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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기덕감독...
비공개 조회수 17,948 작성일2004.09.22
김기덕 감독은 군대 다녀왔나요?
어디서 근무 했나요?
군 생활 잘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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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
식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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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金基德, 1960.12.20~]

국적 한국
활동분야 영화
출생지 경북 봉화
주요수상 오스트레일리아 누사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상(1998), 청룡영화제 작품상(2003),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넷팩상, 브뤼셀 판타스틱영화제 경쟁부문 대상(1999), 베를린영화제 감독상(2004)
주요작품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섬》 《실제상황》 《나쁜 남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본문
1960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일산에서 농업전수학교를 마친 뒤, 총회신학교를 거쳐 1990년부터 2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회화를 공부하였다. 1993년 영화 《화가와 사형수》의 시나리오를 집필해 같은 해 시나리오작가협회 창작상 대상을 받으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무단횡단》으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대상을 받았다.

1996년 저예산영화 《악어》의 각본·감독을 맡으면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파격적인 내용과 충격적인 영상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여대생과 창녀의 역할 바꾸기를 소재로 다룬 《파란 대문》(1998), 잔혹한 표현과 여성비하 논란을 일으켰던 《섬》(2000), 단 3시간 만에 촬영을 끝낸 《실제 상황》(2000), 자신의 애인을 창녀로 만든다는 내용을 다룬 《나쁜 남자》(2001) 등이 있다.

그 밖에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수취인불명》(2001), 《해안선》(2002),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등을 감독하였고, 2004년에는 여고생의 원조교제를 소재로 한 《사마리아》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은곰상)을 받았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인정을 받는 감독으로, 1997년 밴쿠버국제영화제에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누사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스톡홀름영화제, 선댄스영화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브뤼셀 판타스틱 국제영화제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누사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월드시네마상(1998),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넷팩상,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브뤼셀 판타스틱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청룡영화제 작품상(2003) 등을 받았다.


*
김기덕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해는 1996년. 그전에 그는 영화공부를 제대로 한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니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데 어린시절 불우한 가정사와 엄격한 아버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기대를 잔뜩 받고 있던 김기덕의 형이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피해 서울로 가출,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김기덕을 중학교에 진학시키는 대신, 동네 형들이 운영하던 농업전수학교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거긴 정식으로 학교 허가가 나지않았기 때문에 그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남아있습니다.
그후 16세에 아버지가 강제로 전자공장에 취직시켰다더군요.
그러나 미술에 대한 소질이 있었고, 나름대로 미술쪽에 남다른 꿈을 키워오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는 한 방편으로 군대에 입대했죠.
해병대에 자원입대 했는데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의 수단이었을 뿐 그 자신이 원했던 바는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사실 스무살때 방위병으로 입소하라는 영장이 나왔는데 김기덕은 그 사실이 국가가 자신을 불량품 취급하는 것 같아 해병대에 입대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선택해서 들어간 해병대 생활은 무척 힘들고 괴로웠었다고 합니
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를 악물고 버티어 5년간이나 복무했다고 합니다.

그 후 제대후 김기덕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남산의 장애자 수용소에서 일을 하며 보냈죠. 그러면서 그는 직업을 찾아보려고 애써보았지만 학력때문에 일반회사같은 곳은 어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로 막노동으로 생활을 꾸려왔다고 하더군요.
'서른살 이전의 삶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 자신이 이렇게 술회할 정도로 서른살까지는 힘든 방황의 세월을 보냈죠.
그리고 서른살이 되자 무작정 프랑스로 떠나버렸는데 그림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답니다. 그 계기는 백남준에 관련된 기사를 보고 자극을 받아서 였다고 하더군요.
프랑스에 간 김기덕은 그림을 공부하는 한편 자신이 습작한 글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지냈고 틈나는 대로 유럽을 여행하며 부랑자처럼 지냈답니다. 그렇게 2년간의 유럽생활이 그의 학력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에서 그림을 계속 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과 새롭게 관심을 두게 된 영화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귀국 후 그는 영진공(영화진흥공사)에서 실시한 시나리오 공모에 한 편의 시나리오를 제풀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영진공에서 소질이 있으니 계속 노력하라는 쪽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수업을 들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갔죠. 그 후 몇차례 영진공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에 시나리오를 출품했고, 1994년 <이중노출>이라는 시나리오로 장려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95년 7월 <무단횡단>으로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최초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거죠.

200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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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시사인물사전10+네이버 백과사전+열심히 두들긴 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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