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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농구선수 김훈... 대전고 시절에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wody**** 조회수 12,355 작성일2003.12.03
김훈선수가 대전고 시절에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얼핏 듣기로는 당시 고교 최강팀도 꺽고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잘 알지 못해서 ... 답변부탁드립니다.
상세히 좀.. 그리고 연대우승 당시 김훈의 활약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전 그때 초등학생 이었을때라 잘 생각이 안나네요.
연대 우승 이후 시즌은 잘 생각이 나는데... 우승 이후에도 이상민-우지원-김훈-서장훈 대단했는데... 김훈 혼자 한경기 7개 이상 3점 성공시키고.. 캬~

유감독이 sbs로 보내면서 애 망쳤지만... A급 선수였는데.. 지금은 부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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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h2****
영웅
농구 16위, 해외프로농구 12위, 농구 선수, 감독 1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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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대전고 시절 슛이 좋은 선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명문 연세대에 스카웃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연세대에는 문경은이라는 대형슈터가 있었

으며, 동기생인 우지원도 슈터로서는 그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까닭에 김훈은 벤치신세

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김훈이 주전으로 뛸 수 있었던 요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장기

인 슛이 아니라 수비였다. 그가 2학년이 되는 해에 서장훈이 들어오고 주전센터 김재훈

이 부상당하면서 최희암감독은 이상민, 김훈,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의 1가드-3포워

드-1센터의 라인업을 구상하게 된다. 분업농구에서 전원이 공격에 치중할 수는 없는 노

릇이었기에, 김훈은 자연스레 수비에 주력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변화에 성공적으

로 적응한 까닭에 그들은 정상급 선수의 대결에 낄 수 있었다. 2번(슈팅가드)으로서 비

교적 장신이었던 김훈은 끈질긴 수비와 정확한 외곽슛으로 연세대의 93∼94시즌 농구대

잔치 우승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문경은이 졸업하면서 우지원과 쌍포를 형성하게

된 그는 이듬해에도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서장훈의 도

미 후에도 팀을 95∼96농구대잔치 4강에 진출시키고 올스타에 뽑혔다. 졸업후 우지원,

석주일과 더불어 대우증권의 창단멤버가 된 그는 프로에서도 기복없는 활약을 펼쳤다.



김훈은 원래 홍익대로 진학예정이었지만 연세대로 가게된 이유가 있는데 대전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 큰 상처를 주었던 사건이다. 당시 김훈은 고교 무대에서 알아주는 슈

터였다. 서장훈, 현주엽이 버티는 휘문고도 김훈 때문에 대전고와의 경기가 힘들었다.

당연히 김훈은 대학 감독들에게는 꼭 데려오고 싶은 선수 중의 하나였다. 먼저 손을 내

민 쪽은 홍익대였다. 대전고의 서울 전지훈련을 책임지고 골대나 기타 장비를 지원해

주면서 오랜 기간 구애를 했다. 대전고 감독(김훈이 그런 것처럼 실명은 거론하지 않는

다)은 김훈의 어머니를 설득해 홍익대로 유도했고, 본인 스스로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김훈은 연세대로 진로를 결정했다. 문제의 시발은 여기다. 김훈이 홍익대로 가

야만 함께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던 선수들의 진로가 막혔고, 홍익대와 굳게 약속했

던 대전고 감독은 낭패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대회였던 전국체전이 열렸

다. 이 대회에서 4강에 든다면 나머지 선수들도 대학 진학의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

만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가? 대전고는 4강에 들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대

전고 감독은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교무실에서 김훈에게 사정없이 매를 댔다. 그러면

서 ‘친구들이 대학에 못 가게 하려고 일부러 열심히 뛰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달았

다. 얼마나 맞았는지 허리에 심한 충격이 갔고, 김훈은 결국 전치 6개월 진단을 받고

말았다. 대전고 감독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김훈에게 각서를 요구했다. ‘친구들을 대

학에 보내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지 않았다. 연세대 최희암 감독이 이미 진로가 결정되

었으니 열심히 뛰지 말라고 했다’라는 거짓 각서였다. 윽박지르는 감독도 무서웠고 이

것만 쓰면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에 김훈은 부르는 대로 적었다. 대전고 감독은 그 각서

를 복사해 학교 선생님에게 돌리며 김훈을 매도했고, 심지어 연세대 최희암 감독에게

도 보내 따지는 행태를 보였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김훈의 대학 진학도 막겠

다는 행동이었다. 사춘기였던 김훈은 믿고 따랐던 감독 선생님의 이해 못할 행동에 상

처를 많이 받았다. 당시의 충격이 너무 커서 지금껏 한번도 심경을 말해 본 적이 없

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못하게 일부러 안 뛰는 선수

도 있습니까?”



그는 국제무대에서도 경쟁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97년 영맨세계선수권에서는 득점3위,

3점슛 2위에 올랐으며 그 해 이태리 시실리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외곽득점을

담당하며 팀이 27년 만에 8강에 오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의 활약은 자못 인상적

이었던 까닭에, 당시 각국 스카우터들에게서 슛터치는 NBA급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

러한 활약으로 97년 동아시아대회, 98년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대표로 잇달아 뽑혔

다. 프로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SBS에 입단한 그는 팀을 4강에 진출시키며 신인왕을 차

지하기에 이른다. 팀의 핵심멤버였던 정재근, 홍사붕이 트레이드되면서 주포로 자리잡

은 그는 지난 2000-2001시즌에도 팀을 4강에 진출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200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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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김훈 팬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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