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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양녕대군이 미친 걸까?
zzag**** 조회수 28,867 작성일2005.08.14

양녕대군이 정말 미친척을 한건지 아니면 정말 미친건지 궁금합니다.

지식인에 보면 정말 미쳤다고도 나오고 미친척을 했다고 나옵니다.

그 예를 보여주겠습니다.

 

미쳤다고 생각한 지식인의 답변

 

용의 눈물이라는 KBS드라마에서는 양녕대군이 아버지인 태종이 왕이 되기위해 동생들을 죽인 것이라든지 왕에 대한 부담감 등 여러가지 이유로 왕위를 포기하기 위해 미친짓이라든지 망나니 짓을 하고 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녕대군은 남의 부인들은 추행한다거나 강간한 사례가 엄청나게 많으며, 특히 그는 상왕인 정종의 여자와도 관계할 정도로 방종했으나 충녕대군인 세종시대이 형인 양녕대군에 대한 상소에 대해 거의 봐주다시피 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종이 죽고 난뒤에도 상당히 오래살았으며, 세종의 아들인 문종, 그리고 문종이 일찍죽자 그 아들인 단종이 즉위한 후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세조가 쿠테타로 즉위했을때 세조가 단종의 처리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당시 왕족들을 이끌고 세조에게 달려가 단종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던 인물이며, 왕세자 당시에는 자신의 거듭된 비행에 궁지에 몰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외삼촌들을 죽게 한 인물입니다...

 

 

미친척했다고 생각한 지식인의 답변

 

 

양녕대군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양녕대군의 연기는 태조 이성계부터 시작됩니다.

 

주제에서는 벗어나지만 태조는 아들 이방원의 쿠테타를 겪습니다.

 

실록에는 태조가 병석에 있었을때 그랬다고 하지만 당시 태조실록을 편찬한 하륜은 이방원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죠.

 

이렇게 태조 이셩계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죽을때까지 발 한번 마음놓고 펴고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양녕은 어릴때 아버지의 이런 사실을 알게되지요.

 

지극히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이며 당당했던 양녕은 이미 태종에게 인정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죠. 

 

유학와 제왕의 길을 배우던 양녕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양녕은 권력이 위험하다는 것과 함께 고민과 방황을 합니다.

 

당시 13살이던 양녕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10살인 충녕에게 세자자리를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죠.

 

더군다나 미쳤다는 것은...

 

만약 양녕이 미쳤다면 당시 명재상이었던 황희가 필사적으로 반대했을까요?

 

겨우 미친자에 대한 연민이었을까요?

 

결국 황희는 그로인해 태종이 죽을때까지 귀양살이까지 했습니다.

 

이 기록만 봐도 양녕은 훌륭한 자질을 갖춘 후계자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화끈한 답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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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 답변
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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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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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화끈한 답변입니다.

 

양녕대군은 미친것일까, 미친척한것일까.?

물론 사람마다 역사관은 다르지만, 제 소견으로 봤을땐

양녕대군은 미친척 했다고 봅니다.

 

양녕대군(1394~1462)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첫번째 아들로,

건국초기 부왕태종의 많은관심과 기대를 한몸에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왕이었던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형제들을죽이고(왕자의 난)

외척이 정권을 잡는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원경왕후 민씨의 형제들을 모두

죽입니다(민무구의 옥, 원경왕후의 오빠와 남동생인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가

태종에 의해 살해된다)

 

이때부터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에게 엄청난 실망을 하고,

왕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노골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녕이 태종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것은 아니었고,

왕으로써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유분방한 자기만의 삶을 살고싶은마음때문에

왕의 자리를 포기한것이라 봅니다

 

평복을 입고 기생집에드나들기, 서당선생앞에서 개흉내를 내며 '멍멍'하고 짓기,

사대부의 부녀자희롱등 세자로써의 자질이 떨어졌고, 충녕대군(세종)에게 믿음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세자로써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 이어지자 유정현이 상소를 올려

'폐세자'할것을 처음으로 건의하지만, 이에 앞서 황희가

 

"충녕의 학문이 뛰어나긴 하지만 양녕은 뛰어난 무예와 학문실력까지

 두루갖춘 분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맞는말이라고 보면됩니다. 양녕은 모든것에 뛰어났지만

당시 조선사회가 유교사회였음을 감안한다면, 세자의 이런행동은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희의 의견에

동의하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고, 태종은 황희를 유배시킵니다.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세자로 결정하였습니다.

 

양녕이 폐세자되자 왕의자리는 효녕대군(태종의차남)으로 돌아올거라 생각하고

효녕대군은 열심히 공부했지만 양녕의 충고를 듣고 출가합니다

 

양녕대군은 비록 폐세자가 되었지만, 동생들에 대한 애정만은 남아, 효녕,충녕을

형으로써 사랑하고 아끼고 많은충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태종사후에도 세종대왕은 형님인 양녕대군을 깍듯이 모시고 왕실 웃어른으로써의

예를 갖추며 좋은대접을 했지만, 양녕대군은 이런 세종대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다.

 

세종은 손자였던 단종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유언에서까지 단종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만큼 단종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지만

수양대군(세조)이 왕위찬탈 후 단종을 죽일것인가 말것인가 고민할때,

제일먼저 나서서 단종을 죽이라 상소를 올리고  충고했습니다

이는, 단종이 계속 왕으로 있다가는 협유집권(어린왕을이용해 정권을 착취하는것)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것. 양녕의 아버지 태종이 이런것을 미리 눈치채어

왕권강화를 시행했고 그래서 나라가 융성해졌음을 볼때 양녕역시 이점을 조카 세조에게

충고한것이라 봅니다

 

이렇게 알다가도 모를 양녕대군의 행동은,  아버지 태종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과, 왕으로써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끝나버린 한 사람의 열등의식이

불러온 미친척이라고 생각합니다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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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제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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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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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은 미친것이 아니라 미친척 한것이 맞는겁니다.

오히려 머리가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습니다. 그의 활솜씨와 글은 당대에 알아주는 그런 인물입니다.그의 활솜씨는 날라가는 기러기를 맞추고 시에 능하고 글을잘써 서울 남대문의 편액 숭례문은 그의 필적이라고 합니다.그러나 다만 양녕대군은 어찌보면 성격은 아주 자유분방하여 다음왕위에 오를 세자로써의 엄격한 교육과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던것 일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선조가 세운 조선이란 국가를 버렸다는것은 아닙니다. 양녕은 어려서부터 왕권강화를 위한 태종의 잔악함을 잘알고 있는사람입니다.그러나 그가 그런 잔악함을 반대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포함된 이씨들의 왕조를 위해 당연한걸로 보았을것 입니다.그누구 보다도 왕조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 사람으로 보입니다.그래서 자기동생 충녕이 자기보다 왕조를 잘이끌것으로 보아 그에게 세자자리를 물려주고 자기는 자기에게 걸맞는 방탕한세월을 보내며 철저히 자기인생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씨왕조를 위하는 양녕대군의 시각으로 보니 왕조의 안녕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세종사후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죽고 어린단종이 즉위하고 보니 왕족들보다는 권신들즉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좌의정 김종서같은 신하들이 종친이 권력을 잡으면 위험하다는 논리로 왕족들을 멀리하고 단종이 어린것을 틈타 정국을 농단하는것으로 보았던것 입니다.그래서 강력한 이씨왕조의 왕권 강화를위해 분연히 일어난 세조의 집권을 도와야 했던것 입니다.역시 세조또한 양녕대군과 같은생각으로 혹은 자기자신의 욕심때문에 아니면 두가지가 혼합된 이유로 어린 조카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게 됩니다. 세조는 왕위에 올라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여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유향소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녕대군이 세조를 위해 단종을 제거토록 종용한 이유로 보입니다.양녕대군은 미친것이 아니였습니다.

2005.08.15.

  • 출처

    본인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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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은 미친척 한것이 분명합니다..

양녕대군은 이미 뛰어난 활솜씨와 문장 실력, 글씨로 태종에게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위로 형이 세명있고(어릴때 병으로 죽음)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이렇게 세 대군을 동생으로 두었고..몇명인지 모르지만 누이동생도 있느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녕대군은 어릴때 병으로 돌아가셔서?? 잘 아는 사람이 얼마 없지만...

어쨌든..아우인 충녕대군에게 임금의 자리가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미친척을 한 것이고,

그것을 알고있던,,충녕대군은 형 양녕대군을 더욱  공경하여 임금이 된 후에도

늘 형님 양녕대군을 대궐로 불러모셔 정성껏 대접했다고 합니다..

 

200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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