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주제분류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정혜선 102건

제공처 정보

정혜선
정혜선 대학교수

정혜선은 숙명여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대학교 문학부 외국인연구원, 성균관대 연구교수, 한국일본사상사학회 총무이사를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 인문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성균관대·연세대 등에서 일본사·동아시아역사와 문화·세계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전쟁시기 일본 사법관료의 전향인식과 천황제신앙>, <한일사상과 문화, 그리고 21세기 한국 문화도시-신명, 평화, 자연스러움>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는 《일본공산주의운동과 천황제》, 《한국인의 일본사》, 《시티컬처노믹스》(공저), 《동과서 마주 보다》(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세계지도로 역사를 읽는다》가 있다.

  • 막부의 장군과 지방의 번주(藩主)인 다이묘(大名)가 주종관계를 맺어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幕藩)체제라고 한다. 막번체제는 조세를 부담하는 농민을 기초로 하고, 사농공상 등의 엄격한 신분제에 의해 질서화되었다. 장군은 형식적으로는 천황으로부터 임명되지만, 실제는 일본의 지배자였다. 장군의 권력은 역대 막부의 장군과 비교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강력하였고 토지, 인민에 대한 전제적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막부의 조직은 막부정치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점차 갖추어져 3대 장군인 이에미쓰 시대까지는 거의 정비되었다. 막부기구 중에서 최고직은 다이로(大老)였는데, 그것은 임시직이었고, 통상은 로쥬(老中)가 정무의 중심이었다. 와카도시요리(若年寄)는 로쥬의 보좌역이고, 오메쓰케(大目付)는 다이묘의 감독과 에도성의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메쓰케(目付)는 장군의 직속가신의 감독을 관장하였다. 그 밖에 사사봉행(寺社奉行) · 마치봉행(町奉行) · 감정봉행...

  • 1467년 오닌(應仁)의 난은 하극상의 전국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무로마치 시대 가장 강력한 쇼군이었던 요시미쓰가 죽은 후, 슈고 다이묘의 힘은 쇼군의 힘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오닌의 난은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슈고 다이묘들의 대립이 얽히면서 11년간이나 지속된 내란이다. 오닌의 난의 직접원인은 쇼군 집안의 후계자 문제, 쇼군을 보좌하는 관령이며, 당대 최대의 슈고 다이묘인 시바(斯波) · 하타케야마(畠山)라는 두 집안의 다툼문제였다.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29살이 되어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義視)를 후계자로 정하고 관령인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를 후견자로 삼았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부인 히노 도미코에게서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가 태어났다.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쇼군으로 만들고 싶었던 도미코는 당대 실력자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을 후견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동생 요시미와 가쓰모토, 아들...

  • 폭력적인 운동으로 힘을 잃은 존왕양이파는 사쓰마, 조슈, 도사 등지에서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선 존왕양이파는 '양이(攘夷)'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서양 세력과 직접 싸우면서 서양의 근대적 무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1862년 영국인이 사쓰마 사무라이에게 살해당하자, 영국은 사쓰마의 가고시마 만에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사쓰마 번과 전쟁을 벌였다. 사쓰마 번은 격렬히 싸웠지만, 강력하고 성능 좋은 영국의 대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조슈 번 역시 시모노세키에서 미국 · 영국 · 네덜란드 · 프랑스 4개국 연합 함대의 공격을 받아 거세게 저항했지만, 1시간 만에 조슈 번의 모든 포대가 파괴되었다. 존왕양이파는 서양 세력과 전쟁을 거치면서 '양이'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개국론으로 전환하게 된다. 존왕양이파는 개국론으로 전환하면서 권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조슈 번은 반동파가 번의 실권을...

  • | 57년 | 노국왕, 후한의 광무제에 사신 파견[한위노국왕(漢倭奴國王)의 인장 받다] | | 238년 | 야마타이 국 여왕 히미코가 위에 사신을 보냄 | | 391년 | 위와 고구려와의 싸움 | | 413년 | 위 오왕, 중국에 조공 | | 538년 | 백제에서 불교 전래(일설에는 552년) | | 562년 |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킴(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멸망으로기재) | | 593년 | 쇼토쿠 태자가 섭정이 됨 | | 607년 | 중국의 수(隋)에 사신 보냄(견수사의 시작) | | 645년 | 다이카 개신 | | 663년 | 백촌강의 싸움 | | 694년 | 후지와라코로 천도 | | 710년 | 헤이조쿄로 천도 | | 712년 | 《고사기》 완성 | | 720년 | 《일본서기》 완성 | | 723년 | '삼세일신법' 시행 | | 743년 | '간전영년사재법'. 대불 건립의 조칙 | | 752년 | 동대사(東大寺) 대불의 개안 | | 794년 | 헤이안쿄로 천도 | |

  •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이해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전화(戰火)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등의 연합군(삼국협상)과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등의 동맹군(삼국동맹)과의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약소국들을 식민지화 하여 전 세계의 1/5, 전 인류의 1/10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쟁탈을 위해 일어난 제국주의전쟁의 성격을 지닌다. 1차 세계대전(1914~1917)은 제국주의의 열강 대부분이 연루된 국제전이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에 항의하여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대결로 비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말 이래로 심화되어 온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세력 경쟁에...

  •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진 후, 천하의 실권을 장악한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오와리(尾張)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 하급무사로서 노부나가를 섬기다가 전공을 세워 오미(近江) 나가하마(長浜)의 성주가 되었으며, 이윽고 모리 씨(毛利氏)를 공격하는 총대장이 되고 하리마(播磨) 등 수 개국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빗추(備中)의 다카마츠성(高松城)에서 모리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즉시 강화를 맺은 후,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여 교토의 서쪽 야마자키(山崎) 싸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유업을 계승하여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 1583년에는 노부나가의 중신인 시바타 카츠이에(紫田勝家)를 멸망시키고,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信孝)를 자살케 하였다. 그 해 오사카...

  • 전국시대 100여 년의 혼란을 종식시킨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세 사람이다. 일본사에서는 드문 영웅으로 각각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세 사람을 상징적으로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새를 울게 하라고 한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새에게 울라고 명령을 한 다음 그래도 울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베어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갖 방법을 써서 울도록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처럼 오다 노부나가는 불같은 성격으로 난마처럼 뒤엉킨 전국시대에서 통일의 가닥을 잡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로 가는 핵심지인, 교토에 입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오와리(尾張)의 슈고다이(守護代)의 일족이었는데, 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대두하여 1560년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향하고 있던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1945년 5월에는 독일도 무조건 항복하여 유럽의 전화는 종결되었다. 삼국동맹에 참가한 나라로는 일본만 남았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전후 처리와 일본에 대한 대책이 토의되면서, 일본의 지배층 내부에서 전쟁 종결을 꾀하는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중한 강화파 관료들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육군 측은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가 마침내 미군의 손에 들어가자 명예로운 평화를 주장하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가 총리가 되었다. 전쟁의 종결에 임한 일본 지배층은 강화파건 강경파건 간에 핵심은 '천황제(국체)를 유지할 수 있느냐'였다. 일본 지배층은 천황제가 승전국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일본의 지배층은 패전 후 '천황의 권위를 이용한 국민 통합'이 아닌 다른 방식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이 참

  •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수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쇼군과 다이묘의 거성에 형성된 계획도시인 조카마치(城下町)를 비롯하여 역참도시, 광산도시, 항구도시 등 다양한 성격의 도시들이 존재했다. 조카마치는 전국시대 이래 다이묘의 거성 주위에 무사와 상공업자가 밀집하여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각지에 번영하였다. 이 가운데 삼도(三都)로 불리워지는 에도, 오사카, 교토는 도쿠가와 시대를 대표하는 3대 도시였다.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는 최대의 조카마치로서 18세기 초에 인구가 약 100만으로 당시의 세계 최대도시였다. 무엇보다 에도는 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무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는데, 이들은 절대적인 소비층이었다. 신흥도시 에도는 점차 정치 · 군사 · 경제상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어, 일본 최대 소비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워지는 오사카(大阪)는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로 가장 번영했다. 오사카에는 번이 세금으로...

  • 1858년 막부는 천황의 칙허 없이 통상 조약에 조인하고, 안세이 다이고쿠(安政의 大獄)로 반대파를 숙청했다. 이런 막부의 강경한 조치는 격심한 반발을 낳았다. 많은 사무라이는 자신들의 동료와 주군을 처벌한 막부에 대해 원한이 쌓여 갔다. 통상 조약으로 외국과의 무역이 자유로워지면서 경제 혼란이 가속화되어 일본인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외국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요코하마 거리는 가스등과 서양식 건물이 속속 들어서 깨끗하고 화려했으며 마치 일본 속에 서양을 옮겨 놓은 듯했다. 에도는 외국의 외교관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낯선 거리로 변화되었다. 외국인이 일본의 중심 도시에서 활보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무라이는 무기력한 막부와 이질적인 외국인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반면 통상 조약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했던 천황은 혼란되고 무기력한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표상으로 부각되었다. 통상 조약 이후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받들어 외국을 배척함)...

  • 도쿠가와 시대의 사회는 사농공상이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제도가 기반이 되었다. 무사는 지배계층인 최상위층으로, 전 인구의 1할을 차지하고 있고 갖가지 특권을 누렸다. 에도시대 일반 서민은 원칙적으로 성(姓)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름만 불리었는데, 무사는 지배계급으로서 성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또 무사가 농민이나 상공인의 무례함에 의해 명예가 손상되었을 때, 그들을 살상할 수 있는 권리인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의 특권을 갖고 있었다. 또 무사들은 두 개의 도검을 패용할 수 있는 대도(帶刀)의 특권도 있었다. 기리스테고멘의 특권은 서민에게 무사는 공경의 대상이며, 무사에게는 매사 공순해야 한다는 것을 법률적으로 의무지운 강력한 법이었다. 무사의 특권은 서민에 비하여 우월한 무사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 제도였다. 무사는 원칙적으로 쇼군 · 다이묘 · 하타모토를 정점으로 하는 가신단에 소속되어...

  • 아시아의 근대는 서양으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의 근대 역시 1853년 6월 네 척의 흑선(검은 군함)을 앞세우고 들이닥친 미국 페리 제독의 압력으로 시작된다. 흑선은 에도만 입구의 우라가(浦賀)에 내항했다. 일본인에게는 에도만에 정박한 시커먼 증기선이 마치 섬처럼 보였던지, 우키요에(일본의 전통화)는 이 흑선을 아주 크고 시커멓게 그렸고, 페리는 험상궂게 그려져 있다. 근대 이전에는 서양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는 아니었다. 아마도 중국이 훨씬 발달했으며,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이 세계를 제패하고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때는 근대 이후로 채 300년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의 미국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양은 자본주의를 확립하고, 자본주의에 걸맞은 새로운 근대 국민 국가를 이룩했다. 시민은 자본주의를 만든 주체이고, 이들은 시민 혁명을 통해 왕권의 횡포와 봉건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 다이라 군을 물리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섣불리 귀족 흉내를 내다가 사무라이의 지지를 상실한 다이라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독특한 사무라이 조직을 통해 전국을 다스릴 장치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가마쿠라 막부(鎌倉 幕府)이다.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가마쿠라에 기반을 두고 있던 요리토모는 이곳에 막부를 세운 것이다. 가마쿠라는 지금의 도쿄와는 한 시간쯤 걸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요리토모는 거병 이후 자신의 휘하에 모인 사무라이와 주종 관계를 맺어 이들을 고케닌(御家人)으로 삼았다. 주종 관계란 우선 주군 입장에서 설명하면, 주군인 요리토모는 사무라이가 갖고 있던 영지의 소유를 승인한다. 그 대가로 종자인 사무라이는 평시에는 교토나 가마쿠라의 경비를 담당하고 전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관계를 말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 종자가 전투에 참여했다면, 주군은 그 대가로 은상(恩賞)을 주어야 한다. 주종 관계는 700년간 사무라이...

  • 열도인 일본은 역사상 두 번의 외침을 겪었는데, 바로 몽골의 침입과 1945년 미국의 점령이다. 13세기 초 몽골 고원의 유목민족인 칭기즈 칸이 출현하여 몽골과 그 주변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서아시아 · 남러시아를 원정하는 등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나아가 그 후계자들은 금(金)을 멸망시키고 송을 남방으로 압박하며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럽에까지 원정하여 세계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수도를 대도(大都, 북경)로 옮기고 1271년에 국호를 원(元)으로 칭하면서 아시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원은 일본을 정복하려는 의도로 1268년부터 고려를 통해 3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에 싯켄이었던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는 사신을 추방하고 1271년에는 몽골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내의 고케닌(御家人,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에게 북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을 중심으로 한...

  • 일본은 1991년 이래 장기불황이 계속되면서 10여 년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시달렸다. 이 위기는 이전의 불황과는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른, 전후 55년 체제를 뒤흔드는 근본적인 위기이다. 전후 불황은 있었지만 곧 극복했다. 일본인은 일에 대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니, 그만큼 기민했던 것이다. 이 길고 심각한 경제 위기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렀는데, 이제는 20년이 지났으니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러야 할 판국이다. 불황은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금융권의 부실 채권이 대량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출 등에 의해 사들인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거품 경제의 붕괴로 한없이 하락했다. 그렇지만 은행에서 빌린 원금과 이자는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따라서 기업 등은 그 돈을 갚을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은행이 돈을 빌려 주고도 회수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이것이 부실 채권이다. 부실 채권은 금융 시장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 오고 일본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일본 경제가 장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