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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스토리

황인용

우리들의 영원한 DJ

[ 黃仁龍 ]

출생 19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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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감성도 함께 가야 해요. 풍요로운 인생을 위해서는 그것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많은 이의 가슴에 따뜻함을 불어넣어 준 방송인 황인용. 동양방송 3기 아나운서로 데뷔해 <TBC 파노라마>, <장수만세>, <밤을 잊은 그대에게>, <황인용의 영 팝스>,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등을 진행하며 우리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팝 전문가라는 수식어를 뒤로하고 이제는 자신이 운영하는 음악실 ‘카메라타(Camerata)’의 자리를 지키며 클래식과 함께 정겨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영원한 방송인. 모든 게 우연이었다고 고백하지만, 그의 삶 속에 묻어있는 필연적인 이야기들을 들어 보자.

방송인 황인용 인터뷰 영상

소소한 추억거리가 많아요. 저희 집에서는 항상 닭을 키웠는데 달걀을 낳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알이 나오자마자 '탁'하고 깨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이 되면 모닥불 피워 놓고 멍석 위에서 풋콩 같은 것을 구워 먹기도 했고요. 그 당시 어르신들이 ‘나무꾼과 선녀’나 ‘호랑이와 수수깡’ 같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 재미있었죠. 겨울이 되면 어머니가 부엌에 있는 광에 밤을 숨겨두고는 하셨는데 그걸 훔쳐 먹었던 생각도 나네요. 옛날 시골에는 수리 시설이 안 돼서 물을 채워두는 논이 있었는데, 추워지면 그곳 물이 꽝꽝 얼기 때문에 썰매를 타면서 놀기도 했습니다. 그게 그 시절의 유일한 오락이었거든요. 서울이나 도회지에서 스케이트를 가지고 오는 친구를 보면 너무 부러워서 그걸 사달라고 밤새도록 울기도 했죠.

제가 외아들로 자라서 어렸을 때는 약간 이기적인 성향도 있었어요. 집에 손님이 오셔서 좋은 반찬이 밥상에 오르면 그걸 먹겠다고 엄청 떼를 쓰고 그랬거든요. 특히 계란 같은 것이 올라오는 날에는 더 심했죠. 그때는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잖아요. 그랬던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은 시골에서 한문 글방을 하셨던 할아버지였어요. 거기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명심보감], [소학]까지 떼고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남들은 할아버지께 찾아와서 글을 배우지만 저는 손자라서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게 자랑이었죠. 그리고 제 고향이 파주인데 그곳이 6ㆍ25전쟁 때 다 파괴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고, 나중에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외로움을 많이 타기도 했습니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방송인이 된 것은 우연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신문에서 동양방송(TBC) 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합격했다. 방송인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는 그는 지난 세월을 두고 아슬아슬하지만 용케 지나온 게 아닌가 싶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 새벽마다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그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공부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 꾸준하게 해야 되는구나'란 생각을 그때 했거든요. 딱히 법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어렸을 때의 그 마음이 법학과랑 이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학창 시절의 저는 꿈이나 대단한 희망 같은 게 없었어요. 집도 가난했고 꿈을 꿀 만큼의 의지도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법대를 가게 된 거죠. 그렇게 대학을 갔지만, 제 청춘은 온통 잿빛이었어요. 정처 없이 방황하는 가난한 대학생이었으니까요. 당시 우리나라가 수출에 힘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역업을 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구체적 목표도 없이 막연한 생각뿐이었어요.

20대 초반까지는 방송인이 되겠다는 꿈을 꿔본 적도 없어요. 그때는 ‘방송학’이라는 개념도 없을 때였거든요. 신문방송학과도 당연히 없었죠.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저는 라디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방송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대학 다닐 때는 방송 듣는 걸 굉장히 좋아했고 방송국 활동에도 상당히 활발하게 참여했어요. KBS가 주최한 대학방송 경연대회에 경희대 대학방송국이 응시했는데, 제가 성우로 참여했었죠. 아나운서 공부를 따로 하거나 하진 않았고요.

그 이후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다가 신문에서 TBC(동양방송) 사원모집 공고를 보고 ‘아나운서 시험이나 볼까?’하며 지원했는데, 그로 인해 제 인생이 바뀌게 되었죠. 어쩌면 대학 때의 경험이 제 운명을 결정지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지나온 시절이 아슬아슬했는데 그래서인지 “아, 용케 살아왔구나” 그런 생각이 가끔 들곤 합니다.

황 아나운서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배운 유교적인 예절이 몸에 배어 있다. 덕분에 <장수만세>에서 노인들을 모시고 출연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진행을 할 수 있었고, 출연자와 시청자의 호응을 얻으면서 명사회자로 명성을 얻었다.

입사 후 6년 동안 5분짜리 뉴스와 콜사인 외에 특정 프로그램을 맡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TBC 파노라마>라는 프로그램에 발탁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죠. 그 결과로 노인 프로그램이었던 <장수만세>의 사회자로 뽑혔고, 출연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진행으로 이름을 서서히 알리게 된 거예요. 그것도 저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배운 유교적인 예절 때문에 처음부터 어렵지 않게 진행했거든요. 방송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고나 할까요? 사실 <장수만세>가 처음에 만들어질 때 방송국에서는 별로 기대를 안 했다고 해요. 그리고 선배들이 출연하기 꺼려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노인들을 모신다는 게 상당히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요. 공손해야 하고 잘 맞춰드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저에게 넘어오게 된 거죠. 얼마나 행운입니까?

요즘은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그게 좀 아쉽죠. 다시 그런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면 예전과는 다른 구성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처럼 가족 단위로 이야기를 다루기보다는 출연자의 인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지금 하시는 일과 취미 활동, 그리고 앞으로 활동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서도 다루는 거예요. 노인이라고 하면 인생의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다 옛말이죠. 그분들이 현재 삶을 얼마나 잘 꾸려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면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지리라 봅니다. 그럼 시청률도 잘 나오지 않겠어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가족들과 함께 노래자랑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하는 프로그램, 정신 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가치와 인간의 심성까지 전달한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해요.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로 활약하던 시절의 황인용 아나운서. 그는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것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라디오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라디오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그 당시 방송은 저에게 생존 수단이었어요. 너무나 감사했죠. 라디오 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을 맡았던 것도 굉장히 행운이었어요. 제가 팝송 DJ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정부에서 방송국에 심야 프로그램을 아나운서에게 맡기라는 지시를 내려서 제가 들어가게 된 거예요. 당시 이장희, 윤형주 등 인기 가수들이 음악 방송 진행을 하니까 청소년들이 너무 몰입을 했어요. 생방송 전화 연결이 폭주하는 바람에 시내 전화선에 마비 사태가 오기도 했거든요. 그러니 상대적으로 점잖고 재미가 덜한 아나운서들을 동원한 겁니다.

사실 처음엔 그 일이 싫었어요. 팝송 DJ를 하고 싶어서 방송국에 들어간 게 아니고, 시사 프로그램이나 교양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팝송 DJ에 더 맞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소질을 개발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원래 숫기가 없는 편이라 학교에서 장기 자랑을 하면 노래 한 곡 부르기까지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아이였어요. 몸을 배배 꼬면서 뒤로 빼는 그런 스타일이었죠. 그런데 TV와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놀랍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견해 낸 거예요.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시작할 당시에는 소질이 없어서 3~4개월 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진행을 너무 못하니까 심지어는 담당 PD가 답답한 마음에 안경을 벗어 던졌다니까요. 그런데 방송국의 윗사람들은 제 얼굴이 TV에 알려져 있고 신선하다는 이유로 밀어붙이셨어요. 청취율 때문이었죠. 그러니 제가 잘하는 사람이거나, 팝송을 많이 알아서 발탁이 된 게 아니었다는 거죠. <TBC 파노라마>나 <장수만세> 덕분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DJ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3~4개월이 지나니까 점점 제 속에서 끼가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라디오는 정말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텔레비전보다 정겹고 따뜻하죠. 생명력도 훨씬 길고요. 20년에서 25년 가까이 진행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게다가 진행자의 인격이 드러나는 방송이라고 생각해요. 매일매일 청취자와 대화를 주고받고 호흡을 같이 하다 보면 인격을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하실 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황인용보다는 라디오를 진행하던 황인용으로 기억해 주고 계세요. 지금 만약 라디오 방송을 다시 하게 된다면 그때보다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팝 DJ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음악은 엄청 좋아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서 모내기 할 때 농악놀이를 했는데 그때 들려오던 태평소 소리가 참 좋았어요.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풍금 소리가 좋았고요. 중학교 들어가서는 장기범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스무고개>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았어요. 대학생 때는 음악다방에서 틀어주는 브룩 벤톤(Brook Benton), 앤디 윌리엄스(Andy Williams), 마틴 로빈스(Martin David Robinson),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이런 사람들의 음악을 좋아했지요.

그런데 방송을 진행하면서 취향이 조금씩 변해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이나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쪽의, 우리나라로 이야기하면 ‘뽕짝’같은 음악을 들었죠. 그런데 계속 듣다 보면 성향도 발전하더라고요. 점점 록 발라드(Rock ballad)를 듣게 됐어요. 그 후 비틀즈(Beatles)의 음악도 제대로 듣게 되었고요. 음악적 기반이 없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던 곡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하자 신기했어요.

방송을 진행하면서 실수한 적도 많아요. 감성적이어서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진행을 한 적도 있고, 음악이 끝나면 멘트를 해야 되는데 너무 빠져서 듣다가 가만히 있기도 했죠. 저 때문에 담당 PD가 많이 당황스러워했어요. 그래도 제게 그런 감성적인 부분이 있다는 게 감사했어요. 오히려 그 덕분에 시청자들에게도 가까이 갈 수 있었고요.

비틀즈도 처음에는 미국에서 계속 거부당하다 ‘I Want to Hold Your Hand’가 대히트를 하면서 빌보드를 석권하고 ‘에드 설리번 쇼’에까지 나가게 되었죠. 천문학적인 팬이 모여들자 ‘영국의 침공이 시작됐다’는 표현까지 등장했고, 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게 되죠.

비틀즈의 음반 판매량은 클래식 전체 판매량에 필적한다고 해요. 그들은 지금도 살아 있는 그룹이나 마찬가지예요. 연 200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하니까요. 현대의 모차르트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특히 ‘예스터데이(yesterday)’쯤 오면 실제로 클래식의 현악 4중주를 도입하죠. 그래서 저는 그들을 대중음악 역사의 틀을 완전히 바꿔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의 기초도 전혀 없었고 공부를 한 사람들도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음악의 내용과 구성도 새로운 스타일이었고요. 그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도 통상적인 가사 내용과 너무나 달랐어요. 꼭 사회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사랑을 얘기하더라도 말이죠. 운영의 측면에서 보면 자급자족하는 기능, 즉 음악의 생산ㆍ연주ㆍ아이디어를 모두 네 명 안에서 해결했어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특히 존 레논(John Lennon)의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까지 더해져서 엄청난 음악을 만들어 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참신함 때문에 지금도 생명력이 있는 거예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가 사내에서 우수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상을 받았다. 왼쪽부터 당시 제작을 맡았던 이명룡 PD, 탤런트 강부자 씨, 황인용 아나운서. 서민들의 삶의 애환에 공감하며 인기를 얻었던 <황인용, 강부자입니다>에서 두 DJ는 찰떡 호흡을 자랑하며 15년간 프로를 이끌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우리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았어요. 강부자 씨는 목소리도 좋았지만 특히 편지를 읽을 때는 남달랐습니다. 서민들의 사연이 담긴 편지인데, 강부자 씨가 정말 호응을 잘 해줬고 그 내용들을 잘 이해해 줬어요. 저는 그것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 역할이었는데, 서로 격의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프로그램을 순조롭게 진행했죠. 그래서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는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호텔에 가면 도어에서 일하시는 분, 음식점 가면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 그런 분들이 얼마나 반가워해 주시던지요. 절대적인 인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강부자 씨와 저는 정서가 비슷했어요. 유교적인 정서라고 할까요? 둘 다 보수적인 데가 있어서 잘 통하는 편이었죠. 가정에서 지켜야 되는 가치들이나 생활 태도까지 비슷해서 근본적으로 잘 맞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희 둘뿐만 아니라 그 정서가 청취자들에게도 공유가 되는 거예요. 저희 모두가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죠. 아마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저로서는 정말, 강부자 씨를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황 아나운서가 프리랜서가 된 1980년, 언론사 통폐합으로 TBC는 KBS에 통합된다. 심야 프로그램인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자였던 황 아나운서는 방송 종료 방송을 맡게 되었다. ‘비장하지 않게,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마지막 방송을 진행할 때 고별사를 고하면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어요. 처음으로 운명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됐죠. 제가 성격이 진취적이지 않아서 한 번 직장은 영원한 줄 알았지, 방송국이 사라진다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런 고정관념 속에 살다가 방송국이 없어지니까 ‘역사라는 게 개인이 아무리 거부해도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도저히 역행할 수는 없는 거구나’하는 엄숙한 운명을 느낀 거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휩쓸려 가는구나’, ‘개인은 무력하구나’하는 것도 절실하게 느꼈어요.

저는 마침 그 해에 방송국의 월급이 너무 적고 살기가 힘들어서 TBC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어요. 아이가 황달에 간염까지 걸렸는데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제대로 치료를 못해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4월부터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는데, 11월 30일에 방송국이 없어졌어요.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11월 17일 아침에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를 진행하러 갔는데 방송국이 뒤숭숭한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방송국이 없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정확히 13일 후에 고별 방송을 하게 됐어요. 제가 프리랜서라 해도 TBC에서만 방송하는 아나운서였으니 마음이 어려웠죠.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어요. 방송국 분위기는 마치 폐허와도 같았어요. 서류가 쓸데 없어졌으니 복도나 사무실이 아무렇게나 서류더미로 쌓이기 시작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10일 동안 방송을 했고 마지막 방송까지 하게 됐어요. 마지막 방송이 11시 10분부터 새벽 1시까지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12시가 지나면 날짜가 바뀌잖아요. 그 순간부터 TBC가 KBS가 되는 거였어요. 그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방송을 지키기 위해서 모였는데 다들 속상한 마음에 술을 한잔씩 하고 왔더군요.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오직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저만을 바라보는데 그것도 보기가 참 힘들었어요.

11시 30분이 지나면서부터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원고에 쓰여 있는 것도 잘 보이지가 않아서 즉흥적으로 진행하게 되더군요. 다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오늘 자정을 기해 여러분 곁을 떠나려 합니다.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여러분이 아끼던 동양방송은 사라져도, 동양방송의 기억은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 방송을 진행할 때 ‘비장하지 않게,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죠. 결국 애청자들에게 고별사를 고하면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15년 가까이 일했던 방송국이 없어진다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어요.

많이 그립죠. 떠올리면 외로워지기까지 해요. 방송을 너무 일찍 그만뒀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쩌면 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고비가 올 때마다 못 넘기고 포기했다는 말이 더 맞겠죠.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인수분해를 배우게 되자 고비를 못 넘겼고, 영어의 고비도 못 넘겼어요. 사실 영어에는 소질이 있었는데도 끝까지 열심히 하지는 못했죠. 그리고 방송 또한 완성을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아쉬워요.

마지막 공중파 방송은 1997년 11월이었어요. 그때 IMF가 터져서 똑똑히 기억나요. 제작비 많이 드는 프로그램들을 없애면서 그만두게 됐거든요. IMF 실업자가 된 거죠. 20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제 인생도 많이 저물었어요. 저는 20세기의 인물인 셈이에요. 그 뒤로 교통방송을 6~7년 더 하고 2004년 완전히 그만뒀어요.

사실 방송을 그만둘 때 이루고 싶었던 꿈이 하나 있었어요. 근사한 호텔의 룸을 빌려 청취자를 포함해서 그동안 제가 신세 진 분들을 모셔놓고 1시간 30분 정도의 고별쇼를 하고 싶었어요. 제 프로에 나와서 인연이 됐던 분들, 김동길 교수님이나 이어령 선생님 같은 분들을 초대해 대접하고, 지나간 얘기도 하고, 열심히 연습해 노래도 두세 곡 부르고, “그동안 신세가 많았습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흐지부지되어 버렸어요.

방송을 떠난 황 아나운서는 고향인 파주시 헤이리에 카페를 겸한 음악 감상실 ‘카메라타’를 열었다. 카메라타는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인, 건축가, 미술가, 음악가 등이 모여 토론하고 얘기를 나누던 작은 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는 본래 하루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있어야 견디는 인간이었어요. 음악을 듣든, 친구들과 담론을 벌이든, 술을 마시든 말이죠.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쏟다 보면 거기서 어떤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에너지가 생겨 나거든요. 제게는 그것이 음악과 오디오였어요. 소리가 좋아서 쫓아다니다 보니 노후에 하나의 동반자,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됐다고나 할까요? 그게 ‘카메라타’가 되었죠.

‘카메라타’는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인, 건축가, 미술가, 음악가 등이 모여 토론하고 얘기를 나누던 작은 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계획을 확실히 세워서 만든 곳은 아니에요. 방송을 오래 할 것 같진 않았고,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음악 감상실 같은 곳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거든요.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헤이리라는 동네가 생긴 겁니다. 우연히 신문 1단 기사에서 제 고향인 파주 헤이리에 예술마을이 생긴다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집사람에게 당장 말했죠. 그러나 헤이리 문화예술마을의 조성에 있어 제가 주축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저는 뒤늦게 알게 됐고, 고향인지라 동참한 거니까요.

제가 오래 전부터 음악광이었고, 또 스피커광이었어요. 저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죠. 그런 만큼 카메라타를 제법 괜찮은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단 스피커가 제 몫을 하죠. 스피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제법 이름난 빈티지 명품들이거든요. 이 중에는 1920년도에 제작된 것들도 있어요. 잘 관리해 준 덕분에 뿜어내는 소리도 여전하죠. 또 그 소리를 잘 울리게 해줄 만큼의 공간도 만들었어요. 다행히 삼십 년째 모아온 LP판도 1만 5천장이 넘습니다. 좋은 스피커와 그곳에서 나오는 소리에 심도를 심어줄 공간, 그리고 귀를 즐겁게 해줄 다양한 명반들까지 구색을 맞췄으니 이 정도면 음악 천국이 될 만하죠.

벽 자체가 이야기를 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뭔가 비워진 듯 하면서도 공간 자체가 어떤 정서를 전달해 주는 그런 느낌이요. 저는 카메라타가 그런 곳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억지로 뭘 꾸며서 만들거나 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를 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카메라타를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었습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설계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자연스럽게 노출 콘크리트로 짓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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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타에는 희귀 LP 음반들이 가득하다. 황 아나운서 본인이 수집한 것도 있고 유명 인사들이 기증해 준 것도 있다. 하지만 황 아나운서는 아직 부족하다며 좋은 음반을 더 모으고 싶어 한다.

알아주는 음악광이자 스피커광인 그가 꾸민 곳답게 카메라타의 음향 시설은 매우 훌륭하다.

방송에서 하도 팝을 듣다 보니까 반발심리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젊어서 팝 음악을 너무 들어서인지 음반을 모을 때 클래식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잘 모르는 분야를 배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죠. 저는 사실 클래식에 대한 기초가 좀 부족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고전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호기심이 아주 강했어요. 모르니까. ‘아, 이게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 세계로구나’하고 느꼈죠.

그렇다고 해서 팝을 싫어하거나 홀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팝 중에도 예술 차원에서 훌륭한 곡들이 부지기수예요. 다만 클래식은 팝과는 전혀 다른 음악 언어라고 할 수 있겠죠. 클래식을 틀어드리는 것에 거창한 사명감이라든가 그런 건 없어요. 가끔 재즈를 틀어드리기도 하고요.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어머니 같은 존재라는 의미예요.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보호를 받듯이, 음악도 그런 역할을 해준다고 보거든요. 음악은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덜 외로워져요. 사람들은 외로울 때 음악을 찾게 되잖아요. 그건 음악이 마음을 미세하게 흔들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역할도 하고요. 그래서 음악을 늘 듣는다는 것은 기댈 데가 있고 외로울 때 투정 부릴 데가 있는 것과 같아요. 어머니 품속같이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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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셨던 어머니께 감사 드려요. 종손으로 태어난 저를 마음을 다해 키워주셨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오직 저희들을 위해 죽을 각오로 견뎌주셨어요. 그게 저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제 삶에 일어난 모든 우연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최선을 다해서 살지 못했지만, 운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피난을 갔지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 운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우연과 운명과 그리고 저를 위해 헌신해 준 어머니께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유럽 문화를 공부하고 싶어요.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 독일 쪽으로 음악 관련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여행을 할 거예요. 제 오디오는 아직 미완성이에요. 결정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두 군데 있는데, 그 부품을 오리지널로 바꿨으면 좋겠고요.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는 알지만 워낙 비싸서 아직 엄두가 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음반도 더 모을 거예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완성해 주겠죠. 비틀즈가 역사에 남았듯, 이 공간도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역사, 철학, 미학, 물리, 어학 등등 다 배우고 싶어요. 기본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밑에 깔려야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책을 많이 읽고 싶어요. 제가 독서량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 앞에 가면 주눅이 들 때가 많거든요. 예전에 같이 일하던 PD가 해준 말인데, 제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김동길 교수가 출연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긴장해서 단추를 여몄다가 풀었다 하기도 하고 넥타이를 여러 번 고쳐 매기도 했대요.

사람들이 저더러 젊게 산다고 하지만, 저 스스로는 거울로 얼굴을 볼 때마다 세월을 실감합니다. 저는 웬만한 공식석상이 아니라면 대체로 블루진을 입어요. 스티브 잡스 흉내 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건 아니고요. 청바지를 입으면 풍기는 느낌도 젊잖아요. 그게 좋아요. 그리고 늘 음악의 세계에 정신을 두고 사는 것이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요. 이 나이가 됐지만 성인 질환을 겪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음악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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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인류가 쌓아오고 축적한 지식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많이 아는 것만이 힘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한국어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필수로 공부를 하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변화된 시대에 살고 있거든요. 여행도 많이 다니세요.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에 다니는 여행이 중요합니다. 저희 때에는 여행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잖아요. 비행기도 1979년에 처음 타봤던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일들도 그 시절에는 어려웠으니 말이죠.

그리고 모든 것이 디지털로 돌아가고 있지만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돼요. 풍요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들 전화기만 붙잡은 채로 살고 있으니 문제가 많죠. 그런 것에 붙들려 있으면 생각할 겨를이 없어져요. 앞으로 돌아올 세월을 무한정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게 아닙니다. 빨리 오고 빨리 가버리는 것이 세월이잖아요. 그럼 그 세월을 아껴야 할 필요성이 있어요. 그래서 여행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독서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새벽 네 시 반이면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 한쪽을 구워서 과일과 함께 먹은 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 10시까지 작업을 한답니다. 그 다음에는 달리기를 하고, 오후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우리들도 그럴 필요성이 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독서를 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야 하고요.

대단하게 기억될 만한 일을 하지도 못했고, 그런 사람으로 제 자신을 평가하고 싶지도 않아요. 대단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도 없어요.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평범하게 살았다 해도 가까운 이들에게는 어떻게든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잖아요. 그럴 때 ‘황인용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어.’,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지’ 이렇게 생각해 줬으면 해요. 거기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주 근사한 사람이었지.’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좋겠어요.

특히 제 주변에 젊은 친구들이 꽤 많은데요, 나중에 제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카메라타에 모여서 이야기할 때 ‘황인용 아저씨가 여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그리워해 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죠.


인터뷰이 소개

황인용
1940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67년 동양방송(TBC) 3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TV와 라디오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장수만세>와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어르신들을 대하는 깍듯하고 예의 바른 진행으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황인용의 영 팝스>에서는 음악에 대한 폭넓은 식견으로, <황인용, 강부자입니다>에서는 청취자와 함께 울고 웃는 푸근한 진행으로 늘 우리 곁을 지켰던 황인용 아나운서는 라디오야말로 진행자의 인격이 드러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그는 은퇴 후 고향인 파주 헤이리에 마련한 고전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운영하며 여전히 클래식과 함께 정겨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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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3.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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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공처 네이버 naver

  • 인터뷰이 소개 황인용

    1940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67년 동양방송(TBC) 3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TV와 라디오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장수만세>와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어르신들을 대하는 깍듯하고 예의 바른 진행으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황인용의 영 팝스>에서는 음악에 대한 폭넓은 식견으로, <황인용, 강부자입니다>에서는 청취자와 함께 울고 웃는 푸근한 진행으로 늘 우리 곁을 지켰던 황인용 아나운서는 라디오야말로 진행자의 인격이 드러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그는 은퇴 후 고향인 파주 헤이리에 마련한 고전음악감살실 ‘카메라타’를 운영하며 여전히 클래식과 함께 정겨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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