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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세리에 대해서 A4용지 3분의 2분량으로 조사해주세요...
aktn**** 조회수 2,509 작성일2005.12.11

숙젠데 좀 조사해주세여...

장황하게 해주지 말고

백과사전에서 퍼오면 안되고여

자세하면서도 알기 쉽게 해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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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제12회 한국주니어대회 여고부 우승
1995한국골프라이터스협회 올해의 선수상 특별상
1998미국 LPGA 우승
1998골프다이제스트우먼선정 올해의 선수
1998체육훈장 맹호장
1998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신인상
1999미국 LPGA투어 삼성월드챔피언십 우승
1999대한골프협회 98년도 최우수선수(MVP)
2001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개막전 우승(합계 13언더파 203타)
2001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투어 롱스드럭스챌린지 우승
2001한국여자프로골프 대상
2002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오피스디포챔피언십 우승
2003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제이미 파 크로거클래식 우승
2003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배어 트로피(Vare Trophy)
2004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제이미파 오웬스코닝클래식 공동준우승
2004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미켈럽울트라오픈 우승
2004일본여자프로골프 마스터스GC레이더스대회 공동11위
2004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CJ나인브릿지클래식 공동11위
2004한국여자프로골프대상 공로상 및 특별상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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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l****
초수
골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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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골퍼 박세리 말씀하시는 거죠?

검색을 해보시면 박세리의 기록이나 프로필은 잘 나와있을 거에요.

하지만 박세리는 좀 더 특별하죠.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프로선수이자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스포츠스타니까요.

1977년생인 박세리는 고교시절부터 오픈대회(프로와 아마가 모두 출전하는)를

석권하게 됩니다. 골프가 직업인 프로선수들을 제치고 여고생인 박세리선수가

국내무대를 석권하기 시작한거죠. (당시 박세리의 라이벌은 동갑내기인 김미현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 드디어 프로에 데뷔합니다. 아직 스무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모든 프로들을 제치고 4승을 거두며 한국골프의 여왕이 되었죠.

(그 해 총 대회가 10여개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신인이었던 김미현선수가 3승을 했죠.

신인이었던 두 선수가 대회의 절반을 우승한거죠)

그 후 박세리는 삼성의 후원을 받고 미국진출을 노립니다. 1997년에는 국내무대는

뒤로하고 LPGA진출을 시도했으며, Q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1998년

미국무대에 진출하게 되었죠. 그때까지 골프의 본고장인 미국무대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었기에 박세리의 미국 진출은 기대도 있었지만 염려도 있었죠. 당시에는 한국 유명

골퍼들은 일본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암튼 삼성에서도 몇년간은 적응기를 가질거라고 생각했고 1998년에는 1승만 거두어도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을텐데, 무려 4승을 거두었습니다.

더구나 메이져대회 2승이 포함되어있었죠. 동양에서 온 박세리는 첫 해에 각종 기록과

화제를 집중하면서 미국무대를 평정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껏 어떤 선수도 이런 충격적인

데뷔를 하지 못했죠. 여자 타이거우즈란 말이 딱 어울렸죠.

그 해 세계언론이 주는 각종 '올해의 여성 스포츠상'을 받기도 했고 가장 영향력있는

아시아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타임지에도 나왔습니다.

쉬운 말로 소렌스탐이나 샤라포바, 비너스 윌리엄스같은 선수들이 받는 상을 우리의

박세리가 받은거죠.

무엇보다 US오픈에서 보여준 맨발의 연못샷은 절정이었습니다.

IMF로 풀 죽어있던 그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같은 샷으로 우승을 만들어냄으로써

박세리는 국민적 영웅대접을 받기도 했죠.

1999년에도 4승을 거두며 박세리는 소렌스탐, 웹과 함께 세계골프계의 '빅3'로 불리게

됩니다. 2000년에는 1승도 못 거두고 부진했습니다.

또한 남자친구로 인해서 성적이 부진하다, 자신은 미국인이 되고싶어한다, 성공하더니

변했다 라는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박세리는 2001년 2002년 각각 5승을 거두며 소렌스탐과 양강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2003년에는 최고의 영예인 '명예의 전당' 입성 조건을 충족하죠. 즉 골퍼로서 경기력이나

성과가 최고라는 것을 미국에서도 인정받게 된겁니다.

그 후로는 거짓말처럼 부진의 늪에 빠집니다. 정신적인 슬럼프다, 너무 골프에만 매달렸다

하며 말이 많고 부상까지 겹치면서 올해에는 최악의 한해를 보냈습니다.

박세리가 다시 재기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까지 박세리가 보여준

기록과 업적만으로도 우리의 스포츠영웅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박세리 개인으로 뿐 아니라 그 후 많은 한국골퍼에게 새로운 길과 기준을 제시한거죠.

박세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골프 한류열풍이 있었으니까요.

다시 화려하게 재기하기를 바랍니다..

200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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