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 없어도 노둣돌 없어도 가슴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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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 없어도 가슴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하는 것을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이칠석
못다이룬 사랑, 못다이룬 가족
더불어 살아야 할 공동체 등
국한되는 않는 노두의 인문학
  • 입력 : 2018. 08.16(목) 21:00
  • edit@jnilbo.com
연 전의 칼럼 ‘노두’ 中 ‘하늘엔 은하수길 바다엔 노두(露頭)길’. 하늘강에선 은하수를 타고 바다강에선 노둣돌을 놓아 만난다는 의미다. 뉴시스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견우의 노래, 칠석의 노래’

고창사람 서정주의 시 ‘견우의 노래’ 전문이다. 시어에 대한 해석은 넘칠 만큼 많다. 핵심은 만남에 있다. 긍정적인 기다림의 노래다. 하지만 현실이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부정적이거나 고통스럽기조차 하다. 꼬여있는 현실은 이별로 나타난다. 그냥 이별이 아니다. 사랑을 위한 이별이다.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야 하는 숙명을 핵심 삼아 풀어나간다. 소재는 시인이 즐겨 차용하던 풍속의 조각들이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 은하수의 은핫물 얘기고 견우의 밭가는 얘기이며 직녀의 베 짜는 얘기들이다. 물살 몰아갔다 다시 몰아오는 바람을 우연히 말하는 게 아니다.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괜히 세는 것이 아니다. 소망이며 희망을 암시해주는 장치들이다. 하늘강 얘기만이 아니다. 고창 앞바다의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밀물 썰물의 개펄이 아니었더라면 서정주도 이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칠월칠석이 단순히 견우와 직녀가 하늘강에서만 만나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다강에서는 노두를 통한 만남이 있고 동아시아 해안으로는 바닷길 갈라지는 해할(海割)의 만남도 있다.



직녀의 노래, 노둣돌의 노래

견우의 노래를 불렀으니 직녀의 노래로 화답했을 것이다. 연 전 칼럼에서도 다루었다. 가수 김원중이 불러 우리에게 익숙한 ‘직녀에게’는 문병란의 시를 원작으로 삼은 노래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가/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김원중이 노래로 불렀기 때문에 견우의 노래보다 훨씬 잘 알려졌다. 견우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극단적인 절망이다. 1970년대 중반에 쓴 시이니 한국전쟁의 풍경이다. 통일 염원의 대표시로 말하는 이유다. 비극적인 현실을 절절하게 포착해내지만 이내 희망을 노래한다. 은하수는 말라붙은 현실일지라도 이 슬픔을 정녕히 끝내자 한다. 어떻게 끝낼 수 있나? 그래서 노둣돌이 나왔다. 직녀의 노래는 남과 북을 잇고자 하는 노둣돌의 노래다.



바다엔 노두(露頭.outcrop) 하늘엔 은하수

노둣돌은 어디에 있는가? 노둣돌을 연달아 이어 놓는 돌다리가 노두다. 연 전의 칼럼 노두(露頭)에서 나는 이런 카피를 뽑아봤다. “하늘엔 은하수길 바다엔 노두(露頭)길”. 하늘강에선 은하수를 타고 바다강에선 노둣돌을 놓아 만난다는 의미다. 신안지역에서는 중노두 설화로, 진도에서는 뽕할머니 설화로 그 만남들을 구조화해 두었다. “칠월 칠석에 하늘강을 열어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는 스토리는 마치 남도의 바다 개펄강에서 노두를 통해 만나는 연인 전설과도 같다. 하늘에는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놓아 오작교를 만들었다. 개펄 바다 노두는 사람들이 개펄과 돌을 날라다 만들었다. 모두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는 이야기다. 연결은 단절로 이어지지만 다시 연결을 이끌어 온다.

주역에서 말한 대대(待對)의 철학이고 변증법의 문법이다. 이것과 저것은 작은 동네의 이야기로부터 분단된 나라의 이야기, 투쟁하는 세계의 이야기, 하늘길을 여는 우주의 이야기로 확산된다. 못다 이룬 사랑, 못다 이룬 가족애, 더불어 살아야 할 공동체 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노두의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겠다.” 나는 재삼 주장한다. 금세기에 성과를 거둔 어떤 문학가나 철학가도 이 노두 혹은 은하수의 대대성에 비견되지 못할 것이라고. 유럽중심이던 세계 문명사의 흐름을 새롭게 견인할 동아시아의 명분과 지혜가 이 공간에서 나온다고 말이다.



이별이 너무 길다

서정주는 노래한다. 견우가 암소를 먹이는 동안 직녀에겐 베틀의 북을 놀리라고.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 있어야 한다고. 직녀가 짠 비단은 필시 칠석날의 카펫이리라. 하지만 문병란은 상황 인식이 절절하다. 몇 차례고 반복하여 슬픔이 너무 길다 한다. 이별이 너무 길다 한다. 그래서일까? 직녀는 몇 번이고 실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사방은 막혀 유방도 처녀막도 머리털도 다 빼앗긴 죽음의 땅이다. 출렁이는 물살이 오고 가는 순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은하수가 없어도 오작교가 없어도 심지어는 노둣돌이 없어도 슬픔을 끝내야 한다고 토로한다. 그만큼 주어진 현실이 각박하고 처절하다는 뜻이다.

서정주가 ‘견우의 노래’를 불렀던 게 1948년이다. 광복되고 얼마지 않아서다. 이에 비하면 문병란의 ‘직녀에게’는 1970년대 중반이다. 이심전심이 있었는지는 내 모르겠지만 문병란은 서정주의 견우에 답하여 이 시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가.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하고 화답하는 대목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서정주의 시대는 천지만물의 이치가 중요했을까? 문병란의 시대는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암울한 시간이었을까? 서정주의 견우에게 답하는 문병란의 직녀는 간절하고 절박하다. 면도날 위라도 딛고 가야하는 처절한 심정이 분단 1세기를 향해 가는 우리네 한반도의 심정이리라. 사력을 다해 이 슬픔을 끝내자 외는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슬픔은 너무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73년이란 분단의 슬픔 말이다. 4자회담 혹은 6자회담 대표자들의 DMZ 번개팅 칠월칠석이다. 하늘강 전설은 견우와 직녀 이야기로 대표된다. 견우는 소를 몰아 논밭을 가는 총각이다. 직녀는 베를 짜서 옷감을 만드는 처녀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다. 그런데 만나지 못한다. 이를 가엾이 여긴 까마귀와 까치들이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든다. 오작교(烏鵲橋)가 그것이다. 칠월칠석날 단 하루만 이 길이 열린다. 애석하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문병란의 노래를 빌어 말하자면 분단 73년 동안 오작교는 끊겨 있었다. 유방도 뺏기고 처녀막도 뺏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뺏긴 시간이었다. 심지어는 노둣돌마저 뺏긴 시절이었다. 어찌할까? 두 시인이 이미 말했다. 만나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한다.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고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한다. 그래서 제안한다. 칠석날 4자회담 혹은 6자회담 대표자들끼리 분단의 상징 DMZ에서 번개팅을 해보라고. 동아시아에서 역사 이래 전승되어 온 설화문법이자 희망의 메시지 생성 방식이기도 하다. 하늘강과 바다강에서 이루어졌던 번개팅의 오래된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분단을 허물고 연대를 강화하는 구비문법 말이다. 문재인과 김정은이 지난번처럼 만나야 한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함께 만나야 한다. 푸틴과 아베도 참석하면 좋다. DMZ에서 만나 산다이 한 판 벌려도 좋다.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한 판 벌려도 좋다. 이제는 지지리도 못난 이 슬픔을 끝내야만 한다. 설화는 기록되지 아니한 소망과 염원 혹은 드러나지 않는 욕망의 문법이기도 하다.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반에 침윤된 칠석의 문화를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를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남도인문학 TIP

韓, 칠석날이라 하는데 中 칠석제.日 타나바타라 불러



축제포럼 김정환 전 회장이 정리해둔 바를 요약 인용하여 동아시아 칠석날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칠석날은 중국에서는 칠석제, 일본에서는 타나바타, 한국에서는 칠석날이라 한다.

삼국이 공유하는 설화는 밭을 가는 견우와 베를 짜는 직녀의 만남 얘기를 중심으로 한다. 견우를 목동이라고 하고 직녀를 옥황상제의 손녀라고도 한다.

칠석날 전후에는 부슬비가 내리기도 한다. 이를 세차우(洗車雨, 수레 씻는 비)라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여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 하고 이튿날 새벽에 비가 내리면 슬픈 눈물 즉 쇄루우(灑淚雨)라 한다.

까마귀와 까치는 이 날 다리를 놓느라 머리가 모두 벗겨진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칠석날은 북두칠성과 관련되어 있다. 견우성과 직녀성의 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생긴 설화다.

칠석날의 풍속이 많다. 부녀자들은 새벽에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빌기도 한다. 이북지방에서는 풍작을 기원하는 밭제(田祭)를 지내기도 한다.

중부지방에서는 ‘칠석맞이’라는 고사를 지낸다. 동국세시기에는 이 날 눅눅했던 책과 옷을 말리는 날이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칠석은 주(周)나라 왕자 교(喬)가 봉황곡을 울리며 신선이 되어 도사 부구공(浮丘公)의 부인과 만난 날이라고도 하고, 서왕모(西王母)가 자운거를 타고 천상에 내려와 장수를 원하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요지선도를 올린 날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타나바타라고 하는데, 만엽집(万葉集)에 약130수의 타나바타 노래가 있다 한다. 읽어봐야겠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하늘강 냇물에 죄와 부정을 씻기 위한 마음으로 대나무를 세워두는 풍습이 생겼다. 대나무 인형을 바다에 떠내려 보내는 풍습도 생겨났다. 견우와 직녀 사랑 얘기를 매개 삼은 칠석날은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설화문법을 실천하는 날이다.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 이사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남도 문화재전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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