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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수봉

의열의 폭탄을 던진 밀양청년, 건국훈장 독립장 1963

[ 崔壽鳳 ]

출생 - 사망 1894.3.3. ~ 19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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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3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가 자유를 빼앗겼으니,
강토의 사용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사로
나는 투탄한 것이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실황

광복 이후의 밀양경찰서

1920년 12월 27일 아침 9시 40분경, 경남 밀양의 관아 자리 서남쪽, 옛 토포청(討捕廳) 자리에 위치한 경찰서에서 돌연 요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몰래 청사로 들어가서 폭탄을 던진 때문이었다.

그날은 월요일이어서 경찰서장 와다나베(渡邊末次郞)가 서원 19명 전원을 청사 내 사무실에 2열로 세워놓고 연말 특별경계를 당부하며 훈시하고 있었다. 그때 남쪽 정문을 통해 한 남자가 경찰서 경내로 들어서더니 청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현관 오른쪽 두 번째 창문 앞의 한 칸쯤 떨어진 지점에 멈춰 서서, 팔을 한 번 휘둘러 뻗으며 창문 안쪽의 사무실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유리창을 뚫고 날아 들어간 그 물체는 순사부장 쿠스노키(楠慶吾)의 오른팔 관절부에 맞고서 옆 책상 위로 떨어졌다. 난데없는 유리창 파열음에 놀라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순사들의 눈에 창문 너머 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날아와 떨어진 것은 얼핏 봐도 폭탄이었는데, 인체에 부딪쳐서 충격이 약해진 때문인지 불발이었다.

밀양지역 지도 (조선총독부, 1924년 말)

돌발 사태에 놀란 서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는데, 현관 앞에서 복도를 향해 또 한 발이 던져졌다. 그것은 골마루 바닥으로 떨어져 부딪치곤 큰 폭음을 내며 터졌다. 그러나 폭발의 위력이 약하여, 실내의 식기와 다기들만 일부 깨지고 부서졌다. 타박상을 입은 순사부장 외에는 다치거나 죽은 자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서원들이 일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투탄자는 몸을 돌려 황급히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밀양성 서문 쪽을 향하여 내달렸다. 순사 몇몇이 고함치며 쫓아가는데, 1Km 남짓 되는 거리의 한길을 계속해서 달음박질치던 투탄자는 돌연 내이동 황석이(黃石伊)의 집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엌에서 식도를 찾아 꺼내 자기 목을 찔렀다. 뒤쫓아 달려간 3명의 순사가 다량의 출혈과 함께 실신하여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하고 포박했다. 투탄자의 목에는 길이 2.5㎝, 깊이 1.5㎝ 가량의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순사들이 그를 급히 읍내의 일본인 병원으로 옮겼고, 응급처치 후 2주간의 가료 끝에 투탄자는 회생하였다. 경찰이 밝혀낸 그의 신원은 밀양군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 사는 27세의 청년 최수봉(崔壽鳳)이었다.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서

최수봉 의사 생가터 ⓒ김영범

최수봉은 1894년 3월 3일 밀양강 서편 농촌마을인 마산리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적명은 경학(敬鶴)이었다.

의열단 창단 무렵의 약산 김원봉(약관의 김원봉) ⓒ국사편찬위원회

“천품이 영특하고 기상이 뛰어나, 소년시절부터 향학의 열성이 남달랐다”는 최수봉은 향리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 유교적 가르침을 익히고 신지식도 섭취하였다. 그 후, 밀양 내일동의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40리나 되는 원거리를 통학하며 다녔다.

밀양공보를 같이 다녔던 김원봉(金元鳳)이 후일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에서 회고담으로 소개한 일화 하나가 어려서부터의 최수봉의 곧은 성품을 잘 보여준다. 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에 단군은 자기네 대화족(大和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의 아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두 인물의 생존연대만 보더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니 최수봉이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이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했고, 그로 인해 퇴학당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 1910년에 최수봉은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학해서, 전홍표(全鴻杓) 교장 밑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2년으로 그치고 만 것은 일제당국이 1911년에 폐교시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전홍표와 김대지(金大地) 등 애국적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워갈 수 있었다.

동화학교 터

1912년에 최수봉은 부산 북면(北面)의 범어사(梵魚寺)가 운영하는 명정학교(明正學校)에 들어갔다. 최수봉의 부모가 독실한 불교도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최수봉은 고삼종(高三宗)이 1912년 내일동에 세운 밀양읍교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 밀양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교회 출입이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최수봉은 1913년에 명정학교를 1년 만에 자퇴하고 멀리 평양으로 가서 미국 북장로교(北長老敎) 계통의 중학교인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삼종이 주선했거나 ‘교회 대표 입학생’으로 추천해준 덕분이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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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학교, 지방학림

숭실학교 (1921년) ⓒ김영범교수

고삼종에게는 1887년생인 차남 고인덕(高仁德)이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성장한 그는 정의감이 강하고 신념에 투철하며 열정적인 성품이었다. 일제의 한국강점과 식민통치에 끝까지 저항하여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해내야만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 그것은 한민족의 자주독립 달성의 열망과 통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7년 연하의 최수봉과 진작부터 의기 상통으로 친교했던 것 같다. 최수봉이 밀양읍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도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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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덕

고인덕 관련 동아일보 기사(1921) 부분

최수봉은 숭실학교도 4년 과정 중 3년만 다니고 중퇴했다. 엄격한 학사관리로 인해 진급시험에 탈락한 때문이었거나 학비조달 문제 때문이었을 수가 있지만, 그만의 어떤 회의감과 새로운 모색에 따른 독자적 결정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어떻든 최수봉은 1916년 음력 5월경에 평북 창성군으로 가서, 프랑스인 경영의 사금광(砂金鑛)에서 1년간 광부생활을 했다.

최수봉이 금광에 들어간 것도 단순 호구지책이나 돈을 좀 벌어볼 요량에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과는 다른 어떤 류의 결의, 즉 조국의 독립을 그저 소망하고만 있거나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여 마음속 ‘준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무엇이든 일익을 담당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품다가 점점 그리로 기울어 마침내 굳혀진 모종의 결의와 연결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1916년 9월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광복회(光復會)의 부사령(副司令) 이진룡(李鎭龍)이 대원 6명을 이끌고 평북 영변군에서 평양발 운산행 송금마차를 기습한 사건 소식을 접하면서 더욱 강화되었을 수 있다.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광복회 평안도지부의 동향을 때때로 들어 알고 있으면서 관심을 갖고 자극도 받았을지 모른다. 지부장은 정주(定州)의 대부호 조현균(趙賢均)이었는데, 최수봉이 광부생활을 그만둔 후 정주에서 우편배달부 일을 했었다고 후일 법정에서 진술한 점도 예사롭지가 않다.

광부와 우편집배원 생활 이후의 최수봉 행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만주의 서간도로 들어가서 펑티엔(奉天, 오늘날 선양)과 안뚱(安東, 오늘날 단둥) 사이를 왕래하며 동지 규합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펑티엔이나 안뚱은 당시 재만 한인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밀양 출신 손일민(孫逸民)·구영필(具榮泌)을 포함한 다수 지사들이 거기에 재류하고 있었으며, 김대지도 펑티엔과 밀양을 오가다 1918년 일경에 피검된 바 있다. 그렇다면 최수봉의 그 지역 왕래는 단순 방랑이 아니라, 그만의 웅지를 펼 기회를 만들고자 모색하며 준비해가던 모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인덕이 1918년 음력 11월에 만주로 건너갔고 3․1운동 이후로는 만주의 지린(吉林)과 남방의 상하이(上海)를 자주 오가며 독립운동의 길을 찾았다는 점도 주목해보아야 한다. 최수봉의 서간도행과 고인덕의 만주행은 서로 무관하고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내밀하게 연결되어 같이 단행된 것일 수 있다. 고인덕은 1919년 상하이에서 구입한 폭약 및 폭탄제조기를 갖고서 귀향한 후 그것을 쓸 기회를 엿보았는데,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거사가 계획되었을 때 그것을 갖고 만든 폭탄이 최수봉에게 건네진 것이기도 했다. 일련의 이런 사실들은 최수봉과 고인덕 사이에 일찍부터 긴절한 기맥상통과 밀접한 연계행동이 있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투탄거사 결의와 준비

최수봉도 고인덕처럼 1919년에 다년간의 외지생활을 접고 귀향한 것 같은데, 정확한 시점은 불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수봉이 밀양읍내 장터에서의 3․13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일경이 출동하여 시위자를 마구 체포하려 할 때 급히 현장을 빠져나가 타관으로 일시 피신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확언키는 어렵다.

3․13 만세시위는 윤세주(尹世冑)와 윤치형(尹致衡)이 기획과 준비를 주도하고 전홍표가 자문역을 맡았으며 동화학교 출신의 여러 밀양청년들이 사전 모의 및 준비에 참여하여 성사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매우 가깝고도 신뢰하는 사이였을 최수봉이 그 과정에 참여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거사 기일이 급박한데다 은밀한 모임과 왕래 동정이 혹시라도 경찰이나 일반 주민들에게 포착·주시될 우려가 있으므로 사전준비 과정에의 참여자를 의도적으로 밀양읍내 거주자들로 국한시킨 것일 수는 있다.

의열단의 ‘밀양폭탄사건’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6.21.) ⓒ국가기록원

아무튼 해가 바뀌어 1920년이 되자, 전년도 11월 만주 지린에서 창립된 의열단이 제1차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여, 4월부터 폭탄 밀반입과 실행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시켜갔다. 그러나 그 동향이 경기도경찰부에 탐지되어 수사 개시되었고, 밀입국 단원 다수와 국내 조력자들이 6월 중순 이후로 연이어 붙잡힘과 아울러 밀양 내일동의 김병환(金鉼煥) 집에 숨겨 보관해 둔 폭탄 3개가 압수되고 말았다. 이윽고 7월 29일에 총독부 경무국이 사건을 공개하고 피검자 16명의 명단 및 신원사항과 함께 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동아·조선·매일 3개 신문이 ‘밀양폭탄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호외를 내고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 그 후 9월에는 창원군 진영(進永)을 통해 밀반입하여 감추어 둔 폭탄 13개도 적발 압수되고 배중세(裵重世) 등 여러 단원과 현지 관련자들이 추가 피검되었다(‘진영사건’).

하지만 최수봉의 이름은 이 사건 관련의 당시 문건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고, 그 후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최수봉은 이 거사계획의 국내 추진과정에서 완전히 국외자로 있게 되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만주 또는 타관 어딘가에 가 있어서 참여 또는 협조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처지였을지 모른다. 최수봉이 밀양에 재류 중이었음이 확인되는 바의 문서상 최초 시점은 1920년 8월이었다. 그때가 ‘밀양폭탄사건’ 수사결과 발표 직후였던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 얼마 후 9월 12일에 밀양읍내 주민들의 ‘경찰서 습격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그 해 8월 기승을 부렸던 콜레라 방역작업의 노고를 위로하는 합동연회 자리에서 밀양경찰서의 노구비(野久尾) 순사부장이 한인 순사 3인을 심하게 구타 폭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매 맞고 실신하여 이송되는 순사의 모습을 목격한 후 그 정황을 파악해낸 주민들이 몹시 분개해했다. 그러다 마침내 수백 명이 노도처럼 경찰서로 밀고 들어가 사무실 집기와 유리창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깨버리며 매섭게 항의 의사를 표출한 것이다. 당황한 서장이 강경진압을 시도하자, 이번에는 한인 순사와 일본인 순사 간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그처럼 기묘한 상황으로까지 이르게 된 이 사태의 기세는 이틀 후 9월 14일에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로 들어가 서장실을 타격한 폭탄의거의 성공과 함께 최수봉의 의기를 매우 고무시켜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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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재혁 의거 신문기사

그 후 투탄거사를 결심하여 실행케 된 과정과 그 준비 경과를 최수봉은 경찰 취조와 검사국 예심 및 1·2심 재판정의 진술에서 수차 다른 내용으로 바꿔 말하곤 했다. 한 편의 소설을 지어내는 것처럼 허구적이거나 의도적 허위진술이었을 부분이 많다. 검사국과 법정에서는 최수봉이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예전에 서로 친교가 있었다는 임태호(任泰昊)라는 인물을 등장시켰고, 그가 밀양까지 내려와서 자기에게 거사행동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폭탄도 만들어주었거나 갖고 와서 제공한 것처럼 진술했다. 그러나 임태호는 소설 속 주인공과도 같은 허구의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일제 관헌과 사법당국은 이 사건의 내막과 진상 파악에 몹시 애를 먹고 혼선을 겪었다.

최수봉이 그런 얘기의 저본으로 삼은 것은 일찍이 출향 전부터 절친이었던 선배 운동자 고인덕의 신념에 찬 성품과 용기 있는 언행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강력하고도 투쟁적인 항일행동에 나서야만 함을 역설하고 촉구하던 그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을 뼈대로 삼고 허구의 살을 붙이며 만들어낸 얘기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경찰 수사보고서 및 판결문과 일련의 신문보도, 그리고 후자들에서 인용되는바 검사국 예심 및 공판정의 진술 등을 종합하여 대략 파악되는 사건 진상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볼 수 있다.

최수봉은 치열한 독립사상을 품고서 항상 독립운동을 꿈에서라도 한 번 해볼 생각을 하며 지내왔다. 그러던 중 1920년 11월에 상남면 기산리 묘지에서 김상윤(金相潤)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독립운동에 진력할 것을 권유받아 쾌히 승낙했다. 기산리 출신으로 1897년생인 김상윤은 최수봉과 동화학교를 같이 다닌 친우 사이였다. 그는 1919년 초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다니고 의열단 창립에 동참한 후 제1차 국내 대거사를 위해 밀입국해 있었는데 ‘밀양폭탄사건’으로 단원 다수가 붙잡혀가고 있던 중에도 일경의 검거망을 벗어나 계속 잠행하고 있는 터였다.

이종암 사진 ⓒ동아일보

그 얼마 후 최수봉은 기산리 묘지에서 의열단원 이종암(李鐘岩)도 같이 만나서, 독립운동의 기세를 진작시키기 위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질 것을 모의했다. 이종암은 대구 출신으로 1918년 만주로 망명했고, 이후의 경력과 행적은 김상윤과 동일한 인물이었다. 그 후 밀양읍내에서 이종암과 재차 회합하여 12월 27일에 결행키로 협의하였고, 마침내 26일 저녁에 삼문리 장봉석(張鳳錫) 소유의 무인 농막에서(혹은 밀양역 앞 다리 건너 솔밭에서) 이종암을 만나 대·소 2개의 투척용 충격즉발식 폭탄을 건네받아 다음날 실행한 것이었다. 결국 거사의 직접적인 계기는 김상윤과의 만남이었고, 거사준비 과정에 그와 두 번, 이종암과는 세 번 만난 것이었다.

경찰 취조나 검사국 예심 혹은 법정 진술에서 나온 이름인 김원석(金元石/金元錫) 혹은 임태구(任泰具)·임태호는 이종암을 만났던 사실을 철저히 감추기 위해 최수봉이 꾸며낸 인물이었다. 경찰 취조 때의 지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밀양 현지 출신인 김상윤의 이름은 대야만 했을지 모르지만, 타지 출신인 이종암은 처음부터 엉뚱한 가명으로 위장시켜 추적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진 것은 1925년 11월의 ‘경북의열단사건’ 때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북경찰부에 피체된 이종암의 진술을 통해서였다. 중국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워두었고 귀국하면서 폭약과 제조기도 밀반입해왔던 고인덕이 이종암과 김상윤의 요청에 응하여 협조해줌으로써 대·소 폭탄 1개씩이 밀양 외곽의 산속 암굴에서 제조되어 최수봉에게 건네진 것이라 했다.

그로써 경북경찰부는 이종암과 김상윤을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의 ‘주범’으로 재규정하였다. 그 두 사람이 고인덕을 안학수(安鶴洙)의 소개로 만나서, 폭탄에 들어갈 약품과 재료를 제조해주도록 의뢰하고 외피는 밀양읍내 밖의 산속 암굴에서 직접 제작하여 최수봉으로 하여금 밀양서에 투척케 했다는 것이다. 원래는 최수봉과 함께 이웃마을 조음리 출신인 22세 청년 이원경(李元慶)이 폭탄 하나씩을 던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원경에게 어떤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최수봉 혼자 결행한 것이라고도 했다.

재판과 순국

최수봉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속행되었는데, 1·2·3심 모두 단시일 내에 2회 이내의 공판만 열면서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종결되었다. 최수봉 의거의 파장을 최소화해보려는 총독부의 의도가 반영되어서였다. 그렇지만 법정에서 최수봉은 경찰서 폭파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자결도 실패한 채 체포되어 적에게 욕을 보고 있음이 분하다 함을 서슴없이 직설하며 의열적 기개를 꺾지 않았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검사 공소에 의한 2심에서 사형이 언도되고,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된 그는 여하한 형선고에도 동요하는 빛 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태연하였다.

최수봉 1심 재판 보도기사 (매일신보 1921.1.20.)

1921년 2월 3일 부산지법에서의 첫 공판에서 재판장이 거사 후 도주의 이유를 묻자 최수봉은 “내가 그때 정말 목적을 달성했으면 즉시 자결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네놈들에게 욕을 보지도 않을 텐데, 일이 그렇게 안 되어버렸으니 어찌 운명이라 하지 않겠는가?”라고 통박하였다. 또한 최수봉은 “세계 대세나 동양 대국상(大局上)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행동은 조선 국민 된 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당당히 외쳤다. 이에 검사는 “조선역사를 알지 못하는 음모 선인(鮮人)으로 독립을 망상하고 죽음을 결단하였으니 사형에 처하는 것이 지당함”이라고 논고하였다. 그러자 최수봉은 “좋소!”라는 한 마디로 태연히 응수하였다.

2월 10일의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은 무기징역을 언도하였다. “인심동요 목적으로 투탄했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여 관사 파괴와 서원 살상이 없었다. 이는 무지무식의 행위로서 목적을 달성치 못했으므로 사형이 필요 없다.”라는 것이었다. 최수봉은 재판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덤덤한 기색으로 듣기만 하였다.

최수봉 1심 판결 보도기사 (매일신보 1921.2.13.)

1심 언도형량에 불만을 품은 검찰이 공소하였고, 최수봉은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다.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은 살인미수죄를 추가하면서도 가장 무겁다는 폭탄사용죄의 적용만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도 최수봉은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한 웃음을 머금고 퇴정하였다.

최수봉은 2심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변호사를 통하여 상고하였다. 상고 요지는, “우리 3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가 자유를 빼앗겼으니, 강토의 사용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사로 투탄한 것이다. 그러나 인명 사상(死傷)과 건조물 파괴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형에 처함은 유사 이래 동서고금에 하나 있고 둘은 없을 일이요, 우리 인류세계의 법이라 할 수 없다. 미수에 그친 일로 이와 같이 판결함은 불법이다”는 것이었다. 5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은 상고의 이유가 없다면서 기각 판결을 내렸다.

최수봉(최경학) 상고심 판결문 ⓒ국가기록원

확정판결 한 달 보름만인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교수대에 선 최수봉은 안색 하나 변함이 없이 형을 받아들이고, 13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최수봉도 회원이었던 밀양청년회에서는 전홍표의 제의에 따라 장례를 최대의 경의와 예우로써 성대히 거행코자 부의를 거두었다. 몇 사람은 대구로 가서 시신을 인수하고 밀양역까지 수행하였다. 이에 밀양경찰서 서원 전원이 출동하여 역에서 읍내까지의 도로 좌우를 엄중경계하면서 한 사람도 마중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그뿐인가. 이튿날에는 조위금을 거둔 이와 낸 이 1백여 명을 불러내 일일이 조사하고, 모금 주도자와 시신 인수자 10여 명은 ‘범죄인 사체 취체규칙 위반’ 혐의로 검거하여 취조했다. 그리고는 3주일간이나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부산지법 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최소한의 인륜조차 외면하고 짓밟는 만행이 아닐 수 없었다. 박재혁의 장례에 대해 꼭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서를 공격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그래서 최수봉은 쓸쓸히 향리의 공동묘지에 묻히고, 자결 기도 때 흘린 피가 배어든 의복만 거두어 보존되었다.

최수봉 의거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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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사 추모 기적비

박재혁 의거가 세상을 놀라게 한지 석 달 만에 식민통치의 최첨병 폭압기구인 경찰서를 재차 타격한 최수봉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다시금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키면서 각오를 새로이 다지게끔 하였다. 경찰은 경찰대로 언제 또 그런 양상의 폭탄거사가 터질지 몰라 불안감에 떨며 노상 전전긍긍하였다. 두 의거의 성공으로 의열단과 김원봉은 제1차 국내 대의거계획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것은 최수봉 순국 두 달 후에 단신으로 총독부 타격에 나서서 통쾌한 성공을 거둔 김익상(金益相) 의거로도 입증되었다.

최수봉 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관련하여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밀양경찰서 투탄거사가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혼자만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때와 장소에서 단신으로 감행된 것임은 맞지만, 그렇더라도 일회성의 개인의거로만 보기보다는 더 큰 시·공간적 및 운동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밀양 지역사의 어떤 단면, 즉 멀리는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의 의병충렬정신을 이어받는 민족운동 전통과 가까이는 일합사(一合社) 및 광복회 조직을 통해 은밀히 이어져 온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기맥,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여 간 전홍표·김대지·황상규(黃尙奎) 등 청년지사들의 동향과 그 좌표 등이 의미를 갖고 중요해진다. 또한 그 의거는 석 달 전의 밀양주민 경찰서습격사건과 연접되는 것이었고, 밀양출신 청년들이 창립을 주도하고 대거 참여한 의열단의 초기 투쟁사와, 그것이 부산·경남의 항일운동사와 접속되던 부분, 즉 ‘밀양폭탄사건’ 및 박재혁 의거 역시 그 맥락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총공격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검거망을 피해 잠행하던 김상윤과 이종암이 최수봉을 의열단원 동지로 만들고 폭탄거사를 추동했으니, 그 거사의 실행은 혼자였으나 기획과 준비는 의열단 차원의 집단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수봉 의거는 개인단독 거사로 보이지만 기실은 여러 단원이 직접 관여한 ‘의열단 거사’였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접할 수 있는 최수봉의 유일한 사진(감옥에서 찍은 것인 듯함)은 심지 깊고 의지력 강하며 과묵하면서도 넉넉한 성품을 느끼게끔 해준다. 담담한 표정이 담고 있는 굳은 결의와 초탈의 기운도 범상치가 않다. 어쩌면 민족애나 조국애 등의 일반적 용어로만 최수봉의 내심과 행동을 표현하기는 부족할지 모른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의열기생 논개(論介)를 기리어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고 시로 읊은 바 있다. 그런 ‘분노와 정열’의 인간상은 바로 최수봉의 것이기도 했던 듯하다. 실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이고 열사였던 것이다.

정부는 최수봉 의사의 드높은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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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범. 「1920년 밀양 항일폭탄의거의 배경과 전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5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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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6.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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