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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2. 의정부 백영수미술관
정치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2. 의정부 백영수미술관

하얀 건물에 아치형 창문 달린 경당 ‘눈길’
아담한 마당·내부 곳곳에 모자상 배치
어머니 향한 애틋한 마음 고스란히 담겨
손바닥 만한 드로잉 작품 구경 재미 더해
소박하지만 정겨운 삽화·조형물에 ‘감탄’

백영수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즐겼고 관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소요산행 1호선 전철을 타고 도봉산역과 의정부역 사이에 있는 망월사역에서 내려 스마트폰으로 미술관까지 거리를 찍어보니 600m가 나온다. 2번 출구로 나와 도봉산 방향의 골목길로 접어들어 5분쯤 걸으니 하얀 2층집 백영수미술관(관장 김명애)이 나타난다.

■ 몽당연필로 그린 ‘백영수 드로잉전: 1부 주머니 속 이야기’

터가 좋아서일까, 11월 하순인데도 미술관 담장에 빨간 장미꽃이 피어 있다. 고개 들어 미술관 외벽에 걸린 그림을 찬찬히 바라본다. 대형 캔버스에는 나무가 서 있는 언덕을 배경으로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고, 그 밑에는 철골로 만든 모자상이 설치되어 있다. 아담한 마당에도 모자상 조형물이 또 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상은 2년 전에 작고한 화가 백영수(1922~2018)의 분신인 셈이다. 박물관은 지난 18일부터 ‘2020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으로 ‘백영수 드로잉전-1부 주머니 속의 이야기’를 전시하고 있다. 김명애 관장이 다음 달 29일까지 열리는 드로잉전에 출품된 작품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분의 모든 주머니 속엔 몽당연필이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몽당연필은 스케치용 부드러운 연필심이 아니고 딱딱하여 가늘고 흐리게 써지는 것들이었어요. 작은 연필을 쥐고 그리는 것이 답답하고 안쓰러워 연필을 사서 정성껏 깎아 연필 통에 꽂아 놓으면 그것은 어느새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어요. 스케치하기 좋은 연심의 연필을 톱으로 짧게 잘라 놓아도 여지없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지요. 그 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두 손을 들어버렸어요. 휴대하기 좋은 스케치북을 사 놓아도 한 번도 사용하질 않고 영수증 뒷면, 휴짓조각, 냅킨, 작은 공책에 그렇게 흐릿하게 그렸어요. 왼손으로 몽당연필을 잡고 작은 종이에 그렸습니다.”

백영수의 미공개 드로잉 30여점 및 책표지화‚ 몽당연필 등이 전시된 백영수 드로잉展이 열리고있다.<br>
백영수의 미공개 드로잉 30여점 및 책표지화‚ 몽당연필 등이 전시된 백영수 드로잉展이 열리고있다.

드로잉전을 관람하기 전에 구효제 전시해설사의 안내로 작가의 숨결이 남아 있는 작업실부터 둘러본다. 마치 며칠 전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린 듯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방금 김 관장이 들려준 열댓 개의 몽당연필과 붓이 가득 꽂힌 필통과 물감으로 얼룩진 팔레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방 한가운데 놓인 의자는 조금 전까지 주인이 앉아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다. 작은 용기가 가득한 진열장을 유심히 살펴보자 구 해설사가 사연을 들려준다. “두 분이 모두 소금 그릇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셨다고 해요. 여행하면서 사 모으신 것이라고 해요.” 50년 전 부부가 살았던 아담한 집 뒤로 도봉산 봉우리가 우뚝 솟은 흑백사진이 보인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미술관 주변에 건물이 가득 들어차서 이제는 예전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어 유감이다. 방안에 걸린 ‘가족’은 백영수 화백의 내면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작은 문을 열고 옆방에 들어서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백 화백이 생전에 기도하고 주일 미사를 드리던 ‘경당’이다. 아치형 창문이 있는 경당은 밝고 아늑한 공간이다. 입구 맞은편 안쪽에는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 성경책이 펼쳐진 탁자에 작가의 사진이 놓여 있다. 청색 목도리를 두른 사진 속의 인물은 온화한 눈길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의자가 여럿 놓여 있고 좌우 벽에도 ‘모자상’이 걸려 있으니 작은 전시실인 셈이다.

전시된 드로잉 작품들은 대부분 손바닥만큼 작다. ‘모자상’부터 작은 지면에 담긴 그림에 쓰인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의 집이 어디냐 앞장서거라’, ‘사랑이 무엇 눈물의 씨앗’, ‘미라보 다리 세느강이 흐르고’, ‘뾰쪽뾰쪽한 도봉산도 있고’, 커다란 눈동자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는 그림에는 ‘손주’라고 쓰여 있다. 어느새 곁에 온 김 관장이 들려준다. “이렇게 그려졌던 그림들은 얼마 후 대형 작품으로 탄생했지요.”

백영수는 1960년대 전후부터 신문이나 월간지의 표지나 삽화를 많이 그렸다. 전시실 한쪽에는 그가 그린 표지삽화가 실린 1950~1970년대 잡지들이 전시돼 있다. 그 속에서 ‘소월시집’과 ‘김광섭시집’의 표지화는 물론 우리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의 표지도 발견한다.

작가의 아내인 김명애 관장이 옛 사진을 보고 있다.<br>
작가의 아내인 김명애 관장이 옛 사진을 보고 있다.

■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백영수 자신

백영수는 70년대부터 어머니와 아이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그림 속의 어머니와 아이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지 않다. 가로로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이 등장하게 된 까닭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들려주었다. “6ㆍ25동란 중 낙동강 하류 지역에 피난을 갔는데 한 초가에서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아이를 봤어요. 지쳐 있는지, 기대 있는지,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인 거예요. 그 뒤로 인물을 그리면 정자세가 아니라 자꾸 갸우뚱하게 그려지게 돼요.”

2011년 백영수가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그를 의정부 작업실(현재의 미술관)까지 모신 평론가 김윤섭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연을 이렇게 전해준다.

“그날도 차 안에서 조그만 볼펜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어깨너머로 몰래 봤더니 역시나 ‘모자상’이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엄마의 모습인데, 근데 희한하게 몇 년부터 몇 년까지라는 연도를 표기한 것은 알겠는데, 꼬마 아이 얼굴에 수염이 그려져 있었어요. 화백님께 ‘꼬마 얼굴에 수염이 왜 있는 건가요’라고 물었더니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씩 웃으시면서 ‘아이일 때 한국을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이 아이가 수염이 나 있어.’이러시는 거에요.”

미술관은 생전 백영수(1922~2018) 가 거주하며 작업하던 주택을 개조해 2018년 4월 개관했다.<br>
미술관은 생전 백영수(1922~2018) 가 거주하며 작업하던 주택을 개조해 2018년 4월 개관했다.

■ 한 세기를 건너간 작가의 오롯한 흔적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난 백영수는 두 살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 현해탄을 건너 일본 오사카에 정착한다. 유년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백영수는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해 유화를 배운다. 1945년 미군의 폭격으로 살던 집이 사라지자 백영수는 어머니와 함께 맨몸으로 귀국한다. 일본인 여교사의 주선으로 목포고등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조선대학 박철웅 초대 총장의 초대를 받고 광주로 거처를 옮겨 천경자, 윤재우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 미술과를 설립한다. 1947년 광주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상경한 그는 화신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어 이응로, 남관, 이쾌대, 장욱진 같은 작가들과 교류하고, 같은 해 제1회 조선미술전(국전)의 심사를 맡았다. 이 무렵 잡지 ‘국제보도’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유엔 한국위원단 공보관 프랑스인 알베르그랑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알베르그랑의 주선으로 1948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고 많은 작품을 팔아 생활의 안정을 얻는다. 1950년 전후에 백영수가 어울린 사람들은 박수근, 이중섭 같은 화가는 물론 박목월, 모윤숙, 조지훈 같은 문인들이다. 이 시절의 아련한 풍경은 그가 펴낸 ‘검은 딸기의 거울’(전예원), ‘백영수의 1950년대 추억의 스케치북’(열화당)에 실려 있다. 특히 백영수미술문화재단에서 펴낸 ‘성냥갑 속의 메시지’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화가, 문인들과의 흥미로운 일화가 가득하다.

의정부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던 백영수는 1977년 프랑스로 이민을 떠난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요미우리화랑의 전속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해외에 머물던 35년 동안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미국 뉴욕,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여러 도시에서 100여회의 전시를 열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모자상.<br>
모자상.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별

2011년 1월 백영수는 35년의 긴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외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탓에 백영수의 작품은 국내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2012년에 특별 초대전을 열어준다. 1947년 조선대 미술과를 창설로 맺은 광주와의 특별한 인연이 66년 만에 다시 이어진 것이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2013년까지 열린 ‘백영수 회화 70년’은 한국 문화계에 백영수를 알리는 전기가 된다. 2016년 서울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해 정부는 해외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백영수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되는 올해에는 고향 수원에서 백영수를 초대했다.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열린 ‘백년을 거닐다: 백영수 1922~2018’은 코로나19로 관람이 제한되는 악조건에서도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젊은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반갑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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