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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서울중앙시장

요약 서울중앙시장은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로 서울 3대 시장으로 꼽혔고, 1960년대까지 서울 시민이 소비하는 양곡의 70% 정도를 거래하던 전통시장이다. 현재는 닭과 돼지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다양한 품목을 거래하고 있다.
분류 > 지역 서울 > 중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85길 22
시장 유형 상설시장
형성 시기 1962년(개설)
시장 현황 점포 수 342곳, 면적 16,919m2
특산물 부산물(닭, 돼지)
먹을거리 보리밥, 떡볶이
같은 지역 다른 시장 평화시장, 동대문종합시장, 서울풍물시장
주변 볼거리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쇼핑타운, 청계천
전화번호 서울중앙시장 상인회 02-2232-9559

1. 서울중앙시장 개요

서울중앙시장이 있는 황학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사대문, 특히 동대문의 바깥에 위치했다. 주변에 있는 뚝섬나루에서는 땔감과 목재를 많이 취급했고, 왕십리 일대는 채소를 가꾸는 밭이 많았다. 황학동 일대는 당시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한양의 시민들이 소비하는 땔감이나 채소 등을 가까운 나루인 뚝섬과 주변의 왕십리에서 집산해서 공급하는 형태로 시장이 발달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신당동공설시장이 있었고, 1945년 해방으로 일본이 물러나자 1946년에 성동시장이 들어섰다. 당시 성동시장은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보다 더 많은 점포를 갖춘,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곡물시장으로 번영해 한때 서울 시민들이 소비하는 양곡의 80%를 거래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정부의 쌀값 안정화 정책에 따른 정부미 방출로 양곡시장이 약화되면서 한때는 나전칠기가 시장을 대표하는 상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새로 개통된 마장로 주변으로 주방기구·가구 점포가 늘어나고 외식업의 폭발적 성장으로 주방기구·가구를 취급하는 점포가 늘어나면서 중앙시장은 양곡시장이 아닌 주방기구·가구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서울중앙시장은 닭과 돼지의 부산물을 중심으로 여러 물품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지하에 예술가들의 공간인 신당창작아케이드가 들어서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서울중앙시장 입구

서울중앙시장 입구

서울중앙시장의 내부 모습

서울중앙시장의 내부 모습

2. 서울중앙시장의 어원

서울중앙시장은 ‘서울’이라는 지역 이름과 중심이라는 의미의 ‘중앙’이 합쳐진 이름이다. 본래는 성 동쪽, 즉 동대문 바깥에 있다는 뜻으로 지어진 성동구에 위치해 있어 성동시장이었다. 이후 성동중앙시장이라 불렸는데 1975년 시장이 있는 자리가 행정구역상 성동구에서 중구로 편입된 이후 이름도 성동중앙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중앙시장으로 바뀌었다. 한편 20세기 이후 실제적으로 서울에서 중심 시장의 역할을 해 온 것은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었다.

3. 지역의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서울중앙시장이 위치하고 있는 서울 중구 황학동은 서울의 4대 성문 가운데 하나인 동대문(흥인지문)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상황 때문에 예부터 동쪽에 있는, 멀리로는 강원도로부터 가깝게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물자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 또한 서울에서 매일 소비되는 소비재들, 이를테면 땔감이나 채소 등을 생산해 공급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조선시대에 강원도나 경기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물자의 수송은 주로 물길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 지역의 나루는 뚝섬이었다. 뚝섬나루는 독백이라고도 불렸는데, 주로 목재와 땔감이 거래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뚝섬나루에 목재나 땔감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점포만 40호가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당시 뚝섬나루는 멀리 강원도 양구에서 띄워 보낸 땔감용 통나무가 쌓이는 곳이었고, 겨울에 기온이 떨어져 한강이 얼면 얼음을 채취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뚝섬의 내륙인 왕십리 주위는 토질이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배추나 무와 같은 채소 농사에 적합해 서울이 대도시로 탈바꿈해서 주택가가 들어서기 전에는 채소를 재배하는 넓은 밭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생산된 채소들은 대부분 동대문을 통해서 서울로 보내져 소비되었다.

따라서 뚝섬과 왕십리에 모여드는 목재와 땔감, 채소, 얼음 등을 비롯한 많은 물자들을 체계적으로 집산할 필요가 있었다.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동대문 바깥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황학동 주변에 큰 시장이 생긴 것은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1914년에 시장규칙을 규정하고, 쌀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파는 공설시장을 곳곳에 개설했다. 실제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쌀값이 치솟아 서민들의 생활이 곤란했을 때 쌀과 생활용품을 염가로 판매해서 효과를 보기도 했다. 신당동에 공설시장이 생긴 것은 1941년 6월의 일이었다.

시장의 오래된 방앗간

시장의 오래된 방앗간

일제강점기 때 동대문 바깥에 또 하나의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땔감과 채소를 공급하는 이른바 시탄소채시장이었다. 시탄소채시장은 동대문 바깥에는 1923년 창신동에 개설되어 종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주거지에 땔감과 채소를 공급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이 물러난 뒤 이곳에 성동시장이 개설되었다. 1946년 5월 1일에 개설된 성동시장은 성동구 신당동 175번지에 위치했고, 점포 수가 263개에 이르는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당시 동대문 시장의 점포 수가 188개, 남대문시장의 점포 수가 215개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크기였다. 그야말로 서울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전파상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전파상

이런 사정은 1949년에 점포 수가 309개로 늘어나면서 계속 유지되었다. 1949년 말 동대문시장은 209개, 남대문시장은 250개의 점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성동시장의 이런 성장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엄청난 피해를 남긴 한국전쟁은 황학동 일대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한국전쟁 당시 기존에 황학동과 왕십리 등에 있던 주택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공병대는 오늘날 중앙시장이 있는 자리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다가구주택인 이른바 재건 주택을 건설했다.

한편 집을 잃고 떠도는 수많은 피란민들과 월남자들은 청계천 주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주거 공간을 확보한 피란민들은 고물상을 하거나 노점을 하며 생계를 도모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근의 황학동의 주거지로 유입되었다. 훗날 황학동에 벼룩시장이 들어선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성동시장은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상인들은 가건물을 지어 장을 개설했고, 시장의 위치도 신당동 140-28번지로 이전했다. 이때 시장은 점포 수가 223개로 1949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남대문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성동시장은 1962년에 성동중앙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앙시장의 1950년대 주요 거래 품목은 쌀이었다. 1953년 서울 시민이 소비하는 양곡의 약 70% 이상을 중앙시장에서 거래했을 정도로 엄청났다. 지방에서 집산된 쌀을 비롯한 콩, 보리, 잡곡 등의 양곡이 철도를 이용해 용산역에서 집하하고, 용달차를 이용해 중앙시장으로 옮겼다가 서울과 수도권으로 배송하는 구조였다.

이 무렵 중앙시장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과 함께 서울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혔다. 1950년대에는 중앙시장에서 양곡을 다루는 점포가 800곳이나 되었다.

이처럼 양곡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중앙시장은 1970년대까지 경기도 북부 지역과 동부 지역의 농산물뿐만 아니라 전국의 양곡상과 연계되어 있었고, 고추, 참기름, 채소 등의 거래도 활발했다.

그러나 1965년 정부에서 쌀값을 비롯해 서울 시민이 먹는 쌀의 수요와 공급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가 정부미를 방출하면서 양곡시장으로서의 중앙시장은 크게 위축되었다. 1960년대 후반 중앙시장에는 양곡을 취급하는 점포가 120곳으로 크게 줄어 있었다.

양곡 판매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옛 모습이 남아있는 거리

양곡 판매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옛 모습이 남아있는 거리

여기에 성동중앙시장에 있던 양곡시장이 1977년 강남구 서초동 트럭터미널에 있는 중앙양곡도매시장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중앙시장의 양곡시장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교통의 변화와 유통 다변화로 인해 양곡시장으로서의 전통마저 잃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85곳, 1990년대에는 50곳, 2010년에는 30곳으로 양곡을 다루는 점포가 계속 줄어들었다.

오래된 곡물 가게

오래된 곡물 가게

양곡을 대체한 것은 나전칠기였다. 1975년 시장이 위치한 신당동이 성동구에서 중구로 편입되었다. 이 무렵 중앙시장에는 나전칠기를 다루는 점포가 200곳이나 되었다. 그것이 1980년대에는 325곳으로 정점을 찍었고, 1990년대까지 250곳을 유지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그 수가 급속도로 줄어서 2010년 기준 28곳으로 감소했다.

양곡과 나전칠기의 부침과 달리 주방기구를 다루는 점포는 1980년대 59곳에서 2016년 현재 500여 곳으로 증가했고, 가구시장 또한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주위 교통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시대를 따라 중앙시장의 변천을 살펴보면 1970년대에는 여전히 쌀을 중심한 양곡이 주요 거래 품목이었고 배추나 무와 같은 채소가 함께 거래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면서 시장 북쪽으로 마장로가 개통되고, 그 도로를 따라서 주방기구와 가구 및 인테리어 점포가 하나둘 생겨났다. 곡물시장으로 유명했던 중앙시장에 위상의 변화가 생긴 것은 이 무렵이었다. 또한 성동기계공고 너머에 있는 삼일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중고 용품과 골동품을 파는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노점이 증가했다.

1990년대에 들면서 중앙시장의 버팀목이었던 양곡 및 채소의 판매가 현저하게 힘을 잃었고, 마장로 건너편에 형성되었던 주방기구와 가구 판매 점포가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중앙시장은 양곡시장이 아니라 가구거리로 널리 알려졌다. 실제로 과거 양곡을 다루던 점포의 대다수는 주방기구와 인테리어 점포로 대체되었다.

한편 1970년대에 형성되었던 황학동 만물시장은 1980년대의 호황기를 지나 이 무렵이 되면 큰 인기를 누리는 시장으로 확대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중앙시장은 주방기구·가구 거리의 성공과 반비례해서 악화일로를 걸었다. 중요한 상권이던 삼일시민아파트 및 주변 지역의 재개발로 인해 주변 인구가 감소했고, 대형마트의 상권 잠식으로 장세가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시장은 2004년에 비가림막, 전기공사, 소방공사, 도로포장, 간판 정비 등을 추진해 시설을 현대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 현대화 사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와 함께 대형마트가 입주하면서 중앙시장의 상권은 점점 약화되었다. 여기에 2003년부터 황학동 주방기구·가구축제가 개최되면서 중앙시장은 전통적인 양곡과 채소 시장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비가림막을 하고 간판을 정비하는 등 시설을 현대화한 시장 내부

비가림막을 하고 간판을 정비하는 등 시설을 현대화한 시장 내부

* 주방기구·가구 거리
한편 중앙시장과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주방기구·가구 거리는 업계 추산으로 전국 주방과 관련된 물품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특화되어 있다. 이들 점포들은 대부분 공장을 함께 운영하고, 별도의 유통망을 갖춘 대형 업체도 많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냉장고, 냉동고, 저장고, 쇼케이스, 가스레인지, 닥트, 환풍기, 저울, 싱크대, 테이블과 의자 등이며 음식점과 호텔, 학교, 병원, 구내식당 등에 판매하고 있다.

주방기구·가구 거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87년 마장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중앙시장 뒷골목은 리어카와 포장마차를 제작하던 영세한 가내수공업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장로의 개통과 다음해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그릇과 주방기구를 만드는 방향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마장로의 도로에 하나둘씩 점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면서 한국 사회에서 외식 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주방 용품의 수요가 급증했고, 주방기구·가구 거리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주방기구·가구를 다루는 점포는 도로변을 넘어 중앙시장으로 파고들었고, 과거 양곡을 파는 점포가 있던 곳을 대부분 잠식했다. 여기에 2003년부터 서울 중구청의 지원과 함께 주방기구·가구축제가 열리면서 주방기구·가구가 특화된 지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4년에는 주방기구·가구 거리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중고 가구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

중고 가구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

각종 주방기기와 용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

각종 주방기기와 용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

* 신당지하상가와 신당창작아케이드
신당지하상가는 서울시에서 도심의 교통 체증 해소와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1971년 9월에 중앙시장 지하에 왕십리 중앙시장 지하상가라는 이름으로 조성한 상가이다. 지하 7m에 길이 391m에 달하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지하상가였다.

신당지하상가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99개의 점포가 개설되어 한복과 이불, 수입식료품, 양장점 등 주로 포목점 위주로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좋지 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지하철 2호선의 개통으로 사람들의 동선에 변화가 생겼다. 신당역과 연결되지 않은 신당지하상가는 외면당했고, 여기에 한복 소비의 급감,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소비 패턴이 변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해 2000년대까지 계속 침체가 이어졌다.

서울시가 임대료를 인하하고 위탁 경영자를 찾았지만 나타나지 않자 2009년에는 신당지하상가를 리모델링해서 매장 면적을 넓히고 대형화해서 상권의 변화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009년에 신당지하상가는 52개의 점포가 주인을 잃고 비어 있었다.

이에 서울시는 예술 공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빈 점포를 손질해서 공동 작업용 가마와 같은 설비를 제공하고, 도자, 섬유, 금속, 유리, 종이, 칠, 판화, 사진, 영상 등을 다루는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서로 교류하며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형시켰다.

이를 통해 창작 공방이 40곳, 전시실 1곳, 공동 작업장 1곳이 생겨났다. 이름도 신당지하상가에서 신당창작아케이드로 바꾸었다.

신당창작아케이드는 기존의 신당지하상가의 점포들과 함께 ‘시장, 예술을 만나다’와 같은 전시나 ‘공공미술 프로젝트-시장 골목 살리기’ 등을 진행하며 새로운 공간으로 변형시키고, 시민 체험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예술과 시장을 잇는 기획을 하고 있다. 또한 중앙시장, 주방기구·가구 거리와 연계해서 문화 관광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시장과 예술의 만남으로 구성된 신당창작아케이드

시장과 예술의 만남으로 구성된 신당창작아케이드

5. 서울중앙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서울중앙시장은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2호선 신당역이 가장 가깝고, 6호선 신당역과도 연결되어 있다. 2호선 신당역에서 나오면 북쪽 방향으로 바로 시장이 보이고, 시장의 지하에는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위치하고 있다. 시장을 나와 왼쪽 길로 가다가 성동공업고등학교에 못미처 북쪽으로 보면 황학동 만물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서울중앙시장에서는 양곡, 가구, 포목, 해물, 청과, 채소, 닭과 돼지의 부산물, 주방기구·가구를 주로 판매하고 있다. 특히 닭과 돼지의 부산물은 중앙시장의 특산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닭과 돼지의 부산물로 만든 음식도 많이 팔리고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서울중앙시장은 북쪽의 종로구 숭인동, 남쪽으로는 중구 신당5동, 서쪽으로는 중구 흥인동, 동쪽으로 성동구 왕십리와 인접해 있다. 서울 사대문의 하나로 동쪽에 있는 동대문(흥인지문)과는 직선거리로 약 800m 떨어져 있다.

교통편이 많아 시장 이용이 편리하다. 지하철 2호선과 6호선 신당역과 인접해 있고, 2, 4,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10분 이내, 1, 4호선 동대문역과 6호선 동묘역과는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인접한 도로로 지나는 버스도 많아서 접근성이 뛰어나다.

또한 도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장 주변에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이 많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황학동 주방기구·가구 거리, 신당동 떡볶이거리 등이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관광특구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두산타워와 밀리오레, 디자이너클럽 등을 비롯한 많은 쇼핑타운도 찾는 이가 많다. 가까운 청계천 역시 시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7. 먹을거리

서울중앙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찾는다면 중앙시장 뒷길에서 영미로까지 자리하고 있는 곱창골목과 보리밥과 쌈밥이 주요 메뉴인 보리밥골목을 들 수 있다.

중앙시장의 곱창은 왕십리 곱창이라고도 불리며, 종로5가의 동대문 곱창과 구별된다. 이곳의 곱창골목이 유명한 이유는 중앙시장이 닭과 돼지의 부산물을 많이 팔고 있어 신선한 재료를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보리밥골목은 1990년대부터 건강을 위해 보리밥과 쌈밥이 유행하게 되자 시장에 하나둘 보리밥과 쌈밥을 파는 점포가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골목이 형성되었다.

양곡과 채소 중심 시장이던 전통을 살려 푸짐한 양과 저렴한 가격으로 보리밥을 내놓으면서 입소문을 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중앙시장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보리밥골목에는 보리밥과 쌈밥 외에도 칼국수, 수제비 등 시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들을 팔고 있다.

시장에서 파는 전과 각종 먹을거리

시장에서 파는 전과 각종 먹을거리

신당동 하면 떠오르는 것은 떡볶이다. 신당동에 지금처럼 떡볶이골목이 형성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떡볶이가게마다 DJ박스가 있어서 사연과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신당동 떡볶이의 유래는 현재 떡볶이골목이 형성되어 있는 곳에 동아극장이 있었고, 극장의 관객들을 위해 옥수수, 감자와 함께 떡볶이를 팔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떡볶이는 떡에 고추장만 풀어서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떡볶이는 국민 간식이 되었고, 신당동 떡볶이골목에서는 계란과 당면, 어묵, 라면, 해산물, 치즈 등이 들어간 다양한 형태의 떡볶이가 팔리고 있다.

신당동 떡볶이골목은 6호선 신당역에서 청구역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신당동 떡복이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신당동 떡복이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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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에서 파는 손목시계들

노점에서 파는 손목시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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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덕

    문화인류학 박사. 현재 대학에서 경제인류학, 아시아문화, 종교문화, 축제와 신화 등을 강의하고 있다. 쓴 책으로 《길 위에서 마주친 우리 문화》, 《인문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신화》,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고민하는 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등이 있다.

  • 사진, 촬영 박재영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전공과 관련 있는 전통건축을 주제로 오랜 시간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전통건축에 녹아 있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미적 감성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20여 년 전국을 유랑한 결과물로 '우리공간 이야기', '지붕', '선' 등 서너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집으로 《오감으로 느끼는 전통건축》이 있다.

  • 원고와 사진 정리 가디언 출판사 가디언 출판사 로고

    가디언과 시루, 2개의 브랜드로 혁신과 지속 성장에 필요한 경제 · 경영서와 실용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역사서와 인문교양서를 출판하고 있습니다. 대표서적으로 《하루 10분의 기적》, 《3불 전략》,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식객II》(전3권) 등이 있습니다.

  • 지원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600만 명의 소상공인과 1,500여 개의 전통시장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 2014년 1월 설립된 준정부 기관으로, 전국 6개 지역본부와 60개 지역센터를 운영하여 상공인 및 전통시장을 위한 전문적이고 차별화된 시책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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