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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스토리

김훈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세상을 이해하는 소설가

[ 金薰 ]

출생 19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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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일은 밥을 열심히 성실하게 벌고, 그 안에서 도덕을 실현하는 것이죠.”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 등단하여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 2004년 [화장]으로 이상문학상, 2005년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 문학상, 2007년 [남한산성]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우리 시대의 대표 소설가 김훈. 영문과 중퇴, 30여 년의 기자 생활, 1995년 불현듯 소설가가 되어 지금까지, 그의 손을 움직여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밥벌이의 힘’에 대해 듣는다.

<소설가 김훈 인터뷰 영상>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시절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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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8년생입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북한에서는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죠.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내 생애가 딱 맞먹어요. 내가 세 살 때 6ㆍ25전쟁이 났고, 우리 집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렇게 나는 부산에서 자랐어요. 전쟁이 끝나고 바로 서울로 오지 못하고 부산에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저학년을 다니다가 왔지요.

그 당시 내 중요한 일과는 미군 부대에 가서 초콜릿을 얻어먹는 거였어요. 미군 지프차를 따라가면서 “헬로, 쪼코렛, 기브 미 쪼코렛, 예스 오케?” 하면 미군들이 초콜릿을 던져줬죠. 어떤 애들은 초콜릿 하나를 들고 일가족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나는 주로 미군 부대 앞에 가서 얻어먹었어요. 미군 부대 철조망 앞에는 언제나 나같이 남루한 애들이 한 50명쯤 있었어요. 그러면 보초를 서러 나온 미군이 초콜릿을 던져줬죠. 아이들이 “기브 미 쪼코렛, 쪼코렛” 합창을 하면, 미군이 하나를 왼쪽으로 던져요. 그러면 애들이 왼쪽으로 확 몰리죠. 그다음은 오른쪽. 그러면 또 오른쪽으로 애들이 구름처럼 몰려가요. 다음에는 멀리, 그다음에는 가까이 던지면 애들이 막 갈팡질팡……, 그렇게 초콜릿을 얻어먹었어요. 나는 한 개씩 던져줄 때는 잘 움직이지 않다가 통째로 날아올 때를 기다렸어요. 그 초콜릿 박스가 어디에 떨어지는가를 잘 판단했다가 떨어지는 지점에 슬라이딩을 해서 잡았죠. 마치 야구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듯이 먼지를 일으키며 슬라이딩을 해서 잡는 거죠. 나는 그것을 잡자마자 냅다 집으로 뛰었어요. 그러면 어른들이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지요.

그렇게 우리는 가난했어요. 하지만 그 가난은 그 시대 전체의 가난이었어요. 나는 초콜릿을 얻어먹은 게 전혀 수치스럽지 않아요. 조그마한 애가 먹을 게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오히려 나는 그 당시 장면을 떠올리면, 초콜릿이 날아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애들의 그 발랄한 생명력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다만, 그걸 이쪽저쪽으로 던져주던 자가 악한 자죠. 예절을 잃은 거예요. 물건을 남한테 줄 때의 예절을 잃은 거죠. 나는 다만 배가 고팠을 뿐이지, 그것이 무슨 치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짜 노는 것’은 무엇일까요? 서울 종로구 근처에 살았지만, 북한산•영등포•노량진•왕십리•한강 뚝섬까지 다니면서 아주 극성맞게 ‘노는 아이’였다고 자평하셨습니다.

노는 것은요, 제일 좋은 것은 일과 놀이가 합쳐지는 거예요. 일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는 것, 그것이 참으로 이상적이죠. 일을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도 들노래’는 진도 농부들이 들일 할 때 부르던 노래예요. 그들은 그 힘든 농업 노동을 노래를 하면서 놀이로 만들어버렸어요. 어부들의 뱃노래도 마찬가지예요. 멸치잡이 배에 탄 어부들이 조업 내내 ‘멸치 후리는 노래’를 불러요. 그 노래가 자기 노동의 리듬과 맞는 거죠. 일을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해요. 지금은 노동이 산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데에 앉아 있는 노동자가 자기 일을 놀이로 만들 수가 없어요. 거기선 노래를 할 수가 없죠. 리듬이 안 맞으니까. 그러니까 일과 놀이는 점점 상극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저놈 일 안 하고 놀기만 한다’라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일과 놀이는 완전히 반대 개념으로 쓰이는 거예요. 노는 놈은 일 안 하고, 일하는 놈은 놀지 않는 걸로 되어 있는 것이죠.

김훈에게 ‘놀이’는 어떤 의미 인가요?

나는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누군들 안 그렇겠어요? 노는 게 좋지 일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노는 것도 좀 생산적으로 놀아야지 좋은 거죠. 노는 것 안에서만 나오는 에너지가 나오게끔 놀 수가 있어야 돼요. 나는 놀 때 꼭 혼자서 놀아요. 전에는 여러 사람하고 놀았는데, 여럿이 놀 때는 인간 사이의 소통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혼자 놀 때는 자기 놀이에 내면적인 심오함을 만들어나갈 수가 있고요. 나는 요즘 혼자 아주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게 놀죠. 망원경을 가지고 강가에 나가서 새를 보고, 노을을 보고 그렇게 놀아요. 혼자 놀아도 재미있어요.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청소하고, 학교 마당에 난 풀을 뽑던 일은 놀이의 연장이며, 소통을 배우고 남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던 훌륭한 교육이었다’고 회고했는데, 어떤 의미인지요?

내가 어렸을 때 받은 교육 중에서 제일 좋은 게 청소 교육이었어요. 자기가 배운 교실은 물론이고 고학년 애들은 저학년 애들 반 청소도 해줘야 했어요. 국민학교 1학년 애들은 너무 어려서 청소를 못 하잖아요. 2학년도 마찬가지고요.

그때는 선생님이 공부 못하는 애들은 혼을 안 내도 청소 안 하고 도망 간 애들은 용서를 안 했어요. 왜냐하면 청소를 통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협동, 인간의 분업을 배우는 거죠. 청소를 할 때 어려운 일, 물 떠 오고 유리창 닦는 일은 남자애들이 하고, 걸레질하는 일은 여자애들이 했어요. 그리고 키 작은 애들은 나르고, 키 큰 애들은 유리창을 닦았죠. 반장이 다 알아서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선생님은 나중에 와서 검사하고, 도망 간 아이들 혼내주고, 그렇게 했죠. 그것은 정말 훌륭한 교육이었어요. 자기가 사는 주변을 제 손으로 치울 줄 알게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공부였어요. [소학(小學)]에서 말하듯이, 마당에 물 뿌려서 쓰는 게 인간의 가장 중요한 도리인 거죠. 그것은 또한 노동의 신성함을 배우는 것이기도 했죠.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소설가 김훈에게 세상을 들여다보는 행위,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미지가 펼쳐진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글은 육체가 아니지만,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데를 다녀요. 그러다 보면 몇 개의 이미지가 걸려 들어와요. 그러면 그것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죠. 책보다도 오히려 세상을 직접 보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돼요. 책은 자료나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이미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책을 별로 안 좋아해요.

물론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아마 쓸데없이 많이 읽은 사람일 거예요. 하지만 그것을 추호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친구들 중에 평생 책 한 권도 안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지도 않아요. 그 사람들은 밥 벌어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책을 안 읽은 거예요. 나는 그 사람들 보고 책 읽으라는 말은 안 해요. 다만 그 밥 버는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는 하지요.

공자님 글을 보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요. 그런데 그것이 책 읽으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책을 들여다보라는 얘기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에요.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공부하라는 얘기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스스로 나아갈 바를 찾아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책 들여다보는 공부보다 훨씬 어려운 공부일 거예요.

주희 선생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공자를 읽기 전과 읽고 난 뒤의 내가 똑같은 인간이라면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힘들여서 뭐하러 읽느냐. 책이 나를 개조할 수 없다면 그걸 구태여 읽을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에 쓰인 모든 문제가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나는 책을 무지하게 많이 읽었음에도 그것으로 인해 내가 바뀌거나 개조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면 참 답답하고 암담해요. 그래서 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에요. 우리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느냐는 것이 우리가 세계를 상대하는 거의 모든 문제일 거예요. 그러니까 책보다도 인간을, 이웃 사람을, 친구를 잘 들여다보는 것이, 그들을 직접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책을 읽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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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유교적인 사고가 어떤 해답을 줄까요? 관계의 어려움에 대한 해답을 유교적인 사고와 삶, 유교적 인격의 아름다움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유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은 아닐 거예요. 나는 다만 책을 읽고 그것의 아름다움이 뭔지를 짐작할 수는 있죠. 그것은 관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객관적인 타자라는 것이 유교 사회에는 없는 거예요. ‘인(仁)’이라는 것은 인이라는 절대적인 가치가 따로 있어서 ‘그것이 인이다’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남과의 사이에서 실천한 결과로써만 있을 수가 있어요. 실천의 결과로써만 있는 것이지, 하나의 개념이나 추상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거죠. 즉, 인이라는 것은 너하고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거예요. 인의예지신이 다 인간과 사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실천의 결과로써만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동양 책을 읽어보면 생활 정서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좀 전에 말했듯이, [소학]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얘들아, 마당에 물을 뿌리고 매일매일 쓰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른이 너를 부르면 빨리 대답을 하는 게 중요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뭐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할 줄 아는 게 인간이다, 이거예요. 공자님은 [논어]에서 아주 쉬운 얘기를 하죠. “얘들아, 매일매일 모르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 기쁘지 않으냐?” “얘들아, 친구가 먼 데서 오면 기쁜 일이 아니냐.” 나는 공자가 구어체로 말하는 게 참 좋아요. 옆집에 있는 사람처럼 신적인 권위가 없어요. 서양의 성경처럼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하면, 인간은 없잖아요. 인간은 없고 신의 권위만 가득 차 있는 거죠.

나도 남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이 자기 내부에 침잠해서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자기 주변의 인간, 주변의 사람을 좀 더 폭넓고 심도 깊게 들여다보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젊은이들이 자기의 삶을 건강하게 자리 잡아가는 길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남을 이해하고,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 관계에서 아름다움과 그 정당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걸 찾아가는 게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격은, 인간의 도덕성은 자기 손으로 제 밥을 벌어먹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죠.

너무나 당연한 ‘밥벌이’를 굳이 언급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요? 글을 쓰는 이유나 자전거의 의미 등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밥벌이’를 이유로 꼽아서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전에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을 썼어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은 “책을 많이 팔아서 밥을 많이 벌어놓고,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을 또 쓴 것은 김훈이 엄살을 부리는 거다”라고 해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밥을 벌기 위해서다”라고 했더니, 그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더군요. “너는 밥이 다 있는데, 무슨 밥을 또 벌려고 하느냐”라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밥벌이야말로 인간이 자기의 도덕과 인격을 완성해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어먹을 수 없는 자가 무슨 인격을 말할 수가 있겠어요. 그렇죠? 인간의 인격은, 인간의 도덕성은 자기 손으로 제 밥을 벌어먹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나로서는 매우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는 밥벌이라든지 돈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세속적인 가치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인간에게 소중한 거예요. 돈은 엄청나게 소중한 겁니다. 돈을 열심히 벌고, 아껴 쓰고, 잘 쓸 줄 알아야죠. 돈을 하찮게 알고, 돈벌이를 우습게 알면서, 자기는 마치 고매한 정신세계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나는 신뢰도 안 하고 경멸해요.

그러니까 나는 밥을 열심히 성실하게 벌고, 그 안에서 도덕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때때로 지겨운 일이다 하는 거. 지겨운 일. 즉 피할 수도 없다는 거죠.

지금의 자신을 형성한 평소의 습관이나 원칙이 있는지? 혹시 평생 갖고 가는 ‘화두’ 같은 게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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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형성한 습관이나 원칙……, 글쎄요……. 나는 스승이나 선배가 없이 산 사람이에요. 나 혼자서 산 사람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어디 매인 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나를 컨트롤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규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내가 나를 규율하지 못하면 나는 망해버려요, 그 순간에.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정확하게 일을 하고, 그날 봐야 될 책이나 자료를 보고 그러는 것이지요. 근면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재주가 없으면 부지런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 강철 같은 기운을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지요. 그것에 의해서 나를 버텨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기운을 상실하는 순간에 난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요. 나는 늘 조금씩이라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그것이 나의 습관이에요.

그리고 화두가 무엇이냐는, 그런 포괄적이고, 거대한 질문 앞에서는 대답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어요. 언제인가 학교에 갔더니 학생이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더군요. 그리고 “선생님, 인생은 무엇입니까?” 그래요. 근데 그것이 도대체 질문인지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건 대답할 수도 없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무엇을 물어봐야 되는지를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진지하고 심오한 질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내가 보기에는 그 질문은 성립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질문을 잘하려면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나는 젊은이들이 구체성을 묻는 질문을 배우기를 바라요. 말하자면,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과학적으로 들여다보는 안목을 갖기를 바라요. 사이언스를 알아야 된다 그거예요. 사이언스. 우리 젊은이들은, 나도 그렇지만 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너무나 모자라요. 교육이 그렇게 돼 있어요. 이 세상을 항상 정서적으로 인식하거나 심미적으로 인식하죠. 아니면 이념적으로 인식해버려요. 어떤 현상을 보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왜 이런가’,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는 어떤가’를 질문하지 않고, ‘이것은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이것은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가 추한가’, ‘이것은 나한테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것은 나한테 이로운가, 저놈한테 이로운가’, ‘이것은 내 적한테 이로운가, 내 적의 적한테 이로운가’를 생각하죠. 인간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 인간은 내 편인가 아닌가’를 생각하잖아요. ‘저 사람은 내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적의 적인 거 같으니까 내 편이 될 수도 있겠다.’ 이따위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이해할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과학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해요. 그런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는 것이죠. 나는 문학이라는 것은 과학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해서 문학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죠. 심미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는. 물론 심미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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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자존심이나 품격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난 젊은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런 점이 매우 모자라는 사람이지요.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지 말고, 남과의 관계, 자기와 사회와의 관계, 자기와 이웃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이 나는 좋아요.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도 거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품격이라는 것은 우선 그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해요. 그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은 참 저속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저속한 얘기가 아니에요. 아주 절실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의 취업난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지요.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한테 가하는 죄악이에요.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게 만들어놓고, 그 가혹한 저임금에다 방치해놓고, 그것이 시장적인 질서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야만적인 짓이에요. 이런 것들을 개선해나가야 하는데, 그걸 개선하려면 우선 물적 바탕이 있어야 해요. 그다음에 리더십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젊은이들이 어떤 경우에도 삶의 구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품격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인터뷰이 소개

김훈
소설가 김훈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이후 시사저널, 국민일보, 한겨레신문 등에서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다.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 등단,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 2004년 [화장]으로 이상문학상, 2005년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 문학상, 2007년 [남한산성]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시대의 대표 소설가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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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2.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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