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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때 군인에 대하여
moon 조회수 2,547 작성일2017.09.07
오늘 차이나늘 클라스? 에서 황석영 작가님이 나와서 잠깐 5.18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덧붙여 말했어요
누군가 광주가 폭동이라 하는데 진짜 폭동은 군인이라고
여기서 궁금한점이 생겼어요


자 만일 우리가 5.18 당시의 군인이라고 칩시다
우리는 위에서 나오는 명령에 따라야해요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그 상황에서 그당시 명령 불복종은 사형이잖아요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 상황에서 무고한 시민인 것을 안다고 쳐도 과연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 목숨을 내놓을까요?
그 와중에 전우는 두드려 맞아죽고 총맞아죽고 하는데 눈에 뵈는게 있었을까요
그저 그사람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잖아요


자, 다른 관점에서 봅시다 만약 어떤 군인이 그당시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바로 그 군인이 5.18 운동을 주도하는 청년이였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은 5.18운동가들은 당연히 지원받고 위로 받는건 맞지만 그 군인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간직해온 헤아릴 수 없는 상처들은 왜 무시하는거죠
왜 군인들만 미친놈들에다가 폭도 소리를 들으며 지금껏 살아왔어야 하나요?
똑같은 피해잔데.
그런걸 모두 보듬어 줄 줄 아는것이 통합정치 아닌가요
그런데 왜 지금은 그저 희생자들만 기리지 또다른 이면은 보지 못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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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gTent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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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총기에 관련된 자료를 1995년 검찰수사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죠


---- 19일 상황입니다


- 최초의 총기 피탈 시점은 19일 15시 15분경으로, 경계 근무 중이던 31 향토사단  병력의 총기가 탈취되었습니다


o 15시 15분경 카톨릭센터 7층에 있는 기독교방송국 경계 병력인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 9명을 공수부대원으로 오인한 시위대가 이들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카톨릭센터측이 공수부대원이 아니라고 하자, 시위대는 차고에 있던 승용차 4대를 불태우고, 분말소화기를 뿜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7층까지 밀고 올라가 경계병력의 M16 소총 1정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지는 등 방송국을 점거하였으며, 공수부대 병력이 다시 시내에 투입되었다는 말을 듣고 해산하였으나 일부 시위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음.


- 19일 17시경에는 포위된 장갑차에 시위대가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안으로 넣으려 하자 장갑차에 보관중이던 11공수 63대대 경계용 실탄으로 최초 발포가 있었습니다


o 17시경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 제보를 받고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길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의 강력한 포위 공격과 최루탄 연기로 인해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감각을 잃고 보도 턱을 들이받고 정지하자, 시위대 수명이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뚜껑을 열고 장갑차 속으로 던져 넣으려 하였고, 이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M16 소총으로 위협 사격(威脅 射擊)하였는데, 그 와중에서 김영찬(19세·조대부고 3년)이 대퇴부 등에 총상을 입었음.


---- 20일 상황입니다


- 20일 20시경에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의 차량 돌진으로 경찰 4명이 사망하고


o 20시경 시위대 약 3,000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20시 10분경 노동청 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 붙였으며,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1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음.


- 22시경에 계엉군 측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자


o 광주역 앞에서 다섯 갈래의 방사형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쏘며 수천명의 시위대와 대치, 공방을 벌이고 있던 12·15대대는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버스 등 차량 돌진 공격을 게속하자 인도(人道)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하였고,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重傷)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하였음.


o 한편 18시 30분경 3공수여단의 본부요원이 2.5t 차량 2대로 시내 작전 부대의 저녁식사 보급을 위해 전남대에서 500m 가량 떨어진 신안동 굴다리 부근에 이르러 시위대 2,000여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전남대에 잔류하고 있던 16대대 병력이 출동, 최루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나, 20시경 고속도로 쪽에서 차량 1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몰려와 공방전을 벌였으며, 16대대의 강력한 진압으로 시위대들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여 소강상태가 유지되던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1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하였음.
 

- 20일 22시 30분 최초로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 됩니다


o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지급 등 지원을 요청하자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22시 30분경 위협용(威脅用)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하여, 본부대 병력 약 20명으로 지원조를 편성, 여단 정보참모가 먼저 신안동 굴다리에 있던 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여발을 전달하고, 이어 여단 작전참모와 함께 광주역 뒤쪽 도로와 광주시청 앞 사거리를 지나 광주역으로 진출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쳐 경고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차량에 거치한 M60 기관총을 위협 발사하고, 권총과 M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E-8 발사기로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한 후 광주역에 도착하여 12·15대대에 경계용 실탄을 전달하였고, 이어 광주역에 도착한 11대대에도 경계용 실탄을 전달하였음.
 

- 한편 20일 23시경 광주 세무서 방화시, 시위대도 칼빈 17정을 탈취하여 무장을 합니다


o 시위대의 억센 저항에 부딪쳐 11공수여단이 전남도청 앞으로 밀리고,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 집결되어 전남대로 철수함으로써 전남도청과 조선대·전남대를 제외한 광주시 일원은 사실상 군경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고, 시위대는 밤새도록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서·파출소 대부분을 공격하였으며, 경계 병력이 철수한 KBS 방송국이 불타고,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이 시위대에 탈취되었으며, 5월 21일 02시 13분 광주지역의 일반 전화선이 단선 조치(斷線 措置) 되었음.


---- 21일 상황입니다


- 21일 시위대가 무장한 상태에서  전남대 앞에서 차량돌진으로 저지선이 무너지자 발포가 있었습니다


o 전남대에는 5월 21일 이른 시각부터 시위대가 트럭·버스·소방차·장갑차 등을 몰고 와 10시경 정문에는 4만여명, 후문에는 1만여명의 시위대가 3공수여단 병력과 대치하여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으며, 그 무렵 엄청난 시위대가 모인 데다가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였다는 첩보가 전파되자, 13대대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각 경계용 실탄 탄창(30발) 2개씩 지급되었음.
 
o 12시경 시위대의 전격적인 차량 돌진 공격으로 전남대 정문이 300m 가량 시위대에 의해 돌파당하자, 3공수여단은 기동 예비 1개 대대로 시위대 전열(前列)을 공격하고, 2개 대대는 정문지역을 확보한 후 시위대를 밀어붙여 광주역 부근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정도 퇴각시키는 등 14시경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시위대가 장갑차·트럭 등 차량을 돌진시키자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차량을 향해 총격을 가하였고, 공수부대원들은 도망가는 시위대를 굴다리 부근 민가(民家)에까지 쫓아가 최루탄을 발포하거나 진압봉 등으로 강하게 가격하고, 시위대를 체포하여 전남대로 연행하였으며 시위대의 장갑차·5t 구난차·경찰가스차·트럭 등 차량 13대를 노획하여 4대는 파기하고, 나머지는 광주 교도소로 가져가 도로를 차단하는 데 사용하였음.


- 그리고 21일 도청 앞에서도 무장한 시위대의 장갑차 돌진으로 사상자가 생기자  발포가 있었어요


o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칼빈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고, 장갑차를 비롯한 트럭, 버스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시위대 전면(前面)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낀 11공수여단 61대대장은 여단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대책 강구를 건의하였으나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도청을 사수(死守)하라는 지시만 반복하였고, 11시경 63대대장은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대대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 지급하고,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음.
 
o 12시경에는 공수부대가 장갑차 2대와 함께 횡대(橫隊)로 도로에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을 저지하고,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100여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압박하여, 서로 10m 정도까지 접근,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되던 중, 13시경에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상무관·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하였고, 장갑차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 발포(空中 發砲)가 되고,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宣撫活動)의 일환으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를 방송하며 해산을 호소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뒤쪽에 있던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하여 버스 1대는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도청 좌측 건물과 충돌하여 정지하고, 장갑차와 다른 차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 나갔음

황석영 작가님이 이런 건 절대 얘기 안 하시겠죠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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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흐음... 생각해볼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안타깝다는 표현을 먼저 하고 갈게요

얼마전에 5.18관련 페이지와 주변 인들에게 들었던 중복되는 이야기를 조금 할게요

얼마전에 지인 중 한명이 자기 회사 상사인데 5.18때 군인으로 있었던 사람이 였다고 해요

같이 일하다보니 술도 먹고 그런다는데

한번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 사람 죽여 봤냐?", "너 여고생 가슴을 칼로 찢어 봤냐?"

물론 제가 본 글과 들은 말들이 물론 과장되거나 누군가의 조작 또는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의 위치인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역사적인 것으로 가면 2차세계 대전을 들어볼게요

과연 독일 사람들 모두가 하일 히틀러 하면서 유대인 죽이는 것을 찬성했을까요?

그리고 그 죽이는 과정에서 같은 인간이라는 감정이나 윤리적 도덕적 자괴감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질문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역사왜곡을하는 일본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이 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왜 세계인들이 독일인들의 반성하는 자세와 반성하는 태도에 

칭찬을 보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이나는 클라스 초반부에서 이야기로 나오지만 우리의 잘못도 있습니다.

바로 베트남이죠 우리도 그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이 말이 나오죠 '월남전을 다녀온 사람들은 복귀해서 정상생활이 힘들었따던데요'

물론 힘들었겠죠. 황석영 작가님도 힘들었다고 말하구요 하지만 놓치면 안되는 것은

개인의 감정이 아닌 개인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확석영 작가님도 우리도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논점을 흐리게 될 것 같아 죄송하지만 최근에 학생 폭력 사건으로 이야기를 해볼게요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자기가 되려 피해자이다. 자기를 기분나쁘게 했다. 등으로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청소년 보호법에 맞추어 경량 처벌하는 것에 대하여

맞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폭력을 한사람과 폭력을 당한 사람 모두가 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폭력을 한사람은 잊을 수 있어도

폭력을 당한사람은 잊을 수 없는게 정설입니다.

지금도 5.18의 일들을 보고도 전두환은 자기는 아무 잘못없다는 듯이 

뉴스에 나와서 당당하게 살아가는거 보면 당황스럽기까지 하죠

펙트에 대한 자료들은 다른 분들이 많이 올려주셔서 생각해볼 만한 거리 위주로 적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택시기사나 이 차이나는 클라스를 봐서 그런지 다른 관점이라 말하시면서 적은 이말을 보면서

이 감정을 느낄 때와 같은 감정이 들었습니다.

일본인들도 일본 전쟁때 힘들었고 우리나라 위안부 들은 단순하게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로 온것이다 라는 기사를 읽었을 때 화가 나던 감정과 비슷한 것 같네요

저 처럼 뇌피셜처럼 적는 사람도 제 인생이 힘들다고 하는데

이세상에 괴롭고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질문자 님이 살고 싶은 세상 그리고 질문자님의 자식이 살아 가길 바라는 세상이

가해자를 생각해주는 세상이 좋으신지 피해자를 언급해주는 세상이 좋은지는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해자에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독일 사례를 생각해주시구요 

야밤에 두서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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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lk****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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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이 동정받는것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맞서 싸윘기 때문에 그들이 동정받는것이고 진압군은 이에순응하였고 그들이 행한 행위는 처벌받지않고 넘어갔습니다

진압군측에서 동정받아될 인물들은 계엄사의 계획에 반대하였거나 후대 진상조사를 할시 그당시 를 증언해준 진압군측 전역 군인들이지 진압군전체에게 해당되는사안이 아닙니다

5.18 투입당시 부상과 전사한 군경들은 상이군경으로써국가유공자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이 제도적혜택에서 소외된적 없었고 그들이 부당한대우를받은적없습니다

대법원판례96도3376에서 대법원은 진압군의 진압행위를 난폭하였다고 규정하였고 그행위의 실행자들이 그책임에서 면제받을수있을까요? 전아니라고봅니다

피해자단체에대해 사과를하든 아니면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임하든하여 속죄하는 행위가 있어야 동정받을수있다고 생각합니다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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