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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샹송
가사 시계의 흔들이는 ‘똑딱 똑딱’. 호수의 새는 ‘찍짹 찍짹’. ‘굴굴굴’하는 칠면조. 예쁜 종이 ‘딩댕동’. 그러나 ‘붐’. 우리의 마음이 ‘붐’하고 울릴 때 모두 함께 붐이라고 한다. 눈뜨는 것은 사랑이다. 이 ‘붐’의 리듬에 맞춰 귓가에서 ‘붐’하고 되풀이하며 모두 신나게 노래하네. 이제부터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네. 그리고 거리에는 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네. 리라꽃이 피어 손을 내미네. 바다 위에는 해가 뜬다네. ‘붐’. 한낮의 별이 ‘붐’ 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샹송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중요한 아티스트가 샤를 트레네이다. 가수로서의 그는 모리스 슈발리에 등과 마찬가지로 샹투즈 팡테지스트(환상파 가수) 부류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장르를 초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작사 ·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비범해 기존의 샹송에 혁명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기성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담하게 재즈와 그 밖의 현대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지적인 유머를 덧붙여서 넓은 음악 세계에 풀어 놓았다. 그 덕분에 샹송은 현대에 어울리는 국제적인 양식을 몸에 붙였던 것이다.

샤를 트레네는 1913년 5월 18일 피레네 산맥과 가까운 지중해의 도시 나르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뤼시앙은 공증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놀라운 신동이었으며, <그것이 악마였다면>이라는 최초의 샹송을 쓴 것은 겨우 7세 때 였다고 한다. 이 해에 그는 베제에 있는 트리니테 중학교의 기숙생이 되었고, 그 이듬해 가족과 함께 페르피냥으로 이사했다. 15세 때 트레네의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는데, 「나는 아침부터 웃으며 노래하는 소년」이라는 시가 코크 카타랑(카타로냐의 바람개비 닭)이라는 지방신문에 실린 것이었다.

1928년, 그는 독일의 베를린에 가서 잠시 머물며 미술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30년 17세 때 미술 장식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파리로 나갔다. 그림을 그려 전람회에 출품하는 한편 조앙빌 촬영소에서 무대 장치를 담당하기도 했고, 자크 드 비롱세리의 조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소설도 썼으나 모두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다. 18세 무렵, 트레네는 시인 막스 자콥(1876~1944)에게 매료되어 서로 친해졌다. 1932년, 조그만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촬영소에서 알게 된 감독 벤노 비니가 「바리올」이라는 영화를 위해 5편 정도의 샹송 작사를 의뢰해 왔으며, 작곡자는 잔 보스라는 사람이었다. 이 해에 트레네는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 지나 에스와 만나 서로 의기 투합하였다.

에스는 1915년 스위스의 안젤리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상업을 배우기 위해 파리에 나왔으나 콜레주 인이라는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트레네와 자니 에스 두 사람은 상담을 거듭한 끝에 1933년 ‘샤를과 조니’ 라는 듀엣 팀을 편성하고, 같은 해 12월 파라스라는 뮤직 홀에서 데뷔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서 그들이 맡았던 역이 불만스러워 지배인과 충돌하여 겨우 사흘 밤만에 뛰쳐나오고 말았다. 이때의 지배인은 1920년대에 카지노 드 파리 악단을 지휘한 앙리 바르나였다.

이어서 합승마차라는 카바레에서 노래했는데, 밝고 현대적이며 싱싱한 그들의 샹송은 많은 인기를 얻었다. 빨간 상의에 하얀 바지의 차림새로 트레네가 작사하고 에스가 작곡한 노래를 에스의 피아노 반주로 듀엣하는 이 콤비는 1936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동안에 15매(78회전 음악으로 30곡)의 레코드를 녹음했다. 그러나 1936년, 트레네가 이스톨 공군 부대에 입영했기 때문에 모처럼 궤도에 오른 이 듀엣도 부득이 해체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비라크브레의 병사(兵舍)로 옮겼는데, 언제나 귀영이 늦어져 영창에 들어가는 상습범이었다. 그러나 그 영창 속에서 트레네 최초의 대히트곡 <Y’a D’la Joie>가 탄생하였다.

부친과 아는 사이였던 악보 출판업자인 라울 부르통을 비롯한 막스 자콥,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던 장 콕토 등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모리스 슈발리에에게 권해 주었다. 슈발리에는 1937년 카지노 드 파리의 르뷔 ‘기쁨의 파리’ 속에서 <기쁨이 있도다>를 초연했으며, 작자 트레네의 이름도 유명해졌다. 같은 해 10월에 제대한 그는 마르세유의 스탠드 바 티롤에 솔로 가수로서 출연하여 <Je Chante> 등을 선보여 성공을 거두었다.

1939년 3월 트레네는 ABC 극장에 출연하면서 파리에의 데뷔를 장식했다. 그 무대는 선풍을 불러 일으켜 그는 하루 밤 사이에 스타가 되었으며, 장 콕토는 트레네를 평하여 ‘노래하는 미치광이’라고 말했다. 「La Route Enchantee」(빛나는 길)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같은 제목의 자작곡과 <붐>을 불렀다. 그리고 <붐>의 레코드가 1938년도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여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도 1951년에 <Voyage Au Canda>로 재차 ACC 디스크 대상을 획득한 것 외에도 56년에는 ADF 디스크 대상, 다시 67년에는 <샹송의 30년>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La Mer>와 <L’ame Des Poetes> 등 자작 자연의 히트도 많다. 1959년과 69년에는 동양에서도 공연을 가져 감동이 가득찬 노래 소리를 들려 주었다.

1975년 4월 올렝피아 극장에서 연 리사이틀을 끝으로 은퇴를 표명했으나, 80년에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여 건재함을 보여 주었다. 이 <붐>은 트레네가 작사 · 작곡한 1938년의 노래로, 같은 해 12월에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여 그의 인기를 결정지었다. ‘붐’이라는 의성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한없이 즐거운 한 편의 작품으로서, ‘노래하는 미치광이’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느낌이다.

샤를 트레네의 디스크 대상 음반이 정평이 있지만, 록 풍으로 열연하는 앙리 살바도르(Henri Salvador)의 노래도 즐길 수 있다. 여성 가수로는 파타슈가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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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70년대 추억의 팝송부터 90년대 록, 레게, 랩 음악에 이르기까지 팝송에 대한 해설과 가사를 곁들이며 알기 쉽게 소개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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