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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떤인물인가요?
비공개 조회수 2,044 작성일20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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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

수수께끼와 논란 속의 예언가

[ NostradamusMichel de Nostredame ]

출생 - 사망

1503.12.14. ~ 1566.7.2.

노스트라다무스의 생애와 활동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의사 겸 점성가의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이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노스트라다무스’로 통칭했다.) 그는 1503년 12월 14일에 프랑스 남부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유대인 가문(훗날 가톨릭으로 개종)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며, 친가와 외가 모두 할아버지가 저명한 의사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린 시절에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부터 고전과 역사는 물론이고 의학과 점성학의 기본 지식도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4세 때인 1517년에 아비뇽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서 인문 교육을 받았고, 19세 때인 1522년에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525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의사로 일했고, 1529년에 다시 몽펠리에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이와는 반대로 대학에서 퇴학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1534년에 그는 마르세유 인근 아장이라는 도시에 정착해서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지만, 1537년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아내와 자녀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처가에서 사망한 부인의 지참금 반환 소송을 걸고, 심지어 종교재판소까지도 불경죄로 소환 명령을 내리는 등의 악재가 계속되자, 결국 노스트라다무스는 아장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각지로 떠돌면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543년에 그는 살롱 드 프로방스라는 도시에 정착하고 재혼했으며, 머지않아 여러 권의 역서(曆書)와 실용서(화장과 식품 제조에 관한 내용)의 저자로 난생 처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52세 때인 1555년에는 예언서인 [백시선]의 초판본(1-3부)을 간행했다.

이때부터 노스트라다무스는 점성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556년 여름에 파리를 방문하여 당시의 국왕 앙리 2세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부부를 알현했다. 살롱으로 돌아온 노스트라다무스는 [백시선]의 집필을 계속했는데, 1559년에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부상을 입고 뜻하지 않게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급기야 이 사건이 그의 예언서에 나온 4행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탁월한 예언 능력에 대한 명성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1564년에 노스트라다무스는 새로운 국왕 샤를 9세의 시의 겸 고문으로 임명되어 각종 특권을 누리는 몸이 되었다. 2년 뒤에 노스트라다무스는 국왕의 밀사로 출장을 다녀오다가 통풍을 앓게 되었고, 이 질환이 점차 심해진 끝에 1566년 7월 2일 새벽, 63세를 일기로 살롱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이런 비문을 지었다. “여기 그 유명한 미셸 노스트라담의 유해가 묻혀 있다. 모든 인간의 펜 중에서 오직 그의 성스러운 펜만이 미래에 이루어질 전 세계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백시선”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후인 1568년에야 완간된 예언서 [백시선]은 전10부(원래 구상은 12부까지였다고 한다)로 이루어졌으며, 각 부마다 100편(7부는 42편까지만 있다)의 4행시가 수록되어 있다(원제인 프랑스어 Centuries를 영어식으로 읽어서 “(모든) 세기들”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책이 1555년부터 3797년까지의 역사적 사건과 대규모 재난(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등등)을 예언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워낙 모호한 내용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후인 1568년에 완간된 예언시 [백시선]의 속표지. 이 난해한 예언시는 오늘날까지 숱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백시선]에 수록된 예언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 서문 격으로 수록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예언시를 쓰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외부적인 힘 (…) 돌발적인 흥분을 통해 천상계의 인과 관계가 나에게 공표된다. 하지만 신성한 영감이 없다면 목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모든 권위 있는 예언은 먼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좋은 조건에서, 마지막으로 천성적인 소질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자신의 신비스러운 예언 능력을 어디까지나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영감이라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은 과학적이고 엄밀한 점성학의 연구를 통해 그 비밀을 살짝 엿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밤에 홀로 / 비밀 서재의 청동 제단에 편히 앉아 있노라 / 잔잔한 고독의 불길로부터 /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노라.” (제1부 1편)

노스트라다무스는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프로방스 사투리까지 뒤섞어서 4행시를 썼으며, 그 순서조차도 뒤섞어 놓았다고 전한다. “공동의 선을 위해 내가 본 대변혁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글로 적어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나는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평이한 문장이 아닌 난해하고 왜곡시킨 문장을 썼다.” 이런 의도적인 난해성은 아마도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신탁이나 예언은 그 모호성으로 악명이 높았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침공하기 전에 신탁을 묻고 이런 답변을 얻었다. “너는 강력한 왕국을 멸망시키리라.” 이에 용기백배한 크로이소스는 전쟁을 벌였다가 대패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강력한 왕국, 즉 리디아를 멸망시킨 셈이 되었다. 이처럼 예언은 양면성과 다의성을 지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 즉 예언을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교훈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시의 해석 방법과 문제점

현재 나와 있는 노스트라다무스 관련서는 하나같이 4행시의 원본이 아니라 그 해설서에 불과하다. 4행시는 막상 읽어도 뜻이 안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시에서 갖가지 해석을 이끌어내는 해설자들이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에 한참 높아졌다가 1999년 초에 절정에 도달했다가 약해졌지만, 2001년의 9/11 테러 이후로 다시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시각에서 그의 예언에 대한 해석은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

첫째로 점성학의 비합리성의 문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인류가 겪게 될 사건이 섭리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으며, 자신은 하느님의 은총과 점성학의 연구(그는 자기 방법의 엄밀함과 과학성을 특히 강조한다)를 통해 이를 알아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코페르니쿠스 이래 천문학이 크게 발달한 결과, 오늘날 점성학은 과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점성학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면, 점성학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역시 합리적 근거가 없는 셈이다.

둘째로 역사적 입증의 문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해설자들은 각종 역사적 사건이 이미 4행시로 예언되었음을 입증하려 애쓴다. 즉 히틀러에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에 대한 언급을 4행시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런 “적중” 사례에는 한 가지 뚜렷한 맹점이 있다. 즉 사건이 발생하기 전이 아니라, 반드시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예언이 해석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사후약방문”이라는 것인데, 그런 예언이라면 사실상 예언(미리 말함)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셋째로 임의적인 해석의 문제다. 이 분야의 전문 연구자 존 호그는 철자와 문장의 변형과 생략, 고어와 외국어를 뒤섞은 혼란스러운 표기법, 일반명사와 고유명사의 상호 변환, 그리고 무작위적인 순서 등을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예언의 특색으로 잡는다. 이처럼 4행시는 해석 가능성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견강부회”가 일어나기 쉽다. 가령 오늘날의 해설자는 대부분 4행시에 나오는 ‘히스터’(Hister)가 ‘히틀러’(Hitler)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히스터’는 ‘도나우(다뉴브) 강’의 옛날 이름에 불과하다.

넷째로 궤변의 문제다. 종말론이나 예언서에 대한 가장 확실한 검증 방법은 시간이다. 즉 예언서에서 말한 바로 그날이 오면 과연 예언이 정확한지 아닌지 여부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경우에는 “일천구백구십구 년의 일곱 번째 달 / 거대한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예언이 결정적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머지않아 “틀린 것은 그의 예언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었다”라는 궤변이 등장하면서, 또다시 가까운 미래에 종말의 가능성을 점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틀린 것은 예언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핑계는 모든 예언의 신봉자들이 반복하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궤변에 담긴 역설이다. 가령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워낙 모호해서 해석이 종종 틀릴 수 있다면, 가령 어떤 해석이 정말 옳은지 여부를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결국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설령 그가 “정말로” 미래를 예언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한, 그 예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백시선]에 나폴레옹(왼쪽)과 히틀러(가운데), 그리고 9/11 테러(오른쪽)가 정확히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야 인지된 것이며, 그나마도 억지로 끼워 맞춘 내용에 불과하다. 가령 히틀러에 관한 예언 가운데 상당수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에 관한 예언으로 공인된 바 있었다. 이처럼 “사후약방문”과 “견강부회”의 해석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는 갈수록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대한 예언자인가, 희대의 낚시꾼인가?

“고대의 신탁이나 종교적 예언이 성행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16세기와 17세기는 미래를 아는 체하는 사기꾼들의 전성기였다.” 집단적 광기와 현혹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한 책 [대중의 광기와 미망](1841)의 저자 찰스 맥케이는 이렇게 지적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 고대의 예언 못지않게 애매하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긴 영역을 다루므로, 수백 년이 지나면 <거기 해당할 만한 사례가> 실현될 수밖에 없으며, 조금만 생각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에 꿰어 맞출 수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1) 최근의 재난과 유사한 내용이 담긴 4행시를 찾아낸다. (2) 유사한 내용은 최대한 부각시키고, 다른 내용은 최대한 뭉뚱그린다. (3) 결국 예언이 빗나갔음이 드러나면, 해석에 약간의 실수가 있었을 뿐이라고 둘러댄다. 이런 식이라면 차후로도 노스트라다무스가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을 예언했다는 사실이 발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런 “발견”은 십중팔구 사건의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걸 정말로 “예언”(미리 말함)이라 불러야 할까?

노스트라다무스는 정말 미래를 내다본 예언자였을까?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단언할 확증도 없긴 마찬가지다. 다만 “성취된 예언”으로 간주된 것들은 모두 “사후약방문”과 “견강부회”에 불과했고, 심지어 1999년 7월의 경우처럼 모든 해석자가 확실하다고 장담했던 예언마저 빗나가고 말았다. 이쯤 되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사실상 가치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예언이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곤란해도, 최소한 예언의 진위를 판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예언을 둘러싼 최근의 논의는 하나같이 상업적인 맥락에 놓여 있음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하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은, 자신이 20세기에 1인 산업이 되리라는 것이었다.”(로버트 T. 캐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일본의 노스트라다무스 해설가 고토 벤의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번역되면서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세기말을 앞둔 불안감에 편승한 반짝 상품이거나, 또는 특정 종교 단체의 종말론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대중적 인기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강력한 호기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앞날이 불투명하고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며 눈길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그의 예언은 비록 미래를 이야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간접적으로나마 이야기해주는 셈이다.

참고문헌 : John Hogue ed.,Nostradamus: The Complete Prophecies , 1997; 미카엘 노스트라담스, <원전: 모든 세기>, 1981; 존 호그, <노스트라다무스>, 1994; 유기천, <점성학이란 무엇인가>, 1995; 고토 벤, <(노스트라다무스) 운명의 초법칙>, 1995; 에티엔느 메조, <노스트라다무스 세기말 대예언>, 1996; 장 샤를 드 퐁브륀, <노스트라다무스 새로운 예언 1995-2025>, 1996; 앨런 홀, <노스트라다무스의 진실>, 1999; 데이비드 오베이슨, <노스트라다무스의 비밀>, 1999; 강주헌,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21세기 대충돌>, 2001; 찰스 맥케이, <대중의 미망과 광기>, 2004; 마리오 리딩, <21세기 대예언: 노스트라다무스>, 2007; 로버트 T. 캐롤, <회의주의자 사전>, 2007.

[네이버 지식백과]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Michel de Nostredame] - 수수께끼와 논란 속의 예언가 (인물세계사, 박중서)

20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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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의사이자 예언가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프랑스왕 앙리2세의 죽음을 예견했고 실제로 왕이 사고로 죽자, 실세가 된 왕비 카트리느 드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어 자주 궁궐을 드나들었죠. 카트리느는 점성술, 마술같은거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의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예언을 했고 그 예언을 시의 형태로 담은 책이 바로 "모든 세기"죠.

1980-90년대에 세기말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그의 유명한 예언인 1999년 공포의 대왕 강림설이 탄력을 받으면서 인기가 절정에 달했으나 그해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자, 후세의 위작설이 대두되고 있죠.

그 많은 예언에 왜 자국이 벌인 식민활동과 만행은 없는지 의문이기는 합니다.

인도차이나전쟁이나 비키니핵실험같은건 노스트라다무스가 보기에 몹시 충격적인 사건인데 말이죠. 나폴레옹은 나오더만..

20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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