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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기덕

[ 金基德 ]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92년 ~ 1953년
성격 실업가
출신지 함경북도 부령
성별

정의

해방 이후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한 실업가.

개설

함경북도 부령 출생. 아버지는 김형국(金炯國)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경성(鏡城) 함일학교(咸一學校)에서 수학한 뒤 청진에서 일본인과 사귀면서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일본 상선회사의 측량기사로 근무하다 1913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약 2년간 머무르면서 일본상인들과 사귀고 일본인들의 감정을 터득하여 후일 그가 총독부 관리 및 조선은행의 일본인 고위층과 친교하여 사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1915년경 귀국해 러시아와 국제무역을 착수, 우리 나라의 곡물과 목재를 반출하여 연해주산 해산물과 잡화를 수입, 시판하여 많은 축재를 하였고, 공동무역상사(共同貿易商社)를 설립, 우리 나라와 만주·러시아를 잇는 무역을 더욱 확장하였다. 한편, 루블화의 환투기(換投機)로 상당한 수익을 보았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발생으로 막대한 손실을 보아 재기 불능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전재산을 담보로 하여 조선은행에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50만 원의 거액을 융자받아, 1924년 공동무역상사를 동일상회(東一商會)로 개편하고, 우리 나라와 만주^연해주를 잇는 국제무역을 확장하였다. 회령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 목재와 물화 수집을 했고, 무산에 목재회사, 청진에 수남제재소(水南製材所)를 설립, 함경선이 부설될 때 철도국에 다량의 침목과 전주를 납품하여 많은 축재를 하였다.

1935년 삼천리사(三千里社) 기자가 방문하여 재산관(財産觀)을 묻자 “돈이란 1,000∼2,000원이나 1∼2만 원일 때에는 개인재산이지만, 100만 원이나 1000만 원이 되면 사회의 공재(公財)를 관리하는 데 불과하며, 자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불찬성이며, 교육과 인격을 줄 일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고향인 청진에 해산물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북만주에 목재회사, 다롄[大連]에 곡물무역회사를 설립했으며,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에도 많은 제재소를 소유하였다. 만주에 곡물, 특히 대두와 목재를 해외로 수출하는 무역을 하였으나 재산의 대부분을 토지에 투자했다. 자수성가형 근검절약의 상인형(商人型)이라기보다는 모험적이고 투기적인 기업인이었다.

청진에 청덕학교(淸德學校)와 청덕전기학교(淸德電氣學校)를, 서울에 한성실업학교(漢城實業學校)를 설립하였다. 동생 김기도(金基道)를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시켰고, 후일 그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자금도 헌상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 중석(重石)의 해외무역을 착수해 성공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 『삼천리』(삼천리사, 19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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