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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중국에 관해서
kkiimm13579 조회수 20,977 작성일2014.05.09

 중국의 특징 자연환격(위치 지형 기후등)

인문환경(정치 경제 인구 수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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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
 중국에 대해

 

 

아시아 동부에 있는 나라로,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淸)나라에 이어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세워졌고,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위치 아시아 동부

동경 105° 00", 북위 35° 00"

9596961㎢

14500㎞

UTC+8

베이징[北京]

한족 (92%)과 55개 소수민족

중국

도교, 불교, 그리스도교 (3%), 이슬람교 (1%-2%)

1949년 10월 1일

후진타오(胡錦濤) (2003.3 취임)

+86

인민공화제

위안(Y)

.cn

www.china.org.cn

1,338,612,968(2009.7 어림)명

73.47(2009 어림)세

1.77 명(2008년 기준)

5,963 $(2008년 기준)

4 %(2007년 기준)

14,350억$(2008년 기준)

10,740억$(2008년 기준)

139명/㎢(2009년 기준)

↑ 중국 국기 / 아시아 동부에 있는 세계에서 면적이 3번째로 큰 나라.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 중국 지도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로, 국토는 남북 5500㎞, 동서로 우수리강(江)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한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간쑤·광둥·구이저우·랴오닝·산둥·산시[山西]·산시[陝西]·쓰촨·안후이·윈난·장시·장쑤·저장·지린·칭하이·푸젠·하이난·허난·허베이·헤이룽장·후난·후베이  22개 성(省)과 광시장족·네이멍구·닝샤후이족·시짱(티베트)·신장웨이우얼  5개 자치구(自治區), 베이징·상하이·충칭·톈진  4개 직할시(直轄市), 마카오·홍콩  2개 특별행정구(特別行政區)로 이루어져 있다.

↑ 중국 행정구역 지도

↑ 중국 주요도시 지도

중국의 지형과 지질

중국 대륙의 구조는 유라시아 대륙판이 동쪽 또는 남쪽으로의 유동 중에 태평양과 접촉하여 생긴 것이다. 또한 중국 남서부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인도양 판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지형학적으로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두 지역 모두 지질구조는 여러 거대한 지향사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 사이에 여러개의 산맥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의 산맥들의 가장 두드러진 방향은 북동~남서로 대체로 태평양 판과 중국판이 충돌한 방향과 관련되며, 우리나라의 산맥들과 중국 동부의 산맥들과 유사한 방향성을 보인다. 북동-남서방향의 산맥들을 중국의 동쪽에서부터 보면 북동부의 창바이[長白]산맥, 화베이[華北]평야,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 그리고 시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분지로 이어지면서 산맥과 평야지대가 차례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타이항[太行]산맥, 우산[巫山]산맥도 이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대흥안령 산맥이 만들어놓은 산지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 황투[黃土]고원, 관중분지, 쓰촨[四川]분지, 윈구이[雲貴]고원으로 분지와 고원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동서방향을 가진 지형들도 있다. 북쪽에서부터 보면, 인산[陰山]산맥, 친링[秦嶺]산맥, 다볘[大別]산맥, 난링[南嶺]산맥 이 있다. 이렇게 하여 주요한 지질구조가 서로 십자형으로 교차하는데 이를 지리학자 스펜서는 ‘중국 장기판 형태’라고 명명하였다. 동서방향의 지형들은 서쪽으로 가면 대규모의 지형들과 연결된다. 이 대규모 지형은 중국판과 인도판이 접촉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즉 히말라야산맥, 티베트고원, 곤륜[쿤룬:崑崙]산맥, 타림(타리무:塔里木)분지, 차이다무[柴達木]분지, 천산[톈산:天山]산맥, 중가리아(준가얼:準1爾)분지, 알타이산맥 이다.

이러한 중국의 지질구조는 과거 지질 환경과 지각 구조운동이 다양하게 나타난 결과이며, 이로 인해 자연 경관은 매우 다양해지고고 광물자원의 종류도 많다. 중국은 전체 면적의 2/3가 고원이나 산악으로 되어 있어 토지 이용에 한계가 있는데, 더욱이 전체 면적의 1/4 정도가 서부지역에 위치한 해발고도 3,000m 이상의 고산지이다.

중국의 자연지형을 주요 고도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칭하이-티베트고원을 중심으로 평균 고도가 4,000m에 달하는 지역, ② 서부 티베트고원에서부터 동부 대싱안링산맥·타이항산맥·우산산맥에 이르는 해발고도 1,000∼2,000m의 고원과 산간분지 지역, ③ 동부와 북부의 평원과 북동부의 평원, 그리고 양쯔강[揚子江] 유역평야를 포함하는 해발고도 500m 이하의 구릉과 평야지대, ④ 해저 200m 이내의 보하이만[渤海灣]·황해·동중국해·남중국해 의 대륙붕 지역 이다.

약 240만 년 전부터 시작된 제4기는 황토(黃土)라고 불리는 풍성토(風成土: 일명 뢰스층)의 확장, 빙퇴적·충적평야·사막의 발달, 티베트에서의 영구동토층의 확대 을 통하여 오늘날의 중국 지형과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히말라야산맥과 티베트고원의 융기로 약 5만 6,471㎢의 거대한 산지 빙하가 형성되었다. 알타이산맥, 톈산산맥, 친링산맥, 쿤룬산맥, 탕구라[唐古拉]산맥 에는 6~8월에 몬순의 영향으로 70%에 달하는 강수량이 집중하며, 이때 빙설 표면이 급속도로 녹아서 홍수를 일으켜 길이 자주 유실된다.

서부 건조지역은 고도에 따른 기후 및 지형의 변화가 심하여 산 정상부에는 산지 빙하, 그 밑으로 주빙하(周氷河) 지대, 산기슭 부근에는 반사막 지대, 그리고 모래와 자갈로 덮인 사막이 계속 이어진다. 서부 지역의 산지의 빙하가 녹은 물인 융빙수(融氷水)는 중가리아·타클라마칸·네이멍구[內蒙古]사막 주위의 농업과 목축업에 중요한 자원으로 이용된다.

중국 자연환경 가운데 중국의 농업과 문명 발생에 시원적(始原的)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인간의 경제적 활동에 자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黃土[Loess:뢰스]이다. 뢰스지대는 제4기에 형성된 것으로 면적은 약 63만 1000㎢로, 중국 면적의 6.6%를 차지한다. 그 범위는 가장 퇴적층이 뚜거운 황토고원을 비롯하여 알타이산맥·쿤룬산맥·친링산맥·톈산산맥의 서부 국경선 지대에서 북동부의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허베이성[河北省] ·허난성[河南省]까지 걸쳐 있다. 특히 황허강[黃河] 중류의 산시성[山西省] ·산시성[陝西省]·간쑤성[甘肅省] ·닝샤후이족[寧夏回族]자치구는 뢰스의 층이 두껍고 연속적인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다.

황토고원은 남부와 동부의 습윤 몬순 지대와 북부와 서부의 사막 지대 간의 기후 점이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습도가 낮고, 해발고도 500∼2,000m 고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겨울이 매우 건조하고 춥다. 황토고원의 북쪽은 봄 역시 매우 건조하며 강수량의 70%가 7·8·9월에 집중하는  건조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로인해 중심적인 농업지대인 이 지역에 토양침식이 심해지면서 농업과 토양 보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최근 건조화가 심해져 황토지대의 경계부분에서의 사막이 확장되고 오아시스로의 모래 유입이 확대되면서 특히 닝샤후이족자치구 ·네이멍구자치구 ·간쑤성 서부 에서 지역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리고 황사(黃砂)는 북부와 동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문제를 일으켰다. 황사와 사막의 확장은 인간의 활동이 증가된 역사시대에 들어 크게 늘어났는데, 인간에에 의한 삼림 파괴와 작물 재배의 확대가 사막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기도한다. 황사는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까지 운반되어 3~5월에 황사현상을 야기한다.

중국의 기후와 식생

중국의 기후는 최남단의 열대에서 서부의 건조기후, 동북삼성의 냉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기후가 대부분 나타나고, 지형고도면에서도 동부의 저지에서 서부의 8000m급 고산지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이로인해 중국의 식생도 열대우림에서 냉대의 타이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종류가 많고 다양하며, 토양 또한 그러하다. 중국의 기후와 식생의 측면을 종합하여 성격이 다른 자연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크게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첫째, 습윤기후지역으로 강수량이 풍부하여 삼림으로 덮힌 지역으로 중국의 약 1/3은 습윤기후지역이다. 습윤기후지역은 열대습윤에서 냉대습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습윤지역이 나타난다. 즉 남부와 남동부 최말단의 열대우림과 해안 도서의 몬순 삼림, 그리고 황허강 동쪽의 아열대 광엽 활엽수림에서부터 보하이만[渤海灣]에 이르는 상록(혼합)림까지의 북동부, 그리고 북동부 말단인 하얼빈[哈爾濱] 동부의 한랭한 기온의 타이가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 삼림과 건조 초원이 결합된 곳으로 습윤기후와 건조기후가 섞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중국 전체 면적의 약 14%를 차지한다. 이에 해당하는 곳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북동부 평야의 삼림 스텝과 산시성[山西省]·산시성[陝西省]·간쑤성의 황투고원이 있다.

셋째, 반건조 지역으로 분류되는 전체 면적의 20%를 차지하는 곳으로, 이곳은 초원과 강수량 250mm이하의 스텝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환경 점이지대이다. 이곳에 해당하는 곳은 산시성[陝西省]과 닝샤후이족 자치구의 북부인 오르도스[鄂爾多斯]와 네이멍구 자치구 일부의 스텝 지역이다.

넷째,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하는 건조지대이다. 서반부의 광대한 지역은 자갈사막, 암석사막, 모래사막의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독특한 건조사막 식생들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오르도스 북단의 사막과 치롄[祁連]산맥 북부의 알라샨, 중가리아분지, 타림분지의 온대 사막, 그리고 차이다무분지와 쿤룬산맥 북사면의 한랭한 사막, 쿤룬산맥 서부의 고산사막과 스텝사막, 티베트고원의 건조 고산 초원 이 있다.

중국의 기온 분포는 여름에는 남동쪽에서의 영향과 겨울에는 북동쪽에서의 영향이 강한 몬순 주기와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산악, 그리고 동부에 위치한 대륙적 위치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1월 평균기온은 전체의 약 60%가 0℃ 이하이며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 서부와 중가리아분지 같은 곳은 대륙성기후를 보여 겨울에-20℃까지 내려간다.

여름에 남동부는 기온과 습도가 모두 높아서 7월 평균 기온이 우한[武漢]·창사[長沙]·충칭[重慶]·난징[南京] 같은 곳은 25℃ 이상 올라가며, 이 네 도시는 모두 40℃ 이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서부의 건조한 분지에도 7월 평균기온은 높게 나타나는데 투루판[吐魯蕃]은 47.6℃까지 올라간 경우도 있다. 이는 해면하 155m에 위치하는 분지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차이다무분지와 같은 한랭한 고도가 높은 사막은 7월 평균기온이 5℃에 불과하다. 여름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영향을 끼친다. 고산지의 산맥에서의 강설(降雪)은 차고 건조한 겨울보다 여름에 많이 발생하며 주요 하천의 유입량을 늘리게 하여 덥고 습윤한 남동부에 홍수를 일으키기도 한다.

중국의 하천

중국은 국가면적이 거대한 만큼 유역면적이 100㎢가 넘는 하천이 5만 개 이상 있다. 중국의 대하천은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중국 전역을 관류(貫流)하면서 동쪽으로 흐르는 중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세 하천은 황허강·양쯔강·시장강[西江]이다. 이 가운데 양쯔강은 길이와 유역면적, 그리고 하구에서의 유출량(流出量)에서 다른 강을 압도한다. 황허강은 길이와 유역면적이 두번째이지만, 황허강은 중국문명의 발상에서 그 역할과 입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황허강은 뢰스 토양을 관류(貫流)하면서 많은 양의 토사(土砂)를 하류로 운반한다. 이 토사들이 넓은 화베이평야를 적시면서 농업용수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황하는 광대한 화베이평야일대를 사행(蛇行)하면서 역사시대에 무려 9번에 걸친 대규모의 물길이 이동을 보였다. 중국 서부와 황토고원에서 여름에만 집중하는 강수량과 문명 발생 이후 계속된 황허강 주위의 인간 거주는 홍수가 빈발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양쯔강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강이고 유출량이 9번째로 많은 강으로, 유역면적도 200만㎢로 중국에서 가장 넓다. 즉 길이도 5,980km로 가장 길며 상하이[上海] 근처에 있는 하구에서의 유출량도 32,190㎥/sec로 가장 많다. 양쯔강은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중심부를 흐르면서 관개를 위한 물을 제공하며 중심부로 접근하기 위한 수상 운송수단 역할을 하고, 황허강에 비해 홍수가 적다. 또한 양쯔강 주위에 있는 둥팅(洞庭)호를 비롯한 많은 호소(湖沼)들은 홍수를 자연적으로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세 강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시장강은 윈구이고원에서 발원하여 남중국해로 흘러들어가는데, 황허강에 비해 길이는 짧고 유역면적도 적으나 유출량은 더 많다. 내륙으로의 수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양쯔강과 유사하지만 유역면적이 좁아 농경지가 적고 거주하는 사람들도 적다. 그러나 그 지류가 흐르는 유역은 접근성이 양호하고 수량이 풍부해 약 1억 명이 이 부근에서 다양한 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의 토양

중국기후의 대경계선인 친링산맥∼화이허강[淮河] 선은 토양의 분포에서도 경계선이 된다. 화베이지방에는 석회토양(石灰土壤)이 발달하고 화난[華南]에는 알루미나·철분 토양이 발달되었다. 화베이의 석회토양은 염분은 풍부하나 유기물(有機物)이 적고, 수분이 부족하여 생산성이 낮다. 화난의 산성(酸性) 토양은 염분이 적고 비료분도 적어, 항상 비료를 주지 않으면 농작물의 생육이 충분하지 못하며 따뜻한 기온과 넉넉한 수분으로 벼를 성장시킨다. 둥베이[東北] 지방에서는 북부·동부에서 알루미나·철분 토양이 분포하고, 중부와 서부에는 석회토양이 많다. 북서 지방에는 회색사막토(灰色砂漠土)가 널리 분포하고 티베트는 산지와 초원지대를 이룬다.

중국의 주민

중국의 인구는 약 13억 1397만 명(2006년 8월)으로 세계 전체인구의 약 22%를 차지한다. 중국은 인구의 과대한 팽창을 막기 위해 1가구 1자녀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1970년대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1980년대 들어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한계가 나타났다. 이는 농촌지역의 전통적인 남아선호 관념과 더불어 개혁 이후 생산단위가 집단체제에서 가족 단위로 바뀜으로써 가구원이 바로 노동력으로 간주된 것에 기인한다. 최근 10년간 평균 인구성장률은 1.07%를 기록하였다. 2001년에는. 20년간 시행한 1가구 1자녀 정책의 실패를 시인하고 각 지역정부별로 2자녀 출산도 허용할 방침을 고려하였다.

한편 인구의 분포는 불균하여 헤이룽장성의 국경지대, 네이멍구자치구, 닝샤후이족자치구, 간쑤성, 칭하이성[靑海省],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시짱[西藏]자치구, 윈난성은 전체 면적의 약 2/3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12.5%에 불과하다. 반면에 중국 북부의 평야와 양쯔강 하류 주위의 충적저지(沖積低地)로 구성되는 전체 면적의 10%에 약 40%의 인구가 분포한다. 불균한 인구분포는 각성 내부에서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쓰촨성[四川省]의 경우 전체 약 1억 정도의 인구 중 서부 50% 지역에 5% 이하의 인구가 거주한다.

한편 1950년대부터 인구이동은 엄격히 통제하여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왔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통제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다. 농촌의 과잉인구는 농촌 내에서 비농업적 직업을 찾기도 하지만, 도시로 이주하여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해 개혁 이후 중국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무작정 도시로 유입된 인구들로 인해 다량의 실업자가 발생하였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맹류(盲流)’ 현상으로도 나타났다. 중국인들의 해외 이주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한국, 일본, 미국, 캐나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걸쳐 있으며 이들 한족(漢族)의 해외 이주자를 화교(華僑)라고 부르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이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여 그 나라 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의 민족구성은 최대민족인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은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며 한족 외의 민족을 동화(同化)시켜왔으나 소수민족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을 고수해오고 있다.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전통에 대한 보호책으로 자치구(自治區)나 자치주(自治州)를 설정하여 각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또 한편으로는 이들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한족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는 양자의 성격을 가진다. 소수민족들은 지역적으로 일정한 분포 양상을 보이는데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서는 좡족[莊族]·만족[滿族]·후이족[回族]·먀오족[苗族]·위구르족[維吾爾族]·이족[彛族]·투자족[土家族]·몽골족[蒙古族] 이 있고, 한민족(韓民族)인 조선족(朝鮮族)은 약 192만 명으로 14번째로 많고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하며 주로 둥베이[東北] 3성인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에 분포한다.

중국의 민족성은 자신들을 문화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문화가 유일한 것으로 여겼다. 바로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요체가 이에 근거하며 이를 토대로 주위의 민족을 오랑캐[夷狄]로 생각하였다. 이로써 체면을 존중하고 강한 자존의식을 갖춘 민족성이 이루어졌다. 또한 중국인들은 현실 또는 실속에 매우 빠른 민족이라고도 한다. 즉 중국인들에게 모든 사물의 판단 준거(準據)는 현실적 유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개방·개혁의 과정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익이 된다면 그들의 정체성(正體性)인 사회주의이념도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대륙적인 스케일을 가진 대범한 성격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이 흔히 말하는 ‘만만디[慢慢的]’라는 말은 이러한 성격을 극명히 보여준다. 황허강을 비롯한 장대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많은 왕조의 부침(浮沈)을 겪어야 했기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덕목이 많다. 특히 신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며, 그 신용은 사람들 사이의 대면관계(對面關係)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관시[關係]’는 대인 관계를 일컫는 말로 이 ‘관시’가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풀릴 수 있고, 역으로 하찮은 일이라도 ‘관시’가 없으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민족성은 개혁·개방으로 많이 희석되고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중국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중국의 언어와 문자

한자(漢字)로 표시되는 중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중국어는 일반적으로 한어(漢語)라고 부르기도 하고, 1956년 이후 중국의 표준어를 보통화(普通話)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어 표준어는 수백 년 동안 사용한 북방관화(北方官話)를 기초로 하고, 베이징[北京] 어음을 표준어로 하며 현대 백화문(白話文)을 어법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어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큰데 대체로 베이징어[北京語]·쑤저우어[蘇州語]·광둥어[廣東語]·푸젠어[福建語]·커자어[客家語]로 크게 나뉜다. 이 가운데 전체인구의 약 70%가 베이징어를 사용한다. 중국어의 어음특성은 성모(聲母)·운모(韻母)·성조(聲調)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성조의 경우 음의 높낮이에 따라 4가지 성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문자는 한자(漢字)이며, 그 수는 6만여 자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상용한자를 3,500자 정도로 제한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한 1964년에는 한자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간체자(簡體字)를 개발·보급하여 사용하고 있다. 민족자치구에서는 소수민족의 언어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종교

중국의 종교는 전통적인 것으로 불교·도교(道敎)·이슬람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16세기 이후 들어와 전파되었다. 중국 헌법 제36조에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주의국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문화혁명 과정에서 사원·교회 이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공격받아, 모든 종교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이후 종교도 과거에 비해 활발한 추세를 보이고 있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들도 중국으로 다수 몰려들고 있다. 각종 종교 신도 수는 약 2,000만 명으로, 대부분은 도교·불교 신자이며 나머지는 이슬람교도가 1~2%, 그리스교도가 3% 정도를 차지한다.

중국의 역사

선사시대의 중국

1927년 중국의 베이징시 외곽 저우커우톈[周口店]에서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중기 제2간빙기(第二間氷期) 지층에서 직립 유원인 다음의 고인골(古人骨)이 발견되어 북경인(北京人:Sinanthropus Pekinesis)이라는 학명이 붙여졌다.그 후 마지막 제4빙하기에 현대 아시아인종의 조상인 상동인(上洞人)이 저우커우톈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최고(最古)의 채색토기 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흑·백·홍으로 문양(文樣)을 그린 토기로 화베이 일대에서 남쪽으로는 푸젠·타이완에 분포하는데 1921년 허난성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양사오문화라고 총칭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흑색토기(黑色土器) 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산둥성 룽산전[龍山鎭]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룽산문화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6,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성의 용마고성보돈유적과 호남성의 성두산 유적 의 다양한 유적지의 발굴이 양쯔강 주변지역에 이루어지면서 장강문화설이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황허문명'이라는 개념은 더욱 폭넓은 의미의 '중국문명'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 즉 기존에는 황허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양사오문화와 룽산문화가 발전하여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는 논의에 기초해 '황허문명'이라는 개념이 널리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중국문명'이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서태열>

고대의 중국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3황(三皇)·5제(五帝)의 평화 시대를 거쳐 하(夏)·상(商)·주(周)의 3대(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귀갑수골(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최고형(最古形)인 복사(卜辭)에 의하여 상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상나라는 웨이수이[渭水]에서 일어난 주(周)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의 통일]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한왕조(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豪族) 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황건(黃巾)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서태열>

중세의 중국

황건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낙양에 세운 위(魏)와 유비(劉備)가 청두[成都]에 세운 촉한(蜀漢), 그리고 양쯔강 중·하류에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 의 3나라로 삼국정립 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사마씨(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서진(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匈奴)의 침입으로 난징[南京]으로 옮겨 동진(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한 6조(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한편 화베이지방은 5호16국(五胡十六國)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鮮卑族)이 439년 북위(北魏)로 통일하여 송(宋)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형세는 581년 남조의 수(隋)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科擧)제도를 시작하였으며,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 개국이 흥망하였다.

근대의 중국

중국사에서 서양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전통왕조 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를 근대사로 구분하고 있다.(『中國近代史』, 中華書局出版, 1983) 이는 청(淸)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中華民國) 초기까지에 해당한다.

청나라는 무역 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아편전쟁, 1840). 이로써 동양의 전통적인 대제국은 서양 근대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중국의 근대사는 피침사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은 반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 자본주의의 침투로 전통적 전제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갖고 홍수전[洪秀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설한다는 이상으로 농민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하였다(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그러나 결국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청나라는 1856년 애로호 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맞았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청 황족이 거주하던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베이징[北京]이 점령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북경조약으로 화해하였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북경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 1862)이 일어나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중국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에 자극받아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光緖帝)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 학교의 설립, 관보 발행, 입헌정치 계획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太后) 사이에 갈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열강의 침투로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불전쟁(1884~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서, 베트남(월남), 조선 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의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고, 동양의 국제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열강들의 약취에 대항하여 1900년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여 외국 공관에 방화하는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 정부의 위약과 열강세력의 침탈 속에서 漢族 중심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쑨원[孫文]이 주동이 되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다. 이로써 1912년 전통왕조인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중국 경영에 소홀한 틈을 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독일이 경영하던 지역인 산동반도 일대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항구도시인 청도(淸島)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중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일 감정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세계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추세를 타고 1919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적극적 공세로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류재택

현대의 중국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淸)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침점(侵占)으로, 홍콩[香港]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안남(安南)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조계(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을 통해 근대공업이 일기 시작하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하였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20년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쑨원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의 성공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하였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건국 후 1949~1955년까지는 초기 변혁기에 해당, 자본주의를 적대시 하였으나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정부의 능률적 경영이 중시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팽창하였다.

1955~19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에 해당한다.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대중노선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시중심의 공업화 계속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은 하락하였고 자연재해로 중국 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였던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내 노선갈이 다시 나타났다.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반까지는 이념보다 다시 효율성과 전문성이 강조되는 시기가 되었으며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났다. 1959년 중공 당정치국 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잠시동안의 실용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시기이며, 이후는 다시 또 사회주의 이념 및 사상의로의 무장을 강조하는 이른바 문화혁명기가 도래하면서 중국은 혹독한 이데올로기적 실험을 경험한다.

<서태열

문화혁명기의 중국

새로운 변혁기인 문화혁명기는 1969년까지 지속된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샤오치의 실용주의 노선이 불평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즉 마오쩌둥은 이들의 노선에는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사상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 경제구조는 물론이고 사상의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11전중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안을 통과시키고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하였다. 홍위병들은 공산당내 부르조아적 요소를 몰아내기 위한 하방운동과 구시대적 문화유산 제거운동을 주도하였다. 문화혁명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  4인방도 합세하였다. 문화혁명 기간중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마오쩌둥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사망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마오쩌둥과 린뱌오간의 연대가 무너지고 군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문화혁명초기 급진파들이 득세하는 양상이 약화되고 저우언라이와 같은 중도파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의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서태열>

덩샤오핑에서 후진타오까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4인방은 문화혁명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하였다. 1978년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실사구시형의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 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에서의 잉여생산물의 판매허용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1980년대에도 지속적인 실용주의적 경제발전 노선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으로 상징되는 덩샤오핑의 사상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이념보다는 경제에 더 중점을 둠으로써 중국정치의 실세가 된 상하이방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런데 개혁,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혁과 개방의 속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고,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1989년 6월의 톈안먼[天安門]사태로 나타났다. 이 사태는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총서기인 자오쯔양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이 총서기에 임명되면서 개혁개방파는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장쩌민이 1990년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을 맡음으로써 경제관료에 의해 당과 정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장쩌민은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 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장한 후진타오 총서기와 윈자바오 총리 체제는 ‘성장우선론자’ 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동부연안 지역 중심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선호하는 ‘선부론자(先富論者)' 세력들을 몰락시키고, 중국 전역에 걸친 성장을 중시하는 분배를 강조하는 개혁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태열>

중국의 정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존속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는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사상, 인민민주주의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궁극적 목표를 무계급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이를 위해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하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는 공산당내에서의 노선을 통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간의 갈의 중심적인 축을 이루어왔다. 정치갈이나 권력갈의 양상은 주로 주요한 국가노선이나 정책이 결정되는 전국인민대회를 통해서 드러난다.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대내외 중요사안에 관한 최고의 의결기구이며, 각 지역과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된 2,900여 명(최고 3,500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년에 한 차례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방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의 주요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왜냐 하면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권력자인 국가주석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거되기 때문이다. 무장력을 통솔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역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서 선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는다.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성(省)과 자치구에 지방인민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한다. 국무원은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예산 은 국무원이 집행한다. 국무원은 산하에 29개의 중앙행정부처를 거느리고 있으며, 총리 1명, 부총리 4명, 국무위원 5명, 비서장 1명, 각처 부장 23명(중국인민은행장 포함)을 둔다. 국무원 총리는 국가 주석의 추천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며, 국무원 산하 부총리와 국무위원은 총리의 지명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된다. 2005년 현재 국가주석은 후진타오(胡錦濤)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하고 있으며, 총리는 윈자바오(溫家寶)이며 이들은 개혁개방세력을 대표한다.

건국 이후부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치는 두 가지 노선의 대립과 갈이 반복되었다. 물론 이 대립과 갈은 공산당 독재와 사회주의 고수라는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정치에서 두 가지 노선이란 하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평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계속 혁명을 추구하고 당의 관료주의화에 반대하며 군중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능률을 지향하면서 현대화 또는 과학기술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생산력 증대를 중시하는 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노선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홍(紅)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전(專)이라고도 한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에 의한 건국후 중국의 현대사는 전자를 중시하는 변혁기와 후자를 중시하는 공고기가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76년 다시 장한 덩샤오핑은 개혁 및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지만 여전히 이와 같은 홍과 전의 갈은 내재되어 있었다. 즉 개혁 및 개방 정책에 의해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놓고 홍과 전의 갈은 지속되었다.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고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식인의 자유화운동이 뒤따르게 되면서 의견의 차이는 1989년 6월의 톈안먼[天安門]사태로 나타났으며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는 보수파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4원칙인 당의 영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새로운 사회계통의 출현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이 결합된 법륜공이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의 강한 탄압을 받고 있다.

중국의 외교

헌법상 중국 외교의 기본원칙은 첫째, 평화5원칙(주권과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내정 불간섭, 평호혜, 평화공존)에 입각하여 각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둘째,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반패권주의이며, 셋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둘째의 반패권주의는 초강대국의 세력확대를 견제하는 것이며, 셋째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같은 사회주의국가들끼리의 평한 관계와 연대를 도모하고 제3세계의 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면서 '독립 자주의 평화외교'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건국 후 중국은 외교의 최대목표를 혁명의 보전과 정권 안정에 두었기 때문에 중공정권 수립 후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6·25전쟁에 인민지원군을 보내 북한을 도왔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는 1960년대까지 적대관계를 지속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반까지 중국 외교의 특징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면서 반미, 반서방 친소외교를 수행한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중소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 외교는 소련과 적대관계에 들어섰으며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제3세계와의 유대강화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1968년 중소국경분쟁 이후 중국은 주된 적을 미국 대신 소련으로 상정하였다. 중국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중국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리하여 1970년대에 소련에 대항하여 나타난 중국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이 반패권주의이다. 반패권주의의 달성을 위해 중국은 미국·일본과의 협력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중국의 이러한 외교전략상의 변화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현대판 세력 균형정책으로 나타났다.

1972년 중국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상하이[上海]에 초청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주의를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이끌어내고 1979년에는 미국과의 국교수립과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졌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1972년 ‘저우언라이-다나카[田中] 공동성명’에서 반패권주의를 확인하였고, 1978년에는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미국·일본  서방과의 관계개선은 중국으로 하여금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1981년 중국은 타이완의 국민당정부를 대신하여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970년대 말 중국 외교의 커다란 승리에도 불구하고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기까지 중국 외교는 자력갱생·민족해방·반서방 및 반미를 강조하였고 외교정책결정은 국가이익보다는 이념에 집착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사후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시대의 외교정책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이고 국익을 중시하며 4개 현대화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서방의 경제협력을 얻어내는 데 집중되었다.

덩샤오핑시대는 개방과 상호의존성의 중요성, 국제협력과 서방과의 교류를 강조하였다. 1982년 개최된 제12차 중공당 전당대회는 덩샤오핑시대의 중국 외교정책을 자주독립외교정책으로 규정하고 개혁·개방을 성공시키기 위해 서방과의 협력을 천명하였다. 한편, 1985년 고르바초프 장 이후에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착수하여 1989년에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간 정상회담이 열렸다.

1988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우쉐첸[吳學謙]은 중국 외교정책의 5가지 기조(基調)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으며 이 5가지 기조는 지금까지 개혁·개방시대 중국 외교의 지침이 되고 있다. ①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유지한다. ② 정책쟁점은 사례별로 실용주의적으로 결정한다. ③ 미국 및 소련(러시아연방)과는 동맹이나 전략적 관계는 피한다. ④ 제3세계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다. ⑤ 경제·무역·과학기술에 관한 한 누구와도 협력한다.

덩샤오핑시대의 중국 외교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톈안먼사태에서의 무력진압으로 중국은 몇 년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서방과 IBRD(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국제부흥개발은행 또는 세계은행)로부터의 차관도입이 중지되었으며 미국으로부터 인권을 개선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이러한 냉각관계는 1992년 일본의 차관공여 재개와 중국 당국의 일부 반체제 인사 석방으로 해소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복원되었다. 1997, 1998년에 이루어진 중국과 미국 양 지도자의 방문을 계기로 더욱 안정적인 관계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1995년 5월 발생한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으로 긴장관계로 들어섰다가 1999년 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때 양국간 개별정상회담을 통하여 관계복원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국의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가입협상이 타결되어 두 나라는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1년 4월 1일에 미군 정찰기가 중국의 하이난다오에 비상 착륙한 사건으로 양국간 갈이 다시 심화되었으며, 아직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중국 통일문제에서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1997년 홍콩을 반환받았으며, 이어 1999년 12월에는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반환받았다. 홍콩과 마카오는 이후 50년간 각각 기존의 경제 사회체제 유지를 보장받았다. 중국은 이러한 홍콩·마카오반환의 경험을 타이완 문제에도 적용하여 하나의 중국이라는 전제하에 타이완이 중국과의 통일에 응하면 독자적인 군대보유와 경제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자치를 보장받는다는 일국양제(一國兩制)론을 통일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미국  외국 국가가 14세 달라이라마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할 것과 티베트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데 대하여 중국은 티베트의 분리·독립운동은 허용할 수 없으며 이러한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중국의 군사

중국의 군대편성 특징은 군대와 중국공산당 간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의해 통솔된다. 이 군대에는 말단 부대에 이르기까지 당조직이 있고 연대 이상에는 정치위원이 있어 정치사상교육을 담당한다. 정규군 외에 방대한 민병이 있는데, 이는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전문가의 집단인 정규군과 인민대중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인민전쟁론의 핵심이다.

인민해방군은 전투부대일 뿐만 아니라 공작대, 생산대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의 정치적 역할을 중시하였으며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당과 행정기구를 대신하여 통치조직으로서의 역할을 떠맡기도 했다. 중국군에는 원래 계급제도가 없고 사단장, 중대장  장교에 해당하는 지휘원과 일반 병사인 전투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홍군(紅軍)·팔로군(八路軍)을 통하여 인민해방군의 전통을 계승한 이른바 장병일치(將兵一致)의 원칙에 기초를 둔 것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군사전략을 둘러싸고 지도부 내에 심각한 이견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 생존시에는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이 군부를 지배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는 참전경험에서 인해전술과 사상적 무장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보고 군비현대화와 현대적인 군의 육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숙청되었고 문화혁명기까지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을 답습하여 군부를 장악했다.

이후 린뱌오는 군부세력을 이용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사망했다. 재래식 장비의 현대화는 뒷걸음쳤으나, 중국은 1956년부터 미사일과 원자핵무기 개발을 계속해왔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당량의 핵무기를 보유하였다. 중국의 본격적인 군현대화사업은 1975년 덩샤오핑이 군참모장에 취임하고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4개 현대화계획 중 국방의 현대화가 강조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꾸준한 경제성장에 기초하여 군의 무기 및 장비를 향상시켜 신속한 국방현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신식무기와 장비의 개발 및 도입을 지시했다. 그 결과, 중국은 최신식 무기를 개발하였고 1985년에는 15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제3세계에 수출했다. 이와 함께 중국은 방만한 군사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고령화된 다수의 군간부들을 퇴역시키고 병력수를 줄여 정예화하였다. 이러한 군정예화에 따라 2001년 현재 중국군의 병력은 250만 명이다. 중국군은 중국혁명의 동력이었으며, 인민에 대한 봉사와 국가보위의 임무를 충실히 함으로써 중국 인민의 친근한 벗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89년 톈안먼사태에서 학생과 지식인을 학살함으로써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해방군의 이미지는 크게 퇴색하였다. 이후 중국군은 인민의 군대라기보다는 중국공산당의 무장력으로서의 역할이 주된 것으로 되고 있다. 2001년 현재 총병력 250만명으로 육군 180만 명, 해군 23만 명, 공군 38만 명, 제2포병 9만 명이다. 병역은 징병제와 지원제를 병용하며 병역기간은 2년이다. 2001년 국방비는 165억 7000만 달러이며, 군부의 실제예산은 자체 기업에서 나오는 수입금이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 국방비는 국무원의 공식예산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중국은 경제발전으로 군인수를 지속적으로 축소하고 군의 현대화와 과학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4년 현재 군인 225만명, 전차 7,000여대, 전투함 63척, 1천톤이상의 잠수함 69척, 핵잠수함 12척 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은 300~45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여 미국, 러시아 다음의 핵강국이다. 그리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S)에 대응하기 위하여 다탄두 미사일과 위성요격시스템의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경제

1979년 대외경제개방 시행 이전의 중국 경제발전 전략은 자본축적을 가속화하면서 경제성장률을 고도화하는 것이었다. 생산부문에서는 농촌인민공사, 공업부문에서는 국영기업이 위주였으며, 배분에서는 일괄구매·일괄판매[統購統鎖] 방식이 주로 행해졌고, 소비는 각종 배급증표(配給證票)를 이용하였다. 1979년 이후 착수한 경제개혁은 이러한 지난 시기 개발전략의 성과를 토대로 결함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농촌에서는 농업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여 인민공사가 해체되었고 도시의 기업도 공유제(公有制)에서 다원화된 소유제 구조로 전환하여 개체소유제(個體所有制), 개인소유경영, 각종 경제연합체  다양한 소유형태로 발전하였다. 경영과 소유의 분리가 인정되었으며, 경제활동에 관여하는 의사결정권을 다원화시켰다. 또한 지령성(指令性)계획 위주의 경제계획을 지도성(指導性)계획으로 전환하고, 국가는 중장기 계획만 담당하여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였다. 분배의 측면에서도 국가 이익을 강조하던 것에서 집단(기업)과 개인(노동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제도로 전환되고 자유시장이 부활되었다.

1980년 4월에는 선전, 주하이 의 경제특구(經濟特區)가 지정되어 대외개방의 창구로 삼았다. 1984년에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에 정식 가맹하여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진행하였다. 이 즈음의 중국 산업정책은 1994년 3월 국무원(國務院) 제16차 상무회의에서 결정한 ‘1990년대 국가산업정책강요(國家産業政策綱要)’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정책에 의하면 1990년대의 주요과제로 ① 농촌경제의 전면적 발전, ② 기초시설 및 기초공업의 체증 문제 해결, ③ 기간산업(基幹産業)의 가속적 발전, ④ 중국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⑤ 신고도기술산업(新高度技術産業)의 가속화로 신흥산업과 신상품 개발, ⑥ 3차 산업의 계속적 발전 을 제시하였다.

1997년 12월 안정 속의 성장을 표방한 가운데 열린 당정연석중앙공작회의에서 아시아 금융위기  대내외적으로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1998도 경제성장률을 8%로 하향조종하고 농촌경제발전, 국유기업개혁, 경제구조조정, 대외개방확대, 지방사회안정  6대 목표를 설정하였다. 중국 정부는 2000년 발표한 제10차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5개년계획(2001~2005)에서 ① 지속적인 고도경제성장 지향, ② 경제구조조정의 지속추진, ③ 서부대개발 전략추진, ④ 과학기술의 진보 및 교육에 역점, ⑤ 전방위적인 대외개방형 경제추구, ⑥ 국민생활수준의 제고를 목표로 삼았다. 2000년에는 투자·소비의 회복, 수출의 증대 으로 인하여 국내총생산(GDP)이 1조 700억 달러로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넘어섰고 경제성장률은 8%, 외환보유고는 1656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주요 산업은 농업, 에너지산업, 철강·섬유·식품공업 이다. 현재 경제문제는 지역간 격차의 확대, 농민 수입의 침체 이다.

지역별 산업정책은 동부지역의 경우 외국의 선진기술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전통공업을 개조하며 신흥공업을 육성하여 수출형 산업지역으로 발전시키고, 서부지역은 풍부한 자연을 이용하여 에너지공업과 원자재공업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양쯔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목표로 1992년 초 국가계획위(國家計劃委)가 ‘10대 경제구(經濟區)’를 발표하여 경제권역별 특성에 맞게 지역경제 발전전략과 산업정책을 통일적으로 수립·운용하고 산업분포를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성(省)·시(市)·자치구(自治區)를 ① 둥베이, ② 화베이환보하이[華北環渤海], ③ 양쯔강 삼각주, ④ 화난, ⑤ 황허강 중류, ⑥ 양쯔강 중류, ⑦ 황허강 상류, ⑧ 양쯔강 상류, ⑨ 신장[新疆]경제개발구, ⑩ 티베트 특별구 으로 묶어 지역의 경제지리적 특성과 비교 우위에 맞는 산업을 육성하고 국내외 투자를 유치하고자 한다. 2000년이후에는 황해 연안의 개방구를 중심으로 하였던 막대한 해외투자가 내륙으로까지 확장되었으며, 이에 따라 충칭, 우한 의 내륙의 공업지역이 급성장하고 있다.

중국의 농업

중국은 경제개혁에서 국가의 주요산업인 농업부문을 강조하였다. 1981년 생산책임제(生産責任制)를 도입하여 개별농가의 자류지(自留地)를 제외한 생산대(生産隊) 소유의 토지를 청부생산제(請負生産制)하에 분배하였다. 이에 따라 2∼3년 사이에 90% 이상의 생산대대(生産大隊)가 농가 생산책임제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농업자유화로 1982년 인민공사가 해체되어 과거 5만 6000개인 인민공사는 4만 3700개의 향(鄕)정부와 1만 1900개의 진(鎭)정부로 변신하였다. 그 결과 농업생산성이 증대되어 1984년까지 연 7.8%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후 1988년까지 농업에 대한 투자 감소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발전이 둔화되다가 1989년에 다시 1984년 수준을 회복하였고, 1993년에는 약 4억 6000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였다. 제8차 5개년계획(1991~1995) 기간중에도 농업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면화  경제 작물생산을 꾸준히 확대시켜나갔다. 1997년 기준 2만 6986개의 향정부와 1만 6126개의 진정부가 있다.

농업총생산액도 1998년 현재 245억 16700만 위안[元]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농업생산의 부문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는데, 농작물 재배업을 제외한 임업·목축업·어업 의 농업총생산액이 1949년 17.5%, 1978년 32.2%, 1992년에는 44.5%로 상승하여 단순 농업에서 각 부문이 모두 발전한 생산체계를 이루었다. 1980년대 중반 들어 농업 각 부문의 생산기지를 건립하였는데, 상품식량 기지현(基地縣), 목화 기지현, 기타 우량농산품 기지현 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벼, 밀, 기장, 고량 이고 이중 벼는 가장 중요한 작물로서 친링산맥과 화이허강의 연결선(連結線) 남부의 고온습윤한 기후인 화중·화난지방에서 주로 재배한다.

벼 생산량은 1998년 2억 7900만 톤으로 세계 1위였고 그 중요한 분포 지역은 양쯔강 중·하류, 화난, 윈구이 고원 이다. 밀 역시 9937만 톤으로 세계 1위이며 광범위한 재배 지역을 가지나 주로 북부에서 많이 재배되며,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은 겨울밀, 이북은 봄밀을 재배하고 있다. 그외에 화베이지방에서는 기장·고량·콩을 많이 생산하고 화난지방의 구릉지에서는 차(茶)를, 그리고 세계 1위 생산량을 가지는 목화는 화중 및 화베이지방에서 재배되고 있다.

중국을 이러한 농산물에 의한 지역구분을 해보면 대략 7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① 밀·보리와 벼 일부를 생산하며, 유목과 목축을 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② 인구밀집으로 노동력이 풍부하고 2기작(二期作)이 가능한 남부 및 남동부 지역, ③ 주로 쌀과 밀의 2모작(二毛作)이 가능한 양쯔강 하류, ④ 고도가 높아 서늘한 여름을 가지면서 수도작(水稻作)과 건조작물(옥수수·감자·밀)의 윤작(輪作)이 이루어지는 남서부 지역, ⑤ 주로 밀을 재배하는 화베이지방의 평야, ⑥ 주로 밀이나 기장·옥수수를 재배하는 황투고원, ⑦ 건조지역으로 감자와 밀·기장, 또는 옥수수를 재배하는 북동부 및 북부 지역으로 나뉜다. 2000년 기준 경지는 13억 555만ha(전체 면적의 14.1%)이고, 농업종사자는 5억 7377만 2000명으로 1인당 농지는 2.65ha이다.

중국의 임수산업

중국의 삼림은 1억 3370만ha로서 세계 삼림면적의 3.3%로 5위를 차지하고 임목축적량(林木蓄積量)은 101억 4000만 ㎥로 6위이지만 전체 면적에 비해서는 삼림이 적다. 삼림피복률(森林皮服率) 역시 13%에 불과할 뿐이고 1인당 평균 삼림보유 면적은 0.114ha로서 매우 낮다. 주요 분포지역은 둥베이 지구의 대싱안링산맥, 소싱안링산맥 그리고 창바이산맥 이 전체 축적량의 30%를 점한다. 또한 남서부 고산지대 역시 약 20%의 임목축적량을 차지하고 있다. 1997년에 2,465건의 삼림화재가 발생하여 3만 5440ha가 피해를 입었고, 병충해로 733.7ha의 삼림이 피해를 입었다.

수산물 생산량은 공산혁명 이후 일시적으로 줄어들다가 1982년부터 어업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수산물 총량이 1984년 600만t으로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1986년에는 어업법을 제정·시행한 후 어업인의 생산 의욕이 고양되어 어업경제가 빠르고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988년에 1000만t을 기록한 후 1990년에는 1200만t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1의 수산대국 자리에 오른 후 10년 연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99년에는 어획량이 4122t으로 1998년보다 5.5% 증가하였고 그중 양식 생산량이 58%를 차지하였다. 해양어류는 약 1,500여 종이 서식하고 있고 그중 주요 경제어종은 200종이다. 수조기·참조기·갈치·오징어가 4대 경제어종이며 갈치·고어·전갱이류의 순서로 많이 잡힌다. 담수(淡水) 면적은 약 2,666만ha로 경지면적의 1/4을 웃돈다. 이중 하천수면은 1,200만ha, 호소수면은 800만ha, 저수지 및 유수지가 670만ha이며, 이중 양식면적은 500여 만ha이다. 이들 담수에는 민물청어·산천어·연어·금강바리  중국 특유의 경제어류들이 잡힌다.

중국의 공업

중국의 공업총생산액은 1993년 4조 472억 위안으로 1949년의 140억 위안에 비해 289배가 증가하였다. 사회총생산액에서 공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1949년 25.1%에서 67.1%로 증가하였다. 1999년 현재 중국제품은 4200개 품목 가운데 460개가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고, 1~5위 안에 드는 품목도 1428개나 된다. 또, 미국 시장에서 1990년 3.1%였던 점유율을 1998년에는 8.0%까지, 일본 시장에서는 5.0%에서 13.2%로 끌어올렸다. 공업 총생산액에서 차지하는 소유형태별 구성에서 1978년에는 국유기업이 77.6%, 집단소유가 22.4%로 개인 및 기타 경제유형은 전혀 없었으나 1999년에는 국유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7.3%로 대폭 줄어들고, 대신 개인 및 기타 경제유형(주식회사 형태, 외자계 기업, 홍콩·타이완·마카오계 기업 )이 차지하는 비중이 40%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공업 입지는 과거 동부 연해지대에서 내륙으로 확산하고 있다. 주요 공업지대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 화학 이 발달한 상하이·난징 중심의 동부지역, 석유, 화학, 정유, 방직 공업이 발달한 시안[西安]·란저우[蘭州]를 중심으로 하는 북서부지역, 기계, 전기, 섬유, 철강 이 발달한 베이징·톈진[天津] 중심의 북부지역, 자동, 차, 조선, 화학, 기계 이 발달한 안산[鞍山], 선양[瀋陽], 다롄[大連] 의 북동부지역, 철강, 섬유, 기계, 차량, 제재제당 이 발달한 우한, 광저우[廣州], 아모이[厦門], 푸저우[福州] 의 중남부와 철강, 기계, 정유가 발달한 쓰촨분지, 윈구이고원의 남서부로 나누어진다.

그동안 강조되어온 중국 공업을 보면 5차 5개년계획(1976∼1980)에서는 야금(冶金)·기계·화학이었고 6차 계획기(1981∼1985)에는 식품, 방직, 의류, 건자재, 가전제품, 7차 계획기(1986∼1990)에는 봉제, 완구, 의류, 가전, 일반기계, 석유화학, 8차 계획기(1991∼1995)에는 기계, 전기기구, 가전, 에틸렌 이고 9차 계획기(1996∼2000)에는 전자, 컴퓨터, 반도체, 우주, 항공, 10차 계획기(2001~2005)에는 원자재공업, 방직공업, 고급제지 및 펄프, 가전제품, 고급브랜드 의상, 농산품 세부가공 을 주도공업으로 설정하고 있다. 11차 계획기(2006-2009)에는 선진제조업의 발전, 산업기술수준제고, 서비스산업의 발전을 통해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추구하려고 한다. 9차, 10차 계획의 성과는 엄청난 것이어서 10년만에 GDP가 세계4위를 기록하였다.

중국의 무역과 외자도입

1949~1978년의 중국의 무역액은 큰 변화가 없이 적은 규모였다. 그 상대국도 대개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시장경제의 도입을 주축으로 하는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세계 모든 나라와의 교역이 필연적이었고 중국의 무역액은 개혁·개방 이후 크게 증가하였으며, 대상국도 비공산권으로 확대되었다. 무역액은 1978년 206억 달러에서 1993년 1,957억 달러로 늘어나 연평균 16%씩 증가하여 세계 11대 교역국이 되었고 1999년에는 9대 교역국으로 뛰어올랐다. 무역 수지에서는 개방 초기에 약간의 적자를, 1981∼1983년에는 균형을 이루다가 1989년까지 적자를 기록하였고, 이후 1992년까지 흑자를, 그리고 1993년에는 다시 적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 전반기 들어 위안화[元貨]의 평가절하와 전기·기계제품 수출의 폭발적인 증가로 수출이 전년 동기에 대비하여 30.2%가 늘어 484억 달러이고, 수입은 자동차와 고급 소비재의 수요감소로 전년 동기 대비 21.1% 증가에 그친 492억 달러로 무역적자가 대폭 개선되었다. 1995년 들어 처음으로 무역흑자로 돌아선 후 1996년 122억 달러, 1997년 403억 달러를 나타내었다.

1998년에는 무역규모가 3250억 6000만 달러로 전년대비 12.1% 증가하였다. 수출 1827억 달러(전년대비 20.6% 증가), 수입 1423억 6000만 달러(2.5% 증가)로 403억 4000만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중국에 유입된 해외자본은 620억 달러(전년대비 13% 증가)이다. 주요 무역 대상국은 홍콩, 일본, 미국, 대만, 한국 이다, 무역의존도도 1978년 9.6%에서 1993년 37.5%로 높아져 급속한 대외개방형 경제로 탈바꿈하였다. 수출입 구조를 살펴보면 개혁·개방이 일어난 1978년 총수출액 중 초급제품이 53.5%, 공업 완제품이 46.5%를 차지하였으나 점차 공업 완제품의 비중이 높아져 1993년에는 그 비율이 각각 18.2%, 81.8%를 차지하였다. 공업 완제품 내에서는 특히 경공업 제품의 증가율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2000년 무역은 수출이 2492억 달러, 수입이 2,251억 달러로 241억 1000만 달러의 흑자를 보였다.

수입에서는 소득의 향상과 더불어 품목에서의 고급화 추세가 최근에 늘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1950년대 주요 무역 상대국은 주로 소련과 동유럽이 대부분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960년의 소련과 관계가 소원(疏遠)해지고 1970년대 중국과 수교하는 국가들이 증가함으로써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교역이 늘어났다. 이는 개방정책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중국은 외자 도입에 대한 초기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상호 이득이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적·행정적 개혁도 외자도입과 연계하여 이루어졌고 경제특구(經濟特區)와 개방도시(開放都市) 도 외자 도입을 위해 설정하였다. 중국의 외자도입은 국제금융기관 및 민간은행으로부터의 차관이나 합자(合資)·합작(合作)·독자(獨資) 의 ‘3자기업(三資企業)’과 공동개발, 그리고 상업신용  3가지로 이루어진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직접투자가 주가 되고, 차관(借款)이 보완적인 요소로 되었다. 1986년의 경우 차관은 84억 700만 달러, 직접투자는 28억 3400만 달러인 것이 1993년에는 각각 113억 500만 달러와 1,114억 3500만 달러로 관계가 역전되었다. 1989년 이후의 경기과열을 막기 위한 ‘치리정돈(治理整頓)’정책으로 둔화된 투자는 1991년부터 다시 전면적인 대외개방 정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직접투자의 도입을 국가별로 보면 홍콩·타이완  화교자본과 일본·미국의 투자가 대부분이다.

중국의 무역과 외자 도입으로 상징되는 대외개방을 위해 중국은 지역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왔다. 1980년 선전·주하이[珠海]·산터우[汕頭]·아모이 을, 그리고 1988년 하이난섬[海南島]을 성(省)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경제특구로 선정하였다. 1984년에는 14개의 연안 항만도시가 경제기술개발구로 설치되어 기술 집약적 제조업 위주의 외국인 투자를 유도하였다. 또한 1985년에 연해경제개방구(沿海經濟開放區)를 설치하였고, 1988년에 산둥반도경제개발구와 랴오둥반도경제개발구를 개방구로 선정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연해지역의 개방 확대와 상하이 푸둥지구[浦東地區]를 중심으로 하는 양쯔강 연안 개방의 추진, 그리고 국경도시와 내륙지역의 개방  전방위적(全方位的) 지역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였고 외자유치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폈다. 그 결과로 중국으로의 실제 투자액수가 2002년에 4,479억 달러에 달하여 세계1위를 기록하고 중국의 한 도시는 우리나라의 전체의 외자유치액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2005년 현재 수출은 7,620달러로 세계3위이며, 수입은 6,600억 달러로 총무역액 1조 4,000억 달러에 1,020억 불의 흑자를 기록하면서 외환보유고 역시 세계1위로 1조 달러를 돌파하였다.

중국의 산업

중국은 개혁 이전에는 국영상업(國營商業)이 주(主)이고 집단소유제의 합작사(合作社) 상업이 종(從)이던 것이 현재는 국영상업 외에도 다양한 경영방식과 유통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중간 유통단계가 단축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가격체제를 현실화하고, 계획에 의한 가격통제를 줄여나가며 불합리한 가격체제 역시 시정하였다. 또한 농산물 가격을 자유화하여 시장경제를 위한 길을 한층 앞당기고 있다.

1993년의 사회상품 소매총액을 유통기구의 경제유형별로 보면 국영인 전민소유제(全民所有制)가 39.7%, 집체소유제(集體所有制)가 26.3%, 개체(個體) 및 사영(私營)이 22.6%, 연영(聯營)이 0.9%, 기타 10.6%를 차지하였다. 1996년 유통업체수는 1400만여 개로, 이중 개체경영기업이 92%, 집체경영기업이 4.8%, 국유경영기업이 1.8%를 차지하며. 개체경영기업은 상승세를 보이는 반면에 집체·국유경영기업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외국투자기업의 진출로 대형 할인매장, 양판점, 대형 슈퍼마켓 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추세이다.

중국의 물가와 노동 및 임금

중국은 개혁 이전에는 물가가 장기간 안정되어 있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까지는 대체로 3∼5%의 안정수준을 유지하였으나 이후 자오쯔양[趙紫陽]의 장으로 경제개혁이 급속히 진전되자 1989년 톈안먼사건 이전까지 연 17∼18%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였다. 이에 긴축노선으로 전환하여 1990년 소매물가 상승률이 2.1%로 안정되었지만 한편으로 실업이 증가하여 고용의 확대가 시급해지자 긴축정책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후의 높은 경제성장은 다시 물가의 상승을 가져와 1992년 5.4%, 1993년 13.2%, 그리고 1994년도 상반기에 19.8%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95년 17.1%를 고비로 1996년 8.3%를 거쳐 1997년 2.8%, 1998년 0.8%, 1999년 1.4%, 2000년에는 0.4%로 안정되었다.

중국의 고민은 앞으로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를 어떻게 적절히 조화하느냐에 있다. 중국의 노동력은 각종 기관·단체·기업에 종사하면서 고정급을 받는 취업노동자[職工], 도시의 개별노동자, 농촌의 집단노동자와 개별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은 고정공제도(固定工制度)를 기본으로 하는 고용제도를 시행해왔는데, 이는 정부가 노동력 배치하여 직업·임금을 결정하는 제도이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영역의 확대와 자율화로 노사간의 계약형식이 도입되게 되어 과거의 ‘쇠솥밥[鐵飯碗]’이라는 평생직장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 실업률은 2005년 기준 9% 이다.

새로운 고용제의 기본방침은 공개채용, 자발적 지원, 우수인재 채용, 수습노동자의 견습기간 제도화, 수습성적에 따른 채용, 자유로운 퇴직 허용 을 근간으로 한다. 1952년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분배원칙에 입각한 계획임금제도로 중국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경제개혁 이후 상여금 및 성과급을 지급하고, 식품가격보조와 승진에 따른 임금가산제 으로 임금구조가 개선되었고, 임금은 개체경제(個體經濟)나 사영경제(私營經濟)에서 빠르게 상승되었다.

2000년 상반기의 도시지역 임금근로자 평균임금(6개월)은 4,1770위안(국유기업 4,296위안, 민간기업 2,777위안, 기타 산업단위 4,904위안)이다. 금융보험(5,881원), 과학연구, 종합기술서비스업(5,844원), 전력·가스 및 수도업(5,796위안)이 제조업의 평균임금(3,829위안)보다 훨씬 많고 매년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2004년에는 석유화공이 7,949위안, 금융 7,457위안, 운송및 물류 7,269위안  주요 제조업과 금융업에서는 7,000위안을 상회하였다.

중국의 철도

철도는 현 중국 교통의 골간으로,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1979년 이후부터 1998년까지 1만 7919㎞의 철도를 새로 부설하였고 1998년 현재 철도 총연장은 6만 5650km에 이른다. 중국 정부는 제10차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5개년계획(2001∼2005) 기간에 7,000㎞의 철도를 건설할 계획이며, 이러한 건설계획이 완료되면 중국 철도의 총연장은 7만 5000㎞까지 확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철도의 수송수요면에서 여객은 연간 4.4%, 화물은 0.9%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1997년의 철도 화물수송량은 17억t으로 전체 화물 운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3%를 차지하였다. 이는 1949년의 34.7%, 1980년 20.4%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운송수단 역할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낙후된 철도를 개선하기 위해 중국은 50여 개의 간선과 70여 개의 지선을 건설하였고 8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베이징∼광저우, 청두∼쿤밍, 하얼빈∼다롄 을 대상으로 5,700km를 전철화·고속화하여 1995년까지 16억 5000만t 수준으로 화물수송량을 끌어올렸다.

현존하는 철도망의 기본 특징은 남북과 동서를 횡단하는 간선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통과하는 주요 철도 중심지는 베이징, 톈진, 선양, 창춘[長春], 하얼빈, 지난[濟南], 푸양, 난징, 상하이, 스자좡[石家莊], 타이위안[太原], 정저우[鄭州], 우한, 주저우[株州], 광저우, 류저우[柳州], 청두, 충칭, 구이양[貴陽], 쿤밍[昆明], 시안, 란저우 이다. 이들을 각 축으로 하여 서로 남북·동서로 얽혀 있다. 지역적으로는 둥베이 3성[遼寧省·吉林省·黑龍江省]이 70여 개의 간선과 지선이 있으며 영업거리 역시 1.2만km로 전국의 1/4을 차지하며, 철도망 밀도도 매 100㎢당 1.51km로 전국 평균(540m)의 2배를 넘는다. 이는 러시아나 일본과의 역사적·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루어진 건설에 연원한다.

1980년대에 중부 및 동부 연해지역 철도건설의 핵심인 징광선[京廣線] 남부의 헝양[衡陽]∼광저우 간 복선개통 및 북부의 다퉁[大同]~친황다오[秦皇島] 간의 전기화·복선화가 이루어졌고, 서부지대의 석탄 개발을 위한 바오센선[包神線:包頭∼神木]이 건설되었으며, 그외에 바오중선[寶中線:寶鷄∼中衛], 시옌선[西延線:西安∼延安] 이 건설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철도 건설은 징주선[京九線:北京∼九龍], 진바선[津覇線:天津∼覇州], 지퉁선[集通線:集寧∼通遼], 허우웨선[侯月線:侯馬∼月山], 스창선[石長線:石門∼長沙], 허주선[合九線:合肥∼九江] 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징주선은 길이 2,538km로서 약 7,000만t의 운송능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남북을 잇는 새로운 철로이다.

그리고 2006년에는 중국 칭하이 성에서 티베트의 랏싸에 이르는 1,142km의 칭짱철도가 개통되었다. 전체구간의 86%가 4,000m이상의 고지대를 달리는 이 철도의 개통으로 중국의 지배가 더욱 공고화되고 티베트는 급속히 중국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 철도교통은 급속히 고속화시대에 들어서고 있는데, 2006년에는 베이징과 상해를 잇는 고속철도를 착공한다고 발표하였다

중국의 수운

중국은 해안선의 길이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잘 발달된 하천이 있어서 수운 조건이 우수하다. 1999년 하천 총연장은 11만km이며, 그 대부분이 화중지방과 화난지방에 편중되어 있다. 항구는 국내 하천에 2,000여 개, 그리고 연해에 60여 개가 있다. 민용선박(民用船舶) 보유량은 1980년의 18만 3771척에서 1992년 말에는 37만 3568척으로 늘어났다. 연해 주요 항구의 화물 운송량 역시 1980년의 2억 1731만t에서 1993년 6억 7646만t으로 늘어났다. 수운에 의한 화물운송량은 총 9억 8000만t으로 전체의 8.9%이고, 여객운송량은 전체의 2.9%를 차지한다.

주요 연해 항구를 화물 출입량의 순으로 보면, 상하이, 친황다오, 다롄, 광저우, 닝보, 칭다오, 톈진, 잔장[湛江] 이었고, 내수면 항구 역시 화물량 순으로 배열하면, 난징, 우한, 난퉁[南通], 진장[鎭江], 주장[九江], 항저우, 웨양[岳陽] 이다. 이러한 항구들은 양쯔강 수계 항로, 주장강 수계 항로, 징항[京杭] 운하 항로 및 헤이룽강 쑹화강[松花江] 항로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중국의 도로

1998년 말 중국의 도로 총연장은 121만km으로, 포장도로는 고속도로 2만 4474km를 포함하여 27만 1300km, 비포장도로는 93만 8700km이다. 중국 교통부는 경제개발이 활발한 연해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기 위해 둥베이3성[東北三省]과 다롄[大連], 허난[河南], 산시[山西], 산시[陝西] 지구와 톈진, 그리고 후난[湖南]·후베이[湖北] 지구와 상하이 간의 간선도로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체 화물수송량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49년의 12.9%에서 1997년에는 76·5%로 높아졌다.

동부 연해지역과 중부지역의 도로는 주로 철도 및 수상운수의 보조수단으로서 단거리 운수를 담당하고 있으나 서부에서는 도로의 상당부분이 이 지역의 간선운수 역할을 하고 있다. 중요 간선도로는 약 70여 개가 되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도로의 질을 높이기 위한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최근에 건설된 중요한 도로 중 선다[瀋大:瀋陽∼大連] 고속도로는 375km의 길이로 1일 5만 대의 통과능력을 갖추고 1990년 완공되었고, 징진탕[京津唐] 고속도로는 베이징에서 톈진까지 142km 길이로 국제 표준에 따른 전면 폐쇄노선이며 모든 교차로가 입체화되어 있다. 1일 5만 대의 통과능력으로서 1993년에 완공되어 운행되고 있고, 광선[廣瀋] 고속도로는 광저우~선전까지 120km의 길이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서태열>

중국의 항공

1929년에 중국항공공사(中國航空公司)가 창립된 후 1950년까지 전국의 민항(民航)은 12개 노선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162개 노선으로 늘었다. 하지만 전체 운수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낮았다. 그후 대외개방·경제개혁으로 1993년 초에는 71개의 국제노선을 포함한 563개의 항공노선을 갖추었으며, 총 연장도 96만 800km에 이르렀다. 1996년 현재 전국적으로 206개 공항을 가지고 있으며, 각 성 ·자치구의 수도  주요 도시는 베이징과 직통 또는 취항관계가 연결되어 있다. 상하이, 광저우, 우한, 항저우, 샤먼, 구이린[桂林], 쿤밍, 청두, 라싸[拉薩], 란저우, 우루무치[烏魯木齊], 시안, 선양, 다롄, 하얼빈 의 대도시와 관광 중심지와의 연결이 양호한 편이다.

한편 1950년대 초 3개의 국제 항공노선이 있었으나 1960년대에 중국민항이 서부아시아, 북아프리카 및 아메리카로의 국제항로가 개척되었고 1980년대, 1990년대에 개방과 더불어 노선이 크게 늘어났다. 주요 국제항로는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쿤밍, 다롄, 샤먼 의 국제공항에서 서울,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프랑크푸르트, 취리히, 부쿠레슈티, 아디스아바바, 쿠웨이트, 런던, 파리, 카라치, 싱가포르, 방콕, 나가사키, 마닐라, 시드니, 모스크바, 평양, 양곤 이다. 중국은 항공운송이 장기적으로 급격한 수요 증가가 예상된다고 보고 중국민항의 관리를 지역별·노선별로 분리·독립한다는 계획으로 주식제(株式制) 도입을 고려하고 항공분야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고도 한다.

중국의 경제개발계획

2005년에는 2006년부터 실시할 <제1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2006년에서 2010년까지의 제1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줄여서 11-5라고도 함)을 보면, 6원칙과 7목표가 제시되어 있다. 6원칙은 안정적 고도성장 유지, 경제성장 방식의 변화, 자주적인 혁신능력의 배양, 도시와 농촌 간의 협력적 발전,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 건설, 개혁개방의 부단한 심화이며, 경제발전의 7대 목표를 GDP 2배와 8% 성장율의 경제성장, 자원이용 효율성 개선, 국제적인 경쟁력을 구비한 우수기업 육성, 개혁개방지속,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보호, 생활여건의 개선, 사회안전의 확보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서부지역을 개발을 중시하여 장강삼각주, 경진익, 동북노공업기지, 성도경제구 4대중점 관심 경제구역을 공표하였다. 이는 그동안의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나타난 농촌과 도시간 격차, 지역간 격차, 경제적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분배와 균형, 안정적 성장을 중시한 것이다.

정부 주도형 경제에서 시장 주도형 경제로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계획” 대신 “규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 ‘新농촌’, ‘자주적 혁신(自主創新)’ 같은 것을 강조하였다. 즉 외자유치에 의한 수출주도형 성장에서 내수주도형 성장, 균형발전, 자주적 기술역량, 환경 및 사회복지의 강화로 성장전략을 변화시키고 있다.

<서태열>

중국의 사회

중국은 1978년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解放思想, 實事求是, 團結一致向前看(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앞을 보자)'이라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2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라는 원칙이 천명되어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혁명 이후 지속되어온 사회주의의 자취가 점점 사라졌다.

1980년대 초 농업은 탈집단화(脫集團化) 또는 사영화(私營化)되어 과거 인민공사(人民公社)에 의한 집체농업(集體農業)은 개별 농가에 의한 개체농업(個體農業)으로 전환하여 혁명 이전의 상태와 유사한 자작소농체제(自作小農體制)로 바뀌었다. 1984년 이후 이러한 개혁은 도시까지 확대되어 국유기업이나 집체기업들이 임대되거나 주식회사로 되기도 하고 사적 소유기업도 장하였다.

또한 도시의 노동집약적 공업화의 여파로 도시인구가 빠르게 성장하였는데 과거 중국이 취한 도시 성장 억제정책은 이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개혁 이후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 노동자들 간의 소득 및 생활수준의 격차를 심화시켰으며 농촌 역시 다양한 사영경제활동의 결과로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농촌의 잉여노동력이 도시로 몰리고 있고, 도시와 농촌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도 다시 벌어지게 되어 이촌향도(離村向都)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1989년 4월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으로 야기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되어 유혈사태로 마감된 톈안먼사건은 군의 발포로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종결되었다. 이후 리펑[李鵬] 총리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이 전면에 나섰다. 그뒤 개혁의 파고(波高)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지만 곧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뒤 다시 개방·개혁이 계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993년 8기 1차 전인대(全人代)에서는 장쩌민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각료 41명 중 22명을 실무형 기술관료로 바꾸는  세대교체를 단행하여 개혁파를 우위에 두는 보혁균형을 이루었다. 1994년 8기 2차 전인대에서 안정 위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하는  중국은 성장과 안정이라는 목표에 조화를 기울이려는 모습도 보였다.

중국은 많은 인구로 인하여 인구증가를 강경하게 억제하고 있어 '1자녀 가지기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같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이 2000년 16.12명으로 줄었고 2005년에는 여성 1명이 평균 1.73명의 자녀를 낳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8월 현재 인구성장률은 0.59%이고 15세 미만 인구는 10.8%, 사망률은 1,000명당 6.97명, 영아사망률은 23.12명이다. 2006년 기준으로 평균수명은 72.58세로 남자는 70.89세, 여자는 74.46세이다. 그러나 2001년부터는 20년간 추진해온 이 운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지역정부가 현지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두 자녀까지 출산을 허용하는 가족법 개정안을 고려하고 있다. 최근에는 개혁·개방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회범죄도 늘어나, 이른바 6해(六害)라고 하여 매춘·포르노·인신매매·마약·도박·사기 및 살인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서태열>

중국의 교육

1982년 덩샤오핑은 “교육은 현대화를 위해, 세계를 향해,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소위 ‘3개면향(三個面向)’을 제의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이후 중국 교육의 개혁과 발전방향의 지표가 되었다. 1985년 ‘의무교육법’을 공포하여 9년제 의무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교육부를 폐지하고 국가교육위원회(國家敎育委員會)를 설치하여 교육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과거에는 사회주의 인간형을 만드는 데 치중해왔으나 개혁·개방 과정에서 실용적인 과학기술과 전문기술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중교육에서 직접 기술교육을 발전시키고 고교육에서는 문과교육(文科敎育)의 재건, 중점대학(重點大學:세칭 일류대학)의 육성, 대학의 자주성 인정, 전원 기숙사 생활에 학비면제라는 기존제도를 고치는 의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기본적 학제는 유치원-소학교-중학교-고학원(대학 포함)으로 되어 있고, 학제는 근대교육의 시작과 더불어 6·3·3제를 받아들였다가 1951년부터 5·3·3제, 문화혁명기에 5·3·2제를, 그리고 현재는 5·4·3제를 시행중이나 지역에 따라 그 차이가 많다. 한국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원교(高等院校)에는 대학, 전문학원(專門學院), 전과학교(專科學校) 및 부설연구부(附設硏究部) 이 있다. 1997년 말 현재 모두 1020개교에 연구생 17만 6400명, 본과 전문대생 317만 2700명이 있으며, 이 가운데 고급 인재 양성의 핵심이 되고 있는 중점대학은 1954년 중국인민대학교, 베이징대학교, 칭화[淸華]대학교가 지정된 이래, 1981년부터는 그 수가 96개교에 이른다. 이와 더불어 농업중학, 고전문학교, 직업기술학교 이 설치되어 있고, 전일제(全日制)가 곤란한 학생 및 성인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있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기관은 직공대학(織工大學), 농민대학, 보통고학교 통신교육부, 야간대학, 간부 전수과(專修科), 관리간부학원(管理幹部學院), 교육학원 및 교사양성학교, 텔레비전 방송대학 이 있다. 중국의 교과과정은 도구교과(道具敎科:국어·수학·외국어), 문과계(文科系:지리·역사·정치), 이과계(理科系:물리·화학·생물), 예술계(藝術系:음악·미술·체육)로 구분되어 있다. 가난으로 인해 소학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1993년부터 ‘1+1 운동’을 전개해 가난한 아이의 교육비를 지원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났으나, 한편 고급스럽고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도 장하여 교육의 질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00년 기준으로 15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은 18.5%였으나 2003년 기준 10%로 줄어들었다. 남자는 4.9%, 여자는 13.5%의 비율을 나타내면서 농가를 중심으로 여자가 상대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다. 중국은 복지정책의 하나로 2007년부터 9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중국의 세시풍속

중국의 세시풍속은 음력에 따라 치르는데 종류가 다양하다. 한국의 설날에 해당하는 춘제[春節]는 중국 최대명절로 3일간의 연휴가 있고, 농촌의 경우는 10일 이상을 쉬기도 한다. 헤어진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므로 전국에서 귀성인파로 교통난이 일어나기도 한다. 춘제 바로 전날인 섣달 그믐부터 폭죽을 터뜨리며 놀고 음식을 먹으며 잠을 자지 않고 밤샘을 한다. 춘제 아침에는 차례를 지내고 ‘궁시[恭禧]’라는 축하인사와 세배를 한다. 이후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되는 기간중에 사자춤과 용춤이 장한다.

정월대보름날인 위안사오제[元宵節] 때는 보름달을 감상하고 불놀이를 하며 만둣국을 즐겨 먹는다. 돤우제[端午節]에는 배를 타고 경주하는 룽촨[龍船] 경기를 하고, 쭝쯔[宗子]라는 별식을 먹는다. 중추제[中秋節] 때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햇곡식으로 먹을 것을 장만하여 감사하는 달맞이 행사를 한다. 이때 가장 즐겨 먹는 것은 웨빙[月餠]으로,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를 방문할 때에는 꼭 이 웨빙을 선물한다. 그밖에 양력 4월 5일 전후의 성묘일인 청명절, 음력 7월 7일의 칠석,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 이 있다.

중국의 사회보장

중국 정부는 2000년에 국가와 민영보험사, 근로자 개인이 함께 복지비용을 부담하도록 사회보장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실험에 돌입하였고, 같은 해에 발표한 제10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2001~2005)에서 2005년까지 사회보장제도를 완비하겠다고 하였다. 이 계획은 법에 따라 연금보험의 실시범위를 확대하고, 사회통합 및 사회·개인의 부담을 서로 결합하는 도시근로자 기본연금보험제도를 계속 개선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중국은 1951년에 노동보험 규정이 도입되었고 대약진 기간중에는 인민공사를 통한 복지 프로그램이 시행되었으나, 문화혁명 기간에는 생산성을 강조하여 노동보험규정의 실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1978년 노동보험규정이 재개정되고 나서야 그 역할이 회복되었다. 1982년 노인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향상하고자 노인복지법령을 제정하여 노인 5보(五保:음식·의류·의료·주거·장례 보장)를 구성하였다. 1985년 7차 5개년계획(1986∼1990)에 처음으로 사회복지사업, 사회구제사업과 보훈사업을 개선하여 완비하려는 조항이 첨가되었다. 1993년 11월에는 2000년까지 전 인구를 대상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할 것임을 밝혔는데, 실업수당, 의료 및 연금혜택  기본적인 사회복지 실현을 주요내용으로 하였다.

중국은 2020년에 80살 이상의 노인이 3천만명을 넘게 된다. 이에 반하여 가족 규모는 급속하게 축소되고 있다. 따라서 노인을 돌보는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사회보장 체계의 중대한 도전이다. 2007년 기준 양로 연금 보험 가입자는 1억 3천만명이나 수혜자는 4천만명 정도밖에 안 된다. 중국의 경제활동인구를 7억명으로 추산할 때 6억명에 가까운 인구가 양로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 정부는 분배에 초점을 두어 조세정책을 개혁하여 고소득층에게 세금을 더 부담시키는 정책을 시행계획이다.

중국의 농촌문제

중국의 농업은 현대화를 통하여 급속히 성장하고 있지만, 세 가지 측면에서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번째, 농민문제로 중국의 개혁, 개방으로 투자는 주로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농민들의 경제적 빈곤이 심각하고 상대적 빈곤감은 더 커지고 있다. 중국인구의 절반가까이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민 1인당 연평균소득은 2005년에 3255위안(한화 약 40만원)을 기록하는데 불과하여 도시민과 농민의 소득격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문화혁명이후 농민과 도시민의 호적을 분리하는  농촌과 농민이 우대받던 시대가 끝나고 산업화시대에는 도시민이 우대를 받고 있다.

두번째, 중국의 농업이 생산력향상에 주력하여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지만, 농민들의 유일한 생계기반인 토지는 여전히 국가소유이며, 곡물가격은 정부가 통제하며 농촌의 사회보장체계는 열악하다.

세번째, 농촌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며, 교육, 의료, 문화와 관련된 시설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이 많고 대학진학율은 낮다. 과거에 우대되었던 호적제도때문에 거주이전이 자유롭지 못하며, 도시로 이주하여도 도시인구억제책으로 인하여 교육비, 의료비 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

중국의 문화

전통시대의 중국문화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주변국가들에 정치, 철학,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서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와 도교 사상도 인접국가에 전파하고 영향을 주었다. 공산화된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유가사상보다 문예활동을 인민에 봉사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할 것을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창작활동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82년 중국 정부는 문예사상의 ‘견지(堅持)와 발전(發展)’을 주장하고 작가는 4가지 기본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여 작가들의 자유화 경향을 제어하였다. 즉 허용된 자유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 내에서의 자유이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다.

1983년 사회주의 사상과 문화의 오염을 막는다는 명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이 다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바이화[白華]의 ‘오왕금과월오검(吳王金戈越五劍)’, 쉬징짜이[徐敬再]의 ‘굴기적시군(掘起的 試群)’이 비판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류빈엔[劉賓雁]과 왕뤄왕[王若望]이 비판을 받고 당적을 잃었다. 톈안먼사건 이후에도 일부 작품들이 자산계급(資産階級) 자유화사상에 물들어 있어 당과 사회주의를 불신하고 있다고 비판되었다. 결국 중국의 문예활동은 정치적 면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도전이 많아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의 화단은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서구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면서 신사실주의(新事實主義), 전위예술 의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고 있다.

문화혁명 이후 서양음악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음악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정권이 지정하는 공연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행으로 인민들의 음악생활도 다채롭게 변모하였는데 특히 배우기가 쉽고 이해하기 쉬운 유행음악들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최근에는 가라오케 노래방[歌廳]들이 대도시에 급증하고 있다. 또한 교향악 부문도 1980년대 중반 인민들 사이에 열풍적인 반응을 일으켜 매번 중앙악단의 공연 때 매진되는 일이 흔하였다.

또한 중국인은 중국 고유의 경극(京劇)을 즐기는데, 이 경극은 극본, 연기, 음악, 노래, 소도구, 분장, 의상 의 예술적 요소를 다채롭게 결합한 총체적 예술로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 원리에 의해 세련화된 예술이다. 이 역시 문화혁명 때에는 소련의 사실주의적 문예정책과 봉건주의적 잔재를 제거한다는 목표로 많은 부분이 변질되었지만 개혁 이후에는 문화혁명기에 금지당한 내용들이 다시 상연되고 표현면에서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태극권  기공수련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아침에 단체로 기공체조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이 결합된 법륜공은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의 강한 탄압을 받고 있다. 스포츠면에서는 육상·체조 에서도 세계 최고수준의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언론

중국의 언론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지도사상과 당의 노선을 준수하고, 당과 인민의 관계를 결합시키며,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사실을 보도하는 하나의 선전·선동(宣傳煽動) 조직이자, 여론기관으로서의 성격과 임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력 일간지들은 당 기관지이고 그 외의 매체들도 당의 직접적인 지도체계 속에 있기 때문에 중국 언론은 거의 당 기관지라고 볼 수 있다.

주요 신문으로는 당 중앙의 견해를 대변하며 모든 신문의 영도적 위치에 있는 《인민일보(人民日報)》, 학술이론과 문화·예술 을 다루는 《광명일보(光明日報)》, 군 기관지인 《해방일보(解放日報)》, 경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경제일보(經濟日報)》, 상하이에서 창간되어 해외에서도 구독이 가능한 《문회보(文匯報)》, 관영노조인 총공회 기관지 《공인일보(工人日報)》와 그외에《농민일보(農民日報)》《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중국부녀보(中國婦女報)》《중국소년보(中國少年報)》《중국아동보(中國兒童報)》《해방군보》《인공일보》, 영자지 《차이나 데일리》《문예보》《경제소식》《경제참고보》《금융시보》《인민공안보》《법제일보》《인민정협보》《문애보》 이 있다. 통신사는 정부의 대내외 뉴스를 국내외에 공급하는 신화통신사(新華通信社)가 1982년부터 국무원에 소속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홍콩의 민간통신사로 중국신문사가 있다.

방송은 국무원의 방송·영화·TV부[廣播電影電視部] 관할하에 중앙방송국과 지방방송국이 있다. 중앙방송국에는 3개 라디오 방송국과 3개 TV방송국이 있다. 전국적으로는 1997년 현재 텔레비전방송국이 3,240개로 중앙방송국에 209국, 지방방송국에 31국이 소속되어 있고 현(縣)·시(市) 유선방송소가 3,000개 있다. 라디오방송국은 AM방송국 369국, FM방송국 259국, 단파방송국 45국이 있다(1998). 광대한 농촌에는 주로 유선방송이 보급되어 있고 홍콩의 위성방송(STAR TV)도 수신이 가능하다.

중국의 과학기술

중국에서는 1978년 실용주의 노선이 구체화되면서 과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과학·기술도 경제건설을 위한 혁신적이고 개방적인 발전전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과학기술체제의 개편이 시도되었다. 그리하여 문화혁명 기간에 정지된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중국과학원, 중국과학기술협회 이 재결성되었고, 이후 8개년 과학기술발전계획(1978∼1985)이 입안·발표되었다. 1986년에는 하이테크산업 발전에 관한 계획(863계획)을 1986∼2000년 과학기술발전계획으로 편입하여 실행하였다. 이 계획은 15년 동안 1만 명 이상의 과학·연구진을 투입해 생체공학, 우주·항공, 정밀전자, 정보기술, 레이저, 로봇 및 공장자동화, 에너지, 신소재 에 연구개발 투자를 장려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이외에도 1988년부터 하이테크 산업의 개발을 상품화, 산업화하려는 ‘횃불계획[火炬計畵]’이 세워졌고, 개발된 기술을 농촌의 향진기업(鄕鎭企業)에 보급·확산시키려는 ‘불씨계획[星火計畵]’, 취약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려고 하는 ‘공관계획(功關計畵)’ 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기술산업개발구(高技術産業開發區)를 27개시에 설정하고 경제특구의 일부를 첨단산업개발구(尖端産業開發區)로 지정하였고, 그중에서도 상하이 푸둥지구[浦東地區]는 아시아 최대의 실리콘밸리로 육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활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각 연구기관들도 공개경쟁을 통해 계약책임경영제를 도입하여 경쟁적 관계를 조성하고 연구원에게도 능력에 따른 임금, 인센티브 및 복지수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과학기술은 혁명 이후의 정책으로 인해 이중적 구조 문제가 내재해 있다. 즉 국방산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민수부문, 중화학공업과 경공업 간의 불균형,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 이 그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과학기술의 성공 여부에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인식하여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21세기를 기술시대로 인식하여, 2000년까지 기술수준을 1980년의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2020년까지는 선진국의 21세기 초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1년부터 실시하는 제10차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5개년계획은 과학기술면에서 전자상거래 발전 촉진을 주목표로 하고 있는데, 전국의 세관을 온라인화하여 수출입관련 정보와 통관관련 정보를 공유할 계획이다. 또 건전한 대외무역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대외무역의 관리·경영·정보체계를 초보적으로 온라인화하며, 전자상거래와 전자메일 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중국의 우주과학기술은 구소련, 미국, 일본, 프랑스에 이어 세계 5번째로 인공위성을 우주궤도에 진입시킨 선진국이다. 1970년에 최초의 인공위성인 '東方紅 1호' 를 발사한 이후로, 2003년에는 중국의 첫 유인우주선인 '선저우(神舟) 5호'를 성공적으로 발사시킴으로서 유럽의 기술을 추월하였다.

2006년 9월에는 초전도 핵융합 실험장치 방전에 성공하였으며 2007년 2월에는 심해 유인 잠수정을 개발하여 연내 해저 7000m 탐사를 추진하였다.

근세 이전의 한국과 중국 관계

한국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하여 있으므로 여러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계속하여왔다. 기록상으로는 BC 3∼BC 2세기에 연(燕)나라의 진개(秦開)가 고조선의 요동(遼東)을 정벌하였다고 적혀 있어 한족(漢族) 세력이 이곳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족의 망명인인 위만(衛滿)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대신하여 위씨조선(衛氏朝鮮)을 세웠다(BC 194). 위씨조선은 한무제(漢武帝)와 싸워 멸망하고 그 고토(故土)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대국가들은 중국을 통해 한문화와 불교문화를 수입하여 국가통치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었고, 특히 신라는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당(唐)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당나라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고려의 광종(光宗)은 중국식 과거제를 채택·실시하여 문치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는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연호로 사용하였으며 귀족사회는 한문학(漢文學)을 교양의 근본으로 삼았고, 승려들도 송(宋)으로 유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3세기에 몽골[蒙古]의 세력이 강대해져 고려를 침입하여 이에 항쟁하고자 수도를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40년간 완강히 대항하였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와 화해하여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고 이후에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원·명(明) 교체기인 고려 말에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는 조선 왕조를 개창(開創)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국시로 삼아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공물을 보냈다.

조선 유교주의자들의 통치원리는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지도원리로 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사대 경향은 더욱 심하여갔다. 조선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명이 구원군을 보내와 일본 격멸에 도움을 주었다. 만주족에 의한 2번의 호란(胡亂:1627, 1636)을 당하자 조선은 굴복하여 그들이 세운 청(淸)나라를 섬겼고, 이 시기에 유럽의 과학지식과 문명이 중국을 통해 들어와 조선 학자들에게 실학(實學) 학풍이 퍼져나간 계기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정치간섭을 심하게 하여 대원군의 납치, 중국 관제의 실시 강요, 청군(淸軍)의 서울 주둔 을 행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1864∼1895) 이후 청나라가 조선에서 손을 떼고, 두 나라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국광복에 불타는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간도 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1919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 6·25전쟁에는 중공군(中共軍)이 대량 투입됨으로써 한국 민족의 분단이 지속되고 있다.

현대의 한국과 중국 관계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전후 냉전체제로 인해 양국은 1950년대 이후 정치적 적대관계와 경제적 단절이 계속되었다. 개방과 개혁이 이루어진 1970년대 후반 들어 간접교역의 형식으로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넘어서서 중국의 개방이 더욱 확대되면서 양국 경제교류도 점차 늘어갔다.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착륙하는 사건이 나자 중국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이후 비정치적인 부문에서 양국 교류가 활기를 띠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飛行情報區域)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고, 1984년 3월에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모국 방문과 한국인들의 중국 친지방문이 허용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 중국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1988년 10월에 한국인들의 중국 관광금지가 해제되었다. 한국의 끈질긴 외교 교섭에도 중국은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을 고수하여 민간교류만 허용하였다. 1990년 10월에 무역대표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91년 10월과 11월에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다. 1992년 2월에 양국 무역협정이, 그리고 7월에는 투자보장협정(投資保障協定)이 발효되었다. 그해 4월에는 3차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고 8월 24일 양국은 수교의정서(修交議定書)를 교환하고 정식 수교를 이루고 민간 차원의 교류에서 정식적 국가 간의 교류로 바뀌었다.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 리펑 총리, 장쩌민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그 일정 중에 한·중 통상장관회의를 열어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대한 세제지원(稅制支援)과 8차 5개년 계획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1993년 5월에는 첸치전[錢其針] 외교부장이 방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시애틀에서 정상회담을 가져 북한 핵문제와 다각적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였다. 19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 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긴밀한 협의, 한반도 비핵화 실현 지지를 논의하고 이중과세(二重課稅) 방지협정 및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통신협력양해각서(通信協力諒解覺書)를 교환하였으며 산업협력위원회(産業協力委員會)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10월에는 리펑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12월에는 한·중 양국의 최대 현안 중의 하나인 서울~베이징 간의 직항노선이 개설되었다. 1995년 11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방한하였고 1998년 1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1995년 2월 17일 북한에 대한 경수로제공을 전담할 다국적 컨소시엄인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참여문제와 관련 불참키로 결정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역할을 스스로 제한하였다.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대북한제재에는 반대하였다. 중국은 1997년 4자회담 참여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8월 뉴욕 4자회담 예비회담과 12월 제네바 본회담에 참가하였다. 중국은 최근 들어 한국의 대북(對北) 포용정책과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화해·교류 및 협력관계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관계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교역은 20억 달러 미만이었다. 1991년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교역액은 44억 달러까지 이르렀고, 양국 무역대표사무소 설치와 무역협정 체결 으로 경제교류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다. 1993년에는 90억 8000만 달러로 늘었다. 무역수지를 보면 한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1993년도에 들어서 대중국 수출이 51억 5000만 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94%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수입이 39억 3,000 만 달러로 증가율 5%에 그쳐 12억 2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도 들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중국의 수입억제로 상반기 무역수지는 3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총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9년의 1.7%에서 1993년도에는 5.5%를 차지하여 중국이 미국·일본에 이은 한국의 제3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교역 품목의 구조는 전형적인 산업간 분업형태를 보인다. 즉 대중국 수출은 중화학 공업제품이 중심이 되어 있어 철강·금속제품, 기계류 및 운반용 기계, 섬유, 화공제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입은 농수산물, 섬유류, 광산물 의 품목이 대종을 이룬다.

정식수교와 한국의 산업구조조정(産業構造調整) 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여 중국이 한국의 2대 투자대상국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1985년 홍콩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가 시작된 후 1989년 9건, 1990년 35건에서 1991년 107건으로 급속히 늘었고, 1993년에는 630건 5억 7,030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3년까지의 직접투자 누계는 1,043건 10억 430만 달러에 달하였다. 1998년에는 191건 1억 1100만 달러로 줄었으나 2000년에는 415건 2억 3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수교 후 초기에는 투자 대상지역이 보하이만[渤海灣] 주변과 둥베이3성(東北三省)에 편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상하이·장쑤성[江蘇省] 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해 중국의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재의 확대와 소비변화에 부응하는 시장개척을 중시하고 있으며, 경쟁력이 약화된 업종의 투자를 조장하고 중국의 전략육성산업이면서 협력 가능성이 높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교환기(TDX), 원자력발전 을 우선 협력분야로 선정하여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대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와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북한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도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9년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소원해진 관계를 재차 긴밀한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소원해져 1993년 3월 예정되어 있던 김정일(金正日)의 중국 방문이 취소되었다. 1992년 12월 중국이 북한에 대해 경화결제(硬貨決濟) 요구에 따라 더욱 그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난이 가중되어 북한이 중국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7월 북한의 ‘승전 40주년’ 행사에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중국의 경제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중국이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서게 되는  여전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다. 1996년 8월 북경에서 한중 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였다. 2000년 현재 한국은 일본·미국·홍콩에 이어 중국의 4번째 교역국으로, 대한(對韓) 수입은 186억 1000만 달러, 수출은 128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화학공업제품, 섬유, 전자 및 기기, 철강, 금속제품 의 공업용 원부자재 이고 주요 수출품은 철강, 금속, 섬유, 전자 및 기기, 농림수산품 이다.

2003년 이후 중국은 우리나라의 수출상대국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4년 이후 수입상대국 2위이며, 2005년 대중국 무역량은 1,006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중국은 2003년 이후로 무역흑자 상대국 1위로 2005년 대중국 무역의 흑자액은 235억달러였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철강, 석유화학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대 중국 수출흑자는 점점 줄고 있다.

201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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