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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스터섬에대해서
y1**** 조회수 7,720 작성일2007.01.09

저희 수학선생님이그러는데요

이스터섬의석상은100톤이넘는데요

그리고그섬의 원시인들은옛날에멸종햇고

그석상을끌어서 산에까지끌고갈수도없고

요즘도불가능하고

끌고간자국도없고

저희선생님꼐서

UFO가떨어트리고간거래요

이스터섬의석상모양은 먼 우리후손의 얼굴모양이래요

UFO는 먼 우리후손의 타임머신이래요

맞는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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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다 추측이며 가설들입니다.

님의 수학선생님의 말씀역시 가설중의

하나인데... 가장 희박한 가설이죠

 

화산지대의 바위로서.. 그 주변의 암석을 조각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가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즉, UFO가 떨어트렸고, 먼 후손의 행동

이라는 것은 가설입니다.

맞다고.. 틀리다고 말은 못합니다.

<!-- //참고 자료 VIEW -->
모아이의 머리들 / 칠레 해안의 서쪽의 남태평양상에 있는 이스터섬 유적. 라노라라쿠 화산의 연한 바위로 만든 거석상 '모아이'는 지금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어 갖가지 억측이 난무한다.
다음은 Jared Diamond 교수의 이스터 섬의 몰락 과정에 대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문을 번역하지는 않았다.



Easter's End
by Jared Diamond
이스터 섬의 종말
다이아몬드

Published in Discover Magazine on 08/01/95



겨우 몇 세기 안에, 이스터 섬의 사람들은 그들의 숲을 일소하고, 그들의 식물들과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그들의 복잡한 사회를 혼란과 사육제로 빠져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도 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가?
인간 역사 중 가장 주의를 끄는 신비 중 하나는 사라진 문명들에 의해 제기되는 것들이다. 크메르, 마야, 또는 아나사지의 버려진 건축물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구조물들을 세운 사회들이 왜 사라졌나?

그들의 사멸은 다른 동물들, 심지어 공룡들의 멸종이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들 잃어버린 문명들이 아무리 이국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 문명의 건설자들은 우리와 같은 인류들이다. 우리도 똑 같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아마 언젠가는 뉴욕의 고층 빌딩들도 버려져서 풀들이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m 마치 앙코르와트나 티칼의 사원들처럼.

모든 그러한 사라진 문명들 중에서, 이스터 섬의 전의 폴리네시아 사회 문명은 그 신비와 유일하다는 점에서 단연 앞선다. 그 신비는 그 섬의 거대한 석상들과 황량한 풍경들에서 연유하지만 , 특정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서 더욱 고양된다: 폴리네시아 인들은 궁극적인 이국적 낭만과 많은 어린 애들과 어른들의 천국의 비전을 대표한다.

64 평방 마일의 면적의 이스터 섬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서식지이다. 가장 가까운 대륙(남아메리카)에서 2000마일보다 더 먼 남태평양에 있고, 가장 가까운 서식 가능한 섬(Pitcairn)에서 1400마일 떨어져 있다. 적도 이남에 위치해 있고 기후는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화산 활동으로 생겨났으므로 토양은 비옥하다. 이론상으로는 , 이런 축복 받은 환경은 이스터 섬을, 나머지 세계들이 처한 문제들과는 동떨어진 , 미니 천국으로 만들었어야 한다.

그 섬의 이름은 네덜란드 탐험가 Jacob Roggeveen에 의한 1722년 부활절(4월5일)의 “발견”에서 유래한다. Roggeveen의 펏 인상은 천국이 아니라 황무지의 그것이었다 : “멀리서 이스터 섬은 모래섬으로 보였다, 시든 풀들과 목초, 불태워진 잡목들을 우리는 모래로 생각했고 , 황량한 모습은 특이한 빈곤과 불모의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Roggeveen이 본 섬은 10피트 이상의 나무나 관목이 하나도 없는 초지였다. 근대 식물학자들은 이스터 섬에 자생하는 고등 식물 47종들만을 확인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풀과, 사초들과 양치식물들이었다. 이들 목록에는 작은 나무 두 종과 덤불 관목 2종을 포함한다. 그러한 식물 군들을 갖고는 로게벤이 마주친 섬사람들은 이스터 섬의 차갑고, 습하고, 바람이 많은 겨울 동안에 그들 자신들을 따뜻하게 해줄 땔감 원료가 없었다. 토착 동물들은 곤충보다 더 큰 것은 , 박쥐, 육지 새, 달팽이, 도마뱀을 포함하여 한 종도 없었다. 가축으로는, 유일하게
닭들만 있었다.
18-19세기에 걸쳐 유럽 방문자들은 이스터 섬의 인구를 2000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그 섬의 비옥한 토양을 생각하면 근소한 수였다. 쿡 선장이 1774년에 잠시 방문했을 때 인식했듯이, 그 섬 주민들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었다(쿡 선장이 데리고 온 타이티 사람이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 폴리네시아 인들이 위대한 해양민족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로게벰과 쿡 선장의 배들을 보러 온 이스터 섬 사람들은 헤엄치거나 로게벤이 “형편없고 부서지기 쉬운”이라고 묘사한 카누를 젓고 왔다. 그들의 배는 “다종의 작은 널들과 가벼운 안쪽 목재들을 모아 놓았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섬세한 꼬인 실들로서 영리하게 기웠다....그러나 ,카누의 수많은 이음매들을 단단히 하고 그 틈을 메 꿀 재료들과 지식이 그들에겐 없었다. 따라서 카누들은 물이 많이 새고 그들은 물을 퍼내는데 시간의 반을 보냈다”고 로게벤은 적었다. 카누들은 10피트 밖에 안 길었고 많아야 두 사람을 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섬 전체에 걸쳐 단지 3-4개의 카누만이 관찰되었다.


그러한 미약한 배로서는, 폴리네시아 인들은 가장 가까운 섬으로부터라도 이스터 섬을 식민화 하지 못했을 것이고 , 고기 잡으러 멀리 바다로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게벤이 만났던 섬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로게벤의 방문 이후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스터 섬의 바위나 산물이 단 하나라도 다른 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 최초의 정착민들이나 유럽인들 이외의 사람들에 의해 그 섬에 가져왔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스터 섬에 살고 있는 260 마일이나 떨어진 Sala y Gomez 산호들을 방문했던 기억들을 주장했다. 그 섬의 조상들은 이스터 섬에서 그 산호까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을까? 또는 다른 곳에서 이스터 섬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이스터 섬의 가장 유명한 모습은 거대한 석상들인데, 그들 중 200개 이상이 한 때는 해안가를 따라서 일렬로 거대한 석대에 세워 있었다. 최소한 700게 이상이, 완성도가 제각각인데, 채석장이나 채석장과 바닷가 사이의 길들에 버려져 있었는데, 마치 조각가들과 운반 인부들이 그들의 도구를 내던져 버리고 걸어 가버린 것 같다. 세워진 상들의 대부분은 단 하나의 채석장에서 조각되고 최장 6 마일 까지 운송되었다-33 피트의 높이에 무게가 82톤이나 나감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상들은 65 피트의 높이에 무게는 270톤까지 되었다. 석대도 똑같이 엄청 컸다: 500 피트 길이에 10 피트 높이에 그 표면은 무게가 10톤이나 나가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게벤 자신도 그 석상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금방 인식했다: “그 석상들은 처음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강한 밧줄과 기계를 만들기 위한 무겁고 두꺼운 목재들이 없는 이 사람들이 그러한 상들을 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게벤은 그 섬사람들이 바퀴도, 가축도 , 그들의 근육 이외의 동력도 없었다는 것을 부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 거대한 석상들을 수송했을까? 더욱 신비한 것은 그 석상들은 1770년까지는 여전히 서 있었지만 , 1864년에는 섬사람들 자신에 의해서 그들 모두가 누여졌다. 우선 그들이 왜 그 석상들을 조각했을까? 그리고 왜 그만두었을까?

그 석상들은 로게벤이 1722년에 본 사회와는 다른 사회를 함의한다. 그들의 수와 크기는 200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말한다. 다들 어떻게 되었나? 더구나, 그 사회는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였음에 틀림없다. 이스터 섬의 자원들 은 섬 전체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석상에 가장 좋은 돌들은 이스터 섬의 북동 끝자락에 가까운 라노라라쿠에서 채석되었고: 어떤 석상들을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왕관에 쓰이는 붉은 돌들은 남서 내륙 지역의 푸나파우에서 채석되었고: 조각도구용 돌들은 대부분 북서쪽에 있는 아로이에서 왔다. 최고의 농경지는 남쪽과 동쪽에 있고 , 최고의 어획 지는 북쪽과 서쪽의 해안들이었다. 이 모든 재화들을 채굴하고 재분배하는 하는 것은 복잡한 정치적 조직을 요구했다. 그러한 것이 이 불모지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는가?

이스터 섬의 신비는 250 년간에 걸쳐 수백 권의 억측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유럽인들은 폴리네시아 인들이-보통 “그저 야만인들”이라고 특징지어지는-이 석상이나 아름답게 건설된 석대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1950년대에, Heyerdahl은 폴리네시아가 아메리카의 발달된 사회들에 의해서 정착되었고, 그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는 대서양 건너의 구세계의 발달된 사회들로부터 문명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Heyerdahl의 뗏목 항해는 그러한 역사 이전의 대양 항해를 증명하려 하였다. 1960년대에 외계인의 지구 방문설의 신봉자인 스위스 작가 Erich von D?iken은 이스터 섬의 석상들은 초현대적 도구를 소유한 지적 존재들의 작품이었다고 주장했다.

Heyerdahl과 Erich von D?iken은 둘 다 이스터 섬사람들이 미주 대륙이 아니라 아시아로부터 온 전형적 폴리네시아 인들이고 그들의 문화는(석상을 포함하여) 폴리네시아 문화에서 성장한 것이라는 압도적 증거들을 무시했다. 그들의 언어는 , 쿡 선장이 벌써 결론 내렸듯이 폴리네시아 언어였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하와이 인들과 마퀘스 인들과 밀접한 동 폴리네시아 방언을 말했다. 어휘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A.D.400년 이후에 고립된 방언이다. 12 개의 이스터 섬의 해골의 DNA 검사는 그들이 폴리네시아 인들이라는 것을 또한 보여주었다. 그 섬사람들은 바나나, 타로 토란, 고구마, 사탕수수 그리고 뽕나무들을 재배했는데, 이것들은 전형적인 폴리네시아 작물이다. 그들의 유일한 가축은 닭인데, 이것 또한 전형적인 폴리네시아 가축이고 궁극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온 것이다. 최초의 정착민들의 카누에 같이 묻어 온 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정착민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나? 과거의 황당한 이론들은 3 분야의 실천가들에 의해 모여진 증거들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고고학, 꽃가루 분석, 그리고 고생물학.

헤에달의 1955년 탐사 이후 이스터 섬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계속되어 왔다.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가장 이른 인간 활동은 A.D.400-700 년 경이다. 이것은 언어학자들에 추정된 인간 정착 시기인 400 년경과 대략 일치한다. 석상 건설은 1200년-1500 년경에 피크를 이루었고 그 이후는 거의 없었다. 고고학적 사이트들의 인구 밀도는 큰 인구를 제시한다: 7000명으로 추정하는 고고학자가 가장 많지만 2만 명까지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스터 섬의 현재의 황량한 풍경은 한 때는 필요한 나무들을 지지했을까?
그 질문은 꽃가루 분석 기법에 의해 대답되어 질 수 있는데, 늪이나 연못의 침전물에 구멍을 뚫는데, 가장 최근의 침전물은 맨 위에 상대적으로 예날 것은 밑에 있다. 각 층의 연대는 방사능 탄소 방법에 의해 연대를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힘든 작업이 시작된다: 수만 개의 꽃가루들을 현미경으로 조사하고 , 세고, 식물 종으로부터 알려진 현대의 꽃가루들과 비교하여 각각의 꽃가루 들을 만들어낸 식물 종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스터 섬에 대해서는
이 작업을 수행한 과학자는 뉴질랜드의 머시 대학교의 John Flenley와 영국의 헐 대학의 사라 킹 이었다.

John Flenley와 킹의 영웅적 노력은 이스터 섬의 역사 이전의 풍경들에서 나온 놀라운 새 그림들에 의해서 보상되었다. 최소한 인간의 도착 3만년 동안. 그리고 폴리네시안 인들의 정착 초기에는 이스터 섬은 전혀 황무지가 아니었다. 아열대 나무들과 덤불 관목들 숲이 풀들과 양치류와 허브들 위를 덮고 있었다. 숲에는 나무 데이지들, 밧줄을 만드는 하우하우 나무들과 밀도 높은 땔감으로 쓰이는 토로미로 나무들이 자랐다. 숲에서 가장 공통적인 나무는 지금은 이스터 섬에서 사라졌지만 전에는 너무나 풍부해서 침전 기둥의 아래층은 그것들의 꽃가루들로 빽빽이 채워진 야자 종이었다. 이스터 섬의 야자는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 칠레의 와인 야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칠레 야자는 높이는 82 피트까지 지름은 6 피트까지 자란다. 높고 가지가 없는 이스터 섬의 야자는 석상들을 운반하고 세우고 커다란 카누를 건설하는데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야자는 또한 귀중한 식량 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칠레 친족은 칠레 사람들이 그것으로 설탕, 시럽, 꿀, 와인 들을 만드는 수액뿐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단풍 시럽에 해당하는 것으로 배를 채우지 못할 때 이스터 섬의 최초의 정착민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뉴욕 박물관의 David Steadman에 의한 최근의 발굴은 이스터 섬의 원래의 동물 세계에 대한 깜짝 놀랄 그림을 제공하였다. David Steadman의 이스터 섬에 대한 기대는 물고기가 압도적으로 고고학적 사이트에서의 주 식량으로서 고대 폴리네시아 쓰레기 더미에서의 뼈들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다른 폴리네시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의하여 조건 지워졌다. 그러나 이스터 섬은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산호초가 살기에는 너무 차갑고 , 절벽들로 이루어진 연안은 몇 군데에서만 얕은 물 고기잡이를 허용한다. 초기(900-1300)의 쓰레기 더미에서 뼈들의 1/4 이하가 물고기 뼈였다; 대신에 모든 뼈의 거의 1/3 정도가 돌고래 뼈였다.


폴리네시아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돌고래는 버려진 음식 뼈들의 1% 이하를 구성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폴리네시아 섬들은 뉴질랜드의 지금은 멸종한 모아나 하와이의 지금은 멸종한 날지 못하는 거위들과 같은 새나 포유류들의 형태로 동물 식량을 얻었다. 대부분의 다른 섬사람들은 돼지와 개를 사육한다. 이스터 섬에서 확인된 돌고래는 가장 흔한 돌고래로서 165 파운드까지 무게가 나간다. 돌고래는 일반적으로 먼 바다에 살기 때문에 연안에서 사냥도 불가능이고 창으로 바다 가에서 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신에 그것은 멸종된 야자나무로 만든 커다란 카누에서 작살로 잡았음이 틀림없다.


Steadman은 돌고래 고기 외에도 초기 폴리네시아 정착민들은 바다 새들을 먹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새들에게는 최소한 인간들이 오기 전까지는 이스터 섬의 고립과 포식자의 결여는 이상적 서식지였다. 이스터 섬에 서식한 눈에 띄는 새들로는 신천옹, 가마우지, 군함새, 섬새 과 물새, 바다제비, prion, shearwater,제비갈매기 그리고 열대 새들이 있었다. 최소한 25개의 둥지 트는 종들을 갖고 있는 이스터 섬은 폴리네시아에서 그리고 아마도 태평양 군도 전체에서 가장 풍부한 새 서식지였다.

육지 새들도 또한 초기 이스터 섬의 요리 그릇에 들어갔다. Steadman은 부엉이, 왜가리,앵무새, 뜸부기들을 포함하여 6 종의 뼈들을 확인하였다. 새 스튜는 그 폴리네시아 정착민들이 우연찮게 가져온 수많은 쥐들로 양념이 쳐졌을 것이다; 이스터 섬은 고고학적 사이트에서 쥐의 뼈들이 물고기 뼈들보다 많은 유일한 폴리네시아 섬이다.


돌고래들, 바다 새들, 육지 새들, 그리고 쥐들은 이스터 섬에 예전에 이용 가능했던 고기 원의 모든 목록을 다 망라하지 않는다. 이 모든 맛있는 것들은 이스터 섬의 숲에서 나온 나무들로 오븐에서 요리되었다.
그러한 증거들로 보아 , 이스터 섬의 최초로 도달한 폴리네시아 인들은 동 폴리네시아에서의 긴 카누 항해 끝에 약 1600 년 전에 이스터 섬에 발을 내딛었다. 그 섬은 원시의 천국이었다. 그 후에 무엇이 일어났을까? 꽃가루와 뼈들이 어두운 답을 제공한다.

꽃가루 기록들은 인간 정착이 시작된 지 겨우 몇 세기가 안 된, 800 년쯤에는 이스터 섬의 숲들이 많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불로 만들어진 숯들이 침전물의 핵을 이루고, 야자와 다른 나무들과 덤불 관목들의 꽃가루들은 감소하거나 사라진 반면, 숲을 대체한 풀들의 꽃가루들은 풍부해졌다. 1400년이 지나 얼마 안 되어서, 야자나무들은 멸종되었다. 벌목의 결과만이 아니라 지금은 편재하는 쥐들이 그것의 재생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수십 개의 보존된 야자열매들은 전부 다 쥐들이 쪼아 먹어서 더 이상 발아할 수 없었다, 하우하우나무들은 멸종되지는 않았지만,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밧줄을 만들만큼 충분한 양이 남아 있지 않았다. Heyerdahl이 이스터 섬을 방문했을 무렵에는 단지 하나의 거의 죽은 토로미로 나무가 그 섬에 남아 있었지만 , 지금은 그것도 사라졌다.


15세기에는 이스터 섬의 야자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숲도 사라졌다. 사람들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땅을 개간하고;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 그리고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들을 벌목하고; 쥐들이 씨들을 먹어 치우고; 나무의 꽃들을 수분하고 열매들을 퍼트린 새들이 사명했을 때 운명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전반적인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숲의 파괴의 예이다: 전체 숲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부분의 수종들이 멸종되었다.

이스터 섬의 동물들의 파괴도 숲만큼 극단적이었다: 예외 없이 , 토착 육지 새의 모든 종들이 멸종되었다. 조개류가 과다 남획된 결과 사람들은 큰 고둥 대신에 작은 바다 달팽이에 만족해야 했다. 1500년경에는 돌고래 뼈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더 이상 누구도 돌고래를 작살로 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큰 항해 카누를 건설하는데 사용되는 나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에 서식하는 새들이 반 이상이 멸종되었다.


이들 고기 대신에 이스터 섬사람들은 닭고기 생산에 집중했다. 그들은 또한 남아 있는 이용 가능한 고기 원 즉 인간들로 돌렸다: 사람 뼈들은 후기 이스터 섬 쓰레기 더미에서 점점 흔해졌다. 섬사람들의 구전에는 식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적에게 내뱉는 말 중 가장 지독한 욕은 “네 어미 살이 지금도 이빨 사이에 끼여 있다”는 욕이었다. 이들 새로운 먹을 것들을 요리할 수 있는 나무들이 없었으므로 섬사람들은 불을 지피는데 사탕수수 부스러기, 풀과 사초들에 의존했다.

이 모든 증거들을 짜 모으면 한 사회의 몰락에 대한 일관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최초의 폴리네시아 정착민들은 비옥한 토양, 풍부한 식량, 넘쳐나는 건축 재료들, 넓은 생활공간, 그리고 편안한 생활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번영했고 인구는 증가했다.

몇 세기가 지나자 그들은 그들의 폴리네시아 조상들이 조각했던 것과 같은 석상들을 석대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해가 감에 따라, 석상들과 석대들은 점점 더 커지고 석상들은 10 톤이나 나가는 붉은 왕관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라이벌 부족들이 부와 권력을 자랑하면서 서로를 능가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선형의 상승이 있었을 것이다. 이스터 섬에는 , 오늘날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역 자원을 재분배하고 다른 지역들의 경제들을 통합하기 위한 복잡한 정치적 시스템에 의하여 사회가 유지되었다.

결국에는 이스터 섬의 인구 증가가 숲이 재생 가능한 속도보다 더 빠르게 숲을 벌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토지는 정원용으로 나무는 연료, 카누와 주택용으로 , 그리고 석상을 운반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숲이 사라짐에 따라 , 섬사람들은 석상들을 운반하고 세울 밧줄과 목재가 바닥났다. 생활은 어려워지고- 샘들과 물줄기들이 말라 버리고 , 불태울 나무는 더 이상 없었다.

육지 새들과 큰 바다 달팽이들과 많은 바다 새들이 사라지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또한 배들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졌다. 고기잡이 카누를 건설하는데 쓰는 목재가 사라졌으므로,
어획량은 줄어들고 돌고래는 식탁에서 사라졌다. 곡물 생산도 감소했는데, 이는 벌채에 의해 토양이 비와 바람에 부식되고 , 태양에 의해 말라버리고, 영양분들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집약적 닭 생산과 식인은 이 모든 잃어버린 식량의 일부분만 대체했다. 해 빛에 탄 얼굴과 드러난 갈비뼈를 한 작은 조상들은 사람들이 굶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잉여 식량이 사라짐에 따라, 이스터 섬은 복잡한 사회를 움직인 족장들, 관료들과 성직자들을 더 이상 먹여 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생존하는 섬사람들은 초기의 유럽 방문자들에게 어떻게 지역적 혼란이 중앙 정부를 대체하고 전사 계급이 유전적 족장들로부터 권력을 인계했는지를 묘사했다. 1600년대와 1700년대 전사들의 전성기 시대에 만들어진 창과 검의 석촉들은 오늘날에도 이스터 섬 곳곳에 버려져 있다. 1700년대 즈음에는, 인구가 전의 1/4에서 1/10으로 급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동굴에서 살기 시작했다. 1770년 즈음에는 라이벌 부족들은 서로의 석상들을 무너뜨리고 머리를 잘라 버리기 시작했다. 1864년에는 마지막 남아있던 석상도 무너졌다.

이스터 섬의 문명의 몰락을 상상하려고 하면서 우리는 자문한다. “와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너무 늦기 전에 그만두지 않았을까? 마지막 야자를 잘라 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 재앙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차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버려진 수백 개의 석상들을 고려해야 한다. 롤러와 로프를 위해 섬사람들이 의지해야 했던 숲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천천히 수십 년을 두고 사라졌다. 아마 전쟁이 석상 이동을 중단시켰을 것이다. 그 사이에. 점진적인 삼림남벌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던 섬사람은 누구든지 그 삼림남벌에 그들의 직업이 의존했던 조각가, 관료 그리고 족장들의 기득권에 의하여 눌러졌을 것이다. 해해마다의 숲의 면적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올해는 저편의 나무들을 개간했지만, 다른 버려진 정원에서 나무들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고 있다. 단지 늙은 사람들만이, 수십 년 전의 그들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차이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의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나무들은 적어지고, 작아지고, 덜 중요해졌다. 열매를 맺는 마지막 성숙한 야자나무가 잘라졌을 때, 야자들은 더 이상 경제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200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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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k****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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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수학선생님께서 공상과학을 너무좋아하시군요... 그렇다면 옛날사람들은 미래를 예시하는능력이이겠군요.... 그럼 히틀러는 우리가질거라는걸 알고있을까요?더욱이 외계인이 타는 이동수단을 UFO라고불립니다.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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