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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화 파리넬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0,038 작성일2003.09.06
영화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각색[?]입니까?

1. 사실 파리넬리를 거세한 사람은 아버지라는데, 영화에서는 형이 파리넬리를 자신의

평생 악기로 삼기위해 그렇게 한다더군요. 사실은 누가 거세햇고 왜 그럽겁니까?

2. 파리넬리와 그의 형이 같이 일을 햇을때,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여자를 공유햇다는데

도대체 여자를 공유햇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3. 영화에서는 형이 파리넬리에게 아이를 선물하고 전쟁터로 나간다는데

정말 파리넬리에게 아이가 잇엇고, 잇엇다면 정말 형이 선물한 아이입니까?

4. 영화에서 헨델은 파리넬리의 노래를 듣고 컥컥거리면서[?]죽습니다

정말 헨델이 그렇게 죽엇습니까?

이 외에도 영화와 실화가 다른부분이 잇다면 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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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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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넬리는 변성기전에 형과 아버지에 의해 거세가 됩었다고 합니다.

거세를 하면 남성 호르몬 분비가 억제되고 자연히 변성기도 오지 않습니다.

물론 거세만 했다고 모두 목소리가 그런건 아닙니다.

거세한 후 피나는 노력으로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당시에는 여자는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처럼 맑은 고음을 낼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2. 파리넬리는 성기가 없으므로 여자를 취할 수 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파리넬리는 여자와 관계를 가질때에 키스와 애무 등만 하고
섹스는 형이 대신 합니다.


3. 모르겠습니다. -0-워~ 전쟁에 나간다면 아기는 누군가에게 맡기고 가겠죠.


4. 치명적인 헨델의 백내장, 비만이 원인

중년기에 접어든 헨델은, 일은 폭주하는게 오페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잠시 심각한 우울병에 빠지게 된다.
1737년 헨델은 자기 스스로가 건강을 해치고 판단력이 둔화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오른쪽 팔은 마비가 와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일을 쉬고 온천에 가서 휴양을 하자 어깨의 마비는 풀리고 류머티스도 좋아졌다. 1743년 다시 그 증상이 재발하자 호레스 메올풀 의사의 치료를 받았는데 증상은 고열과 두통이 오고 언어장애, 그리고 경증마비 때문에 작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후 회복되기 시작하여 후유증도 별로 남지 않았으나 모르는 사이에 실명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헨델은 백내장 때문에 1743년에 이미 시력장애가 뚜렷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오르간 연주를 계속했다.
특히 오라토리오 <삼손>의 연주회에서 테너 가수 죤 바이트가 "기막히는 어둠! 해도 달도 없고 달빛을
암흑이 싸 버린다"라고 노래할 때, 청중들은 빛을 잃은 작곡가의 모습에 마음이 동요돼 눈물을 흘렸다는데 이 이야기로 인간미 넘치는 대중이 헨델의 실명을 얼마만큼 가슴 아파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연주가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러나 헨델이 오르간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의 연주 생활을 통해 익숙해진 손놀림 덕분이었다.
백내장이란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빛이 수정체에 의해 굴절되지 못하기 때문에 망막에 상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병이다.
아주 심해지게 되면 빛과 어두움조차도 구별할 수 없게 되는데 사실은 흔한 병이며 건강한 사람에게
나타나기도 하는 눈병이다.

헨델은 대식가, 애주가, 애연가였으며 특히 거구에 비만한 체구였기 때문에 혈관에 아테롬성 동맥경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되면 고혈압은 수반하게 되어 몸은 점점 쇠약하게 되는 것이었다.

★ 사나운 뇌졸중

1750년 8월에 헨델은 몇 명의 고향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유럽대륙을 향해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네덜란드의 하구 근처에 도달했을 때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겨우 죽음은 면했지만 중상이어서 결국 고향인 할레는 방문하지 못했다.
헨델이 독일로 출발하기 4주 전에 바흐는 이미 세상을 떠나 만날 수가 없었다.
바하의 사망 이후 헨델은 자기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몸이 쇠약해 1750년 6월 1일에는 '사람의 생명이 고르지 않은 점을 생각하며'라는 그의 최초의 유서를 썼다.
그리고는 연주활동도 별로 하지 않고 집에만 머물게 되었는데 바흐의 죽음으로 인한 소위 노인성 우울병의 상태로 생각된다.

1751년 2월에 <예프다>의 작곡에 매달렸을 때 좌측 눈의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작곡을 중단했으며
6월에는 온천에서 요양하고 안과의사를 방문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시력장애의 원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노인성 백내장 때문이었다. 안과의사의 진단은 진단 받은 때는 이미 절망적이라 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프다>의 작곡을 재촉해 8월에 완성하였다.
1752년 11월 3일 헨델은 브륜힐드 의사의 집도로 눈 수술을 하여 일시적으로 시력이 좋아지는 듯 했으나
결국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바흐의 눈 수술을 했다는 죤 티라 안과의사는 자기가 헨델의 눈 수술을 해 성공했다고 자랑하고 있었으나 티라가 수술하였다는 근거가 없다. 아마도 환자를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른다.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의 연주가 끝나자 헨델은 쓰러져 사람들에 의해 집으로 옮겨졌다.
4월 11일에는 정신을 차려서 유서에 궁핍한 음악가와 그 가족에세 천파운드를 기부한다는 것을 추가했다.

헨델은 1759년 4월 14일 뇌졸중의 재발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인에 대해 심근경색을 추리하는 의사도 있으나 재발되곤 한 뇌출혈 증상으로 보아서는 뇌졸중이 타당한 사인인 것 같다.


문국진(학술원 정회원/ 법의학자)

출처 http://www.ouimoi.com/music/handel.htm

200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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