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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황보

[ 皇甫 ]

요약 성씨.

본관은 영천(永川)과 황주(黃州)가 전해지나, 황주는 영천의 분파로서 현재는 영천황보씨 단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 황보 능장(能長:善長)은 고려의 태조 때 금강장군(金剛將軍)으로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영천을 관향으로 삼았다. 영천황보씨는 고려 및 조선 전기에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복성(複姓)으로서는 유일하게 영의정을 배출한 문벌이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명종 때의 명유(名儒)로서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인 항(抗), 의종 때의 명신 탁(倬:起居注), 정종 때의 영(穎:平章事), 고종 때의 기(琦:平章事) 등이 있는데, 특히 유의(兪義)와 임(琳)이 유명하였다. 유의는 훈신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목종 12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사통한 권신 김치양(金致陽)이 그의 사생아를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자 당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유폐되어 있던 대량원군 순(詢:현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훗날 문하평장사를 지냈다.

임은 유의의 5대손으로,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무찔러 1등공신이 되었고, 후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가 되어 왜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개국 후에 중추원지사에 올랐다. 임의 아들 인(仁)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 ·함길도체찰사가 되어 10여 년 동안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으며, 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그는 김종서 ·정분(鄭苯)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계유정난(1453) 때 김종서 ·정분과 함께 수양대군(세조)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두 아들과 손자 한 명도 함께 죽음을 당했는데, 이것이 영천황보씨 일문에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4,689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06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2,101가구로 274성 중 제109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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