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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양녕대군에 대해서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9,484 작성일2011.11.04

 양녕대군 부인이 둘이었나요?

 첫 부인이 아이를 낳지못해 내쫒고 새로 부인을 맞이했다고 들엇는데.

 

양녕대군이 아니면 누구죠?? 조선초기 왕족인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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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n****
물신
한국사 26위, 사회, 도덕 84위, 전통 예절, 의식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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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소생의 아들로,

많은 첩을 두었으나 부인은 1명뿐이었습니다.

 

양녕대군은 1394년 원경왕후와 민씨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위로 세 아들이 모두 조졸했기때문에,

태종 2년인 1402년 태종의 적장자로서 원자에 책봉되었고,

1404년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후 명나라 공주와의 혼담이 논의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고,

1407년 삼간택을 통해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혼인하였으니 당시 양녕대군의 나이는 14세였습니다. 세자빈 김씨는 숙빈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양녕대군과 평생해로하였습니다.

1418년 잦은 폐행으로 결국 태종의버림을 받고 폐세자 되어 세자는 양녕대군에 봉해지고, 숙빈은 왕자군부인으로 강봉되었으며,

한성에서 추방되어 경기도 광주, 이천등에서 살다가 세종 19년에야 한성으로 돌아와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은 69세에 사망했으며,

부인 광산김씨와 함께 합장되었습니다.

 

슬하에 3남 4녀를 낳았으며, 첩소생으로 7남 11녀가 있습니다.

 

 

 

양녕대군 + 삼한국대부인광산김씨  

 

적 1남 순성군 이개 시호 희안

적 2남 함양군 이포 시호 이안

적 3남 서산군 이혜 (원래 서산군에 봉군되었으나, 술을 먹고 사람을 죽인일로 '황계령'으로 강등되었다 '서산군'으로 승직)

적1녀 전의현주 : 지돈녕 이자의 처

적2녀 ?현주 : 중추부사 이번의 처

적3녀 영평현주 : 주부 김철구의 처

적4녀 ?현주 : 군수 박수종의 처

 

양녕대군 + 첩

 

서1남 고정부정 이겸

서2남 장평부정 이흔

서3남 계천도정 이성

서4남 봉산부정 이순

서5남 안창정 이심

서6남 밀(=돌산)부정 이광석 (선원계보에는 밀(密)부정으로 쓰여 있으나, 실록에는 파자하여 돌산(突山)부정으로 기록 )

서7남 금지부정 이광근

서1녀 상장 이종경의 처

서2녀 부령 김암의 처

서3녀 부사 권치중의 처

서4녀 현감 김승간의 처

서5녀 사직 김오의 처

서6녀 현령 김원의 처

서7녀 좌리공신 영의정 청성부원군 한치형의 초취(첫번째부인)

서8녀 별좌 권덕영의 처

서9녀 창승 ?석번의 처

서10녀 봉사 김의의 처

서11녀 정남 임중의 처

 

부인이 이를 낳지 못해 모후에 의해 강제이혼당한 왕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입니다.

 

첫번째 부인은 김수말의 딸인 광산김씨였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여 모후인 안순왕후의 눈밖에 나게 되었고,

안순왕후의 압력에 의해 성종이 이들을 강제이혼시켰습니다.

당시 이혼의 명목은 김씨가 풍병이 있고 제대로 걷지 못한다였고,

 

원하지 않는 이혼이후 제안대군은 다시 박중선의 딸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씨또한 아이를 낳지 못했고,

김씨에 대한 애틋한 정이 있던 제안대군이 급기야 광산김씨와 살림을 차리고, 박씨의 간통설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왕실에서 다시 논의하여 박씨를 내치고 다시 김씨와의 재혼을 허락하였습니다.

불행한 두 여자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제안대군은 적자를 얻지 못했으며,

마지막까지 해로한 부인은 광산김씨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 이구또한 아이를 낳지못한 첫부인과 이혼했습니다.

개국공신인 의산군 남휘의 종실인 남씨와 혼인하였으나 남씨가  12살이 되도록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말이 어눌하며 침을 흘리는 등 지체장애가 있어 세종대왕이 이들을 이혼시키고

최승녕의 딸과 재혼하였습니다.

 

 

위의 답변자님이 쓰신 내용은

양녕대군 이제와 수성부부인 김씨의 장남인 순성군 이개에 관한 내용입니다.

순성군은 신씨와 이혼한 것이 아니라, 사별한 후 포은 정몽주의 손녀인정씨와 재혼하였고,

죽은 뒤 정씨와 나란히 묻혔습니다. 신씨의 무덤또한 같은 언덕에 있습니다.

정씨의 형제인 정보가 사육신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에

정씨또한 연좌되어 왕실족보에 처가 아닌 첩으로 기록되었다가, 고종대에 다시 처로 인정받았습니다.

201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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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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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양녕대군은 태종대왕의 첫째 아들이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여 양녕대군이라 부른다

1404년(태종 4) 1월 6일 11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07년(태종 7) 14세로 광산김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숙빈(淑嬪)으로 봉하였으며10남 15녀를 두었다. 

1418년(태종 18) 25세때 6월 3일 담장을 넘어서 성밖으로 탈출한 사건으로 세자를 폐하여 양녕대군으로,

 숙빈 김씨를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으로강봉하였다. 

 

조선시대 왕족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기 위하여 자식이 없거나 또는 자식이 있어도

후궁으로 하여금 자식을 두는것이 왕족의 관례였으며,

 첫번째 부인은 공식적인 왕후의 자리를 유지하였으며 후궁은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왕에 오를경우에 왕후에 준하는 호칭을부여하였다

 

양녕대군의 아버지 태종대왕은 이직(李稷) 과 황희(黃喜)정승 같은 강직한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명한 3째 아들 세종을 왕위에 계승하였다

 

 

201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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