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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내로남불은?
비공개 조회수 256 작성일2019.12.24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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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연
우주신
한국사 6위, 글쓰기, 화법 1위, 국어, 한문 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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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이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의 삶에 대하여 성경 미술관 블로그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더군요.

푸르티에 신부는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에서 출생하였고,

1854년 6월 11일 사제로 서품된 후 곧바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55년 중국의 귀주(貴州) 지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도중에 임지가 조선으로 변경되어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충북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프티니콜라 신부, 장주기(張周基, 요셉)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5월 27일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900년 9월 4일에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푸르티에 신부는 조선에 신앙을 전파하다가

병인박해 때 3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조선에서 순교한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복자 또는 성인위에 올랐는데,

푸르티에 신부는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현범(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두 신부는 1964년 시복 재판 과정 중 ‘역사적 조사가 더 보완돼야 한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인간적 과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보다 그 나약함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순교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자 했던 처절한 과정을 조명해 한다.

두 신부는 여러 추문으로 시복 과정에서 제외됐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여전히 의문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다.

순교자의 성덕이 오로지 시복 재판의 결과에만 좌우될 성질이 아니다.”

(복자위에서 제외된 두 신부는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두 신부의 여러 추문이 무엇인지,

그것의 사실 여부는 확인이 안 되네요.

다만 시복 과정(교회재판에 의한 심사)에서 그 추문이 문제가 되어서

푸르티에 신부는 제외가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내로남불은

순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복 과정에서 제외될 만큼 문제가 된

추문에 관한 의혹이라고 하겠네요..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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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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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al****
중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천주교 탄압이 문제였을겁니다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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