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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논산의 역사
aqua**** 조회수 873 작성일2013.07.29

 제가 논산의 역사에 대해 조사를 해가야하는데요...

제가 논산 지역 사람인대도 아는게 별루 없네요 힝,ㅜㅡ

그래서 지식인의 힘을 빌리기로 햇씁니다..

 

1. 논산 주요 사건에 대해서 5가지만!! 알려주세요

2  논산 종교에 대한 것도 5가지만 알려주세요

 

이번주 토요일까지 해가야해서요 내공 100!!

제발 잘 알려주세요 좋은 답변 기대하고있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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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곰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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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 한국사, 대학공부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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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주요 사건 5개

 

1.논산시 강경읍 강경상업고등학교 맹휴사건

강경상업학교 맹휴사건은 강경상업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통해서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발한 학생운동이다.

 
2.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이래로 전국적인 장시망(場市網)을 형성하는 등 상업도시로서 명성을 날려 왔던 강경에 1920년 3월 주민들의 기대감 속에서 강경상업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설립 당시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인 교사에 의한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3. 발단

일제의 교육 형태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태에서 2학년 담임인 지하라 코지[茅原耕治]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와 수업 중 일삼은 폭언에 대한 학생들의 분개가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 [경과]

1923년 6월 23일 학생들이 회의를 통해 지하라 코지의 교체 요구를 결의함과 동시에 학교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관철되지 않을 경우 같은 달 25일부터 동맹휴학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다음날인 6월 24일 다케하라[竹原]·히라다[平田]·야수나가[安永] 등의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하라 코지의 생계 문제와 조선총독의 학교 방문을 이유로 내세우며 오히려 학생들의 복교만을 설득하였다. 다음날인 25일 이에 불응한 2, 3학년 학생 40여 명이 집단으로 자퇴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 [결과]

1923년 7월 2일 교장 타카 젠수게[多賀善介]가 학부형과 학생들을 학교에 소집하여 관련 당사자인 교사 지하라 코지의 해고를 결정권자인 도지사에 건의함과 동시에 학생들의 등교 시 주동자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다음날인 7월 3일 학생들이 등교함으로써 이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 [의의와 평가]

복종과 순종만을 강요하는 식민지 노예교육에 항거한 강경상업학교 동맹휴학은 3·1운동 이후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2. 강경포 교안 사건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강경포에서 천주교 신자와 향촌 세력 간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

  • [개설]

강경포 교안 사건은 천주교 신자인 김치문(빈첸시오)과 소금 상인 조흥도가 충돌하여 시작된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와 일반 주민의 갈등에서 출발하여 주한 프랑스 공사대한제국 간의 외교적 갈등으로 확대되어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 [역사적 배경]

교안이란 천주교가 먼저 전래된 중국에서 반그리스도교 운동으로 먼저 사용된 용어로 선교 일선에서 천주교측과 토착사회와의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국내법으로 다루지 않고 외교문제로 취급되어 해결된 사안을 말한다.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된 후부터 1905년 외교권이 박탈될 때까지 발생하였는데, 교안이라는 말 속에서 천주교가 이제 조선 사회에서 박해의 대상이 아니라 정부를 상대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세력으로 변화하였음을 볼 수 있다.

교안 사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교회가 민인에게 폐를 끼친 사건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교폐로 따로 분리하여 보는 시각도 있다. 교폐는 특히 1895년 선교사들의 위상이 급부상하고, 양대인의 위세가 어디서나 우대되면서 자주 나타났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이 사법권을 침해하는 경우와, 신도들이 자신들에게도 치외법권이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의 권위를 빙자한 양민 침해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로 나눠볼 수 있다. 강경포 교안 사건, 혹은 장교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교안으로서는 교폐에 속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 [발단]

논산 지역에는 천주교 박해시대에 박해를 피하여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교인들이 산악지대 등에 은둔하여 지내다가, 1886년 한불조약과 1899년 교민조약이 체결되면서 박해가 완화되자 생업을 위해 마을로 이주해왔다. 이들 이주 교인들과 토착민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처음 일어난 일이 강경포 교안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898년이었다. 김치문(빈첸시오, 방량삼의 비부)과 부유한 소금 상인 조흥도가 언쟁 중에 조흥도가 천주교회를 모욕하고 사람을 동원하여 김치문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경과]

강경공소 신도들은 계속되는 천주교인에 대한 지역민들의 멸시를 참을 수 없어 소속 본당 신부인 나바위 본당베르모렐(장약슬) 신부에게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요청하였다. 베르모렐 신부는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집단 폭행이 일어났음을 중시하여 관아에 고소하기 전에 복사 박제원(요셉)에게 조흥도를 잡아다가 진상을 묻고 다시 재발하지 않게 조치하도록 지시하였다.

박제원과 대면한 조흥도는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이날 밤 나바위 본당 신자들은 조흥도를 폭행하였다. 이에 조흥도의 사촌인 조흥서의 주선으로 집강 윤성여, 부노 최성진 등의 향촌 지도 세력이 앞장서서 주민들을 모았다. 천장옥·김낙문·최일언·조흥이·조성규 등이 강경·논산·황산의 3포구에 통문을 돌려 한 집당 한 명씩 참여를 독려하여 모인 군중 수천 명이 나바위 성당 사제관에 난입하였다. 이러한 군중동원 방식은 민란시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강경포 교안이 민란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도부격인 윤성여·최성진 등이 베르모렐 신부와 대면 담판 중 일어난 예의문제 시비로 인하여 군중이 복사 박제원을 끌어내어 폭행하였고, 이를 구하러 간 베르모렐 신부도 폭행을 당하였다. 계속되는 쌍방의 폭행 속에 베르모렐 신부는 은진군수에게 호소하고, 신자들은 전주보두네(윤사물) 신부에게 기별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4월 6일 서울 주교관베르모렐 신부의 위급을 알리는 전보를 쳤고, 전보를 받은 뮈텔(민덕효) 주교는 프랑스 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외부(외무부)베르모렐 신부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요청하였다.

사건은 프랑스 공사대한제국 외부에게로 넘어갔다. 교회와 정부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군부도 전주 진위대공주 지방대 1소대강경포에 파견하여 난동의 주모자 7명을 체포하여 전주에 압송하였다. 은진군수 김일현의 조사 보고서와 베르모렐 신부의 주장이 달라 외부프랑스 공사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외부대신은 지방민과 베르모렐 신부 모두의 잘못이라 했고, 프랑스 공사베르모렐 신부가 조흥도를 잡아 심문한 것은 잘못이나, 지방민의 행동은 계획된 것이었으므로 처벌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후 외부대신은 법부에 재판을 의뢰하고 천주교인이나 신부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지방관에게 고소하도록 하고, 비난이나 폭행을 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배상을 수락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프랑스 공사는 군함 시위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6월 14일 재판이 시작되어 10월 3일까지 판결과 상소를 거듭한 끝에 윤성여·최성진은 태(笞) 100, 징역 15년, 천장옥은 태 100과 징역 10년에 처해졌다. 이후 베르모렐 신부는 강경포로 돌아갔고 실형을 받은 3명도 교회의 요청으로 곧 풀려났다.

  • [결과]

강경포 교안 사건은 향촌사회의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0년 이후에 강경 지역에서 천주교회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음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본국의 힘에 의지한 교회가 선교지 국가를 상대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게 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신앙의 기준으로 박해받고 있던 신자들을 보호하려는 순수한 동기는 인정되나 그 표현 과정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실정법보다는 신자의 보호를 우선시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대인의 위세에 의탁하려는 동기로 입교하게 되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 [의의와 평가]

선교사들은 프랑스 국민인 자신들이 갖고 있는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천주교 신도에게까지 확대 적용받고자 하여 대한제국 사법권을 침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부 신도들도 자신에게는 치외법권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여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교사들의 시대인식이나 자신들의 모국이 갖는 제국주의적 경향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으나, 대부분 하층민이었던 천주교 신자들이 향촌의 토호세력에게 당하는 부당한 힘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도 포함하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강경형평분사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 지역에서 결성된 사회운동단체.

  • [개설]

형평사는 일제강점기에 백정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일본수평사 운동에 영향을 받아 1923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처음 결성된 이래 형평운동을 주도하는 가운데 전국적인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에 부응하여 충청남도 논산강경 지역에서도 백정에 대한 차별 인습을 타파하기 위해 강경 형평사를 결성했다.

  • [설립목적]

강경 형평사는 사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경제적인 상호부조와 함께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일소하는데 있다.

  • [변천]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대회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 형평사의 지사나 분사의 설립이 이어지면서 강경 형평사도 1923년 형평사남조선대회의 개최와 더불어 설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내부 갈등과 일제의 탄압에 이어 1935년 형평사 총본부가 대동사로 명칭 변경과 친일단체로 변화하는 가운데 1937년 5월 1일 해체되었다. 이에 전국 각지의 형평사들이 연쇄적으로 해체됨과 더불어 강경 형평사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주요사업과 업무]

강경 형평사에서는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인 칭호 철폐, 교육 기회 균등과 지위 향상, 동지간 화목·협력·상조 등과 관련되는 사업과 업무를 수행하였다.

  • [활동사항]

사원들의 정서 함양과 지식 계발을 위한 강습소와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으며 총본부 유지에 필요한 부담금을 모금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임시총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특히 1932년 7월 강경 본정에서 발생한 모욕적인 멸시에 분개한 사원들이 집단구타 사건을 일으키고 구금되자 이들에 대한 변호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종원(李鍾元)·이약한(李約翰)·이봉춘(李奉春) 등은 석방되었으나 최기창(崔基昌)·이판쇠(李判釗)·정관산(鄭官山)·이문석(李文錫) 등은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는 잔존한 신분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였다.

3. 농민운동 - 동학과 관련.

 

  • [정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농민이 그 생활 조건 또는 사회적 환경의 개선을 위해 전개한 사회운동.

  • [개설]

일반적으로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같이 계급으로서의 농민이 스스로의 노동 조건과 경영 조건의 유지·개선·확장 또는 사회·정치적 생활 조건의 유지·향상을 위해 단결해서 행동하는 조직적 투쟁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흔히 농민조합운동, 농촌갱생운동, 농촌청년운동 등을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농민의 계급투쟁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여 실패로 끝난 구한말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과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일제강점기의 농민운동들을 들 수 있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농민운동도 이들과 연계하여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논산 지역의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농민군의 1차 농민전쟁기에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주 화약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집강소가 설치된 이후부터 2차 농민전쟁기까지 논산 지역에서도 소규모의 동학농민군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94년 7월 6일에서 8일 사이에 연산의 동학농민군 100여 명이 연산관아를 습격하여 총과 돈, 말 등을 탈취했으며, 8월에는 노성의 동학농민군들이 노성 관아의 무기창고를 열어 군기를 탈취하였다.

논산 지역 동학농민군은 대규모 조직이기보다는 6~7명의 접주가 두령이 되고 수십 명의 부하로 구성된 소규모의 조직이었다. 연산의 접주로는 박영채(朴泳采), 은진의 접주로는 염상원(廉相元)이 활약하였으며, 노성 무기고 탈취사건의 주도자는 이인(利仁)의 동학 도집강(都執綱) 김창순(金昌順)이었다. 이후 논산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와 더불어 개최된 논산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논산에서 합류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손병희의 북접농민군이 연합하여 동학농민군 대본영을 설치함으로써 논산 지역은 제2차 농민전쟁기의 동학농민군 주력군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논산대회에는 극소수였지만 이전에는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유생들도 참가하였다. 이 중 공주 출신의 유생 이유상(李裕尙), 여산부사(礪山府使) 겸 영위(榮衛) 김원식(金元植) 등은 대회 참가 전에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 활동을 수행하였으나 항일의병 활동을 위해 동참한 자들이었다. 손병희가 직접 인솔하여 논산에 집결한 북접농민군 1만여 명과 남접농민군 중 전봉준의 직할 부대 1만여 명은 나머지 다른 부대원 3만여 명과 함께 같은 달 21일경 논산을 출발하였다. 노성공주경천점(敬川店)에 군영을 설치한 후 3가지 길로 나누어 공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1월 8일에서 11일까지 4일간 전개된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한 농민군은 노성으로 후퇴하여 진영을 수습하였다.

다음 날인 12일 동학농민군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의 이름으로 관군과 이교(吏校) 및 백성들에게 척왜(斥倭)와 척화(斥化, 반개화당)를 내세우는 포고문의 발표와 함께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14일경 노성의 동학농민군은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가 이끄는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의 공격을 받고 논산 대촌(大村)원봉(圓峯)으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공격을 받게 되자 다시 황화대(皇華臺)로 후퇴하였다가 같은 달 17일 강경에서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여 전라도 전주로 퇴각하였다. 논산노성에서의 농민군의 패배는 우금치 패배 이후 재봉기를 준비하던 농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겨주게 되었다.

  • [일제강점기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전반의 농민운동의 경우 논산 지역은 삼남 지역에 비해 비조직적이었으며 활발하지 못하였다. 타 지역과는 달리 논산 지역에서는 군 단위의 합법적인 농민조합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작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전적으로 개인적인 노력에만 의존했을 뿐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논산 지역의 대지주들은 지주회조선농회, 총독부 등의 지원을 받으며 유리하게 소작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다.

1923년 봄 경성 지주 윤덕영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4년 봄 유성 거주 지주 심재후의 토지에서 발생한 악사음의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6년 봄 부적면 부황리 지주 김명수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등이 발생했을 때도 논산 지역의 소작농민들의 지주와 마름의 횡포에 대한 저항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다.

이후 논산 지역의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인 노성농조의 창립과 더불어 다소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12월 상월면 대명리 농민야학 회관에서 창립된 노성농조는 1927년 3월 대명농조로 개칭하고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조선농민총동맹에의 가맹, 대명 농민야학에 대한 후원, 조합원의 계급의식 각성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회원 수는 1929년 1월 현재 83명에 불과했다.

한편 당시 논산 지역에는 대명농조 외에도 채운면성동면에 면단위 농민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중 성동농민회는 1928년 봄 소작권 이동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일부 지주와 악사음을 직접 방문하여 경고하거나 경고문을 발송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논산 지역의 혁명적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의 결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촌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5월경 경찰이 머슴계 설립을 불허하자 70여 명의 양촌면 농민들이 적기 시위를 감행하였으며 경찰이 출동하여 동지들을 검거하자 동지 방면을 위한 투쟁까지 전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촌면 지역에서는 머슴을 잃고 폐농 지경에 이른 지주가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모두 19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권영민이지용을 포함한 총 1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1933년 2월 28일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4. 논산 독립만세운동

 

 

  • [정의]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 [개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이라 함은 조선 말기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이루어졌던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주권 회복을 위해 전개했던 일련의 반외세·항일운동을 의미한다. 이 시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주로 독립만세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독립만세운동]

거족적인 3·1운동과 더불어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도 1919년 3월에만 논산읍, 강경읍, 연산면 등을 중심으로 많은 주민이 참여한 여러 차례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같은 해 4월 1일에도 은진면을 중심으로 횃불만세운동이 일어났을 정도로 당시 논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전반 논산 지역은 농민운동은 삼남 지역에 비해 비조직적이었으며 활발하지 못하였다. 타 지역과는 달리 논산 지역에서는 군 단위의 합법적인 농민조합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작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전적으로 개인적인 노력에만 의존했을 뿐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논산 지역 대지주들은 지주회조선농회, 총독부 등의 지원을 받으며 유리하게 소작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다.

1923년 봄 경성 지주 윤덕영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4년 봄 유성 거주 지주 심재후의 토지에서 발생한 악사음의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6년 봄 부적면 부황리 지주 김명수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등이 발생했을 때도 논산 지역의 소작 농민들은 지주와 마름의 횡포에 대한 저항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후 논산 지역의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인 노성농조의 창립과 더불어 다소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12월 상월면 대명리 농민야학 회관에서 창립된 노성농조는 1927년 3월 대명농조로 개칭되면서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조선농민총동맹에의 가맹, 대명 농민야학에 대한 후원, 조합원의 계급의식 각성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회원 수는 1929년 1월 현재 83명에 불과했다.

한편 당시 논산 지역에는 대명농조 외에도 채운면성동면에 면단위 농민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중 성동농민회는 1928년 봄 소작권 이동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일부 지주와 악사음을 직접 방문하여 경고하거나 경고문을 발송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논산 지역의 혁명적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의 결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촌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5월경 경찰이 머슴계 설립을 불허하자 70여 명의 양촌면 농민들이 적기 시위를 감행하였으며, 경찰이 출동하여 동지들을 검거하자 동지 방면을 위한 투쟁까지 전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촌면 지역에서는 머슴을 잃고 폐농 지경에 이른 지주가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모두 19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권영민이지용을 포함한 총 1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1933년 2월 28일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비해 논산 지역의 노동운동은 강경노동조합강경고용인친목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비교적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강경노동조합은 1910년에 결성된 하역노동자들의 조합으로 1925년경에 이르러 조합원 수가 2~3천 명에 달하고 하루 2천여 척의 하역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강경노동조합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보다는 조합 내 내분으로 인한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예를 들면 1930년 정월 초에 강경 지역의 하역 노동자들 수백 명이 신구 노조원으로 갈리어 집단적인 패싸움을 벌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십 명의 노동자가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관련자 3명이 검사국에 송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충돌은 1930년 4월 강경하주조합의 주선으로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한편 1920년대 중반 논산강경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상점 점원들을 회원으로 하는 일종의 노동조합에 가까운 논산고용인친목회강경고용인친목회가 조직되어 야학을 운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중 강경고용인친목회는 1925년 5월 조선일보 강경지국에서 경찰의 엄중한 경계 속에 창립되었는데, 당시 회장은 우호경, 총무는 박석규 등이었으며 회원 수는 대략 200여 명 정도였다.

강경고용인친목회는 창립총회부터 ‘국제노동자 만세, 무산자 만세’ 등의 구호를 제창하여 경찰로부터 집회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창립 직후에 있었던 단오놀이 행사로 야유회를 진행하여 하시장에 운집한 뒤에 적기를 휘날리며 ‘강경고용인친목회 만세’를 고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는 임시총회를 열고 임원을 교체함과 동시에 강령도 채택하였다. 논산고용인친목회는 1926년 1월 논산읍내에서 조직되었다. 그 외 당시 논산면 지역의 7개 노동단체들이 1929년 3월 논산노동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소속 단체들 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경찰의 탄압 및 1930년대의 집회·결사의 자유 제한 조치 등으로 인해 활동은 미미하였다.

5. 논산 민족운동

 

일제강점기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개한 논산 지역의 모든 저항운동의 범칭.

  • [개설]

민족운동은 소수 민족이 다수 민족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식민지 상태나 종속 상태에서 압박당하는 민족이 지배 민족이나 국가의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운동을 범칭하는 말로 민족해방운동이라고도 한다. 민족은 그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이념을 바탕으로 특히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에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여 전개되는 운동이다.

그리고 민족의 자유와 독립, 즉 민족의 해방이라는 기치아래 토착대중의 ‘고향의식(故鄕意識)’에 호소하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외국세력이나 군대에 대한 불복종·태업(怠業)·게릴라전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저항하는 운동이다. 또한 민족해방의 문제는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내용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체에 따라 청년운동, 교육운동, 종교운동, 사상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거의 모든 저항운동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논산 지역의 민족운동을 당시에 활동한 각 관련 사회단체나 주도 인물들의 활동과 연계하여 살펴본다.

  • [청년운동]

1. 청년운동

3·1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통치를 폐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의 각 지방에는 근대식 학교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수용한 지역 청년들에 의해 각종 청년운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군이나 면 혹은 동리 단위로 청년수양단체를 결성한 뒤 야학·생활 개선 등과 같은 민중계몽 활동과 강연회·토론회·연극회·체육회 등과 같은 정치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활성화된 이러한 각종 인격수양운동·품성도야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은 일종의 신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청년운동 내부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됨과 더불어 청년운동의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에 조직된 상당수의 청년단체들이 1925년~1926년경부터 혁신총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조직의 강령과 규약을 바꾸는 등 사회주의적 경향을 띄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이러한 혁신청년회들은 지역사회 내에서 청년총동맹 산하의 혁신청년회, 조선농민총동맹이나 조선노동총연맹 산하의 농민·노동조합, 신간회, 근우회 등의 결성을 통하여 당시의 관료-유지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민족·민중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논산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 청년단체 조직혁신 및 연대운동

논산 지역의 청년회들이 정확하게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1920년 1월의 강경청년회 총회 개최 기사, 1920년 5월의 논산청년구락부의 지역 보통학교 강연회 개최 기사, 1921년 12월의 박영채, 김창규 등의 주도에 의한 양촌면 양촌리 노동수양회 창립 기사 등으로 미루어 논산 지역에서도 3·1운동 전후 시기부터 청년단체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면단위로 조직되어 있던 이들 청년회는 주로 1920년대 중반 경부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년회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양촌면 인천청년회의 경우 1925년 10월 회무의 쇄신과 청년가맹의 건을 결의한 뒤 이른바 청년회혁신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강경청년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전임회장 윤길중 등의 전횡을 탄핵함과 동시에 조직내부를 정비하는 혁신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논산 지역 전체 청년단체들을 아우르는 군단위의 통일조직 결성에는 실패하였다.

특히 양촌면 인천청년회는 1927년 12월에 이른바 쇄신총회와 함께 전논산청년단 축구대회를 개최하여 각 청년단체의 연대를 강화함은 물론, 군단위의 전체 청년단체들의 통일조직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 시도의 실패 이후로 논산 지역, 특히 강경읍논산읍의 사회단체들은 어떤 부문의 운동 단체들이든지 간에 연대 기구를 형성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 [사회운동]

1. 1920년대

전체 청년단체 통일조직 건설을 위한 노력과 마찬가지로 강경논산의 여타 각 분야별 사회단체들의 통일 또는 연대 기구 형성을 위한 활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1925년 10월 강경민우회, 선구회, 고용인친목회, 혜성단, 체육회, 형평사 등이 중심이 된 강경각단체연맹의 창립을 들 수 있다. 당시 참가자들은 이 연맹의 조직을 매개로 하여 청년운동, 노동농민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사상운동 등을 활성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나 실패하였다. 이후 이들은 통일적인 군 단위 조직은 물론이고 신간회도 창립하지 못할 정도로 활동이 부진하였다.

당시 강경 지역의 대표적인 사상단체인 선구회도 1926년 5월에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조선민중운동이 고취의 시기를 지나 조직의 시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조직화를 위한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였으나 실질적인 활동은 미흡하였다. 당시 선구회의 집행위원은 김종세, 강일병, 박노철, 박수해, 박용국, 임보원 등이었으며 기타 중심인물은 소철영, 임종원, 정인흥, 조병갑, 강상문, 한상옥 등이었다.

1929년 1월 21일자 한 신문의 당시 논산 지역 사회단체 현황 관련 기사에 의하면 논산 지역 청년회들이 주로 1920년대 전반기에 등장하였으며 1927년경을 경계로 면단위 농민조합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군 단위의 전체 청년단체나 농민단체·노동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29년 10월경 박상환, 한우석, 김성원, 편순용 등이 신간회의 강경지회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신문기사만 확인될 뿐 신간회운동 역시 부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2. 1930년대

1920년대에는 그나마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보인 논산 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경찰의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대부분 유명무실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30년 5월 신의주 감옥에서 5년 만에 출감한 형평사 지부원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경찰이 환영기를 압수함과 동시에 환영회 자체를 금지한 사건, 1930년 8월 강경청년회 회원들의 중견청년 강습회 참여를 방해한 혐의로 이용하문운학을 검속한 사건, 1931년 9월 10여 년간 이어온 논산노동야학을 허가받지 않았다고 금지시킨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31년 10월에 발생한 강경시내에서 발생한 격문사건, 1932년 5월에 발생한 메이데이 격문사건, 5월 25일 양촌에서 발생한 적기시위사건, 1933년 1월 강경 등지의 중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불온삐라를 배부할 계획을 세웠다 발각된 사건 등도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주요 활동가]

1929년 1월 현재 논산 지역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았던 활동가는 인천청년회 회장을 역임했던 장일환이었다. 장일환일본 유학시기 북성회에 가입한 뒤 1923년 3월 서울청년회가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했을 때 북성회 대표자로 참여했으며 이후 저명한 공산주의자 이연윤, 박형병 등과 함께 북성회를 탈퇴한 뒤 서울청년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23년 12월 군산에 내려가 해당 지역 활동가 조용환, 김영휘 등과 함께 5개 단체를 망라하여 군산노동연맹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리에서 민중운동자동맹의 기관지인 민중운동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5년 1월 보안법위반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어, 같은 해 12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며, 1926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장일환은 이와 같은 중앙단위의 활동보다는 인천청년회 활동 등과 관련된 논산 지역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생각’이라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권영민을 비롯한 논산 출신의 활동가들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1932년 1월 출판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8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1933년 11월에 다시 검거된 후 1934년 12월 공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 황산벌전투나 견훤의 후백제와 고려 황산벌전투는 일부러 담지 않습니다^^;;너무 흔한것같아서말입니다

- 님이 추려서 쓰시면 될것 같네요.

 

논산 종교 5가지

불교

1. 개태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대한불교 법상종 소속 사찰.

  • [건립경위 및 변천]

936년(태조 19) 황산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여 연산면 천호리개태사를 창건하기로 하였다. 940년 개태사가 완공되자 왕건은 화엄법회를 열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다.

왕건은 이 소문에서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음조에 부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연궁(蓮宮,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천호산개태사를 창건한 동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진전(眞殿)'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때에는 제사를 주관하였다. 또한 국가 대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는 사찰이었으며 공민왕의 경우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태사태조 이후로는 개경과 거리가 멀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우왕 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서 방화·약탈되었고, 도원수 임인계가 왜구를 맞아 싸우다가 죽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잠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1934년 여승 김광영(金光營)개태사지에 매몰되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고 현재의 자리에 절을 짓고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부르기도 했으나 최근에 다시 개태사라 하였다.

  • [관련문화재]

보물 제219호 개태사지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개태사 오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인 개태사지 석조,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 철확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독특한 조각 양식과 분위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 [현황]

충청남도 논산시는 국가사업 차원에서 개태사지를 복원하여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비 41억 1,500만 원, 도비 20억 5,700만 원, 시비 20억 5,800만 원 등 총 82억 3,000만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 현재 사찰 복원지를 포함하여 총 2만 8,907㎡의 부지에 주차장, 휴게 지역, 진입로 등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2. 쌍계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 [건립경위 및 변천]

쌍계사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서, 백암(白庵)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중건비(重建碑)에 의하면 고려행촌(杏村) 이임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절 입구에 세워진 비문에 의하면 쌍계사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선원, 동당, 서당,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향로전, 해회(海會), 삼보, 요사 등이 500~600여 칸이 있을 정도로 한때 호서 지방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대웅전쌍계사의 중심 법전으로 언젠가 화재로 소실된 후 1716년(숙종 42)에 중창하였으나 1736년(영조 12) 11월, 또다시 화재로 전소되어 1739년 다시 중건하였다.

  • [관련문화재]

관련 문화재로는 보물 제408호인 쌍계사 대웅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0호인 쌍계사 부도가 있다. 쌍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웅장함을 자랑하며 좁은 절 마당을 꽉 채우고 있다. 돌로 쌓은 축대를 바탕으로 세워진 화려한 공포의 다포식 단층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정면 다섯 칸에 달린 여닫이문들은 모란, 연꽃, 국화 무늬 등 서로 다른 꽃문양 살로 만들어져 있다.

쌍계사 부도는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절의 입구에 모여 있다. 취봉당혜찬대사지도(翠峰堂慧燦大師之屠) 등 9기가 있는데 모두 조선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기는 종(鍾) 모양이고 3기는 옥개석(屋蓋石)이 있는 사각형으로 높이는 115~178㎝이다. 종형 부도의 지대석(地臺石)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사각형 부도의 탑신에는 장식 없이 기단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 [현황]

사찰 입구에 부도군과 중건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찰 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나한전(羅漢殿)과 칠성각(七星閣)이 있다. 대웅전의 전면에는 중층 누각 봉황루가 위치하고 있으며, 좌측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우측에는 요사채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쌍계사의 유물로는 직경 1.82m의 법고(法鼓)와 전비(殿碑)가 있으며, 공주 갑사에 보관되어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쌍계사에서 조판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절 남쪽에는 작봉산남당산 마루가 동서로 이어져 충청남도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작봉산 자락의 북쪽에 전망이 트인 넓은 대지가 형성되고 그 곳에 쌍계사가 위치한다. 따라서 쌍계사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큰 중정을 두고 있다.

(2) 교회

1. 강경공소

  • [정의]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있던 천주교 교회.

  • [변천]

강경 지역이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에 처음 기록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천주교 대전교구 통계자료집에 의하면, 1883년 당시 전라도 지역을 관할하던 리우빌 신부(Liouville, 한국명 유달영(柳達榮), 파리외방전교회)가 방문하여 사목 활동을 한 공소 중 은진 지방에 강경공소가 나타난다. 1883년 4월 작성된 강경공소의 신자 상황은 사규고해 5명, 사규영성체 5명, 재고해 62명, 재영성체 61명, 교우 자녀 보례자 1명, 견진자 5명, 병자성사 1명 등 총 140명이었다.

이후 강경공소함열 지방으로 관리되다가 1885년에는 두세 신부의 관할에 속하는 강경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당시 소속된 신자는 131명이었다. 강경공소는 신부를 모시지 못하는 공소의 특성상 교회 상황에 따라 관할이 바뀌었다가 1897년 베르모렐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으로 승격된 화산본당(일명 나바위본당)에 소속되었다. 1899년 강경포 교안사건을 겪은 뒤 교세가 확장된 강경공소는 1945년 강경본당으로 독립하였다.

  • [의의와 평가]

강경공소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최초로 등장하였던 한국천주교회로 강경본당 설립의 바탕이 되었다.

 

2. 육곡감리교회

 

 

  • ❚ 서씨가 들여온 기독교

서원에서 조상을 모시며 수백 년 터 잡고 살아온 집성촌이라 하면 보수적인 이미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지만, 육곡2리 마을 초입에는 백년 역사를 가진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된 것은 부여서씨들이 주도적으로 기독교를 도입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담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기독교인들은 서양인들과 같이 생각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를 본 마을 젊은이들 서기훈, 서일선, 서성후, 장남진 씨 등이 1904년 3월 기독교를 도입, 교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처음 기독교 문화가 마을에 전래 되었을 때에는 마땅한 예배 장소가 없어 부여서씨 가문의 대종가 작은 방에 모여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였고 이들을 인도할 사람이 없어 강경황산까지 찾아가 예배 인도자를 찾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무리 종교 활동이라도 남녀가 한 공간에서 모일 수 없어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어져 앉아 그 사이에 포장을 치고 예배를 보았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교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열정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이런 그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어느덧 ‘육곡리감리교회’는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질 수 있었고 현재까지 번성하고 있다.


  • ❚ 육곡리 감리교회의 성장

작고 미미하게 시작된 육곡감리교회는 이후 성장을 거듭하며 어느새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다. 육곡 교회가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공주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의 부인과 마을 토박이들인 부여서씨의 노력이 있었다. 선교사의 부인은 육곡리 교회 청년들의 높은 학구열을 보고 덕은중등강습소를 설립하여 그들이 신문학을 익히고 배워나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독교 전파에 힘을 쏟았던 마을 주민 서기환 씨는 1910년 공주교회의 신학 단기과정을 마친 후 목회 활동을 하며 신앙 전파에 힘을 쏟았다.


그들의 노력으로 점점 교인들이 증가하면서 1936년에는 10평의 양철집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당시 육곡 교회의 교인이었던 서혜선 씨가 푼푼히 모은 돈으로 풍금과 종을 기부하며 교회종소리가 마을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6·25 전쟁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혼란에 빠지며 교회도 위기를 맞아 폐허가 되었고 교인들 중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생겼다. 절망 끝에 희망이 있듯 육곡감리교회의 교인들은 다시 교회를 일으키기 위해 폐허가 된 교회 건물을 다시 세우고 성금을 모아 교회의 집기 등을 다시 마련하는 등의 일을 하였고 1955년 새롭게 장로를 맡게 된 서덕선 씨는 교회의 일을 맡아 돌보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였다.

1955년 이후부터 새롭게 예배당 등 교회 건물을 증축하는 등의 발전을 거듭한 결과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 육곡감리교회의 오늘

신앙을 잃지 않고 이어온 육곡감리교회는 현재 교인 100여명이 훨씬 넘는 큰 교회다. 특히 가야곡면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로서 주변 지역에 믿음을 전파하여 에덴교회, 푸름교회 등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육곡감리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신앙을 따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이나 60세 이상의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노인회관 신축 당시에는 물품을 기증하였으며, 김장철이면 김치를 담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 육곡감리교회 출신 사람들 백여 명이 모여 만든 모임인 신우회에서 어려운 일들을 함께 협의하고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협조하기도 한다.

 

3. 강경침례교회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남교리에 있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

  • [개설]

1889년의 창립예배 이후 1896년에 창립된 강경침례교회논산 지역 개신교 중에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이다.

  • [변천]

1889년 한국에 온 캐나다인 선교사 펜윅의 영향으로 미국 보스톤 클라멘톤 침례교회 엘라씽기념선교회에서 파송한 폴링스태드맨의 선교로 1896년 2월 9일 지병석강경읍 북옥리 136번지 자택에서 강경침례교회를 시작하였다. 1906년 본 교회에서 침례회 최초의 총회가 열렸으며, 그때부터 개설한 성경학교는 현재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교로 발전하였다.

1943년 5월 일제의 탄압으로 옥려봉 일대 교회 대지 9,900㎡가 신사당으로 몰수됨으로써 강경침례교회는 잠시 문을 닫기도 하였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자 윤석훈·라상순 집사와 성도들의 노력으로 강경읍 홍교리에 있던 일본인들의 사찰을 교회당으로 삼아 다시 교회를 열었으며, 이종덕 목사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6·25전쟁 당시 교단 총회장이었던 이종덕 목사는 9·28 서울 수복 시 퇴각하던 공산군에게 금강 변 갈방으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1951년 김용해 목사, 1953년 박성태 전도사, 1956년 김장해 목사, 1960년 윤석훈 목사, 1963년 김종운 전도사, 1966년 최낙규 전도사, 1968년 유흔태 전도사의 사역과 성도들의 믿음으로 1971년 유흥래 목사 안수, 윤칠원문헌봉을 집사로 안수한 후 1972년 강경읍 남교리 82-12번지[옥녀봉로 10] 660㎡를 매입하여 강경침례교회 건물을 신축 이전하였다.

1974년 정호일 목사 부임 및 성전 완공과 목사관을 건축하였고, 1977년 윤칠국 집사 안수 헌당예배를 드렸다. 1986년 교회 부지를 확장하기 위해 강경읍 남교리 103번지[옥녀봉로 10] 712.8㎡를 매입하였으며,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산71-8번지의 대지 4,620㎡를 묘지로 매입하였다. 1991년 박창근 목사 부임 부활의 신앙으로 순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1996년 강경침례교회 100주년을 맞았다.

  • [현황]

옥녀봉을 올라가면 정상 부근에서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집 한 채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이 옛 강경침례교회가 있던 자리이다. 안내판에는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137번지[옥녀봉로73번길 28-12] 옥녀봉에 위치한 강경침례교회미국 침례교단에서 파송된 파울링 선교사 부부가 강경지병석씨를 전도하고 1896년 2월 9일 주일예배를 드린 후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종교의 탄압과 항일사상의 근거지를 말살하려고 신사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1943년 교회를 폐교하고 몰수하였다. 현재 침례교회 터와 가옥이 현존하고 있으며 전국총회에서 강경읍 북옥리 137번지[옥녀봉로73번길 28-12]를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강경침례교회논산 지역 최초의 교회로서, 한국의 기독침례회의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 이상입니다. 더 궁금한거잇으시거나 제가 올린 자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쪽지나 메일주세요

201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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