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복스/활동 상세

1 1997년

1.1 결성 과정

1996년, 영국에서 데뷔해 전세계적으로 걸파워 신드롬을 이끌어냈던 5인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영향력은 국내에서도 거셌는데 여자 가수 시장이 열악했던 틈새 시장을 공략해 국내 가수의 공연 매니지먼트를 주로 맡고 있던 DR뮤직의 대표 윤등룡은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하는 여성그룹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한국판 스파이스 걸스를 기획한다. 우선 부산에서 모델로 활동하며 무용을 전공했던 정시운을 비롯해 팀의 리더 정현전을 영입했으며 평소 친분이 있는 작곡가에게 소개받았던 캘리포니아 출신 재미교포 차유미를 리드보컬로 영입했다. 이어 서울 동대문에서 이희진을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픽업했고 1996년 겨울 김이지도 길거리 캐스팅으로 픽업하며 다섯명의 라인업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첫 앨범은 미국 현지에서 녹음했으며 전체적인 음반 컨셉은 '걸파워 신드롬'에 걸맞는 '여성들을 대변한다' 라는 것으로 채택했다. 실제로도 <머리하는 날>, <남자에게>, <미혼모> 등의 앨범 수록곡들은 (그 당시를 기준으로) 현대 여성의 진솔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1집 앨범의 제목인 <Equalize Her> 역시 '여성들에게 평등하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파일:HDg8QRK.jpg1집 시절 베이비복스. 왼쪽부터 김이지, 차유미, 정현전, 정시운, 이희진어서 와 이런 베복은 처음이지?

이들 다섯명은 베이비복스라는 팀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Baby Voice of Expression'의 약자이다. 사실 1집 당시 인터뷰에선 앞에 있는 'Baby'는 1집에서만 사용하는 서브 타이틀이며 '귀엽다' '상큼하다'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고 팀명에 대해 설명할땐 'V.O.X'의 약자인 'Voice of Expression'의 뜻 '목소리로 표현하다' 라고만 언급했다. 팀명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이 따로 있었던거 같은데 결국엔 무산된듯하다. 이후에도 팀명에 대한 정확한 뜻은 멤버들도 소속사도 딱히 정의하지 않았다. 두 단어를 최대한 이어서 생각해볼때, 본래 'Baby'의 사전적 의미는 '아기; 새끼', '(집안・단체의) 막내', '아이 같은 사람' 등으로 정의되지만 여기서 쓰인 'Baby'는 그러한 '사전적 의미'로 보기보다는 'Baby'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주변적 의미'('아이 같은, 순수한, 깨끗한, 맑은' 등)로써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즉, 'Baby V.O.X'란, '순수하고 깨끗한 목소리로 표현하다'는 의미로 보는게 맞는듯 하다.

1.2 베이비복스의 시작

이들은 1997년 7월 3일, 1집 EQUALIZEHER로 가요계에 출사표를 던진다.
남자에게

매장된 첫번째 타이틀 곡 《남자에게 (민주주의)》

1집 앨범의 첫번째 타이틀곡은 원상우 작곡의 <남자에게>였다. 이 곡은 표면적으로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한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곡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을 비판하는 내용보다는 여자 친구들끼리 수다 떠는 내용이 많다소녀시대 아갓보의 원조?. '민주주의'라는 부제도 정치적인 뜻이 아니라, 이름이 '민주'인 친구한테 남자친구를 뺏길 수 있으니 민주를 주의하라는(…) 뜻이다. 이 곡은 난해한 장르와 더불어 무대에서 선보인 기괴한 스타일링(…)과 컨셉은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남자에게>는 SBS와 KBS에서 정시운의 랩 가사가 문제 되어 방송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으며 활동을 한 데는 쇼 뮤직탱크에서 선보인 게 전부였다. 거기다가 한국판 스파이스 걸스로 기획됐지만 당시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H.O.T.와 컨셉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일명 <여성판 H.O.T.>로 홍보하면서 이쪽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악연은 이때부터

<남자에게> 활동은 불가피하게 접고 8월부터 부랴부랴 <머리하는 날>을 타이틀 곡으로 변경해 새로운 프로모션을 시작한다. <남자에게>보다는 대중적인 디스코 넘버의 곡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소소한 반응을 얻긴 했지만 큰 주목을 받기엔 무리였다. <머리하는 날>의 안무는 대략 4번 정도 바뀌었는데 베이비복스 항목에 서술한 대로 초창기 안무가 너무 격렬했던 나머지 리드보컬 차유미가 연습 도중 부상을 당해 활동 초창기 댄스 브레이크 부분에서 혼자 멀뚱히 서있어야 했으며 이 때문에 안무가 여러 번 수정되면서 차유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됐고 열악한 활동 여건을 견뎌내지 못한 차유미는 결국 10월 초 아무 말도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팀의 중심적인 보컬을 맡던 멤버가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소속사측은 차유미의 탈퇴를 발목 부상으로 인한 하차라고 보도했다.

1.3 팀 개편

멤버 탈퇴라는 위기를 맞은 베이비복스는 당시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던 SBS <기쁜 우리 좋은 날>을 제외한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차유미를 대신할 멤버 찾기에 나선다. 이 때 놀이공원에서 베이비복스 원년 멤버들이 ENG 촬영을 하고 있던 와중 개교기념일을 맞아 친구들과 놀러왔던 간미연(당시 고교 1학년)을 한 캐스팅 매니저가 픽업해 DR뮤직으로 연결 시켜줬는데 당시 베이비복스 매니저가 노래방에서 간미연을 오디션[1]한 결과, 고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정 박자가 꽤 정확했으며 노래 실력도 곧잘하는 편이었고, 거기다 눈에 띄는 외모까지 더해져 간미연을 베이비복스의 새멤버로 합류시킨다. 당시 노래방 오디션에서 불렀던 곡은 김현철 & 이소라의 <그대와의 블루>였다고.

머리하는 날
1997년 11월 23일, 간미연 합류 후 첫 방송 무대 《머리하는 날》

간미연이 합류되고 베이비복스는 안무 동선을 전면수정하기 위해 한달 반 가량 하루에 8시간 씩 안무 연습을 하는 강행군을 한다. 그리고 이전에 보여줬던 보이쉬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에서 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컨셉도 새롭게 재정비한다. 1집 녹음에 참여하지 않아 개인파트가 없었던 김이지는 부재한 차유미의 부분을 립싱크했고 새롭게 영입된 간미연과 이희진이 커플 댄스를 추면서 보다 외적인 부분을 어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의상 스타일도 크게 바뀌었는데 무려 스키복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2]간미연이 영입된 베이비복스는 11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때 <머리하는 날>이 가요차트 50위권 안으로 데뷔하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새롭게 영입된 간미연이 팬들 사이에서 예쁘다라며 찬사를 받기도 했다.물론 소수였지만.. 이 후 두달정도 활동을 이어가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1집 활동을 종료한다. <머리하는 날> 활동 이후 <비밀>이라는 곡으로 후속곡 활동을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다. 1집 활동이 끝나고 초창기 멤버 정현전, 정시운이 탈퇴하면서 1997년 말 심은진이 영입된다. 1집 앨범은 46,333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사실 이 시기 이희진은 나이를 한 살 내려서 활동했었는데 이희진의 실제 나이는 1979년 5월 16일생으로 당시 19살이었지만 1980년 2월생으로 속이고 18살로 활동하며 팀의 막내로 활동했다. 혹여나 나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까봐 빠른 년생이 성립되게 생일마저 2월로 바꾸는 치밀함을 보여줬다. 당시 진짜 막내는 1979년 12월생이었던 차유미였다. 하지만 이희진이 외모적인 느낌이 가장 어렸기 때문에 이희진이 가짜 막내로 둔갑(?)해서 활동한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그래봤자 막내 자리는 얼마안가 간미연이 가져갔고 또 얼마안가 윤은혜에게로 돌아갔다(…) 베이비복스 활동 내내 팬들은 이희진의 생일을 프로필 그대로 믿어 정작 본인의 진짜 생일에는 그 어느 팬에게도 축하를 받지 못했던 비화가 있다(!)

2 1998년

2.1 2집 활동

1집 활동 종료 후, 가요계에는 3인조 걸그룹 S.E.S.가 등장하며 소녀스러운 청순함으로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DR뮤직도 고심끝에 팀에 큰 변화를 주기로 시작하는데 1997년 말, 다른 기획사에서 그룹을 준비하던 심은진을 베이비복스로 새멤버로 영입한 후, 1988년 걸그룹 세또래로 활동했던 이가이도 추가로 영입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무려 30살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 새로운 멤버 라인업으로 거듭난 베이비복스는 걸 밴드 컨셉을 잡고 멤버 한명 당 드럼, 베이스, 기타, 건반 등 악기를 연주하는 연습을 했다. 1998년 3월 경에 주영훈김형석에게 곡을 받아 2집 앨범 녹음을 마치고 컴백을 목전에 앞둔 시기에 또 다른 4인조 걸그룹 핑클이 데뷔하면서 S.E.S.와 마찬가지로 소녀스러운 컨셉에 10대 층이 좋아할만한 감성과 가사를 지닌 <내 남자친구에게>등의 싱글이 크게 히트하면서 DR뮤직은 다시 컨셉 경로를 '걸 밴드'에서 S.E.S.와 핑클의 결정적인 히트요소였던 '슈가팝 걸그룹'으로 바꾸고 3월에 컴백하기로 했던 계획을 취소하면서 다 만들어진 곡들을 댄스 버전으로 다시 녹음하며 안무도 새로 구성한다. 그리고 1집에서 취약점으로 드러났던 체력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년 이상 산악 훈련을 하고 전통 무예인 택견을 3개월 동안 배우며 정신수양까지 하는 등 1집의 흥행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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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의 기념비적인 첫 히트 앨범, 2집 BABY VOX II
1998년 9월 15일 발매

그리하여 1998년 9월, 2집 앨범 BABY VOX II를 발매하며 김형석 작곡의 '야야야'로 컴백한다.

야야야
《야야야》 (김형석 작곡, 작사)

<야야야>로 1년만에 돌아온 베이비복스는 1집 시절의 "여성을 대변하는" 컨셉을 과감히 버리고 "부담없는 깜찍한 요정 컨셉"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 발표 한달만에 각종 음악 방송 차트 10위권에 진입하는 등 놀라온 속도로 상승세를 보였고 결국 SBS 인기가요에선 3위까지 랭크되는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야야야> 활동 초반 일명 '누나 부대'의 극성 때문에 베이비복스는 합숙하던 곳에서 쫓겨났지만 두 달만에 다시 팬들이 숙소에 몰려 와 동네 주민들은 베이비복스에게 이사를 독촉했던 해프닝까지 발생했다. <야야야> 활동 이후 주영훈이 작곡한 <Change>도 가요차트 10위 안에 랭크되며 인기를 얻었다. 2집 활동은 1집과 상반되는 인기를 누렸지만 1집 당시의 모습을 좋아했던 기존 팬들은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1집때부터 알아왔던 사람들은 팀명만 같지 멤버들은 완전히 달라져서 나온거라고 착각하기도.

2집 활동 당시 소속사는 간미연을 확실히 센터로 밀어주기 위해 <야야야> 2절에 심은진과 간미연의 커플 파트 중 심은진의 개인 파트였던 "이 세상 끝날까지" 파트를 첫방송 이후 간미연이 립싱크하게끔 수정했다.심은진 안습 하지만 이 당시까진 간미연의 보컬이 완전히 다듬어지기 전이라 이희진과 비슷한 분량을 맡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이희진이 리드보컬이었지만 간미연과 투톱 리드보컬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집의 히트는 후발주자였던 'S.E.S.'나 '핑클'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베이비복스만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1집 시절 보여줬던 강렬하고 파워풀한 안무는 그대로 유지했다. <야야야>의 안무는 아기자기한 노랫말과는 다른 락킹 장르를 선보이면서 주목받았다. 그리고 애초에 2집 컨셉으로 염두해뒀던 걸 밴드 컨셉은 아직 유효해서 2집 앨범에는 멤버들이 직접 악기 세션을 연주해 녹음한 카 펜터스의 <Top of the world>를 수록하기도 했다. 2집 앨범은 최종적으로 206,221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상업적으로도 준수한 성과를 올렸으며 그해 연말 열린 음악 시상식에서 신인상과 인기상등을 수상하며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비디오
2집 컴백 전, 원래 컨셉으로 구성됐던 '걸 밴드' 컨셉 비디오베이비복스 베이시스트 간미연

2.2 이가이의 나이 논란

그러던 1999년 1월, 모 스포츠신문의 독자가 이가이가 모 방송에서 자기 보다 어린 방송인에게 존댓말을 하는 모습과[3] 기타 정황등을 제보해 나이를 속인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국 소속사측은 이를 시인하며 나이를 속여야했던 이유등을 설명하며 PC 통신에 사과문을 기재했다. 그리고 이가이는 팀을 떠난다. 당시 그녀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돈을 벌어야했다고 해명했다. 이가이는 1998년 당시 자신의 실제 출생년도인 1968년도에서 무려 10년이나 낮춘 1978년생으로 프로필을 조작했다. 1988년 세또래 활동 이후 10년만의 복귀를 기념해 10살을 줄인거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연예계 고무줄 나이 레전드로 뽑힌다.

파일:GE7kBJ5.png(빨간 동그라미)1988년 세또래 활동 시절 이가이[4] / 1998년 베이비복스 활동 시절 이가이(다른 멤버들과의 비쥬얼 차이가...)

2집 활동 당시에도 이가이에 대한 추측과 루머들이 꽤 많았는데 10살이나 낮춘 뻔뻔함에 비해 이가이의 모습은 다른 멤버들과 확연히 다른 노티...나는 모습이었고 인기 역시 다섯명 중에 제일 떨어졌던 상황이라 팬들 조차도 이가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Change> 첫 무대에서는 안무를 완전히 까먹어서 무대를 망칠뻔한 사건도 있었던터라 실제 나이가 공개되고 나서도 안타깝게도 팬들은 오히려 다행스러워 했다(…)

3 1999년

3.1 윤은혜 영입과 컨셉 변화

이가이의 탈퇴 이후 한동안 4인조로 행사 위주의 활동을 이어가던 베이비복스는 1999년 4월 새멤버를 영입하는것으로 결정하여 공개 오디션을 개최한다. 이 오디션에서 당시 잡지 모델로 활동중이던 중학교 3학년의 윤은혜가 지원하는데 1차 오디션에서는 부족한 노래실력탓에 탈락했지만 오디션 현장에서 노래를 실수하고 벽을 퍽(!)치는 모습을 본 소속사 사장은 "쟤는 깡이있구나"라고 판단하여 탈락했던 윤은혜를 다시 합격시킨다.[5] 유난히 잦은 멤버 교체로 불안정한 라인업을 업고 그룹의 명맥을 유지해오던 베이비복스는 윤은혜가 영입 된 시점을 끝으로 총 세 차례의 멤버 교체 끝에 드디어 안정 된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다. 베이비복스가 2집 <야야야>로 인기를 얻었지만 당시 여성 그룹의 패권은 S.E.S.와 핑클이 양분하고 있었던 실정이었고 2집 자체도 그 두그룹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성과였기 때문에 소속사는 고심끝에 '자신들만의 길을' 선언한다.

베이비복스는 당시 평균 신장이 168cm로 다른 걸그룹들과는 달리 서구적인 외모의 키도 크고 늘씬한 외모를 자랑했었는데 이점을 활용해 걸그룹 최초의 섹시 컨셉을 시도하게 된다. 전작 <야야야>의 작곡가였던 김형석과 박진영의 작업하에 탄생된 R&B 펑키 댄스곡 <Get Up>을 들고 가요계에 야심차게 컴백한다.

3.2 3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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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의 고유 컨셉과 이미지를 만들어낸 3집 앨범, Come Come Come Baby
1999년 7월 21일 발매

비디오
《Get Up》 (김형석 작곡, 박진영 작사)[6] 베이비복스 최고의 히트곡이자 유행가

사실 베이비복스는 <Get Up>을 타이틀 곡으로 정하는 것에 대해 용기가 필요했다. 이들이 컴백한 시점에서 볼 때 <Get Up>이라는 곡이 다른 여가수들의 노래와는 장르나 느낌이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차별화 전략이 되어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야야야> 시절에 깜찍한 의상을 입고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보고 싶어/사랑한다고 하나 뿐이라고 예쁘게 안아준다면/혹시 넌 알고 있는 건지 나의 두근거림을"이라며 수줍은 고백을 하던 소녀들이, <Get Up>에서는 배꼽이 노출된 아찔(?)한 의상을 입고[7] "자 이젠 내 손을 잡아/이 밤이 다 가기 전에/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만들 거야"라는 은밀한 메시지를 던지며 '베이비복스'의 '베이비'가 무색할 정도로 치명적인 여인의 향기를 풍기며 나타난 것이다. 배꼽 티와 다리를 쓸어올리는 안무와 자극적인 가사 등으로 PC 통신에서는 하루 종일 베이비복스에 관한 이야기로만 뒤덮이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반면 이러한 콘셉트를 내세운 베이비복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섹시' 콘셉트가 터부시 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생이었던 멤버 심은진과 간미연, 심지어는 중학생이었던 윤은혜까지 '섹시' 콘셉트를 내세우고 나왔다는 것에 대해 당시의 대중들로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대중들은 베이비 복스가 3집으로 활동하던 당시, '미쳤네', '어디서 감히 여중생, 여고생들이 그런 콘셉트를 하고 노래하고 다녀, 돌았네' 라는 등의 말들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그만큼 현 시대에 비해 보수적이었던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베이비복스의 전반적인 3집 콘셉트나 선정적(?)인 무대 의상 등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Get Up>의 뮤직비디오는 '한국 역사 상 가장 섹시한 뮤직비디오 중 하나'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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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가 3집 앨범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음악은 미국의 여성 3인조 그룹 TLC 스타일로서, R&B에 펑키스타일을 가미한 음악이었다. <야야야>와 같은 아기자기한 노랫말에 한번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의 슈가 팝 음악에서 탈피해 한 단계 수준을 높였다는 것이 그녀들의 자신감이었다. <야야야> 때부터 베이비복스와 인연을 맺은 국내 최고의 작곡가 김형석이 프로듀싱한 3집의 타이틀 곡 <Get Up>은 김형석과 박진영이 공동 작업하고 두 사람이 마음껏 실험을 시도했던 곡이며, 90년대 최고의 R&B 그룹 '솔리드' 출신의 김조한이 코러스에 참여했다. 사랑하고 있지만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남자에게 용기를 내어 자신 있게 나에게 다가오라는 내용으로, R&B 리듬의 섹시한 분위기와 파워풀한 펑키 비트가 조화를 이루고, 음산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며 섹시함을 과시한 곡이다. 당시 국내 걸 그룹 음악으로는 다소 어렵게도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여기에 다른 걸 그룹들의 '율동' 수준의 안무와는 차원이 다른, 걸 그룹이 아니라 보이 그룹의 안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워풀하고 다이내믹한 댄스로 무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대중들에게 '여성 그룹 중 춤은 베이비복스가 제일이다.'라는 인식이 심어지게 되었다.

첫 1위장면
파일:TNLgr5q.jpg1999년 8월 3일, 데뷔 후 첫 1위를 수상한 베이비복스의 모습

3집에서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을 확실히 굳혔고, 차별화 전략 끝에 마침내 성공을 거두게 된다. <Get Up>은 첫 방영 된 이후 10만 장이 선주문 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1999년 8월 3일 KBS '뮤직뱅크'에서 1위에 오르는 등, 데뷔 이후 2년 만에 최초로 각종 지상파 정상을 차지하며 1999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인기가요가 되었다. 당시 걸그룹계의 양대산맥이었던 S.E.S.와 핑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하였고, 간미연이 그룹의 마스코트로 떠오르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일정한 지명도를 가지게 되었다.

3.3 안티의 시작

그렇게 성공리에 활동을 하던 와중에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H.O.T.의 멤버 '문희준'과 간미연이 사귄다는 루머가 H.O.T.의 팬들 사이에 퍼지면서 H.O.T. 팬들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한것이다. H.O.T.의 팬들은 베이비복스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수많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고, 침묵시위를 펼치고, 무대 위의 베이비복스가 보는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기도 했다. 8월에 있었던 팬사인회 현장에서는 한 여학생이 간미연의 사인대 앞에서 문희준의 브로마이드를 꺼내놓고 사인하라고 윽박질러 매니저들이 긴급히 끌어내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파일:PG3LiSY.jpgKiller 활동 당시 모습

안티들의 공격에도 베이비복스는 <Get Up>을 이을 후속곡 <Killer>로 활동을 재개한다. <Killer>는 1998년 발표된 김현성의 2집 수록곡이었는데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제작진들이 모두 이 곡을 굉장히 좋아해서 이들의 3집 앨범에 리메이크해서 싣게 되었다. 사실 <Killer>를 녹음할 당시에는 3집 활동 기간이었고[8] 간미연이 메인 보컬로 교체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빽빽한 스케쥴에 녹음 스케줄을 같이 병행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간미연은 해당 곡을 녹음할때 A파트를 달라고 했고 결국 얼떨결에 심은진이 원래 간미연의 파트였던 후렴구를 녹음하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까지 심은진은 존재감이나 캐릭터가 확실했던 멤버는 아니어서 회사에서는 메인 파트 자리를 잘 소화할수 있을지 반신반의 했던거 같다. 그럴만도 한것이 <Get Up>으로 인기를 다지고 <Killer>로 자리를 굳혀야 했던 상황이었다. 우여곡절끝에 <Killer>를 녹음하고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관객석에 앉아있던 안티팬들이 <Killer>의 포인트 안무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바꾸어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상한 심은진은 카메라마다 쏘아보며 무대에 임했는데 이게 곡 컨셉과 제대로 맞아 떨어진것이다! 방송을 본 사장님이 심은진에게 전화로 '야이 자식아 바로 그거야!'를 외치며 환호했다고. 이로써 심은진은 <Killer>에서의 보이쉬한 컨셉이 확실히 각인되어 이후에도 베이비복스의 보이쉬 컨셉은 심은진이 담당하게 된다.오오

파일:4laOVah.jpg간미연 살해협박 사건 신문 보도 자료

<Killer>로 활동을 재개한지 얼마 안됐을 무렵, 1999년 9월 10일경 베이비복스의 소속사 DR뮤직으로 "널 기필코 죽여 버리겠어. 희준오빠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해줄게. 몸조심하길."라고 쓰인 피묻은 혈서와 면도날 8개가 함께 우송되어 왔다. 편지에는 간미연의 눈 부위를 도려낸 사진과 8개의 면도날을 동봉해 보내 간미연의 위해를 기도하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여 큰 불안감과 충격을 받은 간미연은 며칠 간 방송 스케쥴을 소화할 수 없었으며, 결국 DR뮤직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며 파문이 일었다. 뿐만 아니라 H.O.T.의 일부 극성팬들은 베이비복스에게 '황산을 뿌리겠다'는 등의 테러위협까지 했다.

뉴스데스크
1999년 9월 1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H.O.T. 극성 팬들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살해 협박사건을 수사 중이었던 서울 강남경찰서는 1999년 9월 15일 강남구 논현동의 베이비복스 사무실에 또 다시 면도칼과 협박편지가 우송됐다는 베이비복스 측의 신고를 받았다. 경찰서 측은 이를 수거하여 서울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지문 감식을 의뢰했다. 경찰은 또 다시 이런 협박편지가 온 것은 이번 수사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H.O.T. 팬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H.O.T. 팬클럽에 대한 정식조사도 검토하였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협박전화가 끊기긴 했지만 일부 PC통신엔 여전히 간미연의 대한 비난과 은근한 협박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H.O.T.의 팬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DR 뮤직이 H.O.T.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인기를 얻으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거나 '간미연에게 간 협박편지에 묻은 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혈액조사를 했는데 매니저의 혈액이었다', '마감뉴스에 자작극이라고 나왔다본 사람은 많다는데 자료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기이한 현상'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소속사와 간미연의 자작극이라고 우기며 터무니없는 루머를 재생산하기까지 한다. 물론 H.O.T. 팬들의 간미연 살해 위협 사건으로 인해 베이비복스라는 그룹을 남녀 노소 누구에게나 이름을 알려지게 하여 의도치 않은 유명세로 그룹의 홍보 효과를 얻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H.O.T. 팬들이 주장하던 '자작극설'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상식적으로 9시 메인 뉴스에 보도된 사건이 일개 중형 연예 기획사에서 행한 자작극이었다면 왜 그 어느 방송에서도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사건이 자작극이었다면 'fact'를 가지고 방송되는 뉴스데스크에서 과연 사실 확인도 없이 해당 사건을 보도했을지도 생각해 볼일이다. 간미연 사건을 자작극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작 본인들이 하루동안의 소식을 전해듣는 대한민국의 뉴스 방송을 불신하는것과 다름 없다.

첫 1위장면
1999년 10월 24일 SBS 인기가요
1위 후보가 무려 베이비복스와 H.O.T.이다.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PC통신이 완전히 뒤집어졌었다.

3.4 종합

간미연 살해협박 소동으로 시끄러워졌던 상황에서도 <Killer>는 <Get Up>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어 SBS 인기가요에서 1위, KBS 뮤직뱅크에서 2주간 1위, KM 쇼! 뮤직탱크에서도 댄스 차트 정상에 등극하며 크게 히트한다. SBS 인기가요에서는 H.O.T.와 무려 3주간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고 KBS 뮤직뱅크에서도 당시 전설적이었던 조성모와 1위 자리를 다퉜다. 비록 1위는 이들이 아닌 다른 가수와 경쟁해서 수상한 것이었지만[9], 그야말로 가요계의 별들의 전쟁이었던 1999년 가을, 베이비복스는 매주 음악방송에서 굳건히 차트 TOP3를 지켜냈다.

행사 등에 출연할 때도 몸값이 폭등하여, 예전 개런티의 두 배를 주겠다며 행사에만 참가해 달라는 각 대학과 단체에서의 베이비복스를 모셔가기 위한 경쟁적인 초청 전화도 끊임없었다. 특히 모 부대에서는 베이비복스의 사인을 받아오는 사람에게는 2박 3일의 특별 휴가를 주기도 했을 정도로 당시 군인들에게 최고 인기 그룹이었다. 그녀들이 장병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섹시함 때문이었다. <Killer>의 히트 요인은 바로 다른 걸그룹과는 차별화된 컨셉에서 비롯됐었다.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를 부르던 다른 걸그룹과는 달리 베이비복스는 가죽 소재의 카리스마 있는 의상을 입고 나와 카메라를 보며 수줍은 미소가 아닌 냉담한 미소를 지었다. 걸그룹으로서는 이뻐 보여야 한다는 편견을 깨부수고 무대위에서는 남자도 소화하기 힘든 격한 안무를 선보이는 당당함까지 보였다. 결국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것이다. 컨셉과 가수가 적절히 맞아떨어졌을때 시너지가 발생한 단적인 예. <Get Up>과 <Killer>로 2연타 히트를 날린 베이비복스는 발라드 넘버 <Missing You>로 두번째 후속곡 활동을 했는데 이 곡 역시 가요차트 최고 8위까지 랭크되며 인기를 끌었고 성공리에 3집 활동을 마쳤다. 이 시기에 CF도 '아이스크림-와', '햄버거-하디스', '쇼핑몰-르네시떼' 등 총 네 건이나 체결하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둔다. 3집 활동을 마감한 후 연말 시상식에서는 데뷔 후 처음으로 KBS와 SBS에서 본상 수상에 성공했고 MBC 10대 가수에도 선정되었으며 서울가요대상에서는 최고가수상과 본상 총 2관왕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2000년 1월 1일, MBC 7대 가수 스페셜에도 초청받는 기염을 토해냈는데 이 방송에 같이 출연한 가수들이 무려 김건모, H.O.T., 핑클, S.E.S., 이정현, 조성모였다(...) 별들의 잔치

4 2000년

4.1 해외활동 가능성 모색

3집 활동 끝 무렵 베이비복스는 해외 시장에 조금씩 접근을 하기 시작했는데 한일합작 영화 <건드레스>의 홍보대사로 위축됨과 동시에 영화 주제가 <Patron>을 녹음하면서 일본 시장에 문을 두드렸고 1999년 11월, 중국에서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고 중국 현지에 앨범을 먼저 발표한 베이비복스는 99년 12월 북경 TV의 `밀레니엄쇼'에 출연하면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1월 4일부터 21일까지 북경 상해 등 주요도시에서 중국프로모션투어로 활동에 시동을 걸었고 이 후 호남위성TV에서 최고의 인기프로인 ‘쾌락대본영’(快樂大本營)의 스페셜코너에 참가,자신들의 히트곡을 열창하며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회사에서는 내수용으로 끝나는 걸그룹이 아닌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그룹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해외 시장 진출을 타진했고 그 시작이 중국이었던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한류붐이란게 일어나기도 전이었던 상황이라 멤버들은 중국 진출을 한다는 얘길 듣고 다들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이제야 고생끝나고 빛좀 보나" 싶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니 절망적이었다고. 그리고 돈을 꽤 벌게된다... 현재 중국시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박으로 보이지만 그건 아직 훗날의 이야기였다.

4.2 4집 활동과 대안티시대

어쨌든 조금씩 해외로 발을 들이던 베이비복스는 4집 앨범 발표를 위해 다시 한 번 고민하며 신중히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LG에서 제작비를 투자받아 음반 제작에 돌입했으며 전체적인 음악 프로듀서는 그동안 베이비복스의 성공을 도왔던 '은인'과도 같았던 작곡가 김형석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일본에서 아무로 나미에 등을 가르쳤던 톱 안무가 '사쿠마 히로유키'를 섭외해서 타이틀 곡의 안무를 지도 받았으며 무대 의상은 디자이너 이상봉을 섭외해 제작했다. 3집 활동 시절 지적받았던 가창력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 강화시켰는데, 코러스계의 대모라고 불리우는 이주연을 노래 스승으로 초빙해 한 달 동안 발성 연습에서부터 창법까지 다시 지도받았다. 그리고 '비디오 형 가수'라고 질책받았던 지난 앨범들과는 달리 4집 앨범에선 음악성도 상당히 신경을 썼고 완성도 있는 앨범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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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 역대 앨범중 가장 명반으로 평가받는 4집 Why
2000년 5월 16일 발매

why《Why》 (김형석 작곡, 양재선 작사)

2000년 5월, 약 6개월만에 국내 무대로 컴백한 베이비복스는 2000년 5월 2일 중국 계림에서의 한중 우호의 밤 공연에서 타이틀 곡 <Why>를 중국에서 먼저 선보였다. 이 날 공연은 중국 공영방송인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위성 생방송되었다. 뮤직비디오 역시 이틀 간 중국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계림에서 촬영했다. 또한 <Get Up>과 <Killer>에서 파워풀함이 돋보이는 선 굵은 안무로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베이비복스는 <Why>에서 여성의 곡선을 강조하는 화려하고 섬세한 안무로 3집의 '파워풀한 섹시미'에서부터 한 단계 더 진화한 '섬세한 섹시미'를 발산했다. 3집으로 인기 탄력을 받은 베이비복스는 4집 음반을 발매한지 보름만에 15만장 이상을 판매하며 상승세를 이어가는듯 했다. (사실 총판매량은 155,000 장이라 DR뮤직의 언플일수도 있다.)

파일:HrVJiaq.jpg윤은혜 물총테러사건 신문 보도자료

하지만 <Why>때 선보인 이희진의 금발 스타일을 문제삼아 KBS는‘공영방송’임을 내세워 다른 방송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규제를 해왔기 때문에 뮤직뱅크에서는 한동안 출연이 정지되었고 MBC 음악캠프에서 첫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인기가요에서는 2주 뒤에 출연이 성사되면서 방송 프로모션에 지장이 왔다. 거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5월 25일, 한양대 안산 캠퍼스에서 예정된 경인방송의 <뮤직엔진>에 출연하기 위해 소속사 차안에서 대기하던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쏜 물총에 윤은혜가 눈을 정통으로 맞았다. 이 남자는 열렬한 베이비복스 팬을 자처한 다음 피카츄 인형을 선물하는척 하면서 갑자기 물총을 꺼내 윤은혜의 눈에 정통으로 쏜 뒤 쏜살같이 달아났고 결국 윤은혜는 각막 손상을 입으며 한동안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파일:ZXunqdr.jpgWhy 활동 모습

타이틀 곡 <Why>는 초반 기세에 비해[10] 큰 히트를 치진 못했고 SBS 인기가요에서는 최고 3위, MBC 음악캠프에서는 4위까지 랭크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활동 후반 6월 20일에 KBS 뮤직뱅크에서 1위를 수상하긴 했지만 확실히 3집 때 임팩트보단 덜 했다. 비슷한 시기 4인조 신인 그룹 샤크라가 <한>과 <Hey U>등의 싱글을 히트시키고 강자로 떠오르면서 두 그룹간의 라이벌 구도가 생겼으나 갓 1집을 낸 신인이었던 샤크라와 비교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 7월 경에 <Why>활동을 종료한 베이비복스는 곧이어 강한 힙합풍의 댄스곡 <배신>으로 후속곡 활동을 재개했으며 이 당시 인기 보이그룹들과 활동 시기가 겹쳐 베이비복스는 엄청난 안티들에게 3집때보다 더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간미연을 비방하는 글과 테러 위협 메시지를 담은 디스켓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이 적힌 편지까지 전달하는 등 지속적으로 베이비복스 멤버들을 협박해오던, 경북 울산의 모 고교에 재학 중이던 C모양은 베이비복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자 '간미연 사건은 자작극'이란 소문을 퍼뜨리며 조직적으로 활동을 방해했다. 3집 활동 때부터 수차례의 테러위협이 있어도 철없는 학생의 소행이거니 하며 그냥 넘겼던 DR 뮤직은, C모양이 자신의 소재까지 밝히며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후 2000년 7월에 경찰에게 베이비 복스의 협박범으로 잡힌 C모양은 H.O.T.의 여고생 팬이었다. 하지만 베이비복스 측이 처벌을 원치 않아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이 밖에도 안티 팬들은 온라인 상에서 간미연의 수능점수에 대한 것까지 시비를 거는 등 도를 넘어선 인격 모독적이고 저질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2000년 7월 16일자 일요신문에 실린 안티 팬들의 사이버 테러 및 악질 루머 생산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당시의 간미연이 심적으로 얼마나 괴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최근 들어 안티 혹은 베이비 복스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간미연 : '무식하다' '돌머리' '골빈X' 등 참으로 입밖으로 꺼내기 민망한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안티뿐만이 아니라 일부의 우리 팬들도 나한테 그런 욕을 한다는 것이다.

- 그때의 기분은.

간미연 : 뭐, 아무렇지도 않다. 거의 매일 수백번 듣는 소리니깐.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다.
거의 하루일과처럼 그런 욕을 듣는다. 하지만 내 팬들까지 그럴 땐 정말 슬프다.

2000년 7월 22일 MBC '음악캠프'에서는 모 남성그룹 팬들과 베이비복스의 팬들이 충돌하는 소동이 벌여졌다. 베이비복스가 무대를 가졌을 때 해당 남성그룹의 팬들과 기타 남성그룹 팬들이 단체로 곡의 도입부부터 첫 소절까지 박자에 맞춰 '꺼져라' 라고 외친 것이다. 그날 방송에서 해당 그룹이 1위 후보로 출연한 MBC '음악캠프'에서 해당 팀이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춤과 노래를 선보인 뒤 내려간 뒤 베이비복스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해당 남성그룹 팬들을 비롯한 1만여명의 팬들이 단합이라도 했듯이 그녀들을 향해 "꺼져라" 등 심한 야유를 퍼부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졌던 터라 현장의 야유 소리는 그대로 방송전파를 타고 안방극장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동안 일부 팬들이 특정그룹에 대해 야유를 보낸 적은 있지만 이처럼 모두가 한 그룹에 대해 야유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 날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자신들에게 응원을 하는 줄 알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캠프2000년 7월 22일 MBC 음악캠프 방송 자료.
베이비복스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연신 꺼져라를 외쳐대고 있다.

이 날 MBC 게시판에는 해당 남성그룹팬들이 베이비복스를 향해 야유의 소리를 질러 생방송에 그대로 나간 점에 대한 책임을 해당 팀에게 물어 그 그룹을 당분간 출연정지 시킨다는 '음악캠프' 측의 글이 올라왔고, 이는 베이비복스에 적대감을 느끼던 해당 남성그룹 팬들의 감정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공방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베이비복스와 해당 남성그룹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상대 측을 비방하는 글들이 연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올라왔다. 양 측의 비방은 그 수위가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으며 팬들 사이에 일전을 불사할 듯한 적대적인 멘트가 오가는 가운데 베이비복스와 해당 남성그룹 사이에도 자연스레 냉기류가 흐르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당 그룹의 팬클럽에서 "꺼져라" 사건을 주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 사건 이후로 두 그룹이 서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사실을 확인 해 본 결과 당일 MBC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은 '음악캠프' 측에서 올린 것이 아니었고, 해당 남성그룹의 출연정지 또한 전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음악캠프' 팀은 그 날 가수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팬들 때문에 서먹서먹해진 두 팀을 이어줄려는 계획도 했지만 팬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당시 베이비복스 안티 팬들은 대부분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이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10대 여자 중,고등학생으로 분별력이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지고 감정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연령대의 사춘기 소녀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합리적인 이유라거나 자신들의 주관도 없이 그저 주위의 또래 친구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베이비복스의 안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7-22 사건> 이후에도 베이비복스의 음악 방송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꺼져라' 소동이 벌어졌었다.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이 사실을 알고나서 부터 오히려 방긋방긋 웃으며 안티들의 사기를 더욱 돋게 만들었다고.강한 여자들

소속사는 결국 해외쪽으로 방향을 돌려 활발한 활동을 추진했다. 8월 말부터는 국내 활동보다 해외 활동에 치중했는데 우선 중국 청도에서 열린 '세계 맥주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초청되어 비지스, 우타다 히카루, 코코리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합동 공연을 펼쳤고 한국 가수로는 '코리아나'가 초청을 받은 이후 베이비복스가 두번째였다고 한다. 이 공연은 중국 CCTV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위성채널을 통하여 방송되었다. 이어서 중국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고 중국 북경 세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공연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에는 아시아 8개국의 대표가 초청받았으며, 베이비복스는 한국 대표 자격으로 출전한 것이었다. 당시 공연에서 베이비복스에 대한 중국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연장에 운집한 관중들은 여타 가수들보다 베이비복스가 무대에 오르자 연신 '베이비복스'를 외치며 다른 뮤지션들을 무색케 만들었다. 9월에는 미국 뉴욕과 LA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앞서 김건모, 김현정, 안재욱, 클론 등과 함께 한국대표팀 응원가를 녹음했다.

4.3 대한해협 횡단

파일:RqzCCfM.jpgSBS 뷰티풀 라이프 녹화 당시 모습

2000년 1월 방영된 god의 육아일기는 아이돌 예능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주었고 베이비복스도 대중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는 노력의 일환으로 7월부터 SBS의 예능 프로그램 '뷰티풀 라이프'에서 수영선수 故 조오련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에 참가했었다. 이 프로젝트는 '아시아의 물개' 故 조오련 선수가 단신으로 부산 앞바다에서 대마도까지 횡단에 성공한 후 당시 코치였던 지봉균 감독과 "20년 뒤 다시 도전하자"고 한 약속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2000년 8월 12일 횡단 1차 시도에서 출발 11시간 만에 악천후로 인해 경남 통영시 홍도 앞바다에서 철수해야 했던 베이비복스와 대한해협 횡단 팀은 이번에도 폭우 때문에 거제도에서 사흘 간이나 대기해야 했으나, 8월 28일 오후 1시 거제도를 출발하여 예상보다 무려 6시간이나 단축 된 18시간 20분만인 29일 오전 7시 20분 대마도에 도착했다. 故 조오련을 시작으로 소지섭, 정유진, 최종원, 유정현, 이훈, 베이비복스등의 연예인 참가자들과 6명의 일반인 참가자들의 릴레이 수영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대한해협 횡단을 성공시킨 횡단 팀과 베이비복스는 바다의 날씨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안심할 수 없었고, '아직도 성공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특히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처음에 물에 뜨지 못했을 정도로 수영을 전혀 못했었기 때문에 횡단 성공은 더욱 뜻깊었다.

두 달 남짓 계속 된 강행군에 멤버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기도 하였다. 7월 한 달 동안 이희진 김이지 윤은혜 등 3명이 잇달아 쓰러지고 8월에 심은진도 병원 신세를 졌다. 심은진은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지방 행사를 돌다가 그만 과로에 탈진 증세를 보여 부산 모 병원 입원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 때문에 일부 방송 프로그램과 대한해협 횡단 팀의 거제도 훈련에는 심은진을 제외한 4명만이 출연했다. 한편 한여름 무더위와 강도 높은 수영 훈련, 빡빡한 스케줄에도 베이비복스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쓰러지지 않고 끄떡없이 버텨 온 간미연은 강철 같은 체력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베이비복스는 대한해협 횡단을 위해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만 앞섰지만 무사히 횡단을 마친 이후에는 그녀들에게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녀들이 4집 활동 중 가장 뜻깊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4.4 본격적인 해외 활동

10월에 4집 활동을 종료한 베이비복스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ON AIR WEST LIVE HALL에서 미니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약 2,500여석의 좌석이 모두 매진되었고 팬사인회에서도 많은 팬들이 몰려와 성황리에 첫 일본 프로모션을 마쳤다. 이 후 일본 인터넷 벤처기업 프리맥스와 일본 활동에 관한 매니지먼트 정식계약을 맺었다. 일본의 벤처기업 프리맥스는 당시 세계정복을 목표로 연예관련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 번째 타자로 베이비복스를 낙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구체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화권 활동이 많았기 때문에 인기를 얻으려면 최소한 1년에 싱글 2장 이상, 정규 앨범 1장을 발매해야하는 일본의 시스템을 따라가기에 무리가 있던듯.

그리고 11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국내 여성그룹으로는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중국에서의 인기를 입증시켰다. 2000년 말에는 초특급 대우를 받고 중국 국영기업체의 CF 모델로 발탁되었고 중국 스포츠웨어 업체인 '뻬뻬지아'와 1억원에 전속 계약을 맺고 CF를 찍었다. 중국 국영기업체 CF에 외국인 모델이 나서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 이후 베이비복스가 두 번째였으며 1억원은 중국 톱모델급 개런티였다. 베이비복스가 등장한 CF는 2000년 연말부터 중국 TV를 통해 방송되었다. 또, <Why>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던 계림시 측은 베이비복스가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난 후 관광객이 급증하였다며 베이비복스를 계림시 홍보대사로 위축하기도 했다. 한편 베이비복스는 중국에 클론, 이정현 등과 함께 콘서트를 하러 출국하여 무대에 섰지만 공연 사기를 당하여 호텔비를 내지 못해 호텔에 감금되는 바람에 비행기 티켓조차 구하지 못하여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뻔한 일도 있었다.

4.5 종합

2000년 연말, 국내에서 제1회 애견문화인의 상, SBS 서울가요대상 인기상,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상, KBS 가요대상 본상, KBS 연예 예술 대상 신세대 중창 가요 부문, iTV 한국 연예인 대상 본상 등을 수상하며 4집 활동을 마무리했다. 4집 앨범은 음반산업협회 기준 155,864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5 2001년

국내에서 4집 활동을 마무리 한 뒤에도 2001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강서 TV 주최의 '새천년 쇼'에 해외 아티스트 대표로 참가했다. 해외 스타로는 베이비복스가 유일했다. 그 날 공연에는 중국과 화교권 가수들이 다수 참여했는데 베이비복스는 중국 대표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 상한가로 당시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중국을 왕래하던 베이비복스는 그 해에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 잡지였던 'POP 젊음의 음악'에서 앙케이트 조사 1위 그룹으로 꼽힐 만큼 인기 상한가를 누렸다. 아시아 가요시장에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던 베이비복스는 2001년부터 장기적인 대륙 진출을 준비하게 된다.

베이비복스는 새로운 활동을 위해 5집 앨범 작업에 시작한다. 원래 계획으로는 1월 중순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베이비복스내의 대대적인 변화를 위해 제작이 지연되어 6월에 발매된다.

5.1 5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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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성이 강점이었던 4집에서 다양성을 추구한 5집
Boyish Story, 2001년 6월 4일 발매

5집 <Boyish Story>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대만 등 아시아 7개국에서 동시 발매되었는데 당시까지 국내 가수들이 해외에서 히트곡 모음집을 발표하고 간혹 콘서트를 통해 얼굴을 알려왔던 점을 감안하면 베이비복스의 7개국 동시 발매는 국내 가수로서 본격적인 해외 공략의 신호탄이었다. 이들은 수출용 앨범에서도 한국어로 노래했는데 특히 중국의 경우, 어설픈 중국어보다는 한국어를 사용해야 팬들이 더 열광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어로 불러야 중국 내에 불고 있던 한국어 배우기 붐에도 일조한다는 생각에서였다. 5집 앨범 발매를 기념하여 해외 투어도 계획하였다. 5집 앨범부터 몇가지 변화를 주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로는 멤버들이 작사, 작곡, 의상, 안무 등에 적극 참여한 점이다. 원래 1월에 발표될 예정이었던게 6월로 미뤄진 이유도 이때문이었다. 그동안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그저 '얼굴로만 승부하는 걸그룹'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하여 5개월여 동안 음악 수업을 받았고, 그 결실을 맺은 5집은 멤버들이 직접 곡 작업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파일:T6PwSc5.jpg<Game Over> 컨셉 샷

5집 앨범에서 김이지는 <부디>, 이희진은 <The One>, 심은진은 앨범의 <Intro>와 <Outro>, 간미연은 <마지막 선물>을 각각 작사, 작곡했으며, 윤은혜는 <To. Angel>을 작사했다. 5집 타이틀 곡 <Game Over>는 작곡가 김형석이 작곡하고 작사가 양재선과 멤버 김이지가 공동작사한 곡이다. 멤버들의 화음과 신명이 감미롭게 배어나는 댄스곡으로, 곡 제목인 <Game Over>에서의 'Game'은 사랑을 의미한다. 당시 이 곡의 작사에 참여했던 김이지는, '사랑을 마치 게임처럼 하는 요즘 세태를 담았다'면서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끝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5집 앨범은 음악성 면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김이지가 작곡에 참여한 <부디>는 큰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전반적인 콘셉트의 변화도 컸는데, 앨범 제목인 <Boyish Story>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5집 활동부터는 4집 <Why>에서 보여주었던 여성스럽고 섬세한 섹시미와는 대조되는 보이시하고 선 굵은 섹시미를 발산하였다는 점이다. 그룹 내에서 주로 청순하고 세련된 이미지였던 멤버 이희진은 그동안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긴 생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도도한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로 변신하였고, 주로 중성적이고 카리스마있는 이미지였던 멤버 심은진 역시 숏커트 스타일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하여 보이시함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의상을 입었던 지난 앨범들과는 달리 국내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매니쉬룩 정장을 입고 등장했고 힐을 포기하고 강렬한 안무 소화를 위해 단화를 신고 무대에 올랐다.

game over《Game Over》 (김형석 작곡, 양재선,김이지 작사)

4집이 기대보다 히트치지 못했기 때문에 5집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 시기부터 국내 활동보다 해외 활동에 치중했기 때문에 4집보다 더 부진한 성과를 가져왔다. 타이틀 곡 <Game Over>는 역대 최고기록이 뮤직뱅크의 4위 랭크이며 1위 후보에도 들지 못하는 성적을 내었던 터라 국내보다는 중국 시장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문화 수출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베이비복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내 팬들인데도 한동안 국내 팬들에 등한하다는 질책을 받았다. 베이비복스 멤버들도 그런 국내 팬들의 반응에 대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이비복스측은 "중국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 팬들이 훨씬 소중하죠"라며 그동안 다소 국내 무대에 소홀했다고 아쉬워하면서 7월부터 8월까지는 중국 공연도 미루며 국내 활동에만 전념할 것을 선언했다.

<Game Over>를 이을 후속곡으로 정연준이 작곡한 <가까이>로 정하고 7월 말부터 활동을 벌일 예정이었는데, 해당곡의 가사가 진한 사랑 행위를 연상시키는 적나라한 성적 표현이 문제가 됐다. [11] 몇몇 팬들은 소속사인 DR 뮤직 측에, 누가 <가까이>를 후속곡으로 정했는지, 후속곡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가까이> 로 얻고자 한 건 무엇인지, 팬들의 의견을 알아보기나 한 건지 등을 대답해달라는 공개 질의서까지 보냈다. 베이비복스측은 <가까이>를 후속곡으로 정한것은 단지 음악적인 이유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동시에 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속곡 선정 계획을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일단락되었다. [12] 결국 <가까이>는 이미 공중파 방송사의 사전심의를 통과한 후였지만 부랴부랴 후속곡을 김형석 작곡의 <인형>으로 교체하게 된다.

2001년 8월부터 후속곡 <인형>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인형>은 타이틀 곡 <Game Over>보다도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후속곡으로만 추가적으로 3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의 성과를 보이며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다. 그 당시 10대 소녀들 사이에서도 수학여행 장기자랑 등에서 베이비복스의 안무를 따라하는 것이 대세였을 정도로 큰 인기였다. 그런 영향 덕분이었는지, 4집 활동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온갖 기승을 부리던 안티 팬들도 표면적으로는 눈에 띄게 줄어든 양상을 보였다. 5집 활동은 10월까지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9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연말에는 KBS 가요대상에서 본상, (주)모델라인 주최 베스트 드레서 상 가수 부문 등을 수상했다.

참고로 mbc 음악캠프에서 활동했을 때는 game over로만 2번 활동할 정도로 활동이 적었는데, 이 때 음악캠프는 연제협 사태로 인해 결방이 많았던 터라 후속곡 인형으로는 활동도 하지 못했다.(참고로 여기서의 최고 순위는 16위)[13]

인형《인형》 (김형석 작곡, 양재선 작사)

5.2 이어지는 중국에서의 활동

<인형>으로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던 2001년 8월, 한류 열풍의 주역으로서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장을 받은 베이비복스는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중국 선양, 상하이, 베이징 3개 도시에서 '한중수교 9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23일 선양 랴오닝체육관에 이어 25일 상하이(대무대체육관), 28일 베이징(공인체육관)에서 잇따라 열린 당시 공연은 중국 CCTV를 통해 중계되었으며 국내에서도 녹화중계 되었다. 또한 2001년 8월 말부터 연말까지 계속 된 중국 7개 도시에서의 순회 공연은 회당 출연료가 6,000만원을 넘어서며 또 한 번 그들의 중국 인기를 실감케 했다.

파일:SuFoq3D.jpg2001년 중국 순회 공연중의 베이비복스

중국 베이징에는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딴 학교가 생기기도 하였는데 중국 정부에서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산간벽지에 학교를 세워주는 '희망 공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 프로그램에 베이비복스가 참여하여 중국 언론과의 회견이 대대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베이비복스는 '현대모니터' 중국 법인(현대 톈진(천진) 다매체 유한공사ㆍ법인장 김호연)과 함께 베이징 근교의 황산취 도거주앙 중학교와 옌창현 칭룽전 초등학교 등 2개 학교에 42대의 컴퓨터와 현대모니터를 기증했다. 학생 정원 1,200명이었던 북경의 황산취 도거주앙 중학교에서는 아예 컴퓨터 교육 교실과 학교 간판을 베이비복스로 갈아 달며 뜨거운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베이비복스는 이후로도 컴퓨터를 기증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실시하여 중국 내 각 성에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단 학교들이 생기게 되었다.

전 해였던 2000년 10월에 계림시 관광 친선대사로 임명 된 바 있던 베이비복스는 2001년 '여위쥐'(중국 내에서 여행ㆍ유람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으로 관광청에 해당하는 기관)가 새로 설립한 리조텔에 출자하여 리조텔 내부에 '베이비복스 쇼룸'이 오픈됐다. 이 쇼룸에서는 베이비복스의 CD 및 공연 사진과 브로마이드 등을 비치해 판매했으며 리조텔에서 발생한 수익금으로 계림시 초등학교에 도서를 기증하였다. 계림시는 베이비복스가 관광 친선대사로 임명 된 이후 계림시의 한국인 관광객이 26% 증가된 점(계림시 방문 외국 관광객 증가율 1위)에 고무되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체류, 관광 비용 일체를 계림시에서 부담하여 베이비복스 멤버들의 부모님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2001년 11월 5일 계림시의 계산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는 '베이비복스 흉내내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이에 앞서 베이비복스는 2001년 11월 3일 이 호텔에서 열린 국제 관광제 개막행사에 참가하였고, 4일에는 카퍼레이드, 5일에는 팬 미니콘서트에도 참여했다.

베이비복스 측은 "지난 3년 간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류 열풍'의 주역이 됐지만 일부에서는 외국인들에 대해 견제하는 것도 사실"이라며 "버는 만큼 투자하고 베푼다는 차원에서 중국 내에서의 공익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베이비복스는 2001년 9월 한ㆍ중수교 9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심양(선양), 베이징 공연에서 기획사인 희래예술단(대표 유정자)으로부터 공연 개런티는 물론 체류경비까지 받지 못하는 등 사기를 당한 바 있었는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공연을 강행하여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데 대해 중국 팬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6 2002년

6.1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인기

베이비복스는 2002년 1월 1일 새해 첫 날부터 중국의 칭다오 인민체육관에서 공연을 했다. 2001년 4월 20일부터 베이징을 시작으로 충칭, 상하이 등 12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해왔던 베이비복스는, 그 날 칭다오 공연으로 14번째 현지 공연을 하며 2001년의 중국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당시 공연은 7만 5천명을 수용한 대규모 무대로 치러졌다. 베이비복스는 그 날 공연 이후 베스트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2002년 4월, 중국에서 톱스타 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간미연은 '과일나라'와 전속 모델 계약을 맺었다. 간미연이 한국 연예인 중 중국에 제일 먼저 진출했으며, 중화권에 한류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베이비복스 멤버로서 깜찍한 용모와 뛰어난 춤, 노래 실력으로 멤버 중에서도 특히 중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 천진에 '천진동양화장품유한공사'라는 현지법인을 갖고 있던 '과일나라'는 간미연의 중국 내 높은 인기와 깨끗한 이미지가 자사가 추구하는 콘셉트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판단 아래 중국 내 지면광고에만 출연하는 조건으로 1년 전속에 2억 5,00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전격 모델계약을 맺었다. 이 같은 특급 대우는 당시의 역대 중국진출 연예인 중 김희선(6억원)과 안재욱(4억원)에 이어 3위에 해당했으며, 여자 가수로는 최고의 액수였다. 2002년 4월 10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라디오 방송국 협회가 뽑은 '최우수 한류가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여성그룹으로 선정됐다.

6.2 5.5집 활동

2002년 4월, 스페셜 앨범 <BABY V.O.X. SPECIAL ALBUM>으로 가요계에 컴백한다. 그동안 함께 작업한 김형석이 아닌 김창환의 곡을 받아 발표한 앨범이었다.원래는 3월 발매 예정이었으나, 신곡 수록에 대한 문제로 연기되어 5월에 발매 되었다. 작곡가 김창환이 특별히 베이비복스를 위해 내놓았던 <우연>은 그동안 베이비복스가 선보였던 스타일에서 벗어난 하우스 댄스곡으로, 중국 활동을 함께하며 친분이 두터웠던 클론강원래가 사고 후에 처음으로 안무를 맡아 베이비복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파일:Q0BC970.png
베이비복스 역대 앨범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Special Album
2002년 4월 24일 발매

스페셜 앨범은 총 4장의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 CD에는 신곡 2곡 <우연>과 <Go>과 함께 1집부터 5집까지의 히트곡이 리믹스되어 수록되었다. 두번째 CD에는 1집부터 5집까지의 신나는 댄스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번째 CD에는 그동안의 발라드 넘버들이 총망라되어 수록되었다.

우연《우연 (우울한 우연)》(김창환 작곡,작사)

스페셜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던 <우연>은 '콜라'의 <우울한 우연>이 원곡인 리메이크 곡으로, 작곡가 김창환이 '콜라'에게 곡을 주었다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일본의 'Color'라는 그룹에게 <快樂>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주었다가, 그래도 빛을 보지 못하자 또 다시 베이비 복스에게 <우연>이라는 제목으로 주게 된 곡이다.

제 주인을 찾지 못했던 이 곡은 돌고 돌아서 <우연>이란 제목으로 베이비복스에게 간 끝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베이비복스는 <우연>으로 3집 이후 국내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3주 연속으로 SBS 인기가요에서 1위 수상을 하였다. 또한 <우연>은 당시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2002 한일 월드컵 붐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신나는 비트로 인해 월드컵 주제가로 지정되고, 곡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 가요계의 불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복스 활동 중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또한 2002년 벨소리 차트에서도 걸그룹으로는 유일하게 10위권에 들며 이 당시 걸그룹들중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달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음반 판매량도 24만장을 돌파하며 베이비복스의 전체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본래 한달간 활동 하려던게 두달로 늘어난거라 후속곡 활동은 아쉽게도 없었다. 앨범에 수록된 <Go>가 베이비복스의 숨은 명곡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팬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었는데 활동도 없이 2002년 6월 30일자 SBS 인기가요에서 17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6.3 첫 단독 콘서트

파일:LoYJpgq.jpg단독 콘서트 포스터

2002년 8월 15일에는 리더 김이지가 재학했던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데뷔 6년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총 2회의 공연을 선보였으며 8000여명을 동원했고 전석매진을 기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베이비복스는 그 동안 중국 무대에 주력하다보니 국내 팬들에 소홀하다는 질책도 많이 받았는데, 그 때문에 대중문화 수출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국내 팬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8월 15일의 국내 첫 단독 콘서트의 성공은 의미가 컸다. 베이비복스는, "중국 팬들의 사랑도 좋지만 한국 팬들의 지지를 얻을 때 더 큰 힘이 난다"며 데뷔 이후 발표했던 모든 히트곡을 라이브로 열창하며 화려한 무대를 꾸몄다. 공연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쑈쑈쑈'. 기존 콘서트의 틀을 깨는 '난장 파티'를 연출하며 확실한 볼 거리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연 실황의 모습은 M.net에서 1시간 분량으로 편집되어 방송에 송출되었고 추후에 VCD화 되어 발매 되었으나, 워낙 물량을 적게 뽑아 지방에 사는 팬들은 구입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중고로도 보기가 힘들다.

go《Go》 (김유라 작곡)
2002년 8월 15일에 있었던 첫 단독 콘서트 영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6.4 중국 '베이비복스 가요제' 개최되다

파일:UCN0xei.jpg
2002년 7월 중순부터는 중국에서 '베이비복스 가요제'가 중국 15개 성에서 개최되었다. DR 뮤직이 중국 내의 우수한 인재 발굴과 한국가요 붐을 조성하기 위해 각 성 방송사들에 제안한 것이 흔쾌히 받아들여져 이뤄진 것이었다. 이는 당시에 이미 한류의 주역이라기보다 중국의 국민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베이비복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가요제는 중국 내 각 성들과 도시들이 한국의 '강변가요제'나 '난영가요제'와 같은 특색 있는 도시 행사로 발전시키겠다는 의견을 내놔 중국 15개성으로 확대됐다.

김이지와 이희진은 2002년 5월 10일 소속사 대표와 함께 강소성 중앙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가요제의 테이프를 끊었다. 중국 강소성에서 베이비복스 멤버와 강소성 중앙방송사 대표, DR 뮤직 윤등룡 대표가 중국 언론을 대상으로 가진 기자회견 현장에는 '양자만보', '남경 아침일보', '금령만보', '남경시 라디오방송' 등 30개가 넘는 현지 매체가 참석하여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베이비 복스 멤버들은 "단순한 가요제가 아니라 도시의 대표적인 축제로 만들겠다"며 자신들의 이름을 딴 가요제 개최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강소성의 경우, 한 달 동안 4차에 걸친 예선과 결선을 TV를 통해 생중계 하는 등 당시 가요제에 대대적인 관심을 보였고, 2002년 6월 28일 최종 예선을 치뤘던 남경의 경우 1만 6,000명을 넘어서는 참가자가 몰리는 등 상해 광주 심천 삼성 등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내건 행사였던 만큼, 자작 곡을 들고 치러지는 한국의 가요제와 달리 참가자들은 베이비복스의 노래나 한국 가요를 들고 나와 예선을 치뤘고, 2002년 10월에 최종 본선이 열렸다.

한편, 이 가요제에서 입상한 '장리인'은 DR뮤직에 선발된 후 2003년 1월에 10년의 기간으로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가수 트레이닝을 받아오다가 중간에 DR 뮤직에서 나와 2004년에 'H.O.T. china'를 통해 오디션을 보고 SM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DR뮤직 측은 이를 모르고 있다가 장리인이 데뷔한 이후 음색이나 창법이 유사하여 찾던 도중에 장리인이 DR 뮤직의 연습생으로 있던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DR 뮤직은 "감쪽같이 속았다"면서 장리인과 SM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후 DR뮤직은 1년여간 SM 엔터테인먼트와 장리인을 잇달아 접촉했으나 협상이 원활치 못해 결국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DR뮤직의 한 관계자는 "당시 계약서에 따르면 장리인은 계약파기시 손실액과 위약금 등 총 500만 위안(약 6억 4,000만 원)을 물어줘야한다"면서 "하지만 한국 음반 기획사 간의 관계를 고려해 기존 장리인에게 투자됐던 비용에 해당하는 2억 원만 돌려받자는 취지에서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2년 7월에는 홍콩에 이어 8월 대만과 태국 등지에서 프로모션 활동을 펼쳤다. 2002년 7월 20일에는 중국 북경의 CCTV 공개홀에서 MBC와 중국 국영방송 CCTV가 공동 주최한 한∙중 수교 10주년 기념 콘서트에 베이비 복스도 참가하였다. 한국과 중국 측 인기 가수들이 대거 참가했던 당시 콘서트는 CCTV 채널4를 통해 한∙중 수교일이었던 2002년 8월 24일에 선보였으며, MBC는 2002년 9월에 당시 공연을 추석 특집으로 방송했다. 그리고 멤버 개인 활동도 크게 두드러졌는데 2001년 이미 한중합작 영화 <적혈매괴>에 캐스팅 되었던 김이지는 2002년에도 한중합작 드라마 '북경 내사랑'에 캐스팅 되었다. 간미연과 심은진은 국내 예능 버라이어티 쇼에서 맹활약하며 5집으로 잠시 주춤하는듯 했던 베이비복스의 인지도를 다시 높였다.

6.5 여성그룹 '디바'와의 마찰

파일:LDkh1HA.png베이비복스 & 디바. 눈 깔아..

그렇게 개인활동과 해외활동을 병행해오던 2002년 연말 KMTV 시상식에서 3인조 걸그룹 '디바'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사실 전부터 두 그룹은 앙숙 사이로 유명했고 해당 시상식에서 디바와 베이비복스 코요태 세 팀이 합동무대를 꾸며야 했던 터라 베이비복스와 디바가 함께 대기실을 써야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디바의 멤버 '지니'는 공연을 하기 싫다며 신라호텔로 잠적해 버린것이다. 결국 제작 본부장이 신라호텔까지 찾아가 달래는 해프닝 끝에 디바는 행사장으로 돌아왔다. 아슬아슬하게 두 팀이 다시 모여 본 무대에서 올랐지만 베이비복스가 무대를 서고 있던 중 디바 멤버들이 전원 무대를 내려가는 해프닝이 발생한다. 원래 콘티대로라면 베이비복스가 노래하는 동안 디바도 노래에 맞춰 춤을 춰야 했었는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디바는 결국 본인들의 무대가 끝나고 베이비복스의 노래가 흐르자 무대 밖으로 내려간것이었다. 이 사건은 신문 1면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이 해프닝이 생긴것은 두 팀간의 작은 오해 때문이었는데 2011년 강심장에 두 팀이 동반 출연했을때 디바의 '비키'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기로는 "리허설을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베이비복스가 멤버 간미연이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를 성의 없이 했다더라"며 이어 비키는 "내가 선배고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화가 났다. 선배가 지나가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나 싶어 '인사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가, 똑바로 하던가'라고 말했다"고 전했고 결국 간미연은 울면서 공개홀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희진은, "미연이가 평소 잠이 많은 친구인데, 그 때 너무 피곤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졸고 있었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다"라면서 "미연이가 자다가 말고 너무 놀라서 울면서 나갔다"고 했다. 이 날 이후로 두 그룹은 같은 방송에 출연할때면 크고 작은 충돌이 빚어졌고 결국 연말 무대에서 사건이 터진것이었다. 어쨌든 10여년만에 베이비복스와의 불화에 대해 털어놓은 비키는 "그 땐 어려서 그랬는데 지금은 우스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니, 이젠 그런 게 다 필요가 없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훈훈하게 마무리 지었다.

사실 두 팀 중 선배는 베이비복스이기는 한데 따지고 보면 좀 복잡하다. 두 팀이 앙숙 사이로 번진것으로 추정되는 2001~2년에는 1995년 데뷔해 1997년 디바로 이적했던 초대 멤버 채리나가 탈퇴했던 상황이었고 그룹 데뷔 자체가 디바보다 약간 빨랐던 베이비복스의 초대 멤버인 이희진, 김이지는 디바의 비키와 지니보다 선배였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1997년 10월에 합류한 간미연은 디바의 이민경보다 선배다. 그런데 이민경은 이미 1998년 8월에 그룹 유니티로 먼저 데뷔했는지라 1998년 9월에 베이비복스에 합류한 심은진, 1999년 6월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윤은혜보다는 앞선다.(이민경이 디바에 들어 온 것은 1999년 7월 경.) 그 점은 둘째치고, 2004년 M.net <What's Up Yo!> 방송에서 심은진이 '디바가 그룹 결성 자체는 우리보다 늦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사실 활동 당시에도 베이비복스는 디바보다 선배인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디바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난것이 아니었나 의심해 볼 대목이다. 디바는 본인들이 선배라고 잘못 알고 있었음에도 2002년 당시 모 케이블 방송에서 비속어까지 동원하며 베이비복스를 공개적으로 경고한적이 있었다(...) 과연 여자 DOC 근데 이 사건에서 몇가지 의외인 점은 이 당시에도 심은진과 이민경은 꽤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다.응? 두 그룹이 활동을 중단하고 나서 이민경과 이희진 역시 2006년 연극 <사랑은 비를 타고>로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2011년 강심장에서 비키가 활동 내내 앙숙이었던 상대 그룹 멤버의 나이도 몰랐던걸 봐서는 어쩌면 두 그룹간의 신경전은 센언니들답게 조금 스케일 큰 기싸움 정도로 끝났던게 아닌가 추측된다. 언론에서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건 아닐지. 한때 두 그룹간의 폭행설까지 돌았지만 전혀 사실무근이다.

6.6 종합

어쨌든 그 해 <우연>의 히트를 인정받아 데뷔후 처음으로 골든 디스크에서 인기상을 수상했다.[14] SBS 서울가요대상 한류상, KMTV 코리안 뮤직어워드 한류특별상, SBS 가요대전 10대 가수상, SBS 가요대전 본상, KBS 가요대상 본상을 수상한다.

이후 일본 NHK의 '아시아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우연>과 <Killer> 두 곡을 열창했으며, 이벤트 형식으로 EP 형식의 앨범도 발매 하였다. 지난 2000년에 열린 미니 콘서트 이후 2년 만에 일본에서 두 번째 미니 콘서트 등을 개최하고 역시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 LA에서도 미니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이 시점부터 미국 진출에 힘이 가해지게 되었다.

7 2003년

7.1 홍콩과 태국으로

2003년 연초부터 베이비복스는 1월 경 홍콩 현지 프로모션을 위해 출국했다.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과 뮤직비디오 촬영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와중에 홍콩의 톱스타 곽부성이 베이비복스를 만나고 싶다며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베이비복스의 홍콩 프로모션사는 여명등이 소속된 Bingo Music으로 곽부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지만 워낙 톱스타의 식사 초대라 베이비복스는 자리에 응했고 곽부성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곽부성이 김이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현지 기자들한테 오해를 받아 둘 사이에 열애설이 돌았다. 이후 곽부성은 베이비복스와 듀엣곡 녹음하고 싶다는 제의를 보내와 6집 앨범과 곽부성의 앨범에 싣을 듀엣곡 녹음을 위해 몇차례 일정을 조정했으나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때문에 연기되다 결국엔 무산되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3월 초에 곡을 완성한 다음 7월 쯤엔 곽부성과 조인트 콘서트도 계획할 예정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베이비복스/해외 활동 문서를 참고.

파일:JEQPBOa.jpg태국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

홍콩에서의 프로모션 이후 2003년 2월 중순, 일주일 간 태국 현지에서 6집에 들어갈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과 영상 화보집 촬영을 가졌고 곧 이어 3월 21일과 22일,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열린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래미 뮤직 페스티벌은 태국 정부가 주최하는 국제 가요제로, 태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홍콩 등 아시아권 톱가수들은 물론, 세계적인 스타들도 참여해 벌이는 옴니버스 가요제였다. 베이비복스가 해당 가요제에 등장하자 몰려든 수많은 팬들 때문에 현지 모습을 촬영하러 간 국내 방송 제작진들도 매우 놀라워했다.

7.2 6집 활동

5.5집의 활동이 끝난 후, 그 해에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핑클과 S.E.S. 등이 홀로걷기를 선언하며 베이비복스 역시 리더 김이지가 중국에서의 드라마 촬영으로 인해 해체를 하는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증폭되었지만 이를 부정이라도 하듯, 2003년 4월 3일 6집 앨범 <DEVOTION>을 발표했다. 발매 전에 국내에서 모바일을 통해 신곡이 유출 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6집은 아시아 6개국에 수출되었으며, 당시에는 이례적인 전 세계 동시 발매였다. 국내에서 10만 장을 선주문 받은 것을 비롯해 2003년 4월 5일 홍콩의 빙고뮤직으로부터 3만 장, 12일 중국의 상해유통으로부터 20만 장, 15일 태국의 그레미뮤직으로부터 12만 장, 같은 날 대만의 에이벡스로부터 5만 장의 선주문을 받는 등 5개국에서 50만 장의 선주문을 기록했으며, 일본과 베트남에서도 주문이 쇄도하였다.

당시에 대만과 홍콩의 경우 최고 가수의 음반 선주문량이 각각 5만 장, 1만 장 수준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베이비복스의 이 같은 음반 주문량은 엄청난 수치였다. 이는 당시에 일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시아의 별' 보아의 정규 음반이 일본에서 100만 장의 선주문을 받은 것에 비견되는 놀라운 기록이었다. 국내 대중음악계가 아시아 지역에서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한류 그룹' 베이비복스가 이제 명실 공히 아시아권 가수로 떠올랐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같은 수입액 산정은 베이비복스 측이 6집 앨범 출시와 함께 국내에서 직접 생산과 유통을 관장하기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현지 음반사가 대체로 생산 · 판매 유통을 대행해왔는데, 수출 시 주도권을 현지 음반사에 넘기지 않은 것은 그만큼 베이비복스에 대한 지명도와 신뢰도를 인정받았다는 증거였다. 음반업계에서는 베이비복스의 해외시장 개척이 최악의 불황을 맞고 있던 국내 가요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파일:41fjob4.jpg
<우연>의 연장선상이자 대중성을 모토로 잡은 6집 앨범 'DEVOTION'
2002년 4월 24일 발매, 아시아 6개국 동시 발매

<Devotion>이라는 앨범 제목이 말해주듯이 베이비 복스는 6집 앨범을 만들 때 팬들을 먼저 생각했다. "본 앨범판매 수익금 중 일부는 대한적십자사 인도주의 활동기금으로 조성됩니다"라는 사랑스러운 메시지를 첨부한 다분히 헌신적인 음반이었다.

리더인 김이지는 "대중성을 모토로 했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은 듣기에도 편하고 따라 부르기도 쉽다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지난 해였던 2002년에 내놓았던 스페셜 앨범의 타이틀 곡 <우연>을 통해 변화의 기미를 보인 베이비복스는 6집 앨범을 통해 미디움 템포 패턴에서 탈피하여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곡들로 대폭 강화했다.노래는 물론 춤에도 변화를 줬다. 파워 넘치는 댄스로 유명한 베이비복스이지만 6집에서는 힘을 뺐다는 것. 패션 스타일 역시 달라졌는데, 옷에는 자수를 넣고 귀고리나 목걸이 등 액세서리에는 자개문양을 넣었다. 동양적 신비감을 표현하겠다는 뜻으로 범아시아적 활동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전작 <우연>의 히트로 김창환과 손을 잡은 베이비복스의 변화는 대중성을 잡았다는 큰 의의가 있었지만 기존 베이비복스의 색깔을 모두 잃어버린듯한 무난한 댄스곡들로 채워져있어 혹평 받기도 했다. 특히 타이틀 곡 <나 어떡해>는 당시 활동하던 어느 가수가 불러도 히트할만한 개성없는 트랙이었다. 베이비복스가 김형석과 작업하던 시절 보여줬던 세련됨이 아닌 베이비복스의 클론화라며 곡 자체가 촌스럽다는 의견도 지배적이었다.

《나 어떡해》 (김창환 작곡, 작사)

2002년 <우연>의 히트로 다시금 인지도가 상승한 베이비복스는 별 무리없이 <나 어떡해>도 발매 직후 가요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위력을 과시했고 6월 1일 SBS 인기가요에서 1위를 수상하며 1년만에 정상에 올랐다. MBC 음악캠프에서도 1위 후보에 올랐고 KBS 뮤직뱅크에서도 5주 연속 BIG 3에 오르며 인기를 유지했다. <나 어떡해> 활동을 마치고 난 뒤 소속사측은 후속곡 투표를 시행했는데 여기서 심상원 작곡의 <Loveless>와 박미경의 4집 <언젠가는> 노래를 리메이크한 <바램>이 높은 지지를 받아 두 곡을 동시에 후속곡으로 선정하기로 결정했다가 <바램>으로 아주 짧게 활동했다. 활동 기간 동안 KBS 뮤직뱅크에는 한번도 출연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6집 활동 기간 동안에는 멤버들의 컨디션이 대체적으로 안 좋았었는데 특히 심은진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었다. 하지만 당시 심은진의 개인 인지도가 상승했을 시기라 예능 방송에도 활발히 출연했고 데뷔 후 처음으로 단독 CF를 찍기도 했다.

7.3 중국 차트 1위에 오르다

2003년 3월 말, 6집 발매와 동시에 한국을 비롯해 중국, 태국 등 아시아 7개 지역에서 동시 발표한 6집의 수록곡 <I'm Still Loving You>가 중국 중앙 인민 라디오 2003년 4월 둘째주 인기차트에서 8위에 랭크됐다. 국내 가수 최초로 중국 차트 톱 10에 진입한 것이었다. 발표 첫 주 10위권에 진입해 인기폭발을 예고한 이 노래는 2주일만에 8위에 오름으로써 정상을 향한 파란불을 켰고, 당시에중화권을 강타했던 사스의 공포 때문에 중국에서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매 한 달만에 중국 최고의 라디오 방송인 인민 라디오 '음악지성 중국 유행가요배 행방'과 '중국 원창가요배 행방'에서 각각 5위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며 현지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두 프로그램은 중국 내 가요계를 이끌던 최고 인기 프로그램으로 중국 내 100여개 도시, 800여개 방송국의 순위 프로그램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을 정도로 손꼽히던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현지 정상권 가수들도 두 달이 넘어야 10위권에 간신히 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프로그램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이비 복스가 화교권이 아닌 외국인 가수라는 점이었다. 당시에 H.O.T.를 비롯한 한류 스타들이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모았지만 중국 차트에 올라 상위권에 랭크 된 것은 베이비 복스가 처음이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정서 차이도 있었지만 중국 라디오 순위에서는 중국어로 부른 노래만이 차트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H.O.T.를 비롯한 한류 스타들이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모았지만 차트에 오를 수 없었던 이유였다.

<I'm Still Loving You>는 중국의 레리 펭과 시지에가 각각 작곡, 작사를 맡은 중국어 곡으로, 이희진과 간미연의 리드 보컬을 중심으로 멤버들의 고운 목소리가 아름답게 전개되는 발라드 곡이었다. 앨범이 발표되기 전 이미 뮤직비디오가 제작되어 베이비복스의 중국어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베이비복스의 쾌거는 중국어 노래를 통한 중화권 현지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다소 주춤하고 있던 한류 열풍의 돌파구로 기대를 받았다. <I'm Still Loving You>는 매일 밤 중국 내 가라오케에서 열창되고 있었으며, 베이비복스의 출연이 있는 날이면 중국 내 베이비복스 사이트 서버는 다운되기 일쑤였다.

《I'm Still Loving You》 (레리 펭, 시지에 작곡)

마침내 2003년 5월 20일, <I'm Still Loving You>는 1위를 차지하여 정상에 등극하였고, 중국에서 외국 가수 최초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이거니와 '비화교' 출신 가수로도 초유의 기록이었다. 또한 화교권이 아닌 외국인 가수가 중국대륙에서 팝송이 아닌 대중음악으로 중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당시 가요관계자들은 이 프로그램에서 베이비복스가 1위를 차지한 것에 대하여 "보아의 오리콘차트 1위와 맞먹는 성과"라면서 "한국 가수의 자존심을 세운 일"이라고 축하했으며, 베이비복스는 "'10만 중국 팬클럽과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1위에 올라 기쁘다'"면서 "'주춤하고 있는 '한류열풍'을 되살리는데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7.4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베이비복스의 인기

이와 함께 태국의 유명 대중 가요차트인 GGM(Global Music & Media)에서도 베이비복스의 <I'm Still Loving You>와 <나 어떡해>가 각각 9위와 8위에 랭크 돼 동남아 최초의 10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이 같은 기록은 태국에서 베이비복스 음반이 발매 된지 2주만의 기록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태국 음반 시장에 진출했던 베이비복스는 2003년 5월 23일, 태국의 공신력있는 음악 위성방송 '채널 V' 차트에서 4위에 올라 아시아 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1주일에 한번씩 집계하던 이 음악차트에서 베이비복스의 <나 어떡해>가 세계적인 뮤지션인 린킨 파크, 휘트니 휴스턴, 크렉 데이비드, 마돈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을 누르고 4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베이비복스의 아시아에서의 인기는 중국대륙을 넘어 저 멀리 몽골초원으로, 동서양 문화가 공존하는 실크로드의 성지 우즈베키스탄으로, 또 동남아 국가인 태국 말레이시아로까지 번져나가고 있었다. 2003년 7월 26일 몽골의 울란바토르시 나담스타디움에서 열린 베이비복스의 단독 공연은 베이비복스의 위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행사였다. 28만 여명의 울란바토르 시민중 이 날 공연장을 찾은 몽골인은 약 3만 여명으로, 시민의 10분의 1이 넘는 시민이 베이비복스를 보기위해 스타디움에 운집했다. 공연 후 울란바토르 시는 베이비복스 공연이 단연 화제였다.

당시 현장모습, 베이비복스의 몽골내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 공연은 시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몽골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급기야 공연 다다음날인 2003년 7월 28일 몽골 대통령이 직접 베이비복스 제작자인 윤등룡 사장을 급히 찾는 상황에 이르렀다. (몽골 대통령은 공연 전에 의례적인 행위로 한국 공연단을 대통령 관저로 초청하여 저녁 만찬을 열어줬으나, 당시 대통령은 고향에서 열리는 지역행사로 인해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이후 베이비복스는 어디를 가나 '베이비복스'를 연호하는 팬들로 둘러싸였고, '블랙로스' 등 몽골의 인기 가수들도 베이비복스와의 사진 촬영에 열을 올리는 등 한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고했다. 베이비복스는 몽골에서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아 콘서트를 열었는데, 개런티 대신 공로상을 받고 멤버 당 1000평 크기의 땅을 선물받아 총 5000평의 땅을 선물받고 집 다섯 채도 선물 받아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알고보니 국가사기를 당한것이었다.

7.5 북한 공연

파일:Wv2BbB3.jpg2003년 10월 6일 SBS 통일음악회 "이선희, 조영남, 설운도, 신화 등과 함께"

몽골에서의 콘서트 이 후 베이비복스는 10월 6일 평양에서 열린 '평양 류경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 남북 합동 축하공연' 무대에 섰다.이제는 북한까지 2003년 10월 5일 육로를 통해 입북해 평양에서 2박 3일 간 머문 후 7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베이비복스는 1999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을 누볐지만 북한 방문은 처음이었다. 베이비복스는 이 날 신화, 설운도, 조영남 최진희 등과 함께 남측 대표 가수로 참가했다. 국내 연예인들의 북한 공연은 수차례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SBS 측은 공연에 참가할 연예인을 선정하는 데 꽤 신중을 기했다. 그룹 신화는 국내 최고의 카리스마와 세련 된 무대, 베이비복스는 신세대 여성 그룹의 대표주자라는 점이 후한 점수를 받았다. 특히 베이비복스는 중국 공연 일정을 연기하는 열성을 보이며 방북 연예인 대열에 전격 합류했다. 공연은 베이비복스 및 신화, 설운도 등 남측 가수들과 북한의 대표 가수 7개팀과 합동 공연을 벌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공연 실황은 SBS와 북한의 조선중앙TV에서 동시에 생중계되었다.

사실 공연을 앞두고 북한측으로 제재를 받기도 했는데 베이비복스측이 원래 준비해간 의상은 배꼽이 노출된 의상이었고 공연 전 합동리허설에서는 배꼽티를 입고 무대에 올랐으나 리허설 후 북한 관계자의 요청으로 배꼽을 급하게 천으로 덧대어 수정 한 뒤 본 무대에 섰는데 베이비복스가 공연을 하는 내내 북한 관객들이 모두 할말을 잃은 듯한 모습이 방송에 그대로 송출되어 아직까지도 베이비복스 굴욕 영상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2011년에 윤은혜가 버라이어티쇼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북한 여성들이 정색을 넘어 아주 칠색 팔색을 했었다고(...)

7.6 종합

2000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3년간 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2003년은 베이비복스의 해외 인기가 정점을 찍었을 시기였다. 결국 2003년 11월 30일, 소속사 DR뮤직은 언론을 통해 그간의 비행 거리를 합산한 자료를 담은 '해외 공연 기네스'를 전격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베이비복스가 지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공연을 위해 이동하면서 쌓은 항공 마일리지는 개인당 10만 5,346마일. 5명을 합했을 경우 무려 52만 6,730마일(약 84만2,760㎞)에 육박했고 이는 둘레가 4만 75㎞인 지구를 20바퀴 이상 돈 것으로, 당시 국내 가수 중 이같은 진기록을 갖고 있던 팀은 베이비복스가 유일했다. 한편 이 자료에서 각국에서의 에피소드도 함께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몽골 공연 당시 전원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정전 사태를 맞아 공연이 30분 간 중단됐던 웃지 못할 사고와, 공연업자가 도망쳐 멤버와 스태프들이 호텔에 강금됐던 사건 등 여러가지 사기 사건, 비행기를 갈아타고 나서 멤버 2명이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해프닝 등 웃지 못할 많은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었다.

8 2004년

8.1 태국에서의 성과

베이비복스는 2004년 1월 말 태국의 음악전문채널 '채널 [V] 타일랜드'가 2003년 한 해동안 집계한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V] 어워즈'에서 파퓰러 아시안 아티스트 부문 1위에 올랐다. 베이비복스는 대만의 인기그룹 'F4', '주걸륜' 등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 인기가수의 영광을 안았다. 또 2004년 3월 25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당시 시상식에서는 2003년의 히트곡 <나 어떡해>에 영어제목을 붙인 <What Should I Do?>가 1위에 뽑혔다. 2002년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태국에 진출했던 베이비복스는 2004년까지 현지에서 음반 세 장을 발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태국의 최대 음반사인 GMM을 통해 태국에 진출했던 베이비복스는 현지에서 원빈, 손예진 등과 함께 '한국 붐'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이었다.

파일:MvSAwgV.jpg2004년 채널 [V] 타일랜드 어워즈에서

또 태국에서 베이비복스의 춤과 노래를 태국의 한 성인쇼에서 무단 모방한 사건도 벌어졌다. DR뮤직은 2004년 3월 21일 태국 파타야를 방문했다가 그곳의 유명한 트랜스젠더쇼였던 '티파니 쇼' 공연 중 일부가 베이비복스의 안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을 발견하고 저작권 침해 여부를 검토했으며, 윤등룡 대표는 "'티파니 쇼'를 보다가 트랜스젠더 5명이 베이비복스의 안무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쇼 '티파니 쇼'는 세계적인 관광전문지 '트래블컴 매거진'이 꼽은 세계 10대 쇼 중 하나로 29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티파니 쇼'는 트랜스젠더들이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한국 등의 주요 문화 및 대중 스타들의 이미지를 소재 삼아 10여개의 공연이 연이어 진행되는 형식의 쇼로서, 당시 '티파니 쇼'에 등장했던 베이비복스 '표절 무대'는 부채 춤, 사물놀이 등 한국과 관련 된 공연의 마지막 코너에 등장했다. DR뮤직측은 처음에는 저작권 문제를 거론하려고 했으나 그냥 좋은뜻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태국의 유명 골프장에는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딴 '베이비복스 홀'이 등장하기도 했다. 베이비복스 소속사 DR뮤직과 인근 방콕CC측은 골프장 내 파3인 10번홀을 베이비복스 홀로 명명하기로 합의했다. 태국의 명문 골프클럽인 방콕CC는 PGA 볼보클래식대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최양호씨는 태국 최초의 한국인 골프클럽 대표로, 태국인 회장과 또 다른 태국인 사장을 보좌하고 있었다. 베이비복스 홀은 당시 태국 등 동남아를 중심으로 불기 시작했던 '한류'의 성과물 중 하나였다.

이로써 베이비복스는 외국의 유명 골프클럽에 이름을 새긴 한국 최초의 가수가 됐다. DR뮤직과 방콕 CC는 아일랜드 홀인 10번 홀 정면에 대형 '베이비복스' 입간판을 세우기로 했다. 베이비복스 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홀에서 나온 홀인원 골퍼(1년에 4명으로 제한)에게는 베이비복스의 협찬으로 서울-방콕 왕복 항공권을 주고, 연말에 열릴 '베이비복스 회원들의 밤'에도 초청할 예정이었다. 방콕 CC는 이 곳에서 열리는 국제 규모의 골프 행사에 베이비복스 초청해 세계적인 골퍼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이와 함께 방콕에서 열린 베이비복스의 이벤트를 협찬하였다.

당시 대표였던 최양호씨는 "태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베이비복스가 우리 골프장에서 골프를 배우고 즐긴다면 한국과 태국의 골퍼들에게 큰 화제가 될 것"이라면서 "방콕CC 회장, 골프장 경영진 등과 구체적인 상의를 거쳐 곧 최종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콕 골프계는 한국의 유명 그룹이 골프장에서 스타 마케팅을 벌여 골프대중화에 큰 힘을 실어줄 것을 기대했으며, 베이비복스가 태국 상류층에 강한 인상을 남겨 새로운 형태의 '한류 모델'을 제시할 것으로 전망했다. DR 뮤직의 윤등룡 대표는 "계약이 성사되는 대로 한국의 유명인사와 기자단을 초청해 새로운 형태의 한류 성과물에 대해 알릴 것이다. 베이비복스라는 브랜드가 이제 중국을 넘어 동남아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8.2 7집 제작 비화, 미국 진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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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데뷔 이래 꾸준히 활동해 오면서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홍콩, 일본에 진출해 맹활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스타로 부상한 베이비복스는, 6집 앨범을 내고 후속 음반에 대한 장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2003년 11월 미국의 벙갈로 뮤직(2pac, Snoop dog, Dr. dre 등) 에서 수많은 웨스트 코스트 힙합 팀을 제작 및 홍보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벙갈로 뮤직의 사장이었던 John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2003년에 조사를 해보니 중국, 대만, 홍콩, 태국, 베트남 등등 아시아권 전 차트에 베이비복스라는 팀이 전체 상위권에 순위가 올라있어, 어떤 팀인가 조사를 하여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음악시장 또한 불황이었고, 미국의 음악형태가 한 앨범의 여러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피쳐링을 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음반 불황을 돌파해나가는 때였기 때문에 베이비복스도 그런 형태로 기획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또한 힙합이나 R&B가 기타 아시아 시장에 베이비복스와 함께 진출하는 형태가 좋겠다는 생각과, 반대로 베이비복스의 7집 앨범을 영어버전으로 바꾸어 미국 시장에 라디오 스테이션에 플레이를 하면서 아시아권 가수가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프로모션에 대한 제의도 받았던 것이었다.

베이비복스는 새롭게 선보일 7번째 정규앨범을 위해 수록곡 전곡을 우리말과 영어로 녹음했으며, <Ride West>라는 앨범 타이틀이 말해주듯이 힙합의 본 고장인 미국을 겨낭하고 있는 앨범으로서 해외 뮤지션이 대거 참여하였다. 타이틀 곡 <Xcstasy>에는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전설이자 1997년 총기 난사 사건으로 요절한 투팍(2Pac)이 생전 녹음해뒀던 랩핑을 샘플링했고 헐리우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제니퍼 로페즈의 노래 <Play>를 새롭게 리메이크해 수록했다. 특히, 중국, 대만, 홍콩, 태국, 베트남, 싱가폴, 몽골 등 범아시아 무대로 활동을 하던 베이비복스로서는 이제 서서히 빌보드에 문을 노크해야 될 때라 생각하여 미국의 메이저 레코드사였던, 미국 힙합의 메카인 벙갈로 뮤직을 통해 팝의 본 고장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앨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 시작을 겨냥한 앨범이니 만큼 <Xcstasy>, <Play>의 영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을 동시 수록하였고, 미국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대부인 닥터 드레(Dr. Dre) 사단의 작곡가 플로스 피(Floss P)가 그녀들의 검은 옷을 코디 해주며 음악적 후견인을 자처해 화제를 몰고 왔다. 앨범 작업을 함께 한 플로스 피는 에미넴, 50 센트, 백스트리트 보이즈, 메리 제이 블라이즈 등 수많은 아티스트를 올려 놓은 프로듀서인 닥터 드레 사단 내 작곡가였다. 또한 미국 현지 유명 프로듀서의 지휘로 작곡과 편곡 모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맡았다. 미국의 사운드를 생생히 담기 위해 2003년 12월에 녹음해 둔 음원을 미국에서 3달동안 후반 믹싱 작업을 하는 심혈을 기울였다. 7집 앨범에는 베이비복스 음악 13 트랙과, 투팍이 1996년 9월 13일 총격 피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그와 가까웠던 많은 연예인들이 등장하며 곳곳에 공연 장면이 삽입된 2pac forever DVD 등 2CD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업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신곡수가 적어 스페셜 앨범 (6.5집)으로 발매하는것도 검토됐었지만 정규 7집으로 발매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파일:36CvYhz.jpg7집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베이비복스는 7집 앨범 발표에 앞서 대한항공과 전략적인 제휴를 맺었는데 이는 한류스타로서 베이비복스가 주가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다. 대한항공측은 2004년 1월 7집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베이비복스측에 대한항공 활주로과 김포공항 격납고등을 제공했다. 뮤직비디오는 청소년 문화에 유행인 힙합, 자동차 등을 콘셉트로 대한항공 활주로에서 'Street racing' 을 주제로 백스트릿 보이즈, 엔싱크 등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앨런 칼자티(Alan Calzatti)의 지휘 하에 고가의 스포츠카 70~80대가 동원 된, 40억여 원의 제작비가 들어갔던 메머드 급의 뮤직비디오였다.[15] 우리나라 전통 격자문 모양에 회사 로고가 새겨진 초대형 대한항공 격납고의 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각종 고급 자동차 30여 대가 베이비복스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1996년 요절한 전설적인 흑인 래퍼 투팍의 생전 모습, 래퍼 플로스 피, 기타리스트 말로 핸더슨(Malro Han-derson) 등도 베이비복스와 함께 출연하여 이 비디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대한항공 격납고는 B747-400과 같은 대형 항공기 2대와 중형기 1대가 동시에 주기할 수 있는 큰 공간으로, 자동차 레이싱을 하는 광장에서 베이비복스가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내어 촬영 팀 모두 만족을 표했다.

2004년 새해 첫 뉴스 로 미국 진출 소식과 7집 컴백 소식을 전하면서, 그 해 봄에 중화권, 동남아, 일본뿐만 아니라 나아가 <Ride West>는 미래에 있을 베이비복스의 미국 연착륙을 겨냥해 내놓은 앨범[16]이었으며, 데뷔 7년째이자 승부수를 던졌던 7집이 행운의 `럭키 세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8.3 7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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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 최후의 앨범 7집 <Ride West>
2004년 4월 16일 발매

2004년 4월, 7집 앨범으로 돌아온 베이비복스는 SBS 인기가요에서 첫 무대를 가지며 국내 무대에 컴백했다. SBS측에서는 <Xcstasy>라는 제목이 선정적인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며 수정을 요구했고 결국 <환상>으로 급하게 수정해서 방송을 해야했다. 1월 뮤직비디오 촬영으로 대한항공과 인연을 맺은 베이비복스는 7집 활동 재개와 동시에 소지섭과 함께 대한항공 홍보대사로 임명되었고 이들은 베이비복스의 해외진출을 적극 후원하기로 했는데 그 시작이 바로 뮤직비디오 촬영이었다. 그리고 앨범 발표 직전이었던 3월에 열린 베이비복스 태국 일정에 대한항공이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이것은 민간 기업과 한류스타의 '윈윈 전략'이었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7집 역시 대한항공과 DR뮤직이 공동 마케팅을 통해 프로모션을 하게 되었는데 6월 한달동안에는 중국과 동남아 노선 기내에 베이비복스의 7집 뮤직비디오와 인삿말등을 방영하기도 했다. 참고로 7집 앨범에는 대한항공 마크가 찍혀있다. 앨범에 대한항공 스폰서 마크가 찍힌건 최초가 아닐지.

2004년 4월 18일 SBS 인기가요 《Xcstasy》+ 《Play Remix》

타이틀 곡 <Xcstasy>는 힙합을 좋아하던 마니아들에게 '힙합의 신'이라 칭송 받고 있는 투팍이 피쳐링을 한 듯한 기법으로 녹음되어 발매 전부터 수많은 이견을 불러왔다. 그 덕에 팬들 사이에서도 곡에 대한 평이 크게 엇갈렸는데 '도대체 후렴구가 언제 나오는거냐', '기대 이하였다'라는 혹평이 주를 이뤘다.[17] 가요치고는 대중성도 없고 쉽게 귀에 익는 멜로디도 아니었기 때문에 베이비복스측도 이 곡을 통해 상업적인 히트를 얻기보다는 도전에 의의를 두기 위해 활동도 3주 정도로 짧게 선보이고 곧바로 서브 타이틀 곡 <Play Remix>로 전환할 예정이었다. <Xcstasy>는 발표 3주만에 SBS '인기가요'에서 'Take 7'까지 오르는 등, 가요 차트 중상위권에 안착하며 그런대로 괜찮은 순위를 기록했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무대위에서는 7집 앨범의 프로듀서 Floss P가 베이비복스의 활동을 위해 내한하여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원래는 3주 정도만 무대에 서기로 계획했지만 한국 특유의 열광적인 팬 문화와 스탭들의 친절한 대우에 감동받아 본인의 앨범 작업까지 미뤄놓고 5주 동안 머무르며 <Xcstasy> 퍼포먼스에 함께 참여했다. 그리고 Floss P는 자신의 미국 앨범에 실릴 신곡의 피쳐링을 심은진에게 제의해 5월 경 국내에서 녹음을 마쳤다. 이 곡은 KMTV 쇼뮤직탱크에서도 선보였었다.[18] 5월 중순, <Xcstasy> 활동을 마치고 <Play Remix>로 활동을 이어간다. 그리고 6월,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8.4 미아리복스 파문, 심은진의 탈퇴

베이비복스 문서의 이하늘 미아리복스 사건 항목 참고. 이 사건으로 이미지 타격과 활동에 치명타를 입은 베이비복스는 호주에서의 스케쥴을 끝으로 7집베이비복스활동을 결국 중단했다. 이 후 태국에서 6-25 참전 용사들을 위한 공연에 UN등과 참여했고 베트남과 친선교류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등 해외에서의 활동을 이어가다 10월 경 KBS 열린음악회에 출연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베이비복스 다섯명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 날 무대를 끝으로 심은진이 없는 4인조 체제로 활동했는데 사실 2003년 하반기에도 심은진이 없는 4인 체제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19] 팬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11월 열린 대규모 베이징 콘서트에서도 4인 체제로 무대에 올라 탈퇴설이 불거졌다. 이어 2004년 서울가요대상에서도 심은진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결국 2004년 12월 27일, 베이비복스의 소속사 대표 윤등룡이 소속사 홈페이지를 통해 심은진의 탈퇴를 공식 발표했다.

9 2005년

9.1 4인조 활동

심은진의 탈퇴로 4인조 체제로 활동을 이어갈것이라던 DR 뮤직은 2005년 1월, 돌연 입장을 바꿔 중화권 여성을 충원해 새출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중국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팬들은 베이비복스를 여전히 5인조 그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심은진이 2005년 솔로 진출건으로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 '최근 멤버들을 만났지만 새멤버 영입건 사실은 듣지 못했다.'라고 얘기했고 새멤버 영입건은 전적으로 소속사측의 입장이었다.

파일:WVFRlA9.jpg2005년 ‘전국민 천원 희망잇기 캠페인’에서

5인조에서 4인조 체제로 바뀐 베이비복스는 첫 공식 일정으로 지진해일 피해를 입은 태국에 봉사활동을 떠났다. 태국 팬클럽의 가족 일부가 피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현지 선교회와 태국 레이블 GMM의 협조하에 같은 소속사였던 에즈원과 함께 3박4일 일정으로 태국 푸켓으로 지진 해일 복구 작업을 자원봉사 활동을 떠났다. 이 자리에서 2억5000만원 가량의 현금과 물품을 현지 구호 단체에 전달했고 베이비복스와 일행들은 섭씨 34-5를 넘는 더운 날씨속에서 하루 8시간씩 봉사활동을 펼쳤다.

3월에는 태국에서 열리는 ‘파타야 인터내셔널 뮤직 페스티벌 2005(Pataya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2005)’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이미 베이비복스는 2003년 열렸던 2회째 PIMF에서 90만명이라는 PIMF 사상 최다관객을 동원했었던 기록도 있었다. ‘PIMF 2005’는 출연하는 모든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소장품을 기부해 성금을 마련하고, 행사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금 전액을 쓰나미 후원기금으로 쓸 예정이어서 더욱 의미 깊은 행사였다. 또 해당 무대에서 베이비복스는 각국 언론으로부터 일본의 망언과 관련한 인터뷰에 응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가당치 않다”는 입장 표명을 하고 무대에 오른 뒤 '독도는 우리땅'임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펼쳐 박수 갈채를 받았다.

파일:IzDFvjL.jpg2005 PIMF(Pataya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한편 윤은혜는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면서 '소녀 장사'라는 애칭을 얻으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각종 방송가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4월에는 베이비복스의 소속사 DR뮤직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벙갈로 레코드사[20]로부터 베이비복스의 한국어 및 영어 음반의 미국내 마케팅에 관해 지원을 받는 대신 벙갈로측 가수들의 아시아, 특히 중국 시장 진출을 돕기로 합의하고 계약서 서명을 앞두고 있다고 뉴욕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7집의 실패로 물건너간줄 알았던 미국 진출 계획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것이다.

9.2 윤은혜의 탈퇴

그러던 7월 7일, 윤은혜 역시 베이비복스를 탈퇴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고 결국 베이비복스는 4인조 체제에서 3인조 체제가 되었다. 사실 2004년 10월 부터 멤버들의 계약 기간이 차례대로 끝나가고 있었던 상황이라 윤은혜가 탈퇴했을 당시에도 나머지 멤버들은 DR뮤직과 계약 상태가 아니었지만 DR뮤직에서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던 실정이었다. 윤은혜 탈퇴 보도 당시 관계자는 "김이지, 간미연, 이희진 등 나머지 세 멤버는 정식 계약을 하지 않았지만 소속사에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며 "더 이상의 탈퇴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소속사 대표는 향후 베이비복스의 활동에 대해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할지에 대해선 현재 정해진 바가 없다”면서 “다만 개별 활동과 그룹 활동을 병행하는 신화의 현재 방식이 한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베이비복스는 내 딸같은 존재로 현재 남아 있는 멤버들이 한류 1세대로 고생을 한 만큼 모두가 해피엔딩의 결말을 이룰수 있도록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3인조 체제로 축소된 베이비복스는 9월 한-아세안 대화 관계 수립 15주년을 기념해 한국 스타 순회방문의 일환으로, 20일 말레이시아로 출국해 기자회견과 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이 베이비복스의 해체 전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었다.

10 2006년

10.1 해체 위기에 놓인 베이비복스

윤은혜의 탈퇴 이후 3인조 체제로 활동을 이어갈것이고 허무한 결말은 없을거라고 못박았던 베이비복스는 결국 2006년 1월 25일, 리더 김이지가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실상 해체 국면에 직면했다. 김이지의 탈퇴 직후 2월, 심은진이 솔로 데뷔 이후 첫 생일파티 겸 팬미팅 자리를 가졌을때 스케쥴로 인해 불참한 윤은혜[21]를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 네 명이서 약 2년만에 베이비복스로 함께 공식 석상에 자리했다.

10.2 각자의 길을 선언한 베이비복스

파일:A6qwNXN.jpg2006년 2월 6일 심은진 생일파티에 모인 베이비복스 네명

팬미팅 자리에서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이제부터 각자 다른 소속사에 몸담고 솔로활동을 벌이며 그동안 팀 활동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보여줄 것"이라고 얘기했고 아울러 "베이비복스가 각자 연기와 노래, 다른 분야에서 활동을 하더라도 '해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며 "우리는 일정이 허락하는 한 언제든 다시 모여 활동할 수 있다. 솔로활동과 팀 활동을 병행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베이비복스는 결성 9년만인 2006년 2월 해체가 아닌 각자의 길을 선언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섯명이 함께 모여 다시 베이비복스로서 무대에 설것을 약속했다. 이 후 간미연이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을 체결하며 베이비복스에서 탈퇴했고 소속사측은 베이비복스 2기를 결성한다고 공식 발표했다.[22]

<베이비복스가 활동을 중단하는 것에 대한 멤버들의 말>

(김이지)
"우리 팀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팀의 리더로서 기다릴 것이다. 우리 팀을 지키면서 다시 다섯 명이서 공연을 하고 싶다."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이 새롭게 출발한다."

(이희진)
"저희가 말씀드릴 것은 'END가 아닌 AND'입니다."
"이 무대가 마지막 무대라면 아무 말도 못하고 울 것같다. 절대 베이비복스의 마지막 무대는 없다."
"나의 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자리... 우리의 자리가 사라졌다."

(심은진)
"사람들이 베이비복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자.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우리는 우리대로 간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모일 수 있다."
"현 소속사에서 심은진 팬클럽을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베이비복스 팬클럽이면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나는 우리 다섯 멤버 모두를 믿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우리는 다시 모일 것이고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으로 엔젤스 여러분 앞에 설 것입니다."

(간미연)
"소속사가 베이비복스 1기를 해체하고 2기 베이비복스 탄생을 준비 해 베이비복스란 이름으로 음반을 못 내게 되자 상처 입은 팬들의 글을 보며 눈물도 흘렸다.
또 혼자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자신도 없었다. 지금도 홀로 노래할 때, 인터뷰 할 때 부담이 된다."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만나면 늘 다시 무대에 서는 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윤은혜)
"다시는 가수로 활동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약속한 것은 꼭 지키고 싶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우리 멤버들과 베이비복스라는 이름으로 다섯 명이 같이 공연을 할 것이다."

11 활동 중단 이후

베이비복스 활동 중단 이후의 관한 내용은 베이비복스/활동 중단 이후 문서를 참고할 것.
  1. 지금에야 생소하지만 그 당시에는 노래방에서 오디션을 보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같은 팀의 이희진도 그런식이었고 핑클의 이효리도 역시 노래방 오디션을 봤다고 밝혔다.
  2. 남자를 도도하게 차버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랑 같이 데이트하러 가자 뿌잉뿌잉"스런 스키복을 입고 등장한 모양새부터 이미 1집 제작 단계의 기획은 처참히 버려진듯 하다.
  3. 방송상 나이(...)보다 한살어린 1979년생인 이동국에게 오빠라고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4. 이 당시에는 본명인 이희정으로 활동했다.
  5. 10년 뒤 윤은혜는 당시 본인은 벽을 친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6. 당시 작사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박진영이 작사한게 맞지만 앨범 발표 직전 DR뮤직측에 작사가를 자신이 아닌 아내의 이름으로 올려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덕분에 해당 곡의 작사가는 방송사별로 다르게 표기되는 복잡한 상황이 발생했다.
  7. 당시로선 상당히 끈적끈적하고 야릇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시대상으론 꽤나 앞서갔던편 ~염색한 머리도 방송에서 뺀찌놓던 촌스러운시절....~~
  8. 그 당시에는 방송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음반을 발매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9. 박지윤, 젝스키스등을 제치고 1위 수상을 했으며 이들도 9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들이다.
  10. 4집의 초반 반응은 3집 그 이상이었다. 4집은 한국음반산업협회 기준으로 발매 첫달 판매량이 3집보다 높았지만 활동 두달째 들어갔을 때 낙폭이 매우 컸다. 무수히 많아진 안티세력의 영향도 있고 방송 활동도 못했기 때문이다.
  11. 특히 노래의 주요 부분('나 너에게 주기로 했어' 등)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윤은혜가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은 더욱 불거졌다.
  12. 여담으로 가수 이윤정의 2집 앨범 <육감>에 7번 트랙으로 수록된 《가까이 더 다가와》 는 《가까이》와 가사만 다른 동일곡이다. 비록 가사는 다르다고는 적어놨지만, 일부 부분을 빼면 가사마저도 완벽히 똑같다. 같은 해에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 앨범에 똑같은 곡이 수록되었는데, 작곡가 정연준이 똑같은 곡을 베이비복스와 이윤정에게 줬고, 이 사실이 기사화 되어 논란이 있었다. 후에 정연준은 실수였다면서 이윤정에게 사과를 했지만, 곡을 먼저 받았었던 베이비복스에게는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가 후속곡에서 밀려난건 선정성 논란 외에 이런 이유도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13. 특히 <인형> 활동부터는 음악캠프가 2001년 9월 1일부터 필수 라이브 체제로 변경했던 것도 있다.
  14. 당시 베이비복스의 앨범 형태가 스페셜 앨범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음반 판매량이 20만장을 넘겼음에도 후보에 오르지 못하자 팬들이 반발하여 결국 인기상이 급하게 대체되어 수상했었다.
  15. 하지만 결과물을 보면 40억이 들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16. 7집 앨범은 실제로 월드 레이블 EMI에서 담당하기도 했다.
  17. 물론 이 노래를 좋아하는 매니악한 팬들도 꽤 많았다.
  18. Floss P의 미국 앨범은 개인적인 사정이었는지 결국 발매되지 않았고 이 곡도 자연스럽게 묻힐뻔 했지만 2007년 태국과 일본 등지에서 발매된 베이비복스 베스트 앨범에 수록되었고 제목도 당시 가제였던 'Hot'에서 'Fire'로 바뀌었다.
  19. 이 때는 심은진의 건강악화 때문이었다.
  20. 7집 프로듀싱에 참여했던 미국 기획사
  21. 윤은혜의 불참을 두고 불화설이 있었지만 윤은혜가 직접 부정했다.
  22. 베이비복스 리브는 베이비복스와 엄연히 다른 그룹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에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