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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람세스 2세

이집트의 파라오로 왕국의 전성기를 누리다

[ Ramesses II ]

출생 - 사망 B.C. 1303(?) ~ B.C. 1213(?)

고대의 나라로부터 온 한 여행자를 만났다. 그는 말했다. 몸뚱이가 없는 거대한 돌로 만든 다리가 사막에 서 있었다고. 그 곁 모래 위엔 부서진 얼굴이 반쯤 가린 채 묻혀 있었다고.

그 얼굴의 찡그린 미간, 주름 잡힌 입술, 싸늘한 냉소는
조각가가 왕의 정열을 읽었음이리라.
그 정열은 이 생명 없는 물체에 찍혀져 일찍이 그 정열을 비웃은 손과
그 일을 시켰던 심장보다 더 오래 살아 있다.
그 받침대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어스, 왕 중의 왕이로다.
너희 이른바 강자들이여,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19세기 초 영국의 시인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 [오지만디어스(Ozymandias)]의 일부다. 셸리는 아마도 기원전 1세기의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로스의 [세계사]를 읽고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디오도로스는 거대한 파라오의 좌상을 보고, 그 받침대에 새겨진 오지만디어스의 오만한 문구를 읽었다. 오지만디어스란 ‘우세르마아트레(Usermaatre)’라는 이집트 이름을 그리스식으로 읽은 것이며, 우세르마아트레는 바로 람세스 2세의 왕명(王名)이었다.

18왕조에서 19왕조로

 이미지 1

대략 기원전 1323년경(고대 이집트의 연대는 대부분 불확실하다. 학설에 따라 1352년이라고도, 1339년이라고도 한다), 파라오 투탕카멘이 채 스물이 못되는 나이로 사망했다.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은 그의 뒤는 총사령관이며 ‘왕세자’의 칭호로 불리고 있던 호렘헵(Horemheb), 아니면 재상인 아이(Ay)가 이을 것이라 여겨졌는데, 일단은 호렘헵이 아시아에 나가 있는 사이에 투탕카멘이 죽었으므로 아이가 먼저 손을 썼다. 그는 투탕카멘의 왕비인 앙케센나멘을 자신의 부인으로 취하고,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4년에 불과했고, 확실치는 않으나 호렘헵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음 파라오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왕이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는데, 죽기 전에 그의 오른팔로 충실히 일해온 재상 파람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가 람세스 1세이며, 이집트 제19왕조의 시조다(호렘헵을 19왕조의 시조로 보기도 한다).

람세스 1세는 이집트가 지중해와 만나는 나일 삼각주 중에서도 옛날 힉소스(Hyksos) 족이 점령했던 지역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아시아계의 핏줄이 섞인 것으로 보이며, 군인 가문의 자손이었는데 귀족이었다고도, 또는 평민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그는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죽지만, 아이나 호렘헵과는 달리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 있었다. 그가 세티 1세이며, 세티 1세는 다시 10여년 뒤에 자신의 아들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죽는다. 그가 바로 람세스 2세였다.

기원전 13세기의 태양왕

오늘날 가장 유명한 파라오를 꼽으라면 투탕카멘과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람세스 2세일 것인데, 보다 ‘긍정적인’ 이미지, 말하자면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풍당당한 이미지로 그런 명성을 누리는 파라오는 람세스뿐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고왕국 시대(3, 4, 5, 6왕조)를 이집트의 최고 융성기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신왕국 시대(18, 19, 20왕조)야말로 이집트의 전성기였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고왕국 시대에는 범접할 수 없는 웅대함과 신비함이 있었다면, 신왕국 시대에는 사상 최대의 국토와 화려하고 정교한 문화가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파라오는 단연 람세스 2세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의 긴 재위 기간이다. 람세스는 14세 때 이미 왕세자-섭정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10년 만에 왕위를 이어받고는 66년(다소 불확실하지만 60년 이상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을 재위했다. 19왕조 전체의 존속기간이 110년인데, 세 번째 파라오인 그의 치세가 그 중 삼분의 이 가까이를 차지했던 것이다.

아부심벨 신전. 전면에 옥좌에 앉은 20m 가량의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상 4개가 자리하고 있다. 아스완댐 공사 때문에 수몰 위기에 놓였으나 유네스코에 의해 1968년 이전, 복원되었다.

재위 기간이 길면 그만큼 조형물을 세울 여유도 많다. 람세스는 자신의 기념물을 이집트 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많이, 이집트의 구석구석까지 세웠다. 네 개의 거대한 좌상이 있는 아부심벨 신전을 비롯해, 룩소르 신전, 카르나크 신전의 라메세움 등에 거대한 석상이 남아있고, 크고 작은 상들은 아직도 이집트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심지어 예전 왕들의 상을 약간 고쳐서 자신의 상으로 내놓기도 했다. 고왕국의 쿠푸(Khufu)나 카프레(Khafre)가 아주 멀리서도 보이는 기념물(피라미드)을 남겼다면, 람세스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도록 기념물로 국토를 채운 셈이다. 게다가 그는 테베에서 더 북동쪽의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그곳을 피람세스(람세스의 집)라고 불렀다.

그런 사업의 동기에는 어쩌면 ‘콤플렉스’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람세스 2세는 태어날 때부터 왕족은 아니었고, 군인(어쩌면 귀족조차 못되는)의 자식으로 살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이집트인이 미개인으로 멸시하는 아시아인의 핏줄마저 섞였다. 이처럼 태생이 당당하지 못하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도처에 자신을 위대하게 높이는 상을 세우고, 스스로의 신격화에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기념물 조성 사업이 가능했을 만큼, 이 이집트의 ‘태양왕’(람세스는 태양신 ‘라’와 ‘태어나다’는 이집트어 ‘모세’가 합쳐진 이름이다)은 보기 드문 풍요와 번영을 누렸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그만큼 영명했고, 탁월하게 통치한 덕분이었을까?

‘출애굽’은 람세스 시절에 일어났을까?

람세스 2세가 즉위하던 무렵 이집트의 중요한 정책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18왕조의 ‘이단자’ 아크나톤(Akhnaton) 이래 갈등을 빚어온 신생 아톤 신앙과 기존의 아멘 신앙과의 역학관계를 정립하고, 파라오와 신관들 사이의 관계도 정립하는 것이 하나이며, 아시아의 새 강적, 히타이트와 맞서서 아시아의 점령지를 유지ㆍ확대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람세스 2세는 아멘 신앙의 우위를 확정하는 한편 신관의 지위를 존중하되 파라오의 권위를 넘보게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분명 업적이지만, 다만 호렘헵 이래 파라오들의 정책 노선을 답습한 것이기에 큰 독창성이나 탁월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가 그린 ‘이집트를 떠나는 히브리인들’. 1828년의 작품이다.

람세스 스스로가 한껏 자화자찬했던 필생의 업적은 내정보다 외정에 있었다. 그는 아시아 쪽에서 이집트의 지배력을 더욱 높이려 했으며, 어쩌면 그 때문에 보다 북동쪽에 피람세스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명한 히브리인의 “출애굽(出埃及)” 또한 람세스의 아시아 정책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은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인지, 언제 벌어진 일인지가 불확실한데 기원전 15세기설과 13세기설이 있다. 최근에는 이중 13세기설이 더 유력한데, 성서 출애굽기에 히브리인들이 람세스라는 도시를 건설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으며(출애굽기 1: 11), 람세스가 죽은 직후 이집트와 아시아에서 작성된 문서에 “아직도 방황 중인 히브리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반면 기원전 15세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때쯤 지중해의 테라 섬에서 큰 화산 폭발이 있었으며, 그것이 성서에 묘사된 이집트의 7대 재앙의 실체라고 한다). 다만 람세스 본인이 남긴 기록에는 이 사건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그것은 다른 파라오의 연대기에도 마찬가지이며 출애굽의 실체가 그리 대단치 않은, 민족 차원보다 소수 집단 차원의 움직임이어서 그랬거나, 스스로에게 불리한 내용은 일체 생략해 버리는 이집트의 역사기록 습관 때문으로 풀이된다. 13세기설의 지지자들은 힉소스 족이 기원전 17세기에 이집트를 침공할 때 히브리인도 함께 들어와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 거주했으며, 힉소스 족은 기원전 16세기에 축출되었으나 히브리인들은 다른 여러 아시아 민족과 함께 머물렀다고 본다. 그러다가 람세스 2세에 이르러 아시아계 민족에 대한 탄압 정책 때문에 탈출 또는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람세스 2세 당시의 이집트(녹색)와 히타이트(붉은색)의 판도. 경계선에 있는 도시가 카데시(Qadesh)다.

람세스가 히브리인을 의도적으로 추방했다면 국내의 아시아 세력을 청소하고, 그들이 분쟁 지역인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 그곳의 원주민과 싸우게 함으로써 아시아 쪽의 전열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재위 2년째에 이집트를 침입한 샤르다나 해적집단을 물리치고, 4년째에 아시아에 시범적인 출정을 한 람세스는 재위 5년째의 해(기원전 1274년?)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인 아시아 출병을 한다. 병력은 2만에 달했고, 라, 아멘, 프타, 세트 신의 이름을 딴 4개의 군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부왕인 세티 1세 때 정복했으나 지금은 히타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카데시(Qadesh)를 다시 복속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왕은 이를 앉아서 볼 생각이 없었고, 3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해 맞섰다.

카데시 전투

람세스의 대군은 동지중해 해안길을 따라 가나안과 시리아 남부를 지나고, 한 달 만에 베카 계곡 남쪽에서 카데시로 접근했다. 그리고 오론테스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두 명의 베두인(Bedouin) 인을 붙잡았는데, 그들은 히타이트군이 아직 카데시에서 200킬로미터 정도 되는 곳에 머물러 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무와탈리스가 보낸 첩자였고, 거짓 정보를 그대로 믿은 람세스는 히타이트군에 앞서 카데시를 점령하기 위해 곧바로 강을 건넜다. 좁은 여울을 찾아 서둘러 건너가려 했기 때문에 네 개의 군단은 서로 떨어져서 각자 행군했으며, 카데시 문턱에서 재집결해 전열을 가다듬을 예정이었다.

선두의 아멘 군단과 왕이 이끄는 라 군단이 강을 건너고 나머지는 아직 강 저편에 있을 시점에, 람세스는 또 다른 첩자들을 잡았는데 이번에는 그들을 제대로 심문해 진짜 정보를 얻어냈다. 히타이트 군이 바로 코앞까지 와 있다는 것이었다. 람세스는 당황하여 전군의 집결을 지시했으나, 그 때 나타난 히타이트군이 전차대를 질풍처럼 몰아 라 군단을 들이쳤다. 공포에 질린 람세스의 부하들은 허둥지둥 달아났으며, 이집트의 기록대로라면 람세스는 오직 혼자서 벌떼처럼 덤벼드는 히타이트군을 쳐부쉈다고 한다.

“나는 사나운 세트 신처럼 적들을 덮쳤다. 나는 적의 전차병들이 내 말들 앞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감히 나와 대적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힘이 빠져 활을 쏘지도, 창을 겨누지도 못했다. 나는 그들이 악어새끼처럼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서로 달아나려다 겹겹이 겹쳐 넘어지고 뒹구는 그들을, 나는 닥치는 대로 쓰러트렸다. 한 번 쓰러진 자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병사들이여, 나의 승리를 보라, 오직 나 혼자의 힘으로 승리했음을 보라!”

그러나 이는 람세스가 지어낸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식의 허풍이며, 히타이트 쪽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당시 무와탈리스가 신중을 기하느라 우선 소수의 전차대만을 가지고 라 군단을 습격했는데, 얼마 뒤 뜻밖에 이집트의 친위대가 나타나 맹렬히 싸우는 데 놀라 전군을 투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히타이트군이 처음부터 전력으로 람세스를 공격했다면 그는 전사하거나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히타이트군이 초반의 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접전을 벌이는 사이에 후속 부대인 프타 군단과 세트 군단까지 합류함으로써 히타이트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군도 강을 건너 후퇴했다. 양 진영은 오론테스 강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서로 대치하다가, 서로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에 말머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부심벨 신전의 부조에 기록된 카데시 전투 중의 람세스 2세.

이것이 세계전쟁사상 최초의, 전말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된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카데시 전투의 대략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서로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는데, 냉정히 보면 히타이트 쪽의 주장이 더 그럴싸했다. 카데시를 탈취한다는 이집트의 전쟁 목표가 좌절되었고, 이후 이집트 지배하의 아시아 도시들이 추가로 이탈해 히타이트에게 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는 역시 강대국이었고, 람세스는 끈질겼다. 그는 이후 세 차례 이상의 원정을 실시하여 히타이트를 꾸준히 괴롭혔다. 이 상황은 히타이트로서 전혀 달갑지 않았는데, 무와탈리스의 아들인 무르실리스를 내쫓고 새로 히타이트 왕이 된 하투실리스는 무르실리스가 이집트로 망명하여 왕위를 되찾으려 하고 있음에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서 아시리아의 압력이 점차 거세지고 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카데시 전투가 있은 뒤 16년 만에, 히타이트의 사절은 피람세스를 방문하여 람세스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두 나라는 현재의 영토를 존중하며(카데시는 결국 히타이트에게 귀속되었다), 한쪽이 누군가에게 침략당할 경우 다른 한쪽이 원병을 보내기로 했다. 하투실리스는 두 나라의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람세스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이 강화조약의 국제정치적 효과는 대단하여, 이후 40년 동안 오리엔트 세계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람세스는 천성적인 정복욕을 남쪽과 동쪽으로 돌려, 누비아와 리비아에 원정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볼 때 외정 부문에서 람세스의 업적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힉소스를 축출한 18왕조의 아모시스나 카데시를 정복했던 부왕 세티 1세의 업적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가족 가장으로서의 람세스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 그녀를 몹시 총애했던 람세스는 아부심벨에 그녀를 위해 작은 신전을 지었으며, 방대한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람세스 2세는 ‘생물학적인’ 방식으로도 스스로의 흔적을 많이 남겼다. 바로 여러 아내를 두어 많은 자식을 얻은 것이었다. 과연 그 숫자가 몇인지는 불확실한데, 정부인이 최소 6명, 첩은 수십 명이었다고 하며 자녀의 숫자는 85명에서 400명까지 학자마다 다르게 추정한다. 부인들 중에는 람세스의 누이나 딸도 있었는데, 신성한 피를 보존하고자 왕녀가 왕족 외의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게 했던 이집트의 관습상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더욱이 람세스는 오래 재위했으므로, 점점 더 공주가 늘었으며 그 공주들은 람세스의 후궁을 점점 더 늘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지위는 오직 한 사람, 네페르타리(Nefertari)에게만 부여되었다. 18왕조의 파라오 아이의 증손녀, 또는 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방계 혈족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람세스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동맹을 맺은 히타이트의 왕비와 친목을 위한 선물과 서신을 교환하는 등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그녀가 재위 40년경에 죽자, 람세스는 왕비의 무덤으로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무덤을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수많은 왕자들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거나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의 사제로 일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그가 수립한 종교질서상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카르나크 신전의 제사장직은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평생 스스로 겸임했다. 그의 오랜 재위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 또는 리더십의 증거로 거론되곤 한다.

람세스는 적어도 90을 넘긴 나이로, 노령으로 숨졌다.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미라를 보면 그는 매부리코에 강한 턱을 가졌으며, 이집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붉은 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이 60여 년이나 재위하다 보니 그의 아들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으며, 왕위는 열세 번째 아들인 메네프타에게 돌아갔다.

박제가 되어버린 영웅

람세스 2세의 미라. <출처: (cc) ThutmoseIII at en.wikipedia.org>

기록상의 불확실성이 워낙 많지만, 람세스 2세는 번영을 누린 군주이기는 해도 번영을 이룩한 군주로 길이 칭송받을 만한 업적의 주인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대단했던 그의 ‘선전 작업’ 덕에, 그는 이미 죽은 직후부터 전설이 되었다. 19왕조가 끝난 뒤에도 여러 파라오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람세스 11세까지 나왔으며, 몇백 년 뒤까지 그의 상에 제물이 바쳐졌다. 헤로도토스나 디오도로스 같은 그리스인, 타키투스 같은 로마인들도 그에게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 율 브리너가 연기한 영화 [십계], 애니메이션 [이집트의 왕자] 등등에서 람세스는 히어로 또는 안티히어로로서 위엄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요란한 우상화와 거창한 신화 만들기를 마냥 조소할 것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평범한 개인이 살아갈 낙을 얻고, 공동체에 대한 의심을 잊기 위해 최신 휴대전화를, 최신 게임을, 신상 명품백을 소비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신이자 우상인 파라오의 이미지를 소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세출의 영웅과 함께 한다는 믿음, 신과 같은 지도자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었다. 본래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겸손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인류의 희망, 살아 있는 기적으로 스스로를 치장해야 했다. 람세스 2세는 그 궁극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행운 혹은 신의 가호로, 개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풍요를 누리고 살았다. 다만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똑같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만 새겨져 있는 그의 수없이 많은 상들 틈에, 진정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그래서 파라오의 영광이 한낱 구경거리가 된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가 공감할 수 있는 한 인간이 아닌 값비싼 돌조각으로만 비쳐진다는 점이 혹시 아쉬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어스, 왕 중의 왕이로다.
너희 이른바 강자들이여,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그리고 그 곁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 거대한 조각상의 부서진 잔해들 주위에는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평탄하고 광활한 모래밭만 끝없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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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좌상

람세스 2세의 좌상 BC 1290년경,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미술대사전(인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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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2. 07. 18.

출처

제공처 정보

  •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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