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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남양주국보ᆞ보물
jjun**** 조회수 3,253 작성일2013.02.17
남양주에 국보와 보물은 무었이있나요?
사진도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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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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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는 국보는 없으며, 보물은 2개가 있습니다.

 

아래에 남양주시에 있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사적과 중요민속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남양주에 있는 국가지정 문화재)

 

1.남양주 봉선사 동종


종 목  보물  제397호 
지 정 일 1963.09.02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길 32)  봉선사 
시 대 조선시대


이 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것 중 몇개 남지 않은 조선 전기의 동종으로 예종 원년(1469)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높이 238㎝, 입지름 168㎝, 두께 23㎝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대대적인 공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수법 등은 조선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그 특징들이 잘 나타난 중요한 큰 종이다.
 

 

2.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종 목 보물  제1792호 
지 정 일 2012.12.27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길 32)  봉선사 
시 대 조선시대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는 비로사나삼신불과 권속을 그린 괘불도로, 상부의 중앙에 법신 비로자나불, 향우측에 보신 노사나불, 향좌측에 화신 석가불, 하단 좌우로는 6구의 보살과 범천 및 제석천, 10대 제자, 하단 중앙에는 주악천인과 용왕, 용녀 등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삼신불과 권속들을 함께 그렸지만 언뜻 보면 삼신불 중심의 구도로 연상될 만큼 화면 상단의 삼신불을 큼직하게 배치하였는데, 이러한 삼신불 중심의 구성은 이 괘불도를 비롯하여 학림사 괘불도(1774년 중수) 및 원통암 괘불도(1806년) 등 18세기 중후반 경의 서울·경기지역의 삼신불 괘불도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이 봉선사 괘불도에서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은 여래형으로, 노사나불은 보관을 쓴 장엄형으로 묘사한 것은 학림사 괘불도와 동일한데, 봉선사 괘불도에 도화원인 각총에 이어 두 번째로 이름이 올라있는 칠혜가 18세기 전반에 학림사 괘불도를 조성하였으며, 1774년 학림사 괘불도의 중수화원인 처징이 1758년에 각총과 함께 신륵사 삼장보살도(1758년)를 제작했던 것에서 두 작품 간의 도상적 유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괘불도는 1735년 상궁 이성애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1669~1735년)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것이다. 맑은 담채의 황색과 청색, 양록색, 녹색, 하늘색 등 밝고 화사한 색이 굵고 대담하면서도 능숙한 묵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움직임과 옷자락의 자연스러운 주름표현, 힘찬 동세 등과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왕실발원 불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3.남양주 광릉

 

종 목 사적 제197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

시 대 조선시대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남양주 홍릉과 유릉

 

종 목 사적 제207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41-1

시 대 조선시대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왕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광무 원년(1897)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5.남양주 사릉

 

종 목 사적 제209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65-1

시 대 조선시대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명등석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6.남양주 순강원

 

종 목 사적 제356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0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인 인빈김씨(1555∼1613)의 무덤이다.

 

인빈김씨는 조선 16대 인조의 할머니이며,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추종된 왕)의 생모이다. 무덤 주위를 둘러쌓는 담장(곡장)을 둘렀으며, 묘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석조물이 있다.

 

영조 31년(1755)에 무덤을 순강원이라 명하고 지위를 승격시켰다. 또한 위패는 저경궁에 모셨으며, 순종 2년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으로 포함되어 옮겼다.

 

7.남양주 휘경원

 

종 목 사적 제360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22대 정조(재위 1776∼1800)의 후궁 수빈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수빈 박씨는 숙선옹주를 낳고 수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정조 14년(1790)에는 왕자 순조를 낳았다. 순조 22년(1822)에 세상을 떠났다.

 

철종 6년(1855)에 순조의 무덤인 인릉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휘경원을 순강원으로 옮겼다. 철종 14년(1863)에 순강원의 자리가 풍수지리학상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에 모셔져 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들과 정자각, 비각이 있다.

 

8.남양주 광해군 묘

 

종 목 사적 제363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인조 19년(1641)에 사망했다. 처음엔 제주도에 묻혔다가 인조21년(1643)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부인유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로 함께 유배를 갔다가 1623년 사망했다. 양주에 무덤를 모시고, 광해군이 죽은 후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9.성묘

 

종 목 사적 제365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며 광해군을 낳은 공빈김씨의 무덤이다. 공빈김씨는 명종 8년(1533)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선조 10년(1577)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한 많은 석물이 있으며, 왕의 무덤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비석 등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10.안빈묘

 

종 목 사적 제366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6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이씨의 무덤이다. 안빈이씨는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나 숙종 19년(1693)에 죽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라는 글이 새겨 있다.

 

11.남양주 영빈묘

 

종 목 사적 제367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인 영빈김씨의 무덤이다. 영빈김씨는 현종10년(1669)에 태어나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으로 인하여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친정으로 돌아왔고, 영조 11년(1735)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한 영빈김씨의 무덤에는 여러 석물을 세워놓아 죽은 이에 대한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다. 그 중 봉분 앞에 있는 비석의 내용을 통해 영빈 김씨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행장과 장례 등 여러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12.진접 여경구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29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 286

시 대 조선시대

 

 현재의 소유자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180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산을 뒤로 하고 있어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안채와 사랑채·문간채·행랑채·사당채가 연결되지 않고 각각 떨어져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집안 깊숙히 ㄱ자형으로 자리잡았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광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튼 ㅁ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다. 一자형 사랑채·대문채·사당채가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헛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헐리고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인데 왼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앞쪽으로 광채가 보인다. 광채의 오른쪽 끝에 있는 중대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의 평범한 ㄱ자형 집에 안방의 뒤쪽으로 골방·뒷방·광을 둔 것이 경기도 사대부 집의 특이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기단의 높이와 건물의 크기가 같으나 사랑채가 약간 앞으로 나가 위치하여 대문에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안채를 감지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사당채는 사랑채의 뒤편 한단 높은 터전에 따로 꾸몄다.

 

사랑마당과 안마당의 정원시설은 앞면이 툭 터져 전망이 시원할 뿐 어떠한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지만 안채 뒤안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부엌 동쪽의 조그만 뒤뜰을 지나면 개울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게 심어졌는데 아마도 인위적으로 만든 숲으로 여겨진다.

 

13.궁집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426-1

시 대 조선시대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자 왕이 그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북한강변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궁집이라는 칭호는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생겼다.

 

전형적인 ㅁ자형의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대문을 들어선 정면으로 부엌·안방·대청이 있고 꺾어져서 오른쪽에는 건넌방·부엌, 왼쪽에는 아랫방과 사랑뒷마루, 대문 옆으로는 광 ·책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 귀퉁이에 있는 ㄱ자형의 사랑채는 안채의 사랑뒷마루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와 안채는 한덩어리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문간채는 일찍이 헐린 듯하며 담장이 공간의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 집은 화길옹주가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이렇게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1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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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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