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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로빈후드 전설....
멍멍 조회수 5,740 작성일2009.03.24

안녕하세요^-^

제가 프레젼테이션 준비를 하구 있는데요...전설에 대한거에요~

그래서 로빈후드를 topic으로 했습니다...그런데 로빈후드에 관한게 필요한데 로빈후드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좀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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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
영웅
사회, 도덕, 국어, 한문, 수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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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후드의 시대적 배경??

"로빈 후드"는 약 800년전, 제 3차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한 영국의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

제 3차 십자군 원정

12세기 후반, 이슬람쪽에서 위대한 장군 살라딘(Saladin)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어(1174)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살라딘은 수중의 전병력을 동원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여 하틴(Hattin)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1187) 예루살렘의 함락은 유럽에 큰 충격을 주어 영국왕 리차드 1세, 프랑스왕 필립 존엄왕, 독일황제 프리드리히 1세 등 당대의 대표적인 국왕들이 참가한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1189~1192)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왕의 대립으로 양국의 출발이 늦어지자 독일황제는 단독으로 먼저 출발하였으나 소아시아의 하천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1190년 여름, 리차드와 필립은 같이 출발하였으나, 두 국왕의 대립은 계속되고 리차드는 도중에 키프로스를 점령하는 등 딴 짓을 하였으나 다음 해에 시리아에서 힘을 합쳐 아크레(Acre)를 점령하였다(1191). 아크레의 점령 후 필립은 곧 귀국해 버렸고, 리차드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무력함을 깨닫고 살라딘과 협상하여 순례자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받고 돌아갔다.

로빈후드가 살았던 집??

로빈후드의 무대로 유명한 도시는 영국의 Nottingham.
주요 관광지는 시 서쪽에 있고, 시 북쪽 30km쯤에 로빈후드가 활약한 셔우드 숲이 있다.

Nottingham Castle
로빈후드이야기에서 영주가 살던 성의 배경이 된곳. 현재는 노팅엄을 소개하는 박물관 겸 미술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Tale of Robin Hood
노팅엄 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으며,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경에 인형과 음악을 이용하여 로빈후드의 전설을 재현하고 있다.

Sherwood Forrest Center
소요 셔우드 숲 한쪽에 자리하여 로빈후드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숲에는 로빈후드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교회도 있다.

Newstead Abbey
셔우드 숲 변두리에 있는 바이런의 저택. 그림이나 조각, 친필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정원과 호수를 산책하는것도 좋다.

교황은 어땠나?
교황은 누구였나?

이노첸시우스 3세 or 이노센트 3세(1198 - 1216)(Innocent III)

교황청이 최고의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그는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공부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전세계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을뿐 아니라 전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다. 황제의 선출은 7명의 선제후에게 있었으나, 교황은 이 선출된 사람을 조사하는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합당하게 되면 교황은 이 선출되 황제에게 축복해 주고 관을 씌워 주고 황제로써 임명을 해주었다. 이렇게 교황이 인정을 해주기 전에는 이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황제 후보자이다. 1209년 오토라고 하는 사람에게 대관식을 해주었다. 오토는 황제가 되기전에 이탈리아 중심부에 교황의 영지를 확보해주고, 독일의 주교선거 즉 성직자 임명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후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교황은 프리드리히2세라고 하는 사람을 새로 교황으로 임명했다. 결국은 2명의 황제가 서게 되는데 1214년 오토가 죽고난 뒤 프리드리히2세가 정식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필립2세는 왕비와 이혼을 했다. 그러자 교황은 프랑스에 있는 모든 성직자에게 성직을 중지하도록 성직정지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례도 못받고, 결혼도 못하고, 고해도 못하고 죽으면 다 지옥에 가는 것이다. 결국은 왕은 교황의 명령에 굴복하고 왕비와 재결합했다. 영국왕 John은 대헌장에 서명했던 왕이다. 존왕이 켄터베리 대주교를 선출하는제 관여했다. 그래서 이노센트3세가 Langton이라는 사람을 대주교로 임명했다. 여기에 대해서 존왕이 반대를 했다. 교황은 존왕을 파문시켰다. 그리고 영국을 상대로 제4차 십자군을 선포했다. 1213년 왕이 교황에게 굴복하고 영국땅 전체를 교황에게 바쳤다. 존왕은 교황에게 1년에 1천마르크씩 봉토세를 지불했다. 도미니크회와 프랜시스회(탁발수도회)를 정식 교단으로 인정해 주었다. 이노센트3세는 종교적, 정치적 감각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교회배경

황제/교황의 권위?

이노센트 3세(1198-1216)에 이르면 서방교회의 교황주의는 절정에 도달한다. 이노센트 3세는 교황을 태양, 황제를 달이라고 칭했다. 교황 이노센트 3세(1198-1211) 스콜라철학을 배경으로 교권의 최절정기를 맞이했으며 황제의 옹립과 폐위까지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십자군원정의 잇따른 실패로 이후부터는 교황권이 서서히 몰락해가기 시작한다.

서민과 귀족의 생활??

십자권원정을 거치면서 봉건 귀족 세력은 약화되고 국왕권 강화되었다.
귀족들의 불만을 쌓여갔고, 이는 1215년에 이르러 역사적인 마그마 카르타가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움이 되셧으면 합니다~


본문 : http://blog.daum.net/krun5

2009.03.24.

  • 출처

    nake330님 지식in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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