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일본칠월칠석
tjrw**** 조회수 14,192 작성일2008.04.02

칠월칠석의특징
칠월칠석의정의
한국과일본의칠월칠석비교

이세가지빨리좀요

오늘안애해야댐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목식서생
바람신
세계사, 사회문화, 사회학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일본의  칠월칠석

7월 초, 붙어있는 안내지를 보니 "七夕"이라는 단어와 그에 따른 행사 일자와 준비물등이 씌여 있었다. 여기 일본에도 칠석이라는 전통 풍습이 있다는 사실에 왠지 신기하기도 했지만, 우리와 같은 풍습을 공유한다는 것이 비록 나라의 명칭이 다르고 말이 달라도 무엇인가가 정신 세계에 있어서는 서로 통한다는 생각에 그지 없이 반가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현재 칠석날의 견우직녀의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지만, 일본은 예전부터 독자적인 행사를 해 왔기에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것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七夕을 타나바타(たなばた)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원래 음력 7월15일 밤에, 오봉마츠리(お盆まつり)가 되기 전에 이승으로 다시 돌아오는 선조의 혼에게 입힐 옷을 베틀(機)에서 짜서 시렁(棚) 위에 얹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여기서 타나(棚,たな) 바타(機,ばた)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불교가 전해지면서 실제로 이날은 불교 행사가 있기에 7월7일(신성한 숫자로 여기는 7자가 두개 겹쳐진다)로 바뀌었으며, 또 어떤 학자에 의하면 古代에 강가의 작은 집에서 神에게 올릴 천(布)을 짜면서 신을 맞아들이는 타나바타즈메(棚機女)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설화에 중국에서 전해진 견우직녀 이야기가 합쳐져서 칠석이 되었다고 한다.이런 옛날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점차 사람들은 특별한 이 날, 견우 직녀가 건넜다는 저 멀리 보이는 은하수와 별에게 자신의 소망을 비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네 아이들은 일주일 전쯤에 모여서 가느다란 대나무(笹,ささ)와 좁고 긴 종이 조각(短冊,たんざく)을 준비한다. 이 종이에 자신의 소망을 적어 대나무에 달아서 대나무를 아파트 단지 내의 한 가운데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칠석의 다음 날 (예전에는 강에 흘려 보냈지만) 대나무는 버리고 종이는 태워버렸다.

이렇게 어린이만의 간단한 행사도 있지만 어떤 市에서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체 시민의 행사로 떠들썩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행사를 보면서 왜 하필이면 대나무를 사용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대나무를 이용한 도구 몇 개는 보았지만 대나무 숲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남쪽 지방에 내려가면 있겠지만... 그런데 일본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가 동네 여기저기에 대나무가 빽빽히 우거진 숲이 있다는 것(물론 기후 탓도 있지만). 집 앞에도 市有地의 숲이 있어서 정말 처음으로 竹筍이 자라는 것도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도 들었다.

보통의 나무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을 일본인들도 가졌을까... 소망을 적은 종이를 대나무에 매달기 시작한 것은 江戶時代부터이다. 이는 대나무에 어떤 신성한 위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 이유를 들어 보면 첫째, 죽순이 자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성한 성장력에서 분출하는 생명력을 느끼는데 이것을 남성적인 陽. 둘째, 대나무의 내부에는 空洞이 있는데 이것이 여성의 자궁을 의미해서 陰. 음양의 성질을 모두 같고 있기 때문에 신비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세째, 竹(굵은 대나무)은 활(弓)을, 笹(가느다란 대나무)로는 화살(失)을 만들어 魔力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신성한 것을 보호 유지할 수 있었다. 네째, 바람이 불어 잎파리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神의 降臨(神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신령이나 조상의 영혼 정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神社에서 지내는 제사 의식을 보면 제단 앞에서 가느다란 대나무를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TV에서 얼핏 볼 때는 이상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겪어 보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런 대나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옛날부터 행해온 것이니까 따라할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전통들도 그렇게 전해져 내려 오듯이... 외국에서 그 나라의 전통의 형식만을 보면 이상한 것들이 많아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된 이유들을 알고 겪어보면 사람 사는 세상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같다는 생각에 동질감을 가지게 된다.


칠월칠석(七月七夕)에 대한 고찰..

 

한국 ·일본 ·중국 등에서 음력 7월 7일에 행하는 행사.

칠석날 저녁에 은하수의 양쪽 둑에 있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1번 만난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별을 제사지내는 행사이다. 옛날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사랑을 속삭이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1년에 1번씩 칠석 전날 밤에 은하수를 건너 만났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건너는데, 이 다리를 오작교()라고 한다. 칠석 때는 더위도 약간 줄어들고 장마도 대개 거친 시기이나, 이때 내리는 비를 칠석물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호박이 잘 열고, 오이와 참외가 많이 나올 때이므로 민간에서는 호박부침을 만들어 칠성님께 빌었다

 

' 칠석'은 동쪽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날로,삼국시대부터 여러가지 행사가 있어 왔다. 음력 7월 초이레인 이날 여자들은 백종의 음식을 차리고 조상의 명복을 빌며,처녀들은 '걸교'라고 해서 직녀성과 견우성에 절하면서 바느질과 길쌈하는 기술이 향사되게'길쌈 재주 나누어 달라'고 빌었다. 이것을 성제(별제사)라고 한다.

어 린이들은 강에서 목욕하고 재앙과 병을 씻어 보내는 수신제를 지냈다. 또,여자들은 이 날 아침에 풀잎에 맺은 이슬로 분을 개어 단장을 하여서,의복을 볕에 말렸다. 그리고 선비들은 술을 마시며 시도 짖고 책을 내다 볕에 쬐었다.옷과 책을 볕에 쬐는 것을 '쇄서폭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날의 날씨에 따라 그 해의 농사를 점치는 풍습이 있었다.

7 월 7일 칠석은 서로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다. 이 둘이 만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까마귀와 까치들은 하늘에 올라가 오작교(烏鵲橋)라는 다리를 놓아준다고 한다. 이 날 저녁에 비가 오면 이것은 견우와 직녀가 만난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전한다.

이 날 새로 나온 벼로 칠석차례(七夕茶禮)를 지내고, 부녀자들은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떡을 해서 촛불과 같이 놓고 샘제를 지내거나, 칠성제(七星祭)나 칠석제(七夕祭)를 지내며 집안과 자녀를 위해 빌기도 한다. 이날 젊은이들이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에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 밀전병 부쳐 먹는 칠석"

일 년에 꼭 한 번씩 밖에는 만나지 못하는 별들이 있다. 은하수의 동쪽 독수리 별자리의 알타이어(α) 별과 서쪽 거문고 별자리의 베가(β)별이 그것이다. 이 두 별의 만남은 태양 황도상의 운행 때문이지만 옛사람들은 여기에 기막힌 사랑 이야기를 아로새겨 놓았다.   하늘 나라 목동인 견우는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서로를 너무 사랑했던 이들 부부는 결혼 후 게으름만 피웠다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기에 이르렀다. 결국 견우, 직녀 부부는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으로 평생 떨어져 살아야만 하는 벌을 받게 된다.

안 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까치와 까마귀들이 견우와 직녀를 돕겠다고 나섰다. 일년에 하루, 7월 7일(음력)에 오작교를 놓아 두 부부가 상봉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때문에 칠석날이면 까치와 까마귀를 볼 수가 없다 하고, 오랜 만에 만난 연인이 그간의 회 포를 푸느라 이 날은 꼭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오늘에도 전해온다.

이 같은 칠석날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 중국의 속절이 우리 나라에 유래된 것이라 한다. 특 히 고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를 하였고, 백관에게는 녹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의 과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또 민간에서는 서당마다 학동들에게 견우직녀를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는 가 하면 책과 옷들을 모두 꺼내 햇볕에 말렸다. 또 부녀자들은 직녀성에 대고 바느질과 길쌈을 잘 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기도 했다.

음 력 칠월이면 밭곡식인 밀과 보리를 수확할 때이다. 그래서 이맘 때면 밀개떡을 빚거나 제철을 만난 호박과 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밀전병을 부쳐 초간장에 찍어 먹었다. 또 처녀 들은 피부가 고와지니까, 남자들은 건강해진다 하여 복숭아를 많이 먹었다. 특히나 붉은 복숭을 얇게 저며 꿀에 재워 두었다가 오미자 화채를 만들어 먹는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우리 조상님들은 가난했어도 이런 별미의 별식이 때로는 허기진  배를 달래주는 끼니거리였다 하여도 반드시 이웃과 정답게 나눴다는 것이다.

칠석의 음식

밀전병 - 밀가루를 체에쳐서 묽게 반죽한 것에 곱게 채 설은 호박을 넣는다. 번철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져서 따끈할때 양념장을 찍어 먹는다.

과일화채 - 제철에 나오는 과일로 만드는데 여름철엔 복숭아나 수박으로 화채를 만들어 먹는다. 땀을 많이 흘려 수분보충을 위해 과일의 비타민 을 섭취 함으로써 영양을 보충해 주기도 한다.

복숭아 화채 - 빨간 복숭아를 깨끗히 싯어 껍질을 벗기고 은행잎 모양으로 얇게 썰어서 꿀에 재운다 설탕이나 꿀을 넣은 단물에 절인 복숭아를 넣고 실백을 띄워 낸다.

수박화채 - 수박의 과육만 내어 한입 크기로 썰어 씨를 빼고 화체 그릇에 담고 설탕을 뿌려 낸다. 또는 수박통을 깨끗히  씻어 위를 삼분의 이 정도로 도려내어 과육을 한 숟가락으로 잘게 잘라서 설탕이나 꿀을 넣고 얼음을 잘 섞는다. 뚜겅을 덮어 먹는 이들의 앞에 놓고 각각 자료로이 떠먹는 방법이 있다.



시루떡


과일화채


밀전병

칠석의 풍습

 

비와 장수와 재물의 신 - 칠성신(七星神)
칠성신(七星神)은 '비의 신'으로서 기우(祈雨)의 대상이며 또는 인간의 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신등으로 다양하게 신앙되었다. 이는 천체와 별을 신앙하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러한 신앙형태는 궁중과 민간신앙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신앙에도 영향을 주어 오늘날의 사찰에도 많은 칠성각(七星閣)이 남아있어 인간의 무병장수와 재물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는 물과 비[雨]를 비는 신앙은 필연적이었고 그 대상이 바로 칠성신이었다. 불교적 행사일인 칠석(七夕)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칠석과 칠성신의 밀접한 연관에 기인한다.

  •  

[부군(밖) 칠성]

또한 남두칠성과 북두칠성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둘 때 단명(短命)을 타고난 소년이 가서 장수를 부탁하니 북두칠성으로부터 수명을 연장 받았다는 설화에 연유하여 '칠성님께 명(命)을 빌며' 북두칠성을 향한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제주도의 무가(巫歌) '칠성본풀이'에서는, 절에 불공을 드려 낳은 외동딸이 중의 자식이라 집에서 쫓겨났다가 뱀으로 변신하여 일곱 마리의 뱀을 낳았는데 모두 딸이었다. 막내딸이 뒤꼍 주저리 밑으로 들어가 부군칠성(밖칠성)이 되었고, 어머니는 쌀독에 들어가서 부자가 되게 하는 안칠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재물과 소원성취의 신적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칠성신은 기우, 장수, 재물의 세 가지 기능을 가지며 우리 민족의 중요한 민간신앙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칠성제와 기우제
흔 히 7월에 지내는 색다른 제사로 '칠성제'와 '기우제'가 있다. 절간에는 '칠성당'(북두칠성을 신으로 생각하고 모신 집)이라는 데가 있는데, 이 칠성당이나 또는 산과 냇가의 깨끗한 곳을 가려서 백반과 맑은 물을 차려 놓고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낸다. 이것을 칠성제라고 한다. 칠성제는 칠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칠성신에는 북두칠성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는 산신각(산신을 모시는 집)과 나란히 칠성당이 있는 것이다. 칠성신은 사람의 수명을 맡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일에 만능의 힘을 미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칠성신에게 정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기우제는 여름에 가뭄이 계속될 때 비를 내려 달라고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옛날에는 비가 안 오는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임금이 스스로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민간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많다. 기우제는 보통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차려 놓고 지낸다.

 

칠석 물맞이
칠석날에 내리는 빗물은 약물이라고 하여 이 물을 받아서 목욕을 하면 땀띠, 부스럼 등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날을 기하여 산간계곡의 약수터, 폭포 등을 찾아가서 목욕하는 풍속이 있었다.

 

칠석기원(걸교)
칠 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여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게 비는 것이다. 이 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草菓類)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女 功:길쌈질)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女功)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혹은 처녀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재주가 있게 해 달라고 비는데, 다음날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속은 직녀를 하늘에서 바느질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원래는 칠석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의 부녀자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 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고 널리 행하던 중국 한대(漢代)의 걸교(乞巧)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이 풍속은 당대(唐代)에 와서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칠석 풍속은 중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밀전병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 족의 수명장수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한다. 또 이북지방에서는 이 날 크게 고사를 지내거나 밭에 나가 풍작을 기원하는 밭제[田祭]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맞이
중부지방에서는 '칠석맞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골무당에게 자녀의 무사 성장의 기원을 부탁하는 것이다. 무당은 물동이를 타고 기원의 상징인 명다리를 내어 바람에 불리고, 다시금 무사 성장의 기원을 한다.

 

칠석놀이
견 우·직녀 두 별을 보고 소원성취와 칠석요(七夕謠)를 부르며 여인들은 바느질, 수놓기 대회를 하고, 남자들은 새끼 꼬기, 농악, 씨름, 공부하는 소년들은 두 별을 제목으로 하는 시를 짓기를 즐겨한다. 칠석날은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밀국수와 밀전병을 만들어 먹으며, 즐겁게 보내는 날이다.

 

쇄서폭의
한 편 7월이면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김매기를 다 매고 나면 추수때까지는 다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장마를 겪은 후이기도 한 이때, 농가에서는 여름 장 마철 동안 눅눅했던 옷과 책을 내어 말리는 풍습이 있다. 이를 쇄서폭의( 書曝衣)라 하는데, 이 날은 집집마다 내어 말리는 옷과 책으로 마당이 그득하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7월 7일조에도 인가에서는 옷을 햇볕에 말린다 하여 이는 옛날 풍속이라 하였는데, 이 날에 내어 말리는 옷과 책의 수량에 따라 잘살고 못사는 것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칠석은 원래 중국의 속절(俗節)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공민왕(恭愍王)은 몽고 왕후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하였고, 또 이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 를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다양한 생활주기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 칠석의 풍속은 다만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동 심의 세계에 꿈을 부풀리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가요에서의 견우 직녀 상징

 

7월도 어느덧 하순으로 접어든다. 달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7월의 마지막 날에 '칠석'이라는 표시를 발견하게 된다. 칠석날!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지금은 도시의 매연 때문에 밤하늘의 별빛이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벗어나서 시골로 가보면 맑고 깨끗한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볼 수 있다.

마 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아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광대무변한 밤하늘엔 은하수가 길게 펼쳐져서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 은하수의 양쪽 둑에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은 1년에 꼭 한 번 만난다는 전설이 언제부턴가 인간의 삶에서 전해져왔다. 그런데 그 은하수를 어떻게 건넌단 말인가. 이때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다리를 놓아 그들이 건널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고 했다. 운명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존재의 만남은 얼마나 지극하고 애틋했던 것일까.

어 둠과 밝음은 항시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없다.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도 분단을 넘어서지 못한 채로 덧없는 회담만 되풀이할 뿐이다. 풍요와 빈곤도 일치와 균등을 꿈꾸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지금 나누고 쪼개지고 깨어지는 관계로만 치달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갈등과 오해는 점점 늘어만 가고, 우리 가슴에는 증오가 서슬 푸르게 자리잡아 떠날 줄 모른다.

칠석날은 만남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일깨워주는 날이다. 서로 둘이 아닌 하나를 새롭게 깨닫는 날이 칠석날의 상징성이다. 조화로운 삶을 위하여 칠석날은 가슴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칠석날의 주인공이었던 견우와 직녀를 다룬 우리 옛 가 요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식민지시대의 명창 임방울은 '고고천변'을 통하여 '칠월칠석 은하수 다리 놓던 오작이'를 노래하였다. 제국주의 식민지 후반기에 이르러 태평레코드사의 여주인공이었던 백난아는 가요 '직녀성'(박영호 작사, 김교성 작곡, 1941년)을 유장하게 불러서 모성적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음색과 창법으로 민족의 피곤한 심신을 달래주었다. '오작교 허물어진 두 쪽 하늘에/ 절개로 얽어놓은 견우 직녀성/ 기러기 편지주어 소식을 주마기에/ 열 밤을 낮 삼아서 써놓은 글발이요'.

역 시 태평레코드사에서는 가수 차홍련에 의해 함경도 음색이 진하게 묻어나는 창법으로 '아주까리 선창'(처녀림 작사, 김용환 작곡, 1943년)을 취입 발매하였다.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등불은 일제말 모든 자원을 일제에게 약탈당하고 침침한 아주까리 기름으로 등불을 켜던 당시 민중들의 서러운 삶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들이 찾아가고자 했던 '아주까리 섬'은 진정한 민족해방의 밝은 조국이 아니었을까.'아주까리 선창 위에 해가 저물어/ 천리타향 부두마다 등불이 피면/ 칠석날 찾아가는 젊은 뱃사공/ 어서 가자 내 고향 어서 가자 내 고향 아주까리 섬'.

해방 이후로도 진정한 만남의 갈망을 담은 노래들이 나왔다. 1950년대의 작품으로 황금심이 불렀던 '아리랑 칠석날'을 먼저 들 수 있다. 이 노랫말은 남북으로 헤어진 견우와 직녀가 너무나 애달파서 까막까치가 소란스럽게 울어대는 정경을 담고 있다. 백년설이 취입한 '옛 마을'(1956년)은 '수수깡 울타리에 밤이 내리면/ 견우성도 직녀성도 소곤거린다'라는 표현을 통해 명분 없는 분단현실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만남을 강조하고 있다.

1960 년대 남상규가 불렀던 '목포 가는 삼등열차'는 '천리 길 멀다 해도 차표 한 장 길인데/ 못 맺을 사랑이면 견우 직녀 아니냐/ 목포 가는 삼등차야 목을 놓아 울어라'라는 가사로써 고단한 사회현실이 양산해내고 있는 애달픈 이별의 사연을 전하고 있다.

견 우 직녀의 하소연을 담고 있는 진방남의 '오동잎 맹세'(1965), 사랑의 결의를 직녀성에 비유한 박재홍의 '자명고 사랑'(1968)도 특별한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다. 김용만의 '달타령'(1969)은 칠월에 뜨는 달을 견우 직녀의 원망으로 담아서 처리하였다. 이후로도 칠석날 테마를 다룬 노래로 김부자의 '달타령'(1973)과 심수봉의 '견우 직녀'(1979), 조민우의 '타향의 밤은 깊어'와 곽성삼의 '뱅뱅뱅'(1981), 강민주의 '오작교' (1997)와 김원중의 '직녀에게'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노래들이 한국가요사에서 견우 직녀 상징의 든든한 전통을 이어 나갔다.                   이동순(시인· 영남대 교수)

2008.04.02.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국회도서관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fbrl****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일본어로 '칠석'은 '다나바타'

7월 7일은「칠석(다나바타)」이다. 이 날은 彦星(히코보시:견우)와 織女(다나바타츠메: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1년에 한번 만난다는 전설로 많이 알려져 있다. 칠석을 “七夕”이라고 쓰지만 일본어로 읽을 때 ‘다나바타’라고 하는 이유는 신을 맞이하기 위해 물 위에 선반(‘다나’)을 만들어 성스러운 을녀가 베틀에 앉아 베(‘바타’)를 짜는 행사가 있었다는 데에 유래한다. 또 이 날에는 祓い(하라이:신에게 비는 의식)나 수확제 등도 열렸다.
이러한 일본 고유행사에 중국 전래의 견우ㆍ직녀 전설과 乞巧奠(기츠코덴:걸교전. 중국에서 칠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5색 실을 견우ㆍ직녀 두 별에게 바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풍속)이 엮어져 현재의 칠석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되어진다. 얇고 긴 종이에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쓰는 풍습도 기츠코덴의 자취가 아닐까 싶다.

칠석에 연관된 과자로는 옛날 견당사가 가져온 당과자의 하나인「索餠(사쿠베이)」가 있다. 사쿠베이는 밀가루를 재료로 하여 끈 모양으로 만든 음식이다. 일찍이 칠석 행사에 준비하는 음식이었으나, 만드는 방법이 전해지지 않아 현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칠석 때 먹는 과자는 雛菓子(히나가시:히나마츠리때 상에 올리는 과자)같이 화려하지 않아서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지만, 최근 과자점에서는 낭만적인 별의 전설에 아이디어를 얻어 은하수를 비유한 과자를 많이 만들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의「天の川(아미노가와)」도 은하수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비유한 것으로, 녹색의 호박양갱에 흰양갱으로 띠를 비스듬히 넣고 하얀깨를 뿌렸다. 투명하고 엷은 녹색의 색 배합이 신비적인 은하수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킨다.

한편「花扇(하나오기)」는 칠석 때 근위대 사자가 궁중에 보낸 꽃 다발에 연관한다. 하나오기란 7가지 종류의 화초를 부채모양으로 묶은 것이다. 이 행사를 기억할까 싶기도 한데, 하나오기 과자는 부채형 호박양갱에 도라지모양의 연양갱을 넣은 것이다.
호박색이라고 하면 투명 또는 반투명의 황색을 말한다. ‘녹색인데 왜 호박양갱?’ 이라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건 우무에 설탕을 녹여 바짝 조려서 치자나무 열매로 노랗게 염색한 천이 호박색에 가깝다는 데에 유래한다. 이후 호박양갱은 색에 관계없이 제법용어로서 사용되어졌고, 이외에도 ‘금옥’이나 ‘은옥’으로도 부른다.

7월처럼 더운 시기에는 한천을 사용한 투명감 있는 과자를 찾는다. 한천은 칡과 함께 여름 과자에 빼놓을 수 없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 일본에서의 칠석제(다나바타마쯔리)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큰 줄거리는 일본이나 한국이 같지만, 세세한 내용은 약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치가 다리를 만든다는 얘기가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다.
일본에서의 칠석제는 나라(奈良)시대부터 열렸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진 칠석제는 중국 전래의 별 축제와 일본 고유의 습관이 섞여진 행사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음력 7월 15일에 선조의 영혼이 집에 들른다고 믿고 있어, 그 준비로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그 중 하나가 선조의 영혼이 입는 의복을 베틀(직기)에 짜서 선반에 올려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어로 읽을 때는 '다나바타'라고 한다.
칠석에는 빨간색이나 파란, 노란색 등 예쁜 색 종이로 장식을 만들어서, 마찬가지로 예쁜 색의 가늘고 긴 종이에 원하는 내용을 써서 대나무(조릿대)에 묶어 정원 앞 등에 세워 놓는다. 예전에는 토란 잎에 떨어진 이슬을 주워담아, 그 물로 먹을 갈아 긴 종이에 원하는 일이나 시 등을 적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원하는 일을 쓸 때 재봉이나 문장력 등의 실력향상을 기원하는 수단이었으나, 최근 아이들은 '성적이 오르게 해주세요''수영해서 100미터 갈 수 있도록...' 등 자기 신변의 일들을 자유롭게 쓰고 있다.
현재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과 학교에서 칠석제를 하기도 하지만, 관광이나 선전을 위해 마을이나 상점가에서 큰 축제로서 화려하게 많이 열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야기현 센다이시와 가나가와현 히라츠카시의 칠석제가 유명하다.


내용출처 :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2008.08.10.

  • 출처

    내용출처 :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cjdd****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에게는 직녀라는 어여쁜 딸이 하나 있었다.

직녀는 옷감 짜는 여신으로 온종일 베틀에 앉아 옷감에다 별자리, 태양 빛, 그림자등을 짜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하늘을 도는 별들도 그녀가 하는 일을 지켜보기 위해 멈추어 서곤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직녀는 자주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때때로 그녀는 베틀의 북을 내려 놓고 창가에 서서 성벽 아래로 넘실거리는 하늘의 강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그녀는 강둑을 따라 궁중의 양과 소떼를 몰고 가는 한 목동을 보게 되었다.



그는 아주 잘 생긴 젊은이었는데 그들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직녀는 그가 자신의 남편감 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직녀는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인 옥황상제에게 이야기하고 그 목동과 결혼시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옥황상제는 견우란 이름의 이 젊은 목동이 영리하고 친절하며 하늘의 소를 잘 돌본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딸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고 이들을 혼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혼인한 이들은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자신들의 일을 잊고 게을러지고 말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이들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둘만의 행복에 심취된 이들은 곧 다시 게을러지곤 하였다.



마침내 옥황상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들을 영원히 떼어놓을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견우는 은하수 건너편으로 쫓겨났고, 직녀는 그의 성에 쓸쓸히 남아서 베틀을 돌려야 했다.



옥황상제는 일 년에 단 한 번, 즉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날의 밤에만 이들이 강을 건너 만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이들은 음력 7월 7일이 되면, '칠일월'이라는 배를 타고 하늘의 강을 건너 만나게 되는데 비가 내리면 강물이 불어 배가 뜨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언덕에서 직녀가 울고 있으면 많은 까치가 날아와 그들의 날개를 하늘의 다리를 만들어 이들을 만나게 해 준다고 전해진다.

2008.10.17.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