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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양조씨 파, 몇대손인지 궁금합니다.
비공개 조회수 1,337 작성일2017.06.27
할아버지 존함은 조 성자 국자이시고
아버지 성함은 조 종자 남자鍾南이며
제 이름은 조병규炳奎입니다.

사연은있었겠지만 어머니가 제 어릴적 이름을 지으실때 조 성원이라 지으려고 했답니다. 근데 아버님이 요즘누가 그런거 따지냐며 그냥 병규라고 지으셨다하는데..(이 얘기는 무시하셔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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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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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할아버지 존함은 조 성자 국자이시고
아버지 성함은 조 종자 남자鍾南이며
제 이름은 조병규炳奎입니다.

사연은있었겠지만 어머니가 제 어릴적 이름을 지으실때 조 성원이라 지으려고 했답니다. 근데 아버님이 요즘누가 그런거 따지냐며 그냥 병규라고 지으셨다하는데..(이 얘기는 무시하셔도됩니다.)

 

답변 : 님은 한양 조씨이시군요.

 

 각파에서 찾아본 결과로는, 

 

조부님 : 성자 국자 두자 중에 한자가 돌림이라 하셨고,

부친님 : 종(鍾)자 남(南)자 두자 중에 한자가 돌림이라 하셨으며,

님은 : 병(炳)자 규(奎)자 두자 중에 중자가 돌림인 것 같습니다.

 

하나! 고조부님 ?자 → 증조부님 ?자 → 조부님 성자 국자 → 부친님 종(鍾)자 남(南)자 → 님은 병(炳)자 규(奎)자로 이어지는 돌림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항렬표 돌림자 위주로 성함을 지으신 것이 아닌듯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도를 기하기 위하여 먼저 집안 어른들에게 항렬자를 여쭤보시고 모르신다면, 이때는 족보를 보시던가 족보책을 소장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조부님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지금 사시는 관할 동사무소나 읍면사무소에 가셔서 제적등본을 발부 받아 대조해 보시고, 그래도 모르시면, 존함과 과거에 사시던 연고지가 다 나옵니다. 그리고 연고지에 사시는 일가친척을 찾아 무슨파 항렬자냐고 여쭤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항렬표 돌림자가 맞지 않아 항렬자와 파를 찾아 드리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돌림자를 쓰시지 않고 파도 모르시면 저 능력의 한계로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님은 한양 조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한양 조씨에 대한 정보 입니다.

 

 

한양 조씨(漢陽 趙氏)에 대()하여

 

1.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始祖) : 조지수(趙之壽)

2. 한양 조씨(漢陽 趙氏) 유래(由來) :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는 중국(中國)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연대(年代)는 알 수 없고, 고려(高麗) 중엽(中葉)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조선(朝鮮) 개국(開國) 때 한성(漢城)(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繁榮)하였고, 많은 인물(人物)을 배출(輩出)하였으므로 본관(本貫)을 한양(漢陽)으로 하고 있다.

조선(朝鮮) 개국(開國) ()에 크게 번성(繁盛)하였는데, 이는 조인옥(趙仁沃조온(趙溫조영무(趙英茂) 등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활약(活躍)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많은 관직(官職)()를 배출(輩出)하였다. 가장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은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선구자(先驅者) 조광조(趙光祖)이다.

  

 

3. 한양 조씨(漢陽 趙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파명(派名)을 한문(漢文)으로 살펴보면 : 안정공파(安靖公派),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월계당파(月溪堂派), 백당공파(栢堂公派), 세마공파(洗馬公派), 봉사공파(奉事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한풍군파(漢豊君派), 도제공파(都制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고사공파(庫使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돈녕공파(敦寧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병참공파(兵參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파서공파(坡西公派), 봉례공파(奉禮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호의공파(戶議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옥천공파(玉川公派) 나뉘어졌다.

 

 

4. 한양 조씨(漢陽 趙氏) 연락처(連絡處)

 

양주 양주 조씨 대종회 02-980-1332 서울 강북--123-1(양주조씨회관)

임천 임천 조씨 종친회 02-722-1121 서울 중-삼각-39(신우공사라이타창구)

한양 한양 조씨 대종회 02-3675-7136 서울 특별시 종로구 충신동 120번지

평양 평양 조씨 대종회 02-2293-1295 서울-성동-마장-474-8(3)

풍양 풍양 조씨 대종회 02-576-3701 서울-강남-포이-231-11...(풍양빌딩5501)

풍양 풍양 조씨 한산군파종증 02-885-4893 서울-관악-봉천1-702-111(1)

한양 한양 조씨 가산공파종회 02-382-1282 서울-은평-응암3-119-4

한양 한양 조씨 대종회 02-2285-4090 서울-종로-장사-220...(대영빌딩203)

한양 한양 조씨 대종회 02-3672-4399 서울-종로-충신-120-2

한양 한양 조씨 병참공파종회 02-544-1377 서울-강남-신사-665-1

한양 한양 조씨 숭조회 02-514-0064 서울-강남-신사-665-1

한양 한양 조씨 한풍군파종회 02-3477-9400 서울-서초-방배-835...(송광빌딩4)

함안 함안 조씨 화수회 02-2275-3109 서울--산림-207...(대림아555)

한양() 한양 조씨 병참공파종회 02-544-1377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665-1

한양() 한양 조씨 병참공파종회 02-544-1377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665-1

양주() 양주 조씨 회관 0166313084 전북군산시중동261번지193 u2o4@yahoo.co.kr

양주() 양주 조씨 회관 0166313084 전북군산시중동261번지193 u2o4@yahoo.co.kr

양주() 양주 조씨 회관 0166313084 전북군산시중동261번지193 u2o4@yahoo.co.kr

한양() 감역공파 종회 (031)575-2837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432-6 bus777@chollian.net

양주 양주 조씨 장령공파종중 031-336-4509 용인-삼가-428-5

 

[출처] 한양 조씨 갑산공파에 대해서 (한양조씨 갑산공파) / 작성자 무한장

 

 

5. 한양 조씨(漢陽 趙氏) 가문(家門)의 번영(繁榮)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의 외아들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45(1258) (몽고)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초대(初代) 쌍성총관(雙城摠管)을 지낸 조휘(趙暉), 조휘(趙暉)의 아들로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摠管)이 되고 부원수(副元帥)를 지낸 조양기(趙良琪),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歷任)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용성군(龍城君)에 이른 조돈(趙暾),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를 지낸 조인벽(趙仁璧) ()의 인물(人物)이 있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조인옥(趙仁沃), 개국공신(開國功臣)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襄節公) 조온(趙溫)과 한평부원군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등 많은 관직자(官職者)를 배출(輩出)하면서 가문(家門)의 기틀을 세웠다.

 

중종(中宗) 때에 조광조(趙光祖)는 일찌기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修學)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硏究)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學統)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유가 되었다. 151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 여러 관직(官職)을 거치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實施)케 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廢止)하는 등 급진적(急進的)인 개혁(改革)을 단행하였으나 훈구파(勳舊派)의 반발로 사약(死藥)을 받고 죽었다. 조병옥(趙炳玉) 1909년 평양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콜럼비아 대학(大學)에서 철학(哲學) 박사(博士) 학위(學位)를 수여받았다그는 1929년 광주(光州) 학생운동(學生運動) 사건(事件)의 배후(背後) 인물(人物)로 지목(指目)되어 왜경(倭警)에게 체포(逮捕)되어 3년간 복역(服役)하였고,1937년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 사건(事件)으로 다시 2연간(年間) 복역했다. 1945년 해방(解放)이 되자 한국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하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의 정치노선(政治路線)을 비판(批判)하며 반독재 투쟁(鬪爭)의 선봉(先鋒)에 나섰으며 1960년 민주당(民主黨) 후보(候補)로 대통령(大統領)에 입후보(立候補) 했으나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그에게 1962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이 수여 되었다. 청록파 시인(詩人) 중의 한 사람인 조지훈(趙芝薰)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人物)이다.

 

 

6. 한양 조씨(漢陽 趙氏) 대동(大同) 항렬도(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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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行列字)

적용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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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 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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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 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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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양 조씨(漢陽 趙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판도공파(版圖公派)

총관공파(摠管公派)

區分

行列字

區分

行列字

區分

行列字

 

21

天 鉉

 

 

21

敎 植 廷

21

彦 養

22

善 源

22

鍾 載

22

秉 淵

23

泰 柄

23

元 允

23

容 榮

24

東 熙 煥

24

炳 昺

24

基 煥

25

容 奎 在

25

行 형(衡)

25

錫 鎬

26

遠 錫

26

성(誠)

성(成)

26

泳 洙 海

27

27

熙 紀

27

東 植

28

28

慶 庸

28

烈 烋 爕

29

29

新 章

29

均 在 培

30

30

廷 聖

30

鉉 鈺 鍾

31

31

葵 揆

31

瀋 泰 泓

32

32

學 存 厚

32

 

33

33

書 肅 用

3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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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 寅 璜

34

 

35

35

卿 邵 迎

35

 

36

36

震 振 養

36

 

37

37

範 龍 夔

37

 

38

38

年 南 準

38

 

39

椿

39

東 洙 來

39

 

40

40

重 連 暢

40

 

 

 

8. 한양 조씨(漢陽 趙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마전리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 강원도 양구군 수입면 분지수리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모전리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포남리

-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상신기리

- 전라북도 남원사 주생면 내동리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

- 황해도 연백군 괘궁면 구암리

-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장항리

- 평안남도 북청군 덕성면 일원

 

 

한양 조씨 항렬표(行列表)

전에는 소파별로 따로 써 오던 항렬자를 1849년 기유보(己酉譜) 발간시 비로소 처음 정하였다.

 

1849년의 기유보는 판도공파와 총관공파의 합의에 의한 순서합보가 안 되므로 양파가 따로 족보를 만들었는데 그 범례에서, 판도공파는 동족 이름의 항렬자가 같지 않아 소목(昭穆)을 분별키 어려워 친친간에 흠이 되므로 항렬자를 정하였으니 이를 어기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21세부터 36세까지 오행상생 원리에 따라 정하였고 총관공파에서도 종중 각파의 항렬자가 서로 달라서 돈목의 풍속에 흠결이 있어 여러 종파가 회의하여 22세부터 31세까지 천간순으로 정한다 하였고, 1934년 갑술보에서는 32세부터 43세까지 지지순으로 추가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항렬자를 정하기 전에는 판도공파와 총관공파가 10세의 조(), 13세의 유()자와 같이 똑 같은 항렬자를 쓴 일도 있고 항렬자를 정한 21세 이후에도 판도공파 후손들이 판도공파에서 정한 항렬자를 쓰지 않고 21세의 식(), 22세의 종(), 23세의 원(), 24세의 병(), 25세의 형(), 26세의 성()자와 같이 총관공파에서 정한 항렬자를 쓴 일도 있다. 또 양경공-병참공파의 영남 종친들은 총관공파에서 정한 천간 항렬과 지지 항렬을 쓰지 아니하고 오행항렬에 따라 항렬자를 따로 정하여 사용하고도 있다. 위에서 정한 항렬을 도표로 보면 다음 항렬표와 같다고 하였다.

 

시조 중서공 휘 지수

한양 조씨 시조 중서공 휘 지수

우리나라 조씨성의 관향이 35본이나 된다. 특히 한양은 더욱 성문이다. 공은 즉 거룩하신 시조이시다.

공의 휘는 지수요. 관은 고려조순대부 첨의중서사에 이르렀으며, 묘는 함경도 영흥면 은곡동에 모셨다고 족보에 전해지고 있으나 실전하였으니 명호라, 통탄하도다! 왕년에 자손들이 위선하는 정성으로 누차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주민에게 물으면 조씨선산이 이 산중에 있었다고 하나 어느 곳인지 몰라 뜻을 이루지 못하여 후손들이 백세의 한을 풀지 못하였다.

이에 예손 준식(양경공파)등이 도모하기를 조상의 묘소를 잃으면 설단하고 향사해서 그 은혜심을 베풀 수 있다하고, 고종 광무5년에 설단입비하여 그 정성을 표하여 왔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어 구릉을 첨망하고 단하에 분향하는 것마저 할 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이남 제손들이 울읍한지 어언 50여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종회에서 분단이후 두번째 족보를 발간하려 함에 첨종이 협의하여 이곳 이남에도 따로이 설단하여 향화하는 것이 도리라 하고, 2004 4 17일 후손 광주전남종친회장 일형(양절공파)등이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매산 제각골에 설단입비하여 제향을 받들게 되였다.

시조 중서공께서 독자를 두시니 총관공 휘 휘이며, 후손이 30여만명으로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2세 총관공 휘

시조 중서공 휘 지수의 독자로 태어나시어 고려 고종 45(1258) (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 쌍성총관에 제수되셨다.

이후 공의 증손자까지 99년간 총관을 세습하여 12개성을 통치하셨으며,1273년 돌아가셨다.

묘는 함남 덕원군 북성면 신안리이다. 묘소 앞에 사계화가 있어 우리 가문의 상징이 되고있다(사계화 그림참조)

1926년 가선대부 부경(2품 벼슬로 현재 차관급임)을 지낸 정윤(참판공파)공이쌍성각을 창건하였다.

독자를 두시니 부원수공 휘 양기이다.

*총관은 현재 총독과 같으며, 호주, 캐나다, 홍콩이 이에 해당됨.

 

3세 부원수공 휘 양기

고려 원종 14(1273)부공인 총관공의 별세로 인하여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이 되셨다.

충렬왕 7(1281) 5월에 원세조(쿠빌라이)가 합포(현재 마산)에서 고려.원 연합군의 선단을 편성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원의 장군 흔도타구를 도원수로,고려의 김방경을 원수로,쌍성총관이신 공을 부원수로 삼았다.

그러나,이 싸움에서 때마침 불어온 큰 태풍으로 도원수 흔도타구는 패하고 돌아왔으나,공이 이끄는 선단은 무사히 이기고 돌아왔으므로 원세조가 이를 크게 기특히 여겨 그 공을 찬양하고 상으로 금포(금옷)와 옥대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그대가 아직 미혼이니 이것을 입고 돌아가 어진 배필을 얻어 훌륭한 자손을 낳아 대대로 나의 자손에게 정성을 다하기를 그대가 지금 내게 하듯이 하라"고 하였다.그때 공의 나이 21세였다.

그러나,일설에는 합단군이 철령을 넘어온것을 공이 포로로 잡아 바쳤으므로 이것을 내렸다고도 한다.

금포는 훼손되어 없어지고 옥대는 현재 대종가에서 보관하고있다.이옥대는 대종손 성준씨가 1980 7 14일자로 문화재보호법 제41조의 6 및 동법 시행령 제25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일반 동산 문화재로 서울특별시에 등록(1- 13525)되었다.

공의 묘소는 함남 영흥 덕흥면 용천리이다.

 

4세 용성부원군 휘 돈

부원수공의 2자이며,고려 공민왕 5(1356)쌍성총관부를 수복할때 협찬하시어 예빈경을 제수받고,개성에 저택을 하사받으셨다.

공민왕 8년에는 서경(현재 평양)에 쳐들어온 홍건적을 격퇴하셨다.

1360년 공부상서,1362년 해주목사,1363년 예의판서에 오르고,홍건적을 격퇴한데 대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셨다.

우왕 원년(1375)삼중대광 용성군(1)에 오르셨다.

공의 사후에 조정에서 부원군에 추봉하고 문하좌시중을 추증하였다.

묘는 함남 안변군 신모면 어유지이다.

장조카인 총관공 휘 소생의 후손이 전해지지 않아 한양조씨는 공의 후손만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5세 양렬공 휘 인벽

용성부원군의 장자로 호는 우계 또는 해월정이다.

고려 공민왕(1356)쌍성을 수복하여 호군이 되시고,공민 임인년에 이방실과 함께 서경(평양)회복에 대공을 세웠으며, 다음해에 김용을 토벌하여 2등공신이 되고,임자년에 판사로서 가주난동을 진압하여 만호가되어 함주 북청의 왜적을 격퇴하고, 봉익대부에 승진,1375(우왕)에 밀직부사로서 동북면 원수로, 정사년에 신주,옹진,문화 등에 누차에 걸쳐 왜구를 토벌하였다.

다음해에 판밀직으로 화포로 수군을 훈련,다음해에 강릉도 도원수겸 부윤,다음해에 상원수로 왜적을 격퇴, 계해년에 문하찬성사로 동북면 체찰사, 을축년에 4도 도지휘사, 무진년에 삼사좌사, 다음해에 판의덕부사로 승진하여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1)용성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를 역임하셨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태조 이성계가 처남인데도 불구하고 양양으로 은퇴하여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유림이 충현사, 동명서원(강원 양양읍 조산리 소재)을 세워 모시고 조선왕조에서는 증좌정승 시호 양렬공을 하사하였다.

묘는 개풍군 흥교면 사곳리이다.

배우자는 하동 정씨와 정화공주 두분이시다.

 

6세 양경공 휘 연

조연(趙涓) 1374(공민왕 23)1429(세종 11).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경(), 자는 여정(汝靜). 아버지는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인벽(仁璧)이며, 어머니는 정화공주(貞和公主:환조의 큰딸)이다. 음보로 산원(散員)이 되고, 1386(우왕 12)문과에 급제하였다. 1392(공양왕 4) 공조총랑(工曹摠郎)을 거쳐, 이해 조선이 건국되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서 왕의 의친(懿親)인 까닭에 별운검(別雲劒)이 되어 좌우에서 왕을 호위하였다. 1396(태조 5) 과의상장군(果毅上將軍)에 승진되고, 이어 중추원우승지·동지삼군부사(同知三軍府事)를 역임 하였으며, 1400(정종 2)2차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이 되고 한평군(漢平君) 에 봉하여졌다. 1402(태종 2) 우군총제(右軍摠制)를 거쳐 1404년 도총제를 역임한 뒤 무과회시에 감교관(監校官)이 되어 33 인의 무신을 뽑았다. 1407년 겸좌군총제가 된 뒤 이듬해 풍해도관찰사의 왜선 40여척이 나타났다는 보고에 따라 안산·부평의 조전 절제사로 파견되었으나 조선의 표류선임이 확인된 뒤늦은 보고에 의하여 돌아왔다. 이해 상호군·겸좌군도총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09년 병서강토총제(兵書講討摠制)가 되고, 이듬해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변방을 침범하는 모련위 야인의 수장 파아손(巴兒孫올량합(兀良哈착화(著和) 등을 죽인 뒤에 그들의 근거지까지 쳐부수고 남녀포로 수십인을 포획하여 돌아왔다. 1412년 중군도총제·겸판사복시사 등을 거쳐 1413년 공조판서·지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1416년 판좌군부사가 되고, 이듬해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19(세종 1)세종이 즉위하자 동지총제가 되었다. 1420년 찬성사가 되었으며, 1426년 우의정에 올랐다. 벼슬에 나간 뒤 파천된 일이 없고, 4대조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재화를 탐하지 않고 국정에 힘썼다. 성품이 온순하였으며, 문신이면서 야인정벌에 무공을 떨쳤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7세 병참공 휘 련

세종 10년 인수부 판관, 병조참의, 첨지돈령부사,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 중추원부사,1455년 세조시 좌익원종 2등공신에 책록,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벽제 목암동 국사봉 아래이다.

 

11세 한유군 휘 덕원

양경공파.

자는 경혼, 문과에 급제, 예빈시 판관을 역임하시고 전한에 이르렀다.

선조시에 한유군에 봉하였다

 

12세 한흥군 휘 공근

양경공파.

자는 회보, 호는 소옹.

천성이 효에 지극하여 8세에 어머니 유씨가 돌아가심에 애통하기가 어른과 같았고,부친의 병이 심하자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대접했으나 돌아가시니 3일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으셨다.

임진왜란때 사직재랑으로 신주를 모셔 위성공신으로 한흥군에 봉하였다. 옥천군수, 형조정랑을 역임하시고 광해군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칭하시고 사직,양근에 돌아가 계시다가 인조 5(1627)동지중추부사가 되셨다.

묘는 경기 양평읍 도곡리이며, 부조묘를 명하였다

 

13세 문간공 휘 경

양경공파.

자는 일장,호는 용주

광해 4(1612)사마에 합격. 인조반정후 유일로 천거되어 고창현감, 경산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다음해에 형조좌랑으로서 목천현감이 되셨으나 1년만에 그만두심.

인조4년 친시에 장원급제하시고,인조21년 일본통신부사를 마치고 돌아와 일본기행을 쓰셨으며, 형조참의, 대사간, 대제학,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시고 현종2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양조씨 두번째 족보인 신묘삼권보를 발간하셨다.

시호는 문간공,포천 용연서원에 배향되심

 

14세 한릉군 휘 복한

양경공 휘 연의 8세손.

한릉군에 봉하였다.

 

14세 녹문공 휘 위봉

양경공파.

문간공의 아드님

자는 자우. 호는 녹문.

사마에 합격하시고,현종 1년 문과에 급제.

정언을 거쳐 응교에 이르렀다.

청빈과 진퇴에 의리가 있으셨고, 정치에 청간한 한편, 백성을 사랑하며 조정에서 항상 정의를 주장하여 권신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시고 문학으로 소일하셨다.

글씨에 능하심

 

14세 송천공 휘 위명

양경공파.

자는 회여. 호는 송천.

현종 9(1668) 문과급제.

문예에 뛰어나시고, 필법이 절묘하셨다.

숙종이 즉위하자 국자직강으로 시책을 쓰셨으며 승지를 거쳐 충청감사가 되시어 선정을 베푸셨다.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세 한은군 휘 정익

양경공파.

한릉군 휘 복한의 장자

조정에서 한은군을 봉하였다

 

16세 산서공 휘 경남

양경공파.

자는 선술. 호는 산서. 중봉선생 조헌의 문인.

임란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왜적을 무찌름.

학문에도 뛰어나시어 난중잡록, 산서야산를 저술하셨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시고, 남원 주포서원에 배향되심

 

16세 옥천공 휘 덕린

양경공파

자는 택인, 호는 옥천.

16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교리, 사간, 필선 등을 역임하시고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소사가 되셨으며, 난이 평정된 후 동부승지에 올랐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셨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제주에 귀양 가시던 중 강진에서 돌아가셨다. 저서로는 옥천집이있다.

 

27세 민족 시인 지훈

양경공파.

1920년 영양 출생,본명은 동탁,호는 지훈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

혜화전문 문과 졸업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하여 청록파 시인이라 부름.

고려대 문과대 교수,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

공의 전아한 고전적 취미는 한국인의 역사적 문화적 인식을 일깨우는 뜻이 있으며,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일제치하의 민족의 굴욕을 극복하려함.

따라서,공의 시에서는 저항적 요소가 보이고 있으며,그러한 정신적 시세와 연결되고있다.

"지조론"을 주장하셨고,주요작품으로는 승무,완화삼,기다림,산상의 노래 등이 있다.

1968년 졸하셨다

 

26세 전 국방부장관 성태

양경공파

1942.11.3.

서울사대부고 졸업, 육사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업.

국방부 정책실장, 2군 사령관

전 국방부 장관

한양 조씨 대종회 고문

 

22세 전 국회의원 종호

양경공파(병참공파)

국민대 정치학과 졸업

4,5,11,12대 국회의원

전 윤보선 대통령 비서실장

민한당 창당 조직위원장

민한당 당무위원,총무국장

현재 대종회 고문

 

 

9. 한양 조씨(漢陽 趙氏) 가산공(嘉山公) 세계도(世系圖)

 

시조(始祖) : 지수(之壽) 첨의중서사공(僉議中書事公)

2 : 린재(麟才)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 총관공(摠管公)

2 : () 총관공(摠管公)

3 : 양기(良琪) 총관공(摠管公) 부원수공(副元帥公)

4 : () 총관공(총관공) 용천부원군(龍川府院君) ()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4 : ()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5 : 인벽(仁璧) 양열공(襄烈公)

6 : () 양절공(良絶公)

7 : () 첨지공(僉知公), () 한풍군(漢豊君)

7 : () 한풍군(漢豊君)

8 : () 대호군공(大護軍公), () 가산공(嘉山公)

8 : () 가산공(嘉山公)

9 : 수창(壽昌)

10 :

11 :

<이하중략>

18 :

19 :

20 :

 

아래 항렬표 참고요망.

 

   

10. 한양 조씨(漢陽 趙氏) 가문(家門)을 빛낸 주요(主要) 인물(人物)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휘()의 아들 양기(良琪) 1281년 부원수가 되어 일본정벌에 참가했고 21세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받았다.

 

양기의 아들 돈() 1356년 쌍성수복 작전때 공을세워 예빈경이 되고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을 대파한 후 판사농시사, 밀직부사에 오르고 1375년 삼중대광으로

용성군에 봉해졌다.

 

()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 중 맏아들 인벽(仁壁)은 동북면 원수로 왜구를 토벌하였고 정화공주와 결혼(結婚)하여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으며 용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또한 판도판서 인재(麟才)의 증손이자 판서 세진(世珍)의 아들인 영무(英茂)는 조선조에 개국3등공신으로 자헌대부에 올라 한산군에 봉해졌으며 1405년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판이병조사를 겸임한후 한산부원군에 진봉되어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조선조에 와서 한양 조씨의 가문을 더욱 빛낸 사림파의 영수 광조(光祖)는 개국공신 온()의 현손으로 14세 때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원강(元綱)을 따라가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중종 때 대사헌에 있으면서 신진사류인 30대의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켜 남곤·심정 등이 주동한 기묘사화에 피화되어 능주에 유배, 배소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중종때 대사간, 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위한(緯韓)

그의 동생으로 시문에 능한 찬한(纘韓)이 유명했다.

장령 중여의 아들 종저(宗著)는 사학, 천문, 산수, 의학에까지 박통하여 문명을 날렸으며, 충정공 인옥(仁沃)의 아들 뇌는 예조참판을 지내고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계유정난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순생(順生)과 그의 아들 명(), 시인 수삼(秀三), 화가로 이름난 중묵(重默) 등이 유명했는데, 수삼(秀三)은 현종때 문장과 시로써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서예와 중국어(中國語)에도 능통(能通)했다.

그의 손자(孫子) 중묵(重默)은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희원 이한철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대표적(代表的)인 화가로 알려졌다.

 

이렇게 조선조에서 세도를 떨친 한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나라와 가문을 위해 공헌했다.

인원(仁元)의 아들인 병옥(炳玉)은 대학생으로 한인회·흥사단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경무부장으로 치안유지에 힘썼다.

그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 후에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 육군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지훈(芝薰)도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의 선구자로 민족적 정서운동에 앞장섰으며, 종신토록 대학교단에서 문학을 피력하였고, 사회활동에 이바지함이 지대하여 후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11. 한양 조씨(漢陽 趙氏) 본관지(本貫地)

  

- 서울 : 한양(漢陽)

한양(漢陽)은 현재(現在)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옛 지명(地名)으로 사람이 정착(定着)해 살기 시작(始作)한 것은 이미 선사시대부터이다. 백제 371(근초고왕 26) 백제가 먼저 이 지역(地域)을 점령하고 한산이라 하였고, 392(고구려 광개토대왕 2) 한때 이 지역(地域)을 점령했고, 475(장수왕 63)에는 북한산주 설치하였다. 신라(新羅)가 이 지역(地域)을 차지한 553(신라 진흥왕 14) 신주(新州)로 개칭하였다가 557(진흥왕 18) 9주 중 한산주(漢山州)에 속했으며, 757(신라 경덕왕 16)에는 한주(漢州)라 개칭하면서 서울 일원을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였다. 940(고려 태조 23)에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고, 1067(문종 21)에는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되었다가 1308(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로 개칭하였다. 1393(태조 3)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듬해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였고 도성을 중심으로 성저 10리에 이르는 5(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 52()의 행정구역을 확정하였다. 1399(정종 1)에는 수도를 개성으로 옮겼다가 6년후인 1405(태종 5)에 한성으로 환도한 일이 있고, 1592(선조 25)에는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파천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환도하기도 하였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896년 한성부로 환원되었고, 1910년에는 경성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5년에 서울시로 개편하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가 비로소 이루어져 지방자치의 시대를 열었다. 선거를 앞두고 성동구에서 광진구, 도봉구에서 강북구,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되어 관할구가 25개로 늘어났다.

 

 

12. 한양 조씨(漢陽 趙氏) 인구수(人口數)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73,408명이 있었다.

-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한양 조씨는 95,206가구 총 307,74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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