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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야기

이니에스타 · 사비 · 비야

제 19회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스페인이 마침내 세계 축구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고진감래 끝에 획득한 영광임에 틀림 없으며, 스페인만의 ‘특별한 스타일’로 일궈낸 우승이기에 축구사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우승과는 별개로, 대회 최고 선수의 영광은 우루과이의 심장 디에고 포를란에게 돌아갔다. 가장 인상적인 팀들 가운데 하나였던 우루과이에서 포를란이 행사해온 기복 없는 영향력의 크기를 감안하면 그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스페인이 ‘토털 풋볼의 진정한 계승자’를 넘어 ‘남아공 최후의 승자’로 올라서기까지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세 명의 선수들 또한 월드컵 최고의 선수로 일컬어지기에 별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선수가 적잖은 공통점 또한 지니고 있다는 사실. 이들은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가장 잘 해내는’ 선수들인 반면, 하루도 빠짐없이 미디어의 조명을 받는 슈퍼스타 유형과는 다소간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그리고 다비드 비야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과르디올라가 알아본 재능 -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1984년 5월 11일 알바세테에서 태어난 이니에스타는 12세에 바르셀로나 유스 아카데미에 합류한다. 그는 14세 때 팀의 주장으로 나이키 프리미어컵(15세 이하 선수들의 클럽 월드컵)을 들어 올렸는데, 당시의 바르셀로나 주장 펩 과르디올라만큼 일찌감치 이 소년에 매료된 이도 없었다. 당대 미드필드의 거목들 중 한 명인 과르디올라는 이 14세 소년의 게임 읽는 능력이 자신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이후 16세의 이니에스타가 바르셀로나 1군 팀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1군 선수들과 훈련을 받던 날, 과르디올라는 사비 에르난데스를 향해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너(사비)는 나를 은퇴시키게 될 거야. 하지만 이 아이(이니에스타)는 우리 모두를 은퇴시켜버릴 거야.”

스페인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 이니에스타.


소박 한 ‘안티 갈락티코’

창백한 피부의 이니에스타는 현란한 의상이나 장신구를 애용하지 않으며 요란한 스포츠카를 타고 연습장에 나오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파티를 즐기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패션지가 선호하는 표지 모델감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이고 튀지 않는 성품에다 매우 조용한 라이프스타일은 그를 이따금씩 ‘안티 갈락티코’로 불리게 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축구를 아는 이들은 미디어의 그러한 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이니에스타의 ‘영혼의 짝’ 사비는 한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니에스타는 틀림없이 스페인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다. 그는 모든 것을 지녔다. 아니, 사실은… 더 지녀야 할 게 있긴 있다. 그에겐 미디어의 지원이 필요하다.”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혹은 ‘땜빵’?

오로지 축구 실력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했던 이니에스타에겐 또 다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비견되기 어려운 ‘다재다능함’이었다. 2002년 루이 반 할 휘하에서 1군 데뷔를 이룬 이니에스타는 이후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드림팀’ 내에서 입지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니에스타는 레이카르트 휘하에서 진정한 스타로 활짝 꽃을 피운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그가 확실한 베스트 11이라기보다 ‘상황적, 전술적 옵션’으로 간주됐던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레이카르트는 그를 사비의 대체 역할(특히 2005-06시즌 사비는 장기적인 부상에 직면한다)은 물론이거니와 윙포워드, 심지어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활용했고, 놀랍게도 이니에스타는 이 모든 포지션에서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임으로써 안목 있는 이들의 절찬을 받았다. 물론 그럼에도 그는 한동안 ‘다재다능함’과 ‘땜빵’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서서히 이니에스타의 진면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사비와 더불어 바르셀로나 그리고 스페인 대표팀의 ‘토털 풋볼’이 작동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지게 됐다. ‘스페인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라는 사비의 찬사는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닌데, 어쩌면 이니에스타는 사비 그 자신의 특성과 또 다른 바르셀로나 동료 리오넬 메시의 특성을 적절히 버무려놓은 인물인 까닭이다.

물론 이는 이니에스타가 메시와 사비의 모든 능력을 다 합쳐놓은 ‘슈퍼맨’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터치, 시야와 지능, 패싱력과 발빠른 움직임을 겸비한 이니에스타는 ‘패스의 거장’ 사비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절묘한 호흡의 ‘receive(볼을 받고), pass(패스하고), offer(볼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찾아들어가 동료가 자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를 구사할 수 있는 사나이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메시만큼의 화려함은 아닐지라도 세밀함과 간결함이 공존하는 이니에스타의 개인전술은 종종 바르셀로나와 메시 그 자신의 숨통을 틔워주곤 한다. 바르셀로나에게 메시가 없으면 당연히 문제지만, 이니에스타가 없어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메시가 존재하지 않는 스페인 대표팀이라면 이니에스타의 발재간 및 드리블 솜씨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토털 풋볼’이 작동하기 위한 기본 요소인 ‘압박’에 있어서도 더 없이 성실하다. 스페인의 영광을 이끈 비센테 델 보스케는 이니에스타를 가리켜 “완전무결한 축구선수다. 공격도 되고 수비도 된다.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고 직접 골을 넣을 수도 있다”고 표현했다. 이니에스타의 또 다른 미덕은 기복을 별로 타지 않는 꾸준함이다. 바르셀로나가 최고의 영광을 차지했던 2008-09시즌, 이니에스타는 스페인의 유력 잡지 <돈 발론(Don Balon)>에 의해 그 시즌 스페인 라리가에서 가장 꾸준했던 선수로 평가됐는데 이는 팀 동료 사비와 메시를 앞선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의 강자

2008-09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클럽 축구사에 아로새겨질 ‘꿈의 대결’로 관심을 집중시켰던)에서 패배한 직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웨인 루니는 이니에스타를 “세계 최고의 선수”라 칭했다. 그만큼 그 경기에서 이니에스타의 영향력이 컸던 까닭이다. 마이클 캐릭과 안데르송은 이니에스타의 기량 앞에 한마디로 무기력했다. 물론 이니에스타는 말 많고 탈 많았던 준결승에서도 첼시를 격침시키는 경기 막판 골을 터뜨려 바르셀로나를 구했던 바 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 대표팀의 영광을 이끈 이니에스타의 골은 첼시 전 골을 능가하는 드라마였다. 실력에 비해 언론을 적게 타곤 했던 그가 마침내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슈퍼 히어로가 되었고, 축구가 계속되는 한 지구상의 모든 축구팬들이 이니에스타의 골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부상으로부터 돌아온 이니에스타가 적절한 타이밍에 컨디션을 끌어올린 것이야말로 올여름 스페인이 누린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다.

‘질식사’의 주범 - 사비 에르난데스

사비 에르난데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은 역시 요한 크루이프에서 펩 과르디올라로 전해 내려오는 ‘토털 풋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비가 그 전통이 낳은 가장 대표적인 아들인 동시에,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토털 풋볼이 실제로 작동되게끔 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인 까닭이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중심에는 공히 ‘지휘관’, ‘조율사’, ‘디자이너’, ‘건축가’ 등으로 묘사될 수 있는 사비가 존재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너무나도 충실한 플레이를 펼치는 사비.

2009년 1월13일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스포츠 섹션은 놀라우리만치 어이없는 유형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FIFA 올해의 선수에서 5위 안에 입상한 선수들(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페르난도 토레스, 카카, 사비)이 함께 찍은 사진 위에 적힌 그 헤드라인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사비)”였다. 어쩌면 이는 토털 풋볼의 중심에 놓여 있는 사비의 플레이를 주의 깊게 관찰해본 적이 전혀 없거나, 혹은 이에 더하여 사비에 관한 각종 기록과 수치들을 아예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쓰여진 제목일 듯싶다. 조크라기보다 폄하의 인상을 풍겼던 이 헤드라인은 곧바로 많은 이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토털 풋볼은 한마디로 상대를 ‘질식사’시키는 축구다. 대부분 상대들과의 경기에서 우세함을 넘어 경이적인 수준의 볼 점유율을 가져가곤 하는 그들의 축구는 압박과 수비로 대항하는 상대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면서 먼저 지쳐버리게끔 한다. 사람이 아무리 빠른들 볼보다 빠르지는 않은 까닭이며, 높은 지역에서 공격을 지속시키는 측에 비해 수비하는 측의 육체적, 심리적 피로는 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유형의 토털 풋볼을 상대하는 팀들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공산이 크다. 남아공 월드컵 토너먼트 단계에서 스페인의 골들이 거의 다 경기 후반부에 터져 나왔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데 이렇게 상대를 죄어들어가며 종국에는 질식사에 이르게 만드는 범죄(?)의 ‘주범’ 혹은 ‘배후 인물’ 한 명을 지목하자면 그가 바로 사비다.

바르셀로나 DNA

사비는 그의 사수이자 스승인 과르디올라의 표현대로 “바르셀로나 DNA를 지닌 선수” 그 자체다. 11세에 바르셀로나 유스에 합류한 그 순간부터 사비의 축구는 크루이프식 전통을 상징하는 ‘receive, pass, offer’ 세 개의 단어로써 정의되어 버렸고, 그는 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수행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8세였던 1998년 여름 1군 경기에 데뷔한 사비는 데뷔 시즌부터 영향력을 발휘, 팀의 긴요한 자원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한다. 그가 클럽의 중심적인 플레이메이커로 올라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과르디올라의 부상 및 이적과도 맞물리는 것이었다. 이후 사비 특유의 재능은 프랑크 레이카르트 휘하에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특히 레이카르트가 2003-04시즌 후반 전투적인 미드필더 에드가 다비즈를 임대해온 사건은 사비의 커리어에 있어 적잖이 의미가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적절한 지원이 사비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킬 수 있음이 드러났던 까닭이다.


임무에 충실한, 너무나도 충실한

샤비는 자기 자신의 임무가 기본적으로 “패스”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기본적 임무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사나이다. 근년에 이르러 샤비는 참여하는 대회, 뛰는 경기마다 그 어떠한 선수(이니에스타를 비롯한 팀 동료들까지 포함해)보다 많은 패스를 하고 그 어떠한 선수보다 높은 성공률을 기록해왔는데, 통상 그는 경기당 100회 안팎의 패스를 뿌려 80~90%를 성공시키는 경이적인 플레이를 선보이곤 한다. 이는 패스 자체의 정확도는 물론이거니와 상대의 지속적 압박 속에서도 볼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테크닉, 탁월한 시야와 예측력, 여기에 뛰는 양까지 많아야만 가능한 수치다. 물론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템포와 리듬의 조절 또한 샤비의 전문 분야다.


마라도나의 꿈

아르헨티나의 결과가 기대치에 미달할 때마다 메시의 역량에 대한 논쟁이 펼쳐지곤 한다. “메시는 사비가 없으면 별것 아닌 선수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대표팀의 성적과는 별개로 메시는 여전히 엄청난 선수다. 거칠고 조직적인 수비가 횡행하는 작금의 그라운드에서 그는 비길 데 없이 놀라운 플레이들을 빈번하게 펼쳐 보이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고, 역으로 사비와 함께 뛴다고 해서 모두가 메시처럼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까닭이다. 그리고 사실상, 선수단 구성과 시스템의 차이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클럽과 대표 팀에서의 결과가 달라지는 선수는 비단 메시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한 듯하다. 바르셀로나에서 사비는 ‘메시가 메시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아주는 전문가와도 같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는 사비와 같은 선수가 없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은 이것일 게다. 메시는 사비의 유무와 상관없이 최고의 선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비가 존재하지 않는 팀에서 메시가 위대한 역사를 완성하기란 요즈음과 같은 환경에서는 결코 쉽지가 않다. 아르헨티나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가 ‘보유하고 싶은 스페인 선수’를 묻는 질문에 “사비”라 답했던 것은 매우 당연했다.


큰 경기엔 어시스트

2009년 5월2일과 2010년 4월10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레알 마드리드 팬들에게 사비는 악몽 그 자체였다. 레알이 2-6, 0-2로 패했던 그 두 경기에서 사비가 성공시킨 어시스트의 개수는 무려 여섯 개. 경기를 컨트롤하며 절묘한 패스를 뿌려대는 사비는 레알의 팬들에겐 메시보다도 더욱 얄미운 존재임에 틀림이 없었다. 큰 경기들에서 사비의 어시스트 솜씨가 빛난 사례들은 물론 더 있다. 스페인 대표 팀의 오랜 트로피 갈증을 풀게끔 했던 유로2008 결승전 토레스의 결승골 어시스트의 주인공도 사비였다. 또 2008-09시즌 챔피언스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에서 메시가 작렬시킨 쐐기 헤딩골도 사비의 발끝으로부터 시작됐었다.

스페인 최고? 어쩌면 세계 최고? - 다비드 비야

2005-06시즌부터 2009-10시즌까지의 다섯 시즌 동안, 다비드 비야가 발렌시아 소속으로 리그 경기들에서 터뜨린 골수는 모두 ‘108골’이다. 이는 다른 세계 정상급 골잡이들의 실적을 능가하는 수치다. 같은 기간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맨체스터 유나이티드/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101골을 터뜨렸고, 디에고 밀리토(사라고사/제노아/인터밀란)가 99골, 사무엘 에토(바르셀로나/인터밀란) 96골,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가 87골, 페르난도 토레스(아틀레티코 마드리드/리버풀) 84골, 웨인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유벤투스/인터밀란/바르셀로나)가 80골씩을 터뜨렸으며 디디에 드록바(첼시)의 리그 득점은 74골이었다. 물론 각자의 조건들은 모두 다르다. 각자가 소속 클럽에서 맡고 있는 포지션 및 역할, 클럽들의 시스템에 모두 차이가 있으며, 부상으로 경기를 뛰지 못한 기간이 길었던 이들도 있다. 또한 각 클럽이 처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선수기용에 변화가 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비야가 전 세계 그 어떠한 선수 이상으로 꾸준하게 팀 득점에 기여해왔다는 사실 한 가지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비야가 얼마나 좋은 공격수인지를 말해주는 기록과 통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특히 근년에 이르러 비야는 ‘클럽 경기와 국가대표 경기를 종합할 경우’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나이였다. 실례로 2009년 한 해 동안 비야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대표 팀에서 도합 ‘43골’을 터뜨렸는데, 이는 메시(41골), 드록바(39골), 에토(33골), 이브라히모비치(32골), 루니(31골), 호날두(30골), 토레스(29골)의 기록을 모두 뛰어넘는 수치다.

비야는 스페인이 35경기 연속 무패(브라질과 타이기록)를 달렸던 기간 동안에도 22골을 작렬시켜 스페인 무패 행진의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당연하게도 대형 토너먼트에서의 골수 또한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2006 독일월드컵에서 3골을 잡아냈던 비야는 유로2008에서는 4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고 2009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3골, 그리고 남아공에서는 5골을 도맡았다. 한 마디로 스페인 대표팀의 계속되는 영광은 비야의 꾸준한 골 퍼레이드와 더불어 이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공격수, 다비드 비야.


기록의 사나이

비야는 스페인 축구의 적잖은 득점 관련 기록을 갈아치웠고, 계속 갈아치울 태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비야의 A매치 골수는 43골로 라울 곤살레스가 보유하고 있는 스페인 대표팀 최고 기록 44골에 단 1골 차로 접근한 상태. 기록 경신은 한 마디로 시간문제라 하겠다.

하지만 단순한 골수 이상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비야의 ‘경기당 골수’. 비야의 경기당 0.662골(65경기 43골)은 라울의 0.431골을 월등히 능가하는 수치이고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0.377골과는 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비야의 경기당 골수를 능가하는 스페인 역대 선수는 단 두 명에 불과한데, 그들은 다름 아닌 1940년대의 텔모 사라(경기당 1골)와 1950년대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경기당 0.742골)다. 즉 비야는 ‘축구사의 전설’ 디 스테파노 이후 반세기 만에 스페인이 보유한 최고의 무기인 셈. 사실상 비야의 경기당 골수는 ‘당대’가 아닌 ‘역대’ 레벨에서 견주어져야 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브라질의 ‘신 축구황제’ 호나우두의 A매치 기록이 경기당 0.639골, 독일의 득점기계 미로슬라프 클로제도 0.515골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야의 득점률을 확실히 능가할 법한 90년대 이후의 골잡이를 떠올리기란 자체로 쉽지가 않은데, 아마도 호마리우(0.786골)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0.718골) 정도가 뇌리에 떠오르는 이름일 것이다.

또한 비야는 스페인 축구사를 통틀어 월드컵 본선에서 가장 많은 골(8골)을 기록한 사나이가 되었고, 부트라게뇨와 더불어 단일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5골)을 터뜨린 선수로도 기록됐다. 그는 6경기 연속(2008년 9월 보스니아 전~2009년 2월 잉글랜드 전)으로 득점에 성공한 최초의 스페인 대표 선수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비야는 전 소속팀 발렌시아에서도 의미 있는 기록들을 달성했는데 2005-06시즌 비야가 터뜨렸던 리그 25골은 그를 발렌시아 역사상 ‘최고의 데뷔 시즌’을 보낸 선수로 남게 했으며, 2008-09시즌의 28골은 마리오 켐페스, 프레드락 미야토비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라리가 시즌 최다골’ 타이기록이었다. 물론 비야는 경기당 골수 면에서는 캠페스와 미야토비치를 모두 제쳤다.


완벽에 가까운 공격수

비야는 클럽과 대표팀을 가리지 않고 요즈음 축구에서 보기 드문 수준의 골 행진을 꾸준하게 펼쳐온 공격수다. 어쩌면 이러한 기록은 자칫 비야를 ‘골만 넣는 기계’와 같은 선수로 오해하게끔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실상 비야는 현대 축구가 공격수들에 요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다재다능함을 소유하고 있는 사나이다.

우선 비야는 빠르다. 훌륭한 터치 솜씨에다 수비수를 따돌릴 수 있는 재간도 지녔다. 프리킥과 코너킥을 처리할 수 있으며 ‘양발’이 모두 날카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가 뛰어나다. 이는 그가 영리하면서도 이타적이기에 가능한 일인데, 실례로 비야는 라리가에서 시즌 도움왕 자리에 오른 적도 있다(2006-07시즌).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비야는 중앙과 측면, 최전방과 처진 위치를 가리지 않고 공격의 거의 전 영역을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 공격수’다. 175cm의 신장이 작게 느껴질 순 있으나 공격수로서 충분히 강인하며, 전방에서의 침착성과 기본적인 성실성 또한 비야가 지닌 미덕이다.

이런 까닭에 비야의 골들은 매우,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이는 비야를 상대하는 수비진이 대책을 강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 그의 많은 멋진 골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데포르티보(오른발)와 칠레(왼발)를 상대로 터져 나온 장거리 슈팅들, 잉글랜드와 온두라스 수비수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재간 넘치는 골들, 그리고 페널티킥을 놓치고 나서 단 23초 만에 그 실수를 만회해버린 남아공 전의 골(가슴 트래핑에 이은 발리킥) 등은 기억될 만한 장면들이다.


스포르팅에서 누 캄프까지

1981년 12월 3일 아스투리아스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비야는 2부리그 스포르팅 히혼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한다. 비야는 데뷔 직후부터 크게 두각을 나타내 스포르팅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스포르팅의 팬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비야를 1970년대의 키니(다섯 차례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던 공격수) 이후 자신들이 보유했던 가장 뛰어난 공격수로 기억하며 변함없는 애정을 보내고 있다. 실상 ‘스포르팅이 낳은 두 전설’ 키니와 비야는 비길 데 없는 골 사냥 솜씨는 물론, 재능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여러모로 유사성이 있으며 훗날 바르셀로나에 입성하는 것까지도 똑같다.

스포르팅에서 사라고사로 둥지를 옮긴 비야는 드디어 라리가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첫 시즌인 2003-04시즌 비야는 리그에서만 17골을 터뜨려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고, ‘로스 갈락티코스’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했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도 자신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킴으로써 사라고사의 3-2 승리에 일조했다. 2005년 여름 발렌시아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비야는 그로부터 5년간 발렌시아의 꾸준한 에이스로서 맹활약을 펼친다. 그의 활약상을 되돌아볼 때 발렌시아가 비야를 데려오는 데 투입했던 이적료 1200만 유로는 실로 동전 한 닢조차 아깝지가 않은 수준. 그리고 마침내 2010년 여름, 비야는 자신의 선수 경력 처음으로 ‘거대 클럽’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4000만 유로에 비야를 얻은 클럽은 바르셀로나. 대표팀에서부터 이미 발을 맞춰온 사비, 이니에스타에다 메시까지 존재하는 바르셀로나에서 비야가 보여줄 플레이는 벌써부터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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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0. 07. 26.

출처

제공처 정보

  •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

    글쓴이 한준희는 2003년 문화방송에서 축구 해설을 시작, 2005년부터는 한국방송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이다. 유럽 5개 리그, 챔피언스리그, 월드컵, 유럽선수권, 코파아메리카, 아프리칸 네이션스컵, 클럽월드컵, K리그, 실업축구, 여자축구에 이르는 광범위한 중계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한국방송의 <일요 스포츠 쇼>, <비바 K리그>,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등의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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