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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 충청남도

녹도

금주령이 내려진, 성처럼 보이는 언덕 위 마을

[ 鹿島 ]

요약 섬의 생김새가 '고개는 서쪽, 뿔은 동쪽에 두고 드러누워 있는 사슴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녹도라 붙였다고 한다. 녹도는 면적 0.89km2, 해안선 길이는 4km이며, 인구는 95가구, 190명이다. 대천항에서 뱃길따라 26km이다. 교통은 좀 불편해도 어업 활동은 매우 활발하다. 국내 유일하게 금주령이 내려진 섬이다.
위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대천항에서 뱃길따라 26km
면적 0.89km2
길이 해안선 4km
인구 190명(95가구, 2021년 기준)

녹도 개요

섬의 생김새가 '고개는 서쪽, 뿔은 동쪽에 두고 드러누워 있는 사슴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녹도(鹿島)라 붙였다고 한다. 녹도는 면적 0.89km2, 해안선 길이 4km, 95가구, 190명이 거주하며 대천항에서 뱃길따라 26km이다. '사슴섬'이라 불러오고 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이름으로 보인다.

어업이 활발한 녹도

녹도는 먼 바다에 위치한 섬이다. 교통은 좀 불편해도 어업 활동은 매우 활발하다. 주민의 협동심이 강하고 단결이 잘 되는 마을로 유명하다. 그리고 녹도의 특징은 오래 전부터 인근 섬들에 비해 교육열이 높았다고 한다. 1925년에 배움의 터전인 '사숙융광학당'이 있었으며, 지금은 텅 빈 운동장에 시설물들이 남아돌고 있지만 한창 때는 학생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교실이 부족해 동네 사랑방을 빌려야 했을 정도로 번창했었다.

녹도 마을 전경

녹도 마을 전경

녹도주민들은 위계질서도 뚜렷하다. 국내 유일하게 금주령이 내려진 섬이기도 하다. 금주령은 50여 년 전 동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법이다. "50년 전 제가 녹도청년회장이었어요. 그 때 어업이 성행해 경기가 좋아서 여기에 술집이 많았지요. 순전히 밀주였는데 술에 취하여 싸움질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노인들에게 대드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이규인 씨의 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을 청장년들에게 녹도에서 술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동네 주민들이 다 술을 끊은 것이 아니라 동네의 애경사 등 꼭 술이 필요할 때면 대천에서 사온다는 것이다.

50년 전에 술파는 집은 사라졌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다음, 몰래 술파는 행위가 네 집에서 적발돼 보관된 138상자를 시가로 배상해 집집마다 분배해 나눠주는 등 2차 금주령을 실시했다. 녹도에는 이제 가게도 없다. 술을 포함해 생필품은 각자 보령 등 육지에서 사와야 한다. 이렇게 녹도가 규율과 교육열 등이 강한 것은 어족자원의 풍성함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자치 수준이 높은 연유이다.

서해어장의 전진기지였던 녹도는 한때 충남에서 외연도와 함께 번창했던 섬이었다. 녹도 주변 바다는 제주 난류가 북상하면서 봄에는 까나리와 새우, 여름에는 멸치잡이 어장이 성행한 곳이다. 다른 섬보다 주위에 무인도가 많아 전복과 해삼, 소라 등 각종 어패류들이 많이 잡혀서 공판장이 자리했을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어족 자원이 많이 고갈되었지만 대천시는 정기적으로 연안어장의 수산자원증식과 지역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녹도, 호도 등 9개 섬지역에 어린 전복 37만5000마리와 해삼 새끼를 방류한다. 전복뿐만 아니라 어린 참게 17만7000마리를 방류했고 앞으로 참돔, 넙치 등의 방류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번에 방류된 전복은 3-4cm 크기로 약 3-4년 뒤부터 어획이 가능하게 된다. 어민소득 증대와 바다의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녹도 쉼터 앞에서 로이터통신 김홍지 기자와 김시영 발전소 소장

녹도 쉼터 앞에서 로이터통신 김홍지 기자와 김시영 발전소 소장

호도에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20명 정도 있지만, 녹도는 3명이 시집을 왔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제주도에서 10명 정도의 해녀들이 원정을 와서 물질을 한다. 녹도는 바로 이웃섬 호도보다 무인도가 많아 전복과 해삼, 소라 등 생산량이 많은 부촌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물질을 하면서 해삼, 소라, 전복을 채취한다. 그 양이 한 해 100톤에 이르고 12억 정도 수입을 올렸다니 과연 녹도는 보배섬이다. 예전 제주도 해녀들이 많을 때는 40여 명이 몰려와 작업을 했는데 지금은 해녀의 노령화와 자원 고갈로 찾는 인원수가 대폭 감소하였다.

녹도는 현재 안강망 어선 6척이 조업을 하면서 멸치를 잡는다. 바다에서 잡는 즉시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배에서 삶는다. 그 삶은 멸치가 소량일 때는 녹도에 가서 건조하고, 양이 많을 때는 대천 어항으로 달려가서 건조한다고 한다.

예전에 녹도 조기가 제일 먼저 잡히는 곳이어서 임금님 상에 오를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조기가 많이 잡히던 시절에는 124가구 700여 명이 넘을 정도로 마을이 호황을 누렸다. 300여 척의 고깃배가 왕래할 정도였으며 술집도 10여 개에 이를 정도로 즐비했다. 뱃사람들이 돈자루를 메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유했었다. '배 띄워라 돈 실러 가자'라는 뱃노래를 유행가처럼 불렀던 그 시절, 기생집이 흥청망청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섬 속의 도시를 이룬 적도 있었다'는 것이 섬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자녀 교육 등을 이유로 점차 육지로 떠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가구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인구는 매년 급감하고 있다. 참고로 1973년도에 펴낸 내무부 '도서지'에 의하면 77가구 450명, 초등학생은 100명으로 나온다.

이 섬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땅 속에 묻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땅 위에 안치하는 초분(草墳)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기를 잡을 때 땅을 파면 불길하다고 하여 수 개월 또는 수 년이 지난 뒤에 본장을 하였다.

물고기의 산란기인 봄과 여름에 제주난류가 북상하여 연안에는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다. 까나리와 새우, 멸치잡이가 왕성하며 자연굴과 돌김이 많이 난다. 그러나 바위가 많고 급하게 경사진 곳에 마을이 있어 유휴면적이 부족한 실정이다.

녹도 항일 의거 이야기

정미의병

일제는 이준 열사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한국군대를 해산시켰다. 군대를 해산하던 날인 1907년 8월 1일 시위대 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하고 서울의 시위대 소속 한국군 1,600여 명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으로서 시작된 정미의병은 원주, 강화, 홍천, 진주, 안동 등 지방으로 번져 각지에서 일본군과 맛서 싸웠으며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도하였다. 이때 충남지역에서는 같은 해 8월 10일 홍주 분견대가 봉기하였으나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녹도의병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편 오천군 소속이었던 녹도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풍요로운 섬이었던 관계로 화적들의 출몰이 심하여 오천군에 경비병을 보내달라고 했고 이에 5명의 군인(패잔병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진압된 정미의병의 일부일 것으로 짐작함)을 지원받아 화적들로부터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정미의병 중 항거하던 진위대원(鎭衛隊員) 6명이 일시 녹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녹도 의거 사건

이들 5-6명의 의병들이 녹도에 머물던 중 인근을 지나가는 일본인의 상선을 습격하여 소금과 쌀을 빼앗아다가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때 재물을 빼앗긴 상선의 일본인들이 군산 수비대에 신고하면서 "도적들이 녹도로 들어가더라."고 함으로서 1907년 9월 8일 일본인 조사단(순사1, 수비병3<草野上等兵 외>, 통변2, 한국인선부4)이 섬을 찾아 현장을 답사하고 산에서 탄피까지 1개 발견하였지만, 주민들이 의병의 소재를 모른다고 할 뿐 아니라 말들이 서로 엇갈려 조사가 늦어졌다.

조사단은 날이 저물자 다음날 다시 조사키로 하고 마을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설바탕'에 배를 세우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려고 했다. 그러나 높새바람(동풍)이 강하게 불면서 닻줄이 끊어져 배가 부둣가로 밀려왔고 일본인들이 배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때 의병들은 2개 조로 나누어 1조는 '돌컷'이라는 곳의 팽나무 뒤에 매복하고 1조는 '노랑배'라는 바위 뒤에 매복해 있다가 일제히 사격했다. 일본인들도 마주 총을 쏘면서 저항했지만 모두 사살하여 한 곳에 매장했으며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불살라 버렸다. 기록에는 10명을 죽였다고 되어 있으나 섬 주민들은 한결같이 7명을 죽였다고 하고 있음으로 한국인 선부는 살려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병들은 주민들에게 일본군이 쳐들어올 터이니 빨리 피하라고 하고는 자기들도 섬을 떠났으며 주민들도 다른 섬이나 타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하고 이장(전○○)과 청년 3명(박창선, 최승룡, 이름 미상), 그리고 나이가 많은 노인 몇 사람만 섬에 남았다.

녹도의 피해

이 의거가 있자 같은 해 9월 14일 일제의 군산 수비중대(대장:浮須)와 의용군 등 다수의 병력(이하 토벌대라 한다)이 쳐들어와 피하지 않고 있던 이장에게 의병의 행방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하자 단칼에 베이어 죽였다. 그리고 섬의 집과 배와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섬은 완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섬에 남았던 노인 몇 분의 생사여부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청년 3명은 바다에 뛰어들어 가까운 섬인 호도로 헤엄쳐 도망가서 당산에 숨어들었다.

이에 뒤쫓아 온 토벌대가 당집에 불을 지른 후 불을 피해 달아나는 청년들을 쫓는데 그중 박창선이라는 청년은 도망가서 어느 집으로 들어가니 한 아낙네가 바느질하고 있었다. 다급한 김에 살려 달라며 치마 속으로 들어갔고 뒤쫓아 온 일본군이 방문을 열어보니 여자 혼자 바느질하고 있으므로 그냥 돌아가 버려서 그 후 청년은 생명의 은인에게 자기 딸을 며느리로 시집보내 사돈을 맺어 살았다.

녹도 의병전적비 제막식

녹도 의병전적비 제막식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온 녹도의병 상황을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16년 자료수집과 주민 증언을 바탕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고 일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항일 투쟁에 나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병과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초를 무릅고 의병활동에 협조한 녹도 주민의 애국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녹도 포구에 항일의병 전적비 제막

전적비는 1907년 9월 8일 당시 의병들과 일본수비대와의 격전지인 녹도 포구 현장에 세워져 그 의미를 더하고 있어 역사적인 고증과 함께 항일의병 전적지로서의 숭고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녹도의 항일의병 활동에 대해 자칫 묻힐 뻔 했던 사항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배경은 보령문화연구회에서 자료 수집과 지역주민들의 증언 등을 통해 2016년 11월 '보령문화 제25집'을 발표했으며, 언론보도와 기록 및 문헌 등을 통해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시비 1000만 원을 들여 건립함으로써 늦게나마 지역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 빛을 보게 됐다.

정원춘 부시장은 "비록 110년 전의 일이지만 구한말 보령 지역에서의 항일의병 전적지로서의 고귀한 현장이 잊히지 않도록 이제라도 전적비를 건립하게 되어 매우 뜻 깊고 의미가 남다르다"며 "녹도 지역주민들에게 자긍심 고취는 물론 관광객 유치에도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보령시는 이번 제막식을 계기로 녹도 포구에서의 구한말 항일의병 활동을 전개한 역사적인 사실을 대 · 내외에 알리고 재조명하는 의미에서 국가보훈처에 현충시설 지정 신청, 안내판 설치 등 본격적으로 관리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녹도 의병 이야기가 실린 기록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데이터베이스(고종시대사/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1908∼1911년 대한제국 농산공부 발행)(일본인이 우리 바다를 조사하여 쓴 책)
- 군산시사(群山市史, 1975년 군산시 발행)
- 도서지(1997년 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발행)
- 보령문화 제25집(2016년 사단법인 보령문화연구회 발행)

녹도 둘러보기

서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가진 대천은 덤으로 적당한 거리에 멋들어진 섬들과 거기에 위치한 백사장이 즐비하다. 그 특징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산과 해수욕장과 갯벌이 한데 어울려 있는 섬 원산도
화살이 꽂힌 태곳적의 신비를 간직한 섬 삽시도
백사청송과 모래가 있는 장구를 닮은 섬 장고도
은백색의 모래가 펼쳐져 있는 여우를 닮은 섬 호도
최초의 서양 무역선이 통상을 요구한 섬 고대도
전통과 동백숲이 우거진 봉수대의 섬 외연도

2015년 봄, 일행과 함께 녹도에 가려고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두 번이나 왔지만 연휴와 주말에 왔기에 정작 여객선을 타지 못했다. 대신 한 번은 서산의 난지도, 소난지도와 도비도를 돌아보았다. 또 한 번은 인천으로 달려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신도, 시도, 모도와 장봉도를 돌아보고 다시 대무의도소무의도를 여행하였다. 시간에 맞추어서 여유 있게 도착하였지만 인터넷을 통해 예매를 하지 않은 결과 여지없이 우리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대천 연안여객터미널은 연휴 기간이라서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 매우 분주했다. 특히 호도와 외연도로 향하는 배와 삽시도 원산도행 배도 마찬가지로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7월의 휴가철이면 예비선을 띄운다. 섬 여행이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녹도로 가는 배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대부분 호도와 외연도로 가는 관광객들이며, 녹도에 내리는 손님은 거의 없고 그 대부분은 일반 주민이나 낚시꾼이다. 녹도는 호도와 외연도에 비교하여 보면 관광지가 없다. 그래서 비록 관광객들이 별로 찾지 않지만 그 대신 어업활동이 활발하다.

녹도는 여객선을 타고 들어오면 반드시 마을의 차가 대기해 있다. 자세히 알아본 결과 동네의 수도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이종태 씨가 '사랑의 열매'에서 기증 받은 차를 가지고 서비스 차원에서 무료로 봉사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여객선 선착장은 나이 드신 노인네는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전화만 하면 그 분이 그 집 앞에 차를 대고 모셔다 드린다.

그리고 들어오는 손님이 누구든지 마중하고 짐과 함께 실어다 주는 고마운 분이다. 관광객들도 이차를 타고 짐을 싣고 들어오고 나갈 때도 이 차를 이용한다. 그런데 절대로 사례를 받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녹도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순수한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을과 선착장은 약 1.3km 정도로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이웃 섬 호도와 외연도는 선착장과 마을이 바로 붙어 있는데 녹도는 좀 떨어져 있다. 호도는 리어카가 선착장에 즐비하지만 녹도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녹도 길을 따라 얼마 정도 들어가면 길 양쪽에 그물과 통발 등 어구가 널려 있다. 녹도는 대부분이 산지이고 논은 없다. 산비탈에 밭이 일부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산 정상에는 잘 보존된 봉수대가 있다는데 아직은 등산로가 없어서 일반인은 접근이 어렵다.

1993년도 가을에 인천으로 올라가면서 선착장에 배를 댈 때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교회로 올라가 마을을 보니 언덕 밑으로 오밀조밀하고 아담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밤에 불이 켜지면 바다 쪽의 동네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아담한 모습의 그림 같은 섬이다. 녹도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녹도교회를 방문했다.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목사, 한 분은 전도사였다. 모두 여자로, 1980년대에 부임하여 10년 넘게 근무했다고 한다.

봄에 까나리가 많이 나오는데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 그것을 젖으로 담아서 육지와 연결해 판매한 결과, 마을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한겨울을 나기 위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연탄배가 들어오는데 1,200장의 연탄을 교회로 올리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하였다. 이 두 분은 지금은 장고도교회에서 시무중이다.

93년도 방문 이후 2번을 더 왔지만 2008년도 봄에는 허베이호 기름 유출 사고 당시 방제선을 타고 왔다. 아쉽게도 시간 관계상 자원봉사는 하지 못했지만 녹도 주위 여러 섬의 현장을 둘러보고 녹도에서 주민들을 만나 보았다. 그때 녹도발전소 소장을 만났는데 녹도 태생인 그는 녹도지킴이 노릇을 하면서 녹도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었다.

해산물이 풍부한 이유는, 이 섬이 먼 바다와 내륙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환경적 요인과 녹도 주위에 무인도가 많아 고기의 산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도는 지금까지 유복한 섬으로 남아 있다. 그전보다 현대식으로 달라진 녹도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녹도에서 가장 신나는 것은 여름부터 시작된 멸치잡이 안강망 체험이다. 까나리는 봄에 잡히지만 멸치는 한여름부터 11월까지 잡힌다.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밤새도록 멸치를 잡아서 포구로 들어온다. 멸치를 따라 멸치잡이 그물에 들어온 오징어나 우럭, 삼치 등도 많이 잡힌다.

녹도의 해산물

녹도의 해산물

마을 앞 선착장은 해수욕장은 아니지만 물이 빠지면 조그만 백사장이 드러난다. 어린 아이들이 해수욕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녹도에는 가게가 없다. 그래서 녹도 여행을 가려면 미리 이것저것 사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민박집에서 식사를 사먹을 수는 있으며, 주변은 모두 낚시 포인트이다. 물이 빠지면 홍합, 고동을 잡을 수 있다. 지금은 쾌속선이 다닌다. 먼 바다에 위치하여 과거 동력선이 없을 때는 바다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1960년대까지 돛단배에 해산물을 싣고 대천에 나가려면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이들이 육지로 배를 타고 나갈 때에는 한 배에 다섯 명 정도 함께 갔다. 바람이 불면 풍선에 돛을 달고 갔지만, 역풍을 만난다거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교대로 노를 저어서 5시간 정도 후에 겨우 삽시도 근처에 다다른다. 노 젓는 일이 힘들어서 준비해 간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바람이 잘 맞으면 한나절에 들어갔지만, 안개가 끼고 물을 거슬러 갈 때는 이틀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삽시도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날 다시 대천에 가서 시장에서 일을 보고서야 다시 돌아왔으니 이들의 고달픈 삶은 계속되다가 동력선이 나오면서 한결 짐을 덜 수 있었다. 수백년 동안 돛단배에서 통통배로, 그 다음은 목선이 다니다가 철선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쾌속선이 녹도까지 1시간에 간다. 2006년도에 학교가 폐쇄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보건지소와 치안센터, 교회가 존재하여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녹도의 시장선(市場船) 사고

한편, 김 이장은 시장선(5일에 한번 시장을 보려고 다니던 풍선)을 떠올리면며 회상에 잠겼다. 1955년도에 시장선의 사고로 10명이 숨지고 2명이 살아났다고 한다. 생존자 중 1명은 두 살 아래인 정대옥(인천)이고, 한 명은 나이가 많아 별세했다고 하였다. 사고의 개요는 이렇다. 녹도는 다른 섬과 달리 어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농토가 거의 없는 이곳 주민들은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가지고 대천 5일장에 나가 팔고 생필품을 사서 돌아온다. 이 당시는 객선이 다니지 않아서 대천장을 보려면 노전배가 돛을 달고 다녔다. 이 배는 지금의 대천항이 아니라 대천의 철교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해산물을 가득 싣고서 장에 가서 판매하고, 올 때는 생필품을 가득 사들고 오는데 멀어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녹도에서 물때와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다니다, 한번은 장을 보고 녹도로 오는데 역풍이 분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대천항으로 일시 피난을 갔다가 그 다음 날 새벽 항해중 용도 암초에 부딪혀서 배가 침몰해 녹도 마을 주민 10명이 사망을 하였다.

육지에서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듯이 섬에 사는 주민들도 배 사고를 당하여 사망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동력선이 나오기 전에 풍선 시대는 더 심했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명 사고가 훨씬 많이 줄었다.

녹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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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

녹도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속하는 섬. 면적 0.89㎢, 해안선 길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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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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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의 섬』 시리즈는 25년 동안의 현지답사와 섬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눈으로 보며 느낀 감상과 행정기관에서 갖고 있던 기존의 자료 등을 정리한 것으로, 각 지역별로 나누어 수필집 형태로 구성하였다. 총 13권으로 출간되었다. 자세히보기

  • 저자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드론 사진 포함).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하였고, 2020년 1월부터 목포과학대학교 해양레저사업단 섬해양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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