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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8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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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고구려 연구가인 그는 고구려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첫 저서인 『고구려의 발견』은 최초의 본격 고구려 통사로서 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이어서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복원한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발표하여 정치제도사 중심의 고구려 연구 풍토에서 보기 드물게 생활사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논문으로는 「고구려 수레 연구-고분벽화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그의 주 관심사는 고구려가 어떻게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문명을 형성하고 문명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가를 구명하는데 있다. 외적인 고구려의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그는 고구려인의 삶의 모습을 복원하는데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번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 [고국원왕과 모용선비]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아들로 이름은 사유였다. 그는 315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331년에 고구려 16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비교적 오래 살아 60세를 넘겼고, 재위기간도 41년이나 되었다. 그는 고구려 역사상 외부의 적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겪은 왕이다. 그렇지만 그가 못났다거나, 당시 고구려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와 상대해야 했던 적들이 마침 국운상승기였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 최대의 적은 모용선비였다. 고국원왕은 태자시절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수없는 전쟁을 치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모용선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지금의 무순시 부근에 신성을 수리하도록 시켰다. 미천왕 말년이던 330년 고구려는 모용선비를 견제하기 위해 후조의 왕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어 활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후조에서는 338년에 이르러 선박 300척을 동원해서 30만 곡(斛)의 곡식을 고구려에 보내고, 군대를 동원해...

  • [평원왕과 평강공주]   고구려 25대 평원왕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559년부터 589년까지의 재위기간 동안 그는 흔들렸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고구려 문명의 번영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양성이며, 양원왕의 첫째아들이다. 평원왕은 담력이 크고, 말을 잘 타며, 활쏘기도 잘하였다. 그의 정식호칭은 평강상호왕이다. 좋아한다는 뜻의 호(好)라는 글자가 왕의 이름에 들어간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그를 훌륭한 임금님으로 존경했음을 알려 준다. 평원왕에게는 자식들이 여럿 있었다. 뒷날 영양왕이 되는 첫째아들 원, 영류왕이 되는 건무, 보장왕의 아버지인 태양, 그리고 유명한 평강공주가 그들이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어려서부터 울기를 잘하여 평원왕이 딸을 자주 놀리곤 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좋은 데 시집 보낼 수 없겠구나. 자꾸 우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바보 온달. 그는 누구이길래 고구려 왕의 대화에서 거론되었을까?...

  • [고구려는 대왕국가였을까?]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의 임금은 자신이 과거의 여러 나라 왕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전설시대의 3황과 5제에서 각기 글자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가 곧 진시황제다.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황제와 왕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질서가 존재해 왔다. 한 나라의 왕이 황제를 칭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왕을 칭했는가는 그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징표였다. 이런 관점 때문에 고구려에서 황제를 칭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한때 논란이 있어 왔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왕(聖王), 대왕(大王), 왕(王)이란 칭호만 보일 뿐 고구려에서 황제를 칭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성제(聖帝)란 기록이 보인다. 그것도 옛책인 『국사(國史)』의 「고려본기」에서 시조를 동명성제라고 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보다 신뢰도가 높은 사료인 『구삼국사기』에서 제(帝)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제, 황제는 중원의...

  • 을지문덕.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전부 몰살시켜 강대했던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영웅. 그가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 전기를 쓰신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4천 년 우리 역사에서 제일의 인물이라고 했다. [을지문덕과 관련된 지역의 전설] 을지문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만, 『삼국사기』 등에는 을지문덕의 어린 시절이나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평안도 일대에서 그에 관한 많은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역대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고 했다. 석다산은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있는 산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을지문덕이 어릴 때부터 글 읽고 무술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에 있는 불곡산의 동굴 속에서 글을 읽었으며 석다산 남쪽 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무술을 익혔다고도 한다. 『환단고기』란 책에는 이러한 현지에 내려오는 전설을...

  • [장안성 방어사령관 고건무]   612년 수나라 대군이 쳐들어오자 영양왕은 수도인 장안성의 방어와 수나라 해군을 막을 임무를 동생인 건무에게 맡겼다. 을지문덕이 적의 육군을 맞이하여 잘 싸우고 있었지만, 만약 적의 해군을 막지 못하면 고구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수나라 대군으로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는 한편, 30만 5천의 별동대가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수나라 해군은 이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이들과 함께 장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적의 이러한 작전을 알고 있는 건무는 수나라 육군과 해군이 만나지 못하도록 먼저 수나라 해군을 물리칠 작전을 펼쳤다. 건무는 수나라 해군이 대동강 하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먼저 기습공격을 했다. 그런데 건무는 일부러 싸움에 패배하고 달아나기만 했다. 몇 번 이런 싸움이 계속되자 수나라 해군사령관 내호아는 작은 승리에 자만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대가 강하다고 하더니 별것...

  • [형제를 죽인 고구려 왕들]   고구려 15대 왕인 미천왕은 왕이 되기 전에 소금장수를 했던 사람이다. 어떻게 소금장수를 하던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도 무식한 강화도령이 하루아침에 철종으로 등극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미천왕만큼 극적이지는 않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248년 9월 동천왕이 죽자 그의 아들 연불이 12대 중천왕이 되었다. 그런데 그해 11월 왕의 동생인 예물과 사구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중천왕의 뒤를 이어 270년 왕위에 오른 서천왕 때에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 서천왕 17년인 286년 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발은 거짓으로 병이 있다고 속여서 온천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 무리들과 더불어 반란을 모의했다. 서천왕은 이 일을 알고서 이들에게 최고 관직인 국상을 주겠다며 궁궐로 불렀다. 일우와 소발이 궁궐에 들어오자 서천왕은 힘센 장사들을 시켜 그들을 잡아서 죽여 버렸다. 형제들간에 왕위를 놓고 다툰 것은 고

  • [연개소문의 아들로 태어나다] 연남생은 634년 연개소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때 고구려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적국이었던 당나라에서 679년 46세의 나이로 죽은 인물이다. 그는 장렬히 적과 대항하다가 잡혀서 죽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배신하고 조국을 멸망시키는 주역이 되었다가 당나라에서 병들어 죽었다. 일평생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에게는 고구려 제일의 배신자, 제일의 역적이란 더럽고 추악한 딱지가 붙어 있다.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이러한 변모가 가능했을까. 왜 그는 고구려를 배신했던 것일까? 연남생의 증조부는 연자유, 할아버지는 연태조, 그리고 아버지는 연개소문이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가 모두 대대로 벼슬을 지낸 명문집안이었다. 642년 그가 9세가 되던 해, 아버지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고구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막리지가 되었다. 아버지 덕분에 그는 9세의 나이에 선인이란 관등을 얻었다. 연남생은 어려서부터...

  •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   고구려의 건국자는 동명성왕 혹은 고주몽으로 알고 있는데, 추모왕은 다른 사람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글을 쓰고 만든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분을 추모왕이라고 적고 있다.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부여의 말이며, 추모왕의 별명과도 같은 말이다. 동명성왕은 후대의 존칭이며, 본래는 부여의 위대한 영웅 동명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동명왕과 추모왕은 다른 인물이다. 동명왕은 부여의 북쪽에 있었던 고리국에서 태어나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다. 서기 60년경에 쓰여진 『논형』이란 책에는 부여의 건국 시조로서 동명왕이 분명하게 보인다. 동명왕의 탄생 이야기는 추모왕의 것과 그 이야기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물론 두 이야기의 원형은 동명왕 이야기다. 고구려 사람들이 추모왕을 존경하다 보니 부여의 영웅 동명왕의 이야기를 채용하여 추모왕의...

  • 대륙의 거센 모래폭풍과 대양의 거대한 파도가 연상되는 진짜 사내 연개소문. 그는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간 제일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고구려인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저 한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린 위대한 민족기상의 상징이란 평가도 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는 그의 삶이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폭풍 전야] 연개소문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 고구려의 운명이 모두 내일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을 죽이고자 안달하는 적들의 요구대로 먼 요동땅에 가서 천리장성을 감독하겠다고 순순히 말할 수밖에 없었던 답답함. 강한 고구려를 만들어 보겠다고 저들을 설득했건만 공연히 전쟁만 일으켜 평화를 해치는 주범으로 따돌림당한 아픔 등이 떠오르자 적들에 대한 분노심만 커져 갔다. 부하들의 정보와 지금까지 자신이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저들이 곧 자신을 해칠 것은 분명했다. 연개소문은 저들이 수나라 해군을 대동강에서 물리친...

  • [부여국의 콧대를 꺾어라]   대무신왕. 유리명왕의 셋째아들인 무휼이 왕위에 올라 평생 이룩한 업적을 토대로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왕의 호칭 대무신왕. 대무신. 그것은 큰 전쟁의 신이라고 풀이되는 말이다.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힘을 크게 과시한 왕으로 고구려인의 큰 존경을 받았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대무신왕은 추모왕과 유리명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紹承基業)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10살의 나이에 고구려의 군대를 이끌고 학반령에서 부여의 군대를 물리친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큰 지략을 가진 왕이었다. 왕자시절부터 부여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태자가 되고, 이어서 왕위에 오른 대무신왕. 그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강국인 부여국과의 관계였다. 대무신왕 3년인 서기 20년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왔다. 부여 사신은 돌연히 붉은색 까마귀를 고구려에 주었는데, 머리는 하나고 몸은 둘인 새였다....

  • 고구려 인물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서 우리는 내심 지금 우리 모습과 사뭇 다른 그들의 모습에 당황하곤 한다. 우리가 그 시대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 사람들과 우리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인가라는 의문을 가져 볼 만도 하다. 역사는 많은 것을 변화시킨 시간이 빚어낸 과거와 오늘의 같음과 다름을 보여 주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를 이 책을 통해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의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서 당시 사람들의 삶이 저렇게 되지 않고 이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자. [여성의 삶] 먼저 생각해 볼 인물은 유화부인과 부여태후, 우씨왕후, 그리고 평강공주다. 이들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여인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무리 고대사회라고 할지라도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봄직하다. 유화부인은 해모수와 자유연애를 했다. 또 해모수와 아직...

  • 서기 3~4세기는 고구려에게 혹독한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 시기에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에 처했고, 새로 등장한 강적 모용선비족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수도가 함락되고 왕모와 왕비가 포로로 잡혀가는 최악의 굴욕도 맛보았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고국원왕이 살해되는 커다란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렇게 수모만 겪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북으로는 숙신을 굴복시키고, 부여를 속국으로 만들며, 남으로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냈고, 서로는 요동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노력하던 발전의 시기였다. 외부와의 경쟁이 비록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외부로 그 힘을 분출하려고 했다. 고구려의 발산된 힘은 내적 정비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전대에 비해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고, 부의 성격이 변하여 과거의 고유한 부가 해체되고 단지 거주지를 표시하는 방위명부가 새롭게 등장하여 내부체제가...

  •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서기 374년 고구려 왕실에서는 큰 경사가 났다. 소수림왕의 동생인 이연 부부가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담덕이라고 했다. 소수림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담덕은 왕실에서 더욱 소중한 아이였다. 담덕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남이 얕잡아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384년 소수림왕이 죽자 왕위계승 1순위자인 소수림왕의 동생 이연이 왕위에 올라 고국양왕이 되었다. 이제 11살이 된 담덕은 왕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담덕은 자신이 다음번 왕이 될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더욱 학문에 힘쓰고 높은 이상을 꿈꾸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고국양왕은 재위 3년째인 386년 13살의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고구려에서 왕이 태자를 삼는 나이는 대체로 성인의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15세를 전후로 한다. 고국양왕이 담덕을 그보다 일찍 태자로 책봉한 것은 그가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재주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담덕은 태자시절에 직접 군대를...

  • [신라의 위기] 642년 신라의 궁궐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왕마마, 대야성을 비롯한 40개 성이 모두 백제군에게 함락되었사옵니다.” “무엇이라고? 대야성이라면 신라의 서남부를 지키는 가장 큰 성이거늘 성주 품석은 적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대체 무엇을 했다고 하오?” “품석 성주와 그 부인도 적군의 칼 아래 그만 죽음을 당했다고 하옵니다.” “지금 무어라 했소이까, 품석과 고타소랑이 죽었다고?” 선덕여왕과 신하들은 모두들 슬픔에 빠졌다. 백제에 대한 분노로 다들 땅을 쳤다. 특히 신라의 실력자인 김춘추는 넋이 나간 듯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대야성주 내외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김춘추를 견제하던 세력들은 사위의 잘못을 김춘추의 잘못으로 비난했다. 위기에 빠진 김춘추는 북받친 슬픔을 거두고 다시 마음을 추스린 다음 이모인 선덕여왕에게 말했다. “대왕마마, 백제에게 당한 수모를 되갚으려면 지금 우리 신라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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