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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
good**** 조회수 13,806 작성일2003.08.25
용문사에 은행나무 엄청나게 큰거 있자나요
천년기념물 4호 인가 ? 그 은행나무의 .. 역사등등 갈켜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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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의 은행나무 [ 龍門寺-銀杏- ]

 

요약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은행나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30호
지정연도 : 1962년 12월 3일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 99-1
분류 : 은행나무

 

본문

    천연기념물 제30호. 면적 258m2. 수량 1그루. 1962년 12월 3일 지정. 추정수령 1100년. 지정사유 노거수. 용문사 소유. 나무높이 6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이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 세종(世宗) 때는 정삼품(正三品)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은 명목(名木)이다.

200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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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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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0호입니다.

참고로 천연기념물 4호는 현재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종   목   천연기념물   30호
명   칭   용문사의 은행나무
분   류   노거수
수   량   1주260㎡
지정일   1962.12.03
소재지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
소유자   용문사
관리자   용문사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노거수의 대표적인 존재인데 그것은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가장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고 또 전설이 담겨 있는데 있다.

이 나무는 용문사 경내에 서 있는데 배수가 잘 될 수 있는 적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줄기 아랫쪽에 혹과 같은 큰 돌기가 나있는 것이 특징의 하나이다.

이 나무에는 얽힌 전설이 많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 때 태자였던 마의태자가 망국의 서러움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손수 심었다고 말이 있는가 하면 역시 신라의 의상대사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이 은행나무로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삽목신화의 하나로서 세계 각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그때가 서기 913년에 해당한다. 또 한편으로는 경순왕이 친히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고려할 때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약 천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의 수령이 천년을 넘는지라 그동안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각종 피해를 입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러한 역경을 거쳐오면서 오늘날의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령 정미 의병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인들이 절에 불을 놓았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해를 면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방화수로 잘 알려지고 있는 터이다. 그때 사천왕전이 불타버렸는데 이 은행나무를 천왕목으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대한 전설은 더 있다. 즉 나라에 큰일이 있다던가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이 나무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가 소리를 낸다는 말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종(高宗)께서 승하하였을 때에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도 있다.

조선조 세종때 당상관이란 품계가 주어졌는데 그 위계는 정삼품에 해당된다.

약 60년전 이 나무에 대한 측정치를 보면 눈높이 줄기둘레가 약 10.3m, 수고 약 41m, 그리고 줄기는 지상 12m쯤 되는 곳에서 3갈래로 분기했으며 수령은 천년을 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의 수고가 약 67m인 것을 생각하면 숫자를 잘못 적은 듯 하다.

여전히 용문사의 명물인 이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 http://www.ocp.go.kr/

200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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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cr****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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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는 겉씨식물에 속하는 나무이다.

연관종이 없는 특별한 종으로 은행나무문에 속하는 유일한 종이다.

살아있는 화석의 예로 종종 언급된다.

야생 상태의 은행 나무는 멸종된 것으로 몇백년간 알려져 왔으나 중국 저장 성에 일부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활동이 있던 곳이라 자연 상태의 나무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름

은행은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이다.

은행 열매가 살구와 비슷하고, 표면에 은빛 나는 흰 가루에 덮여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압각수라는 이름을 쓰는데, 잎이 오리발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영어권 이름은 통상 은행의 일본어 발음인 Ginko인데, maidenhair-tree라고도 한다.

공작고사리속 고사리와 잎이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다

 

생태

다 자란 은행나무는 10~15m에 이르나 간혹 40m까지 자라는 것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이며

나무의 나이는 약 1100년으로 높이 41m 둘래 11m에 이른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신라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가운데가 터진 부채꼴 모양의 잎이 달린다.

몸에 새 잎이 돋고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물든 후 낙엽을 떨군다.

은행잎에서 추출되는 징코플라본글리코사이드는 혈액순환 개선제로 쓰인다

 

열매

은행나무는 암수 딴그루이며 봄에 피는 꽃은 3mm 내외 크기로 관찰하기는 힘들다.

가을에 암그루에 노란색 열매를 맺는다.

은행의 열매는 과육성분의 외피안에 단단한 껍질을 지닌 백과가 들어 있다.

노란색의 외피는며 악취를 풍기며 비오볼이라는 물질이 있어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킨다.

백과 안에 있는 씨를 먹는다

 

줄기

은행나무의 줄기는 곧게 자라며 수피는 그물 모양으로 갈라져 우툴두툴하다

 

화석

은행나무는 고생대 페름기부터 화석이 발견된다.

쥐라기백악기에는 로라시아 대륙에서 번성했다.

그러나 그 이후 급격히 자취를 감춰, 팔레오세에 오면서는 Ginkgo adiantoides 종 하나만이 발견된다.

플리오세 말에 오면서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

 

전설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용신리 샛터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고목 은행나무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전한다.

 

옛날 고려 말기에 황부자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세 딸과 함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껏 가꾸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 딸과 함께 은행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면서

가을이면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주인에게 보답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몹시 바람이 불고 진눈깨비 내리던 날 저녁

우연히도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은행나무로 날아가 앉더니

며칠 후 맏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신음하다가 죽었다.

맏딸을 잃은 황부자는 시름속에 묻혀 1년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불길하게도

독수리가 또 날아와 은행나무를 쪼는 것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안 가서 둘째 딸 곱실이가 앓아 누웠다.

백약을 다 써 보았으나 역시 곱실이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곱실이가 병든 날이 전에 죽은 큰딸이 병든 날과 똑같이 동짓날 이었다.

딸 둘을 잃고 난 황부자는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나날을 보내다가

괘씸한 독수리를 잡을 것을 생각하고 방을 써 붙였다.

독수리를 잡는 사람에게는 셋째 딸과 혼인시킬 것은 물론 재산을 다 물려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을 한지 여러 날이 계속 되어 동짓날이 가까워와도

누구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 근심을 하게 된 황부자는 동짓날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동짓날 오후 늦게 보기에도 추하게 생긴 더벅머리 총각이 황부자를 찾아왔다.

독수리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말이 생각난 황부자는 우선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대접을 후히 받은 총각은 활과 화살을 받았다.

그러나 무슨 궁리도 하지 않고 사랑방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난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홀을 쏴 보지 않았기에 걱정이 되었다.

생각 끝에 황부자에게 부탁하기를 오늘밤은 날이 샐 무렵까지는

아무도 밖을 내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야기인즉
"내 활은 신궁이라 다른 사람이 보면 안됩니다. 만약 보게 되면 딸은 죽게 됩니다."라고 했다.

자정쯤 되었을 때 총각은 마루 밑에 숨겨둔 삿갓을 쓰고,

있는 힘을 다해 은행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눈보라가 치며 매서운 바람이 불어 총각의 손발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꾹 참고 독수리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 과연 세차게 날개 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독수리가 머리 바로 윗가지에 앉았다.

총각은 삿갓 꼭대기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손을 뻗어 독수리의 억센 다리를 힘을 다해 잡았다.

하마터면 나무에 떨어질 것만 같았으나 놓지 않고 간신히 내려와

나무 밑에 놓아 둔 화살로 눈을 꿰어 죽인 후 그대로 놓아두고 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이튿날 날이 밝아 황부자가 밖을 내다보았을 때는

커다란 독수리가 눈에 화살을 맞아 꿰인 채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부자는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며 눈을 뚫은 명사수 총각과 딸을 혼인시키고

재산을 다 물려주어 이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200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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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이 나무는 현재 우리나라에 생존하고 있는 은행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우람하며 오래 된 것으로 용문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여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0여미터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2.3m를 넘어 동양에서는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이 그의 스승인 대경 대사를 찾아와서 심은것이라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음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신라의 고승(高僧)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전란으로 사찰은 여러번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의병의 본거지라하여 사찰을 불태워 버렸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하여 천왕목(天王木) 이라고도 불렀고 조선 세종(世宗)때에는 정3품(正三品)의 벼슬인 당상직첩(當上職牒)을 하사(下賜)받기도한 명목(名木)이다.

이 나무에는 또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하며 또한 나라에 큰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승하하였을때에는 커다란 가지가 1개 부러졌고 8.15해방과 6.25사변때에도 이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2003.08.25.

  • 출처

    양평군 통합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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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의 은행나무 [ 龍門寺-銀杏- ]

 

요약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은행나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30호
지정연도 : 1962년 12월 3일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 99-1
분류 : 은행나무

 

본문

천연기념물 제30호. 면적 258m2. 수량 1그루. 1962년 12월 3일 지정. 추정수령 1100년. 지정사유 노거수. 용문사 소유. 나무높이 6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이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 세종(世宗) 때는 정삼품(正三品)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은 명목(名木)이다

200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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