
전시의 기원을 말할 때면 등장하는 ‘호기심의 캐비닛’은 16~17세기에 유럽의 권력자들 사이에 대유행이었다. 귀중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은 권력자들 사이에서 오랜 전통이었지만, 다른 대륙으로 탐험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수집 욕망은 다른 차원으로 뻗어나간다. 유럽인들은 낯선 땅에서 발견한 이국적인 물건들에 매료되었고, 희귀하고, 기이하고 독특한 것들에 열광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무한한 호기심과 정복 욕망이 캐비닛 열풍을 견인했다.캐비닛은 수집품들을 소중하게 모아 두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캐비닛의 서랍과 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방문객들은 희귀한 물건들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이러한 컬렉션이 가능한 소장자에게 경탄 어린 찬사를 보낸다.이들의 수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희귀함뿐, 수집품 사이 어떤 일관성을 찾기 어려웠지만, 캐비닛은 개인 수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드러냈다. 지금처럼 지식이 세분화되지 않았던 당시 상류층의 ... -
새로움이라는 역사
종종 만나는 유럽 사람들에게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전시공간 ‘d/p’를 소개하면서 1960년대 지어진 낙원상가라는 아주 오래된 역사적인 건물 안에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50년 된 건물을 왜 오래됐다고 소개하는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되물었다. 나에게는 50년이면 충분히 오래된 건물이지만 100년, 200년 넘은 건물이 즐비한 땅에 사는 그들에게 50년이라면 여전히 새 건물에 가까웠던 탓이다. 그런 경험을 반복한 뒤로는 더 이상 낙원상가를 오래된 건물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프랑스 부동산 중개사 가족의 리얼리티 다큐프로그램 <라장스>는 프랑스 사람들의 집 안 풍경을 볼 수 있어 눈요기로 즐겁기도 하지만, 중개사가 집을 소개할 때 강조하는 설명 역시 흥미로웠다. 19세기 오스만식 아파트라는 것, 유명한 건축가의 주택이라는 것, 역사적 인물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 집의 가격을 올렸다. 집의 헤리티지에 가격을 부여하는 게 인상적이다.오스만도 한...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사람의 피부톤을 사계절로 나누는 퍼스널 컬러를 말하며 웜톤, 쿨톤을 찾아나선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최근에는 골격과 근육, 지방의 분포 정도로 여성의 체형을 ‘스트레이트’ ‘웨이브’ ‘내추럴’로 나누는 것이 세상에 유행인가 보다. 이런 유의 진단은 서로 다른 신체의 유형별 특징이 어떤 이미지를 만드는지 파악한 뒤, 그 유형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데 유용하다. 신체 유형 사이에는 어떤 우월관계도 없다. 어울리는 스타일이 다를 뿐이다.한의원에서 체질검사를 하고 그에 맞춰 식습관을 바꾼 뒤로 고질병을 치료했다는 지인의 경험담이 솔깃해 한의원을 찾았을 때는, 나에게 약이 되는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체질론에 대해서는 비과학적 상술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타고나기를 모두 다르게 태어난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므로 서로의 다름을 그저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나에게는 더 크게 다가왔다. 나의 몸에 최적화된 패션을 찾고, 나의 체... -
요람
이제 막 돌 지난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낸 건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다. 얼마 전 돌잔치에서 붓과 색색가지 종이를 집었다는 이 아기는, 요란하게 칭얼대는 법 없이 조용히,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지배했다. 생존을 위한 필살기로 귀여움을 장착한 아기가 유도하는 대로, 우리는 시선을 옮기고 그의 옹알이에 대꾸했다.아기는 주변의 모든 것에 그의 모든 집중력을 발휘해 반응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펼치자 음식 사진들의 화려한 색감에 반응하듯 아기가 바빠졌다.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건넸다. 식당 테이블 아래 매달려 있는 서랍을 열고 숟가락을 꺼내는 순간,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반응한 아기는 어김없이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는 온통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 차 있을 세상을 향해 싱싱한 호기심을 전하는 아기가 조금은 부러웠다. 삶의 경험을 축적해나가면서도, 첫 순간들처럼 세상에 반응하는 삶이 가능... -
손길모양
이은우의 개인전 <손길모양>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어린이갤러리에는 어린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일 손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 도슨트의 질문에 어린이들은 블록 쌓기, 밥먹기, 태권도라고 답한다. 도슨트는 마우스클릭과 휴대폰 터치를 제일 많이 한다고 말하며, 어린이들은 어떤지 물었지만, 이 어린이들은 아직 디지털 디바이스의 세계에 발을 딛기 전인가보다. 장난감 놀이라고 답한다. 도슨트는, 작가가 매일 손으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그리기’라고 말하면서, 어린이 일행을 이끌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이은우는 작업실에 도착하면, 한 시간 타이머를 맞추고 특별한 무엇을 그리겠다는 목적 없이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시간을 즐긴다. 생활습관처럼 반복하는 ‘그리기’의 시간, 작가는 몰입의 기쁨을 만끽한다. 작은 점이 찍힌 종이에서 시작한 그리기는, 모눈종이로 옮겨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입체 형태로 변주된다. 작업이라는 노동이 선사하는 몰입의 경험... -
하마티아
창의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경험, 발 딛고 있는 현실, 상상하는 미래? 그 시공간을 관통하는 관심사? 새로움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을 ‘남다른’ 시선으로 엮는 솜씨? 이번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받은 구자하의 ‘하마티아 3부작’을 보면서, 창작의 구조와 경계를 생각해본다.연극에서 출발했지만, “연극의 관습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시어터 메이커’로 연극 장르의 다양한 가능성과 확장을 실험하는 예술가”로 정의되곤 하는 구자하의 작업이 전시기획자인 내 눈에는 영락없는 ‘현대미술’로 보였다. 작업의 형식으로 장르를 구분하는 것도 이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장르 간의 경계는 무너졌지만, 제도는 여전히 장르의 경계를 필요로 한다. 경계는 창작자의 상상을 가로막는 동시에 상상에 불을 지핀다.극본·연출·음악·무대·영상·퍼포먼스를 홀로 수행하는 창작자가 운영하는 무대는, 말로 설명할 수 없거나 말로 전달하는 순간 빗나가... -
로댕과 곰리
“로댕이 조각에 대한 중요한 영감과 혁신의 원천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고대와 현대의 방법과 재료를 놀라운 예지력으로 결합하여 조각을 해방시킨 방식 때문입니다. 다양한 실험을 향해 열려 있던 현대조각의 선구자는 신흥 산업시대의 모든 수단을 갖추고, 대량 생산의 역량을 바탕으로 자유로움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나는 ‘크리티컬 매스 2’가 신체의 힘을 조각 예술에 다시 부여하고, 재활용하려는 나의 시도가 가장 집중적으로 담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정원이 아름다운 파리의 로댕미술관에 앤터니 곰리의 작품이 흩어져 있었다. 미술관 입구에서 지옥의 문으로 향하는 마당을 가로지르며 곰리가 1995년 발표한 작품 ‘크리티컬 매스 2’ 시리즈를 설치하여 관객을 맞이한다. 그동안 다양한 기획전을 이어왔던 로댕미술관이 이번에 선택한 작가가 앤터니 곰리였다. “몸은 언어 이전의 언어”라는 말로 인체를 바라보는 자신의 세계관을 피력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몸을 캐스팅하여 발전시킨 조각을 바탕... -
비트 바이 비트
긴 막대 양 끝에 서서, 서로를 바라본 채 가운데를 향해 걸어 들어오는 퍼포머의 움직임은 유연하였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은 어쩐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서커스 텐트 밖에서 정신없이 뛰어놀던 어린아이들마저도 온전히 몰입시킬 만큼의 긴장감이 텐트를 가득 채웠다. 서커스 퍼포머로 함께 성장한 두 형제 시몽과 벵상은, 형제들이 그렇듯, 한없이 가까운 사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함께한 세월만큼 깊은 사랑, 우정, 갈등이 쌓여 있었다. 형제애의 뒤편에는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경쟁심도 있었다. 이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무대 위에 올렸다.컨템포러리 서커스로 분리되는 작품 ‘비트바이비트’는 두 형제의 입에 물린 철 재갈을 매개로, 둘의 관계를 끝없이 조망한다. 이들은 서로의 무게를 온전히 입으로만 지탱하면서 균형의 지점을 찾아간다. 한 사람이 공중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입으로 다른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신체를 극단으로까지 단련하지 않고서는 해낼 수... -
내 발밑의 목화솜
개인 컬렉터 가운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하인리히 티센 보르네미자는 1992년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 작품을 기증했다.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의 초청으로 그의 컬렉션을 연구할 기회를 얻은 레바논 출신 작가 왈리드 라드는, 그의 연구결과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투어 퍼포먼스 ‘내 발밑의 목화솜’을 열었다.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연도를 언급할 것이며, 어떤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 주제와 소재를 오고갈 것임을 경고한 뒤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쇼케이스 안 바퀴벌레 사연에서 출발하여, 실제 무게와 직접 들었을 때 체감할 수 있는 무게가 다른 카펫, 구름이 그려져 있는 작품의 뒷면만 볼 수 있을 뿐, 절대로 앞면의 그림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기증한 작품들을 지난다.보존 수복가 라미아 안토노바가 그의 컬렉션에 등장하는 천사의 수를 세어 기록한 이야기는, 회화의 보존 수복, 액자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거쳐... -
우리가 서로 상처 입힐 때
자콜비 새터화이트의 어머니 퍼트리샤 새터화이트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눈을 가진 사람으로, 자콜비의 작품세계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세상에서는 ‘정신분열증’이라고 부르는 증상을 가지고 있었던 퍼트리샤의 머릿속 세상은 한없이 분절되어 있었고, 그 사이의 맥락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자콜비가 특정한 서사성이나 보편적인 구조를 만들기보다, 파편화된 이미지와 움직임, 사운드를 통해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고, 기묘한 톤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은 그런 어머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디지털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글쓰기, 아카이브의 방법론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자료들을 작품 안에 끌어들이는 그는 가상현실(VR) 작품 ‘우리가 서로 상처 입힐 때 우리는 지옥에 있다’를 통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치유를 이야기한다. 암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무료함을 게임 ‘파이널 판타지’로 달래고, 인스타그램과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